난처한 미술 이야기 8 - 바로크 문명과 미술 : 시선의 대축제, 막이 오르다 ㅣ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8
양정무 지음 / 사회평론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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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역사를 읽으며] 『난처한 미술이야기』 스페인 바로크
― 지워지지 않은 이슬람, 제국의 영광, 그리고 바로크라는 이름에 대한 의문


스페인 바로크에 들어오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이슬람의 흔적이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711년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반도에 들어온 뒤 마지막 이슬람 왕국인 그라나다의 나스르 왕조가 무너진 1492년까지, 이슬람 정치세력과 문화는 700년 넘게 이 땅에 존재했다. 지역에 따라 실제 지배기간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그 긴 세월 동안 만들어진 건축과 도시, 장식과 색채의 기억이 레콩키스타가 끝났다고 하루아침에 사라질 리 없다.

스페인 건축을 보고 있으면 황토와 모래를 떠올리게 하는 따뜻한 색조가 눈에 들어온다. 성채처럼 묵직한 벽체와 반복되는 창, 안뜰과 장식을 보고 있으면 북아프리카와 이슬람 세계가 자연스럽게 겹쳐 보인다.

그래서 스페인 바로크를 읽는 내내 한 가지 생각이 따라다녔다.

레콩키스타는 1492년에 끝났지만, 스페인 미술에서 이슬람은 그날 끝나지 않았다.


1. 분류는 르네상스인데, 눈은 자꾸 알함브라 쪽으로 간다

엘 에스코리알은 미술사적으로 이슬람 건축이 아니다.

펠리페 2세가 1563년부터 세운 거대한 왕궁이자 수도원으로, 장식을 극도로 절제한 스페인 르네상스, 에레라 양식의 대표 건축물이다.

그런데 처음 사진을 보았을 때 내 눈에는 이슬람의 분위기가 먼저 들어왔다.

그것이 특별한 일도 아닐 것이다.

이베리아반도에는 700년 넘게 이슬람 정치와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왕조가 사라졌다고 해서 그 긴 세월 동안 쌓인 건축과 색채, 공간의 기억까지 없어질 수는 없다.

거대한 성채 같은 덩어리와 반복되는 작은 창, 넓은 벽면이 주는 묵직함, 그리고 이베리아반도 특유의 따뜻한 색감을 보고 있으면 가톨릭 왕권의 건축에서도 그 이전 이슬람 세계의 흔적이 겹쳐 보였다.

엘 에스코리알 자체를 이슬람 건축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스페인의 미술과 건축을 이슬람의 오랜 흔적과 완전히 떼어놓고 보는 것도 자연스럽지 않다.

분류는 르네상스인데, 눈은 자꾸 알함브라 쪽으로 간다.


2. 왕은 건물을 남겼고, 돌을 나른 사람은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엘 에스코리알 같은 거대한 옛 건축물을 볼 때면 감탄보다 먼저 불편함이 든다.

지금처럼 크레인과 굴착기, 운반장비와 안전시설이 있던 시대가 아니다.

저 많은 돌을 캐고, 다듬고, 나르고, 들어 올려 쌓은 것은 결국 사람이었다.

그 공사가 반드시 강제노동이었다거나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근거 없이 단정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저 정도 규모의 건축에 막대한 자재와 돈, 수많은 노동자의 시간이 들어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왕의 이름은 수백 년 뒤에도 남는다.

건축가의 이름도 남는다.

그러나 돌을 캔 채석공, 수레를 끈 사람, 비계를 세운 목수, 벽을 쌓은 석공의 이름은 거의 남지 않는다.

로마 바로크를 읽을 때도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보다 그 돔 아래에서 밤까지 일했던 노동자들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엘 에스코리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왕은 건물을 남겼고, 민중은 노동을 남겼다. 그런데 역사는 왕의 이름을 더 오래 기억한다.


3. “장성에 이르지 못하면 호걸이 아니다”

엘 에스코리알을 보다가 마오쩌둥의 말이 떠올랐다.

“不到长城非好汉.”

장성에 이르지 못하면 호걸이 아니다.

이 말은 마오가 실제 만리장성에 올라 즉석에서 한 말이 아니라, 1935년 장정 중 육반산을 넘으며 쓴 「청평악, 육반산」에 나오는 구절이다.

마오는 인민을 앞세운 혁명의 지도자였다. 홍군을 이끌고 긴 싸움 끝에 중국 대륙의 정권을 장악했다.

그런 사람이라면 장성을 자신의 의지와 호걸됨을 상징하는 대상으로 바라보기 전에, 저 거대한 성벽을 만들기 위해 돌을 나르고 흙을 다지다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백성부터 생각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장성을 명령한 황제의 이름은 남았다.

장성을 쌓은 사람들의 이름은 거의 남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마오의 말을 이렇게 뒤집어 보고 싶다.

