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그때 그 호텔에 묵고 있었습니다. 미처 탈출하지 못해 중상을 입었죠. 위기일발의 상황에서 구출되어 살았습니다만."
"아아......." 가와미나미는 책상 가장자리에 놓아둔 편지에 눈길을 주었다. "그래서 병원에 계셨군요." "예. 화상과 골절, 거기에 머리를 세게 부딪혀서 꽤 오랫동안 의식불명 상태였답니다."
5년 전에 죽은 건축가 나카무라 세이지가 각지에 남긴 별난 건물들과, 거기서 일어난 수많은 비참한 사건이 떠올랐다. 쓰노지마의 ‘십각관, 오카야마의 ‘수차관‘, 단고의 ‘미로관’...... 그리고 작년 여름 가와미나미가 속한 "CHAOS』의 취재반 일행이 맞닥뜨린 사건의 무대가 된 가마쿠라의 ‘시계관 역시 나카무라 세이지가 설계한 건물이었다.
그의 ‘관‘과는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다. 그것이 가와미나미의 진심이다. 반면에 이렇게 말려든 이상 결코 달아나지 못할뿐더러,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 먼저 뛰어드는천성이 자기 내면에 도사리고 있음을 가와미나미는 잘 알고 있었다.
"병원에서 읽은 「미로관의 살인에서 어떤 사람의 이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단서가 될 만한 것이 딱 하나 수중에 남아 있었습니다." "단서요?" "제가 썼다고 여겨지는 수기 같은 글인데, 거기에 아유타 도마라는 이름이 나와 있습니다. 그래도 역시 뭐랄까, 이게 제 이름이라는 실감이 안 들어서요. 그 방면의 전문의에게 진찰을 받고는 있는데 전혀 차도가......."
"그 이름과 똑같은 이름이 아까 말씀드린 제 수기에도 나옵니다. 미로관의 설계자, 나카무라 세이지라는 건축가인데요."
"작년 8월 1일부터 4일 사이에 흑묘관에서 일어난 일이 적혀 있습니다." 커피를 따르면서 아유타가 말했다. "대강 짐작이 가시겠죠. 즉." "살인사건인가요?" 시시야가 바로 답을 꺼내자 아유타는 힘없이 눈을 내리뜨고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탁자에 어지러이 널린 잔과 빈 병을 정리하고 자루걸레로 바닥을 닦았다. 쓰레기통을 들여다보자 종잇조각과 담배꽁초 사이로 깨진 잔 두 개가 보였다. 이런, 이런. 이래서야 앞으로 어떨지 훤하다.
세이렌이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마녀의 이름이다. 생김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몸체는 빨간 날개가 달린 새 형상이고 얼굴은 어린 소녀처럼 생겼다는 주장도 있거니와, 하반신이 물고기의 몸체로 이루어진 여자라는 주장도 있다.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선원들의 마음을 홀렸다는 마녀. 어젯밤 히카와가 설명해준 레이코라는 여자 보컬은 그들 밴드 멤버에게 세이렌이었다는 걸까.
텔레비전을 틀자 마침 아침 일기예보를 하고 있었다. 대형 저기압이 서서히 다가오는 중이라 오늘 하루는 맑겠지만, 내일 오후부터날씨가 궂어져 강수량이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
"찬물은 이가 시려서 싫다고요." 내 알 바 아니다 싶었지만, 일단 사과하고 보는 것이 제일이라는 생각에 "죄송합니다" 하고 머리를 숙이고 나서 비꼬듯이 덧붙였다. "급탕관을 늘려달라고 아버님께 부탁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아까 사촌 동생분이 ‘엘‘이니 ‘풀‘이니 그런 소리를 했는데,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히카와는 흠칫 놀란 듯이 고개를 들더니 내 시선을 피해 눈을 돌리고 대답을 망설였다. 그 반응을 보고 역시 그렇구나 싶었다. "혹시 마약 같은 건가요?"
"흐음, 그렇다면......." 꺼내려던 말을 삼키고 히카와는 다시 그림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고양이와 소녀라. 그럼 이 여자애는 아모 박사의 딸일까요? 그런 이야기는 모르십니까?" "글쎄요."
담배 몇 개비를 피우고 나서 슬슬 안으로 돌아가려다가 현관 옆에서 사람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한순간 얼굴이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엉겁결에 눈을 비볐다. 아사오 겐지로의 얼굴이었다. 이제야 일어나서 밖으로 나온 것이다.
"예.. .......그 녀석들, 푹 빠졌어요. 도쿄에서도 어디선가 구해 와서 즐기더라고요. 적당히 좀 하라고 늘 나무라기는 하지만요." "어떤 마약을?" "LSD, 그리고 대마요." "엘과 풀...... 과연." "저는 안 합니다." 단호한 투로 말하며 히카와는 눈을 들었다.
"참 편리한 시대가 되었군요. 오랜 세월 이런 곳에 틀어박혀 있다 보니 세상의 변천에는 어둡습니다. 점점 뒤떨어지는 기분이네요. 뭐, 그래도 별 상관은 없습니다만......!!