장성에 올라 호걸을 말하기 전에, 장성을 만든 백성을 먼저 보았어야 했다.

엘 에스코리알도 다르지 않다.

거대한 건축물을 볼 때 내가 먼저 보게 되는 것은 왕의 권력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사람들의 손이다.


4. 정복은 업적이고, 제국에 손해를 끼치면 실책인가

이 책을 읽으면서 작품 못지않게 저자의 역사관이 걸리는 대목도 있었다.

펠리페 2세를 설명하면서 잉카제국 정복과 포르투갈 합병은 “큰 업적”으로 표현하고, 신교도를 탄압해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부추긴 것은 “뼈아픈 실책”이라고 평가한 부분이다.

이 문장을 그대로 읽으면 평가의 기준이 무엇인지 묻게 된다.

잉카제국을 무너뜨리고 영토를 넓힌 것은 스페인 제국에 이익이 되었으니 업적이고, 신교도를 탄압하다 네덜란드를 잃은 것은 스페인 제국에 손해가 되었으니 실책이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피정복민이나 종교적으로 박해받은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더구나 잉카제국 정복의 본격적인 과정은 펠리페 2세 이전 카를로스 1세 시기에 이미 진행되었다. 펠리페 2세 시대에 마지막 신잉카 세력까지 제거되기는 했지만, “펠리페 2세가 잉카제국을 정복했다”고 뭉뚱그리는 것도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 대목에서는 이런 질문이 남았다.

정복은 ‘업적’이고, 탄압은 제국에 손해를 끼쳤을 때에야 ‘실책’이 되는가.

『난처한 미술이야기』의 미술 설명은 여전히 재미있고 뛰어나지만, 역사적 사건을 평가하는 순간에는 그 기준을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된다.


5. 세비야 대성당, 모스크 위에 올라선 고딕

스페인에서 이슬람의 흔적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건축 가운데 하나가 세비야 대성당이었다.

본체는 15세기부터 세워진 거대한 고딕 성당이다.

그러나 그 자리는 원래 알모하드 왕조의 대모스크가 있던 곳이었다. 지금의 히랄다 탑 아래 부분은 바로 그 모스크의 미나레트였다.

기독교 세력이 세비야를 차지한 뒤 그 탑을 없애지 않고 종탑으로 바꾸었고, 나중에 그 위에 기독교식 종루를 더했다.

말 그대로 한 건물 속에 역사가 층층이 겹쳐 있다.

아래에는 이슬람의 미나레트가 있고, 그 위에는 기독교 종탑이 있으며, 옆에는 거대한 고딕 성당이 붙어 있다.

레콩키스타가 이슬람 왕조를 몰아냈다고 해서 이슬람이 만든 도시와 건축까지 없애지는 못했다.

미나레트는 종탑이 되었고, 모스크의 자리에는 고딕 성당이 올라섰다.

내가 스페인 미술에서 계속 이슬람의 흔적을 느꼈던 것이 단순한 느낌만은 아니었다.


6. 엘 그레코, 나는 줘도 안 가질 것 같다

엘 그레코의 그림은 솔직히 내 취향이 아니었다.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도 그렇고, 「오르가스 경의 매장」도 그렇고, 「라오콘」도 그랬다.

사람은 지나치게 길게 늘어나 있고, 화면에는 인물이 너무 많이 들어차 있으며, 색도 서로 뒤엉키는 느낌이었다.

후대 미술사에서는 그 비현실적인 인체와 색채, 강한 영적 긴장을 독창성으로 높이 평가하지만, 내 눈에는 우선 어수선했다.

특히 「오르가스 경의 매장」은 엘 그레코의 명성을 확립한 대표작이지만, 나는 솔직히 줘도 집에 걸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엘 그레코가 못 그리는 화가라는 말은 아니다.

「오르텐시오 펠릭스 파라비시노 수도사」 같은 초상화는 오히려 좋았다.

사람이 빽빽하게 몰리지 않고 색을 절제하니 얼굴과 눈빛이 살아났다.

결국 내가 싫어했던 것은 엘 그레코 자체라기보다 그의 종교화에 나타나는 과장된 인체와 복잡한 화면, 색채였던 것 같다.


7. 내가 좋아하지 않는 두 화가가 서로 이어져 있었다

「라오콘」을 보면서 피카소가 떠올랐다.

몸을 늘이고, 공간을 비틀고, 현실적인 색에서 멀어지는 방식에서 20세기 그림 같은 느낌이 났다.

그런데 책을 더 읽으니 실제로 엘 그레코가 피카소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설명이 나온다.

특히 엘 그레코의 「성 요한의 환시」와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을 나란히 놓으면 늘어난 인체와 V자형 배치, 파편화되는 공간 사이에 연결이 보인다.

나는 피카소의 그림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피카소를 초현실주의 화가라고만 부르는 것은 정확하지 않고, 입체주의가 그의 중심이지만, 어쨌든 사람이 깨지고 비틀어지는 그의 그림 역시 내 취향과는 거리가 있다.

그런데 오히려 그래서 연결이 잘 이해됐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두 화가가 서로 이어져 있다는 점은 납득이 갔다.

엘 그레코가 없었다면 피카소가 지금 우리가 아는 모습과 조금 달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8. 벨라스케스와 카라바조, 닮았다고 곧 영향은 아니다

벨라스케스에서는 또 다른 의문이 생겼다.

책은 그가 길거리에서 흔히 만날 법한 사람들을 성경 속 인물로 그렸다는 점에서 카라바조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이건 너무 빨리 결론으로 뛰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평범한 사람을 성경 이야기 속에 등장시켰다는 사실만으로 카라바조의 영향을 증명할 수는 없다.

그런 자연주의적 인물 표현은 카라바조만의 전유물도 아니다.

물론 벨라스케스 초기 그림에는 강한 명암 대비, 어두운 배경, 이상화하지 않은 인물, 가까이 당겨놓은 구도 등 카라바조 계열의 특징이 분명히 보인다.

「세비야의 물장수」만 보아도 어두운 배경 속에서 인물과 물항아리가 튀어나오듯 보이고, 유리잔과 토기의 질감까지 세밀하게 묘사돼 있다.

그러니 카라바조의 영향권에 있었다는 설명에는 동의할 수 있다.

다만 순서가 중요하다.

“평범한 사람을 그렸다, 그러므로 카라바조의 영향이다”가 아니라, 명암법과 자연주의, 비이상화된 인물 표현까지 함께 보아야 영향관계를 이야기할 수 있다.

닮은 소재와 영향관계는 같은 말이 아니다.


9. 벨라스케스는 카라바조를 닮은 데서 멈추지 않았다

벨라스케스가 흥미로운 것은 결국 카라바조풍을 벗어났다는 점이다.

세비야 시절에는 어둡고 엄숙한 화면과 강한 명암법이 중심이었지만,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가 되고 루벤스와 교류하며 이탈리아를 다녀온 뒤 그림이 달라졌다.

티치아노 같은 베네치아 화가들의 색채와 붓질을 받아들이면서 화면은 더 밝아지고 붓질은 자유로워졌다.

책의 2장 요약에서도 이 변화를 “유학 전, 강한 명암 대비와 엄숙한 분위기”에서 “유학 후, 화사한 색채와 역동적인 분위기”로 정리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시녀들」에 도달한다.

거울과 시선을 이용해 화면 안과 밖을 뒤섞고, 보는 사람에게 “지금 누가 누구를 보고 있는가”를 계속 묻게 만든다.

벨라스케스가 위대한 이유는 카라바조를 닮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영향에서 출발해 결국 자기 그림을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더 맞는 것 같다.


10. 그런데 이게 정말 모두 같은 ‘바로크’인가

스페인 바로크를 읽으면서 자꾸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나는 바로크라는 말을 들으면 먼저 화려함을 떠올린다.

베르니니의 조각, 보로미니의 건축, 포초의 천장화처럼 공간 전체를 압도하는 움직임과 장식, 극적인 빛, 과잉에 가까운 화려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바로크라는 양식의 원형은 결국 로마에 가장 가까운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북부 네덜란드의 렘브란트와 페르메이르는 훨씬 소박했고, 스페인의 엘 그레코와 초기 벨라스케스 역시 내가 떠올리는 바로크풍과는 거리가 있었다.

같은 17세기에 활동했다는 이유로 모두 바로크라는 이름 아래 넣는다면, 그때의 ‘바로크’는 하나의 양식이라기보다 시대를 묶는 넓은 우산에 가까워 보였다.

로마를 읽을 때는 “바로크란 이런 것이구나” 했는데, 북유럽과 스페인까지 오니 “이걸 모두 같은 바로크라고 불러도 되는가”라는 의문이 생겼다.


11. 세비야가 무너지자 그림은 가난한 사람을 바라봤다

3장에 들어가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1649년 세비야에는 대규모 전염병이 닥쳤고, 책은 인구의 절반 이상이 사망했다고 설명한다. 여기에 기근과 경제난까지 겹치며 한때 스페인의 경제 중심지였던 도시가 크게 쇠퇴했다.

이때 등장하는 화가가 무리요다.

무리요는 거지 소년과 거리의 아이들을 그렸다.

「거지 소년」이나 「주사위 놀이를 하는 거지 아이들」에는 왕과 성인 대신 가난한 아이들이 등장한다.

세비야의 자선병원도 빈민 구제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동시에 화려한 종교미술을 통해 신앙적 위안을 제공했다.

여기서는 로마 바로크와 다른 의미의 종교미술이 보였다.