"저기, 관리인 아저씨, 혹시 UFO를 본 적 있으세요?" "예?" 나는 깜짝 놀라 상대의 거무스름한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UFO?" 아사오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UFO. U, F, O. 최근에 이 부근에서 목격한 사람이 많다고 하던데요."
가자마와 기노우치는 낮에 저택을 나섰을 때와는 180도 다르게 들뜬 얼굴로 레나의 관심을 끌기 위해 갖은 아양(내 눈에는 그렇게보였다)을 떨고 있었다. 숲을 산책하고 돌아온 후 침울한 얼굴로 살롱의 소파에 드러누워 있던 아사오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거무스름한 얼굴을 붉히며 벌떡 일어났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젊은이들의 그런 모습은 개다래나무에 취한 고양이나 마찬가지였다. 히카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장서실에서 나온 그의 짐짓 차갑고 시치름한 표정을 보고 나는 몰래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시선에 대해 과도한 자의식을 드러낸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문이 열리고 가자마가 들어왔다. 이어서 선글라스를 낀 기노우치에게 매달리듯 팔짱을 낀 청바지 차림의 자그마한 여자가 들어왔다. "아아, 아저씨." 당황한 내 얼굴을 가자마가 퉁명스레 힐끔 쳐다보고는 말했다. "얘는 레나 짱이에요. 오늘 밤부터 여기서 지낼 거니까 잘 부탁해요."
하지만 가자마가 그녀를 저택에 재운다고 말한 이상 그 말에 따르는 것이 내 임무다. 내심 번거롭기 짝이 없었지만, "어서 오십시오" 하고 정중하게 머리를 숙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 여자는 쓰바키모토 레나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레나‘에 어떤 한자를 쓰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얼핏 보기에 20대 초반, 젊은이들과 나이가 같거나 조금 연상으로 느껴졌는데 혼자 여기로 여행을 왔다고 했다.
"그럼 일단 겐지로의 방을 쓰면 되지. 녀석은 살롱 소파에서 자면 돼. 아니면 레나, 내 방에서 잘래?" 물론 자신과 함께, 라는 유혹이리라. "혼자 독차지하기 없기야, 유키." 기노우치가 참견하고 나서자 레나는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방긋 웃으며 말했다. "난 아무래도 상관없어."
"응. 그게, 뭐랄까, 아주 무시무시한 실험이었거든. 저기, 프랑켄슈타인이라고 알아?" "영화에서 본 적 있어." "그거랑 똑같은 연구였어. 그런 인조인간을 만들려고 한 거야."
"옛날, 20년 전이었던가, 여기 아모 아무개라는 남자가 살았는데 말이야." 기노우치는 거드름을 피우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가 그렇게 수다스럽게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듯하다.
말하기 미안하다는 듯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 "저쪽 홀로 갔습니다." "장서실로요?" 그렇게 되물었을 때 내 얼굴은 분명 웃음과 울음을 동시에 참는 듯이 굳어 있었으리라.
검은 고양이 칼로 역시 방으로 피신했다. 문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전날 밤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떠들썩했다. 나는 말로 다하지 못할 만큼 착잡한 기분으로 욕실로 들어갔다.
"레나라는 그 여자...... 닮았어요." "닮아요? 누구랑요?" "어제 말씀드렸죠. 같이 밴드를 하던 레이코라는 보컬이랑 생김새랑 목소리가 어쩐지 닮았어요. 그래서 녀석들......."
평소의 배 가까운 시간을 들여 목욕을 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칼로를 안고 침대에 앉았을 때 문득 깨달았다. 살롱에서 목소리가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응. 박사는 지하실에 시체를 숨기기로 했어. 벽 속에 시체를 넣고 새로 싹 발랐지. 그런데 그때 검은 고양이도 같이 들어가 버린 거야. 그래서 지금도 한밤중에 지하실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린대." 별것 아니었다.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 「검은 고양이」의 허접스러운 표절 아닌가.
작은 구멍을 통해 펼쳐진 시야 한구석에서 입구의 문이 열렸다. 안으로 한 걸음 들여놓자마자 히카와는 거기서 벌어지고 있는 친구들의 난잡한 행위를 보고 우뚝 멈춰 섰다. 하지만 네 사람은 히카와가 종종걸음으로 방을 가로질렀을 때야 그가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편 가자마와 기노우치, 아사오 세 사람은 한가운데의 긴 의자에서 떨어져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뭘 하나 싶었는데, 남쪽 벽(회랑아래에 해당하는 곳이다)에서 커다란 장식장을 끌고 왔다. 그리고 장식장을 입구 앞으로 옮겨 문을 막아버렸다.
아까 전 키스에 생각이 미쳤다. 아까 안겨들어 키스를 했을 때 히카와에게 입으로 LSD를 먹인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그는.......