로마에서는 교황의 권력과 가톨릭의 승리를 보여주는 화려함이 강했다면, 몰락해가는 세비야에서는 현실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종교와 미술이 위로의 공간이 된 것처럼 보였다.


12. 현실이 어두울수록 제단은 더 화려해졌다

그리고 3장에서 비로소 내가 아는 ‘바로크’가 나타난다.

울트라 바로크다.

벽을 빈틈없이 채우는 장식, 꼬이고 솟구치는 기둥, 금빛 제단, 소용돌이치는 형태.

특히 추리게라 가문에서 이름을 딴 추리게레스코는 장식의 과잉을 극단까지 밀어붙인다.

오벨리스크를 거꾸로 뒤집어놓은 것 같은 기둥과 끊임없이 겹치는 장식은 내가 로마에서 느꼈던 바로크의 과잉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 조금 우습게 말하면 스페인 바로크 3장에 와서야 비로소,

“아, 인제사 바로크 같네.”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동시에 생각할 거리가 있다.

세비야는 가난해지고 제국은 쇠퇴하는데 미술은 더 화려해졌다.

현실이 무너지는데 제단은 더 빛났다.

그 화려함은 자신감의 표현이었을까, 아니면 불안과 쇠퇴를 가리기 위한 장식이었을까.

책은 울트라 바로크를 위기에 놓인 사회가 더욱 화려한 모습으로 자신을 표현한 미술로 설명한다.

나는 후자 쪽이 조금 더 눈에 들어왔다.

현실이 어두워질수록 장식은 더 밝아졌다.


13. 스페인의 바로크가 아메리카와 아시아까지 갔다

스페인의 울트라 바로크는 아메리카 식민지로 퍼졌고, 그곳에서 현지 문화와 섞이며 훨씬 복잡한 장식으로 발전했다.

멕시코의 대성당과 교회들에서는 유럽에서 건너온 바로크가 아메리카의 색과 장식을 만나 또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바로크는 아시아에도 도착했다.

책은 마카오의 성 바오로 성당 유적처럼 가톨릭 성인과 중국 문화의 요소가 한 건물에 함께 등장하는 사례를 보여주고, 조선 지식인들이 중국에서 서양식 성당과 천장화를 접하고 놀라움을 기록한 사실도 소개한다. 박지원의 『열하일기』 같은 기록도 그 접촉의 흔적이다.

다만 이것을 곧바로 “바로크가 조선 미술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까지 확대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조선 사람들이 서양의 종교화와 원근법, 천장화를 접하고 강한 인상을 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조선 미술 전반을 바꿀 만큼 직접적인 영향으로 이어졌는지는 별도의 문제다.

그래도 로마에서 시작한 바로크가 유럽을 넘어 멕시코와 마카오, 중국을 거쳐 조선 지식인의 눈앞까지 왔다는 사실 자체는 흥미롭다.


14. 스페인 바로크를 읽고

스페인 바로크는 하나의 양식으로 깔끔하게 정리하기 어려웠다.

첫머리에는 이슬람이 있었다.

가톨릭 왕국은 1492년에 그라나다를 정복했지만, 이슬람이 만든 도시와 건축, 색과 공간의 기억까지 없애지는 못했다. 오히려 700년 넘게 쌓인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 당연했다.

그 위에 가톨릭 왕권과 제국이 올라섰다.

엘 에스코리알 같은 거대한 건축물은 왕의 권력을 보여주었고, 그 뒤에는 이름을 남기지 못한 노동자들이 있었다.

역사책은 정복을 업적이라 부르기도 했고, 제국의 손해를 실책이라 부르기도 했다.

엘 그레코는 내 취향과 맞지 않았지만 후대 피카소까지 이어지는 길을 만들었고, 벨라스케스는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결국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었다.

그리고 스페인이 쇠퇴하던 시기에는 오히려 울트라 바로크라는 극단적인 화려함이 등장했다.

로마 바로크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화려함과 극적인 공간이 지배하는 것도 아니었고, 북부 네덜란드처럼 시민의 일상으로만 향하지도 않았다.

이슬람의 흔적, 가톨릭 왕권, 제국의 팽창과 쇠퇴, 빈곤과 신앙, 사실주의와 과잉 장식이 한곳에 겹쳐 있었다.

세비야 대성당의 히랄다는 미나레트에서 종탑이 되었고, 엘 에스코리알은 왕의 이름을 남겼지만 돌을 나른 사람들의 이름은 남기지 않았다.

세 지역을 모두 읽고 나니 내게 ‘바로크’는 하나의 모양을 가리키는 말보다, 같은 시대가 서로 다른 지역에서 얼마나 다른 미술을 만들어냈는지를 묶어 보는 이름에 가까워졌다.

그래도 내가 바로크라는 말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올릴 미술은 여전히 로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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