주인의 복잡한 심경도 모르고 칼로는 기분 좋게 색색거리며 침대 구석에서 잠들어 있었다. 나는 샤워를 해서 몸에 잔뜩 묻은 먼지를 씻어내고 이불 속 깊이 파고 들어가 그다지 편하지는 않은 잠에 빠졌다. 그러니 그 후에 장서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내알 바 아니었다.
"오늘도 헤어질 때 새삼 다짐을 두듯 말했잖아. 부디 이 노트에 관한 이야기를 퍼뜨리지 말아달라고. 사실이 분명해질 때까지는 가급적 경찰이 관여하지 않기를 바라는 거야."
그래서 이건 창작이라고 믿으려 애썼고, 의사와 경찰에게도 그렇게 말했어. 실제로 첫머리에 ‘이것은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는취지의 미묘한 문장이 있으니까, 그 주장도 나름 설득력을 갖춘 셈이지."
차로 한 시간 반 정도 거리에 항구도시가 있을 것. 근처에 인가가 없는 숲속일 것. 그 밖에도 실마리가 될 만한 부분이 몇 군데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지명을 알아내기 어려워. 적어도 내게 이 수기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그거야.
"1970년, 삿포로 H** 대학의 조교수 아모 다츠야의 의뢰로 나카무라 세이지가 설계한 집. 이 정도의 데이터만 있으면 혹시......."
"응. 그건 알아. ‘미래의 나를 위해 쓰는 소설‘이라는 표현을 쓴 것도 이해는 가는데...... 마음에 걸리는 건 어째서 그가 올해 2월에이 노트를 가지고 도쿄로 왔느냐는 거야. 그것도 화재 현장에서 이것만 들고 도망쳐 나왔다고 하잖아. 어째서 그렇게까지......."
"그렇지. 나도 큰 의문을 품고 있어. 덧붙여, 이 수기의 목적은 도대체 뭘까?" "나를 위한, 이라고 나와 있었잖아요. 요컨대 일기와 똑같은 의미겠죠."
구시로에서 아칸코 호수 사이의 아주 깊은 숲속에 세웠더군요." "정확한 소재지는 아십니까?" "그것까지는 생각이 안 납니다." "어떤 집이었는지 기억하시는지?" "아주 세련된 서양식 저택이었을 겁니다."
"아모는 원래 구시로 부근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인근 지역에 애착이 있었겠죠." 가와미나미는 대학 시절에 구시로와 아칸에 한 번 간 적이 있었다. 구시로는 항구도시. 아칸코 호수는 분명 거기서 버스로 두 시간 남짓 걸리는 곳이었다. 근처에 인가가 없는 숲이라면 그 부근에 썩어날 만큼 많다.
옷을 갈아입고 침실을 나선 것이 분명 오전 10시가 지난 무렵이었다. 말소리는 나지 않았다. 다른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기분 탓인지 숲의 작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도 평소보다 얌전하여 전날 밤에 목격한 광란의 도가니가 그야말로 악몽이었던 것처럼, 평온한 혹은 으스스한 정적이 저택을 감싸고 있었다.
그래서 문이 열리지 않는 것이다. 즉, 지금도 이 안에 그들이 있다는 뜻이다. 그 저속한 술자리를 마친 후 그들은 결국 이 방에서 잠든 걸까. 말을 걸어보기도 망설여졌다. 내버려두면 조만간 나오리라. 이때는 그렇게 판단하고 나는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끙끙대다가 일단 내려가서 커피라도 한 잔 더 마셔야지, 생각한 순간이었다. 갑자기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무시무시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설마, 설마 그 여자......." "보시다시피. 죽었습니다." 나는 더욱 담담하게 말했다. 히카와는 안경 안쪽의 가늘고 긴 눈을 크게 뜨고 "설마" 하고 잠꼬대처럼 되풀이해 말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아주 냉정하고 침착한 태도였던 듯싶다. 하지만 물론 이때 내 마음에 두려움과 동요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자신보다 훨씬 어린 데다 평정심을 완전히 잃은 사람이 곁에 있으면 나 자신은 자연히(상대적일지도 모르지만) 정신을 바짝 차리는 법이다.
나는 시체를 더 찬찬히 관찰했다. 실금失禁한 흔적은 없었다. 목에 감긴 스카프는 살을 꽤 깊이 파고든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오른손을 들어 올려 손가락 관절을 살펴보았다. 여기에도 약간이나마 사후경직이 나타났다. 즉, 죽은 지 적어도 일고여덟 시간은 지났다는 말인가.
"저기, 아유타 씨. 이런 식의 발언은 비열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경찰이 개입하면 야유타 씨도 곤란한 입장에......." "압니다." 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말투로 대응했다.
"여러분이 대마와 LSD를 즐긴 사실을 저는 어제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알면서 묵인했으니 경찰은 당연히 죄를 추궁하겠죠." 그렇다. 히카와가 말할 것도 없이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 입장에서도 지금 경찰이 변사 사건을 수사하러 오는 것은 결코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과연 이 사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아까부터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 것이다. "경찰에 신고하더라도 우리끼리 사건을 조금 더 검토한 후에 신고하는 편이 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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