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키 후미타케에게, 5년 전 이와쿠라를 떠올리며 - P-1
주요 등장인물 아유타 도마(60) | 흑묘관의 관리인. 가자마 유키(22) | 흑묘관 현 소유주의 아들. M** 대학 학생 록밴드 ‘세이렌’의 기타리스트. 히카와 하야토(23) | 유키의 사촌 형. T** 대학 대학원생. 세이렌의 피아니스트. 기노우치 신(22) | 유키의 친구. 세이렌의 드러머. 아사오 겐지로(21) | 유키의 친구. 세이렌의 베이시스트. 쓰바키모토 레나(25) | 여행자.
* 괄호 안 숫자는 1989년 8월 시점의 만 연령
아모 다츠야 | 흑묘관의 전 주인. 전 H** 대학 조교수. 생사 불명. 아모 리사코 | 다츠야의 딸. 생사 불명. 구마시로 노스케(70) | 아모 다츠야의 친구. 전 T** 대학 교수. 다치바나 데루코(63) | 아모 다츠야의 전 동료. H** 대학 교수. 가와미나미 다카아키(25) | 기단샤 편집자. 시시야 가도미(41) | 추리작가.
* 괄호 안 숫자는 1990년 6월 시점의 만 연령 - P-1
1990년 7월 8일(일), 홋카이도·아칸 - P-1
세 사람이 대문 앞에 서자 마치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뒤쪽에 펼쳐진 가문비나무 숲에서 짙은 안개가 흘러나왔다. 가와미나미다카아키는 무심코 반소매 셔츠 아래로 드러난 팔을 문지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 P-1
블루종과 같은 색의 숄더백을 어깨에 멘 시시야가 앞장서서 좁은 통용구를 빠져나갔다. 야유타 도마가 오른손에 쥔 갈색 지팡이로몸을 지탱하면서 그 뒤를 따랐다. 마지막으로 가와미나미가 들어갔다. - P-1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니 느릿한 바람에 흘러가는 안개에 현혹되었는지 문득 그 검은 형체가 거대한 고양이로 보였다. 물론 ‘흑묘관黑猫館‘이라는 저택의 이름이 가와미나미의 마음 한구석을 자극한 결과이기도 했다. - P-1
그의 이름은 아유타 도마라고 한다. 체격이 빈약한 데다 등이 약간 굽어 실제보다 훨씬 늙어 보인다. 아직 예순 살 정도밖에 되지않았을 텐데 풍채는 이미 노인이나 다름없었다. - P-1
옅은 회색으로 더러워진 벽에 세로로 길고 조그만 창이 줄지어 나 있다. 지붕은 경사가 급한 맞배지붕. 외관은 그다지 기이하거나별날 것 없는 2층짜리 서양식 저택이지만, 홋카이도의 외진 숲속에 이런 집이 세워져 있다는 것 자체가 묘한 이야기이기는 하다. 더구나 여기가 나카무라 세이지中村靑司가 설계했고, 작년 여름 그 ‘수기‘에 적힌 사건이 일어난 곳이라고 생각하자 가와미나미는 등골이 오싹했다. - P-1
세 사람은 발소리를 죽이고 자욱한 안개 속을 나아갔다. 숲에서 노니는 들새 소리가 사방팔방에서 울려 퍼진다. 7월 초순, 정오에가까운 시각인데도 기온은 올라갈 기미가 없었다. 가와미나미는 쌀쌀한 느낌에 다시 팔을 문지르면서 여름 스웨터를 차 안에 두고온 것을 몹시 후회했다. - P-1
적어도 작년 9월까지는 아유타 노인이 저택의 관리인으로 일했을 것이다. 잃어버린 당시의 기억을 어떻게든 되찾으려고 지금도애를 쓰고 있기는 한데....... - P-1
다음 달 초,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현 주인의 아들이 이쪽으로 여행을 오기로 했다. 친구들과 함께 여기저기를 돌아다닐 예정인데모처럼의 기회이니 아버지가 소유한 ‘별장‘에도 며칠 머무르고 싶다고 한다. 그러니 그들이 사용할 방을 준비하고, 머무르는 동안식사 등의 시중을 잘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 P-1
여기에 적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 1989년 8월 1일부터 4일까지 ‘흑묘관‘이라고 불리는 이 저택에서 일어난 사건의 정확하고 상세한 기록이다. - P-1
이것은 나 자신을 위한 수기다. 나는 이 수기를 씀으로써 그 불길한사건을 하나의 ‘과거‘로서 노트 속에 봉인하고 싶은 것이다....... - P-1
이것은 나 자신을 위한 수기다. 이 노트에 쓴 글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생각은 전혀 없다. 아주 특별한 일이라도 벌어지지 않는 한 아마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다. - P-1
토지와 가옥의 실질적인 관리는 이 지방의 대리인 아다치 히데아키足立秀秋 씨가 도맡고 있다. 그 아다치 씨가 전화로 연락을 한것이다. - P-1
하지만 일개 사용인에 불과한 내게 그러한 지시를 거부할 권리는 없다. 알겠습니다, 하고 냉큼 대답하는 것이 당연한 내 소임이다. 아무튼 가능한 한 냉정과 객관성을 유지하며 그 사건의 전말을 정리해두고자 한다. - P-1
앞으로 10년 정도 지나면 아직은 생생한 그 사건의 기억도 완전히 희미해지리라. 10년 후의 내게 이 수기는 반드시 재미있는 읽을거리로서 남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것은 미래의 나를 위해 쓰는 ‘소설‘, 그것도 이른바 탐정소설 부류에 속하는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 이왕 쓸 바에는 그런 기분으로 써내려가도록 하자. - P-1
내가 그 연락을 받은 것은 1989년 7월 초순이었다. 분명 7월에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2일인가 3일쯤이었을 것이다. - P-1
잊을 만하면 아다치 씨가 상태를 보러 오는 것을 제외하면 전혀, 라는 말을 붙여도 될 만큼 사람이 오지 않는다. - P-1
하여튼 내가 그 지시를 쾌히(표면상으로는) 받아들이자 아다치 씨는 일단 나를 염려해주었다. "여러모로 힘들겠지만 며칠만 같이 지내면 되니까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자세한 일정은 결정되는 대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 P-1
그런 까닭에 나는 저택의 대청소를 비롯해 다양한 준비를 하느라 얼마 동안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예상대로 제법 버거웠다. - P-1
자기 소유의 고급 맨션과 최신 스포츠카가 있고, 용돈까지 두둑하지만 강의도 제대로 듣지 않고 싸돌아다니는 방탕아, 라는 진부한 상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같이 온다는 세 명도 아마 비슷한 부류일 것이라 생각하자 기분이 우울해졌다. 이맘때 굳이 이런 벽촌으로 오지 않아도 될 것을. 여기 말고도 그들이 놀 만한 곳은 얼마든지 있을 텐데....... 새삼스럽게 그렇게 툴툴대며 몇 번이나 한숨을 쉬었던 기억이 난다. - P-1
사이타마의 현 주인 역시 지금까지 업무를 보는 김에 딱 한 번(벌써 4년 전이다) 찾아온 적이 있을 뿐이다. 정말로 - P-1
역시 가능하면 이 집을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한 상태로 유지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예순 살의 노구에게 이 넓은 저택의관리는 이제 힘에 겨운 일인지도 모른다. - P-1
"흔해 빠진 감상입니다만, 역시 경치가 웅대해요. 상상을 훨씬 넘어서서 감동했습니다." "그거 잘됐군요." 나는 짤막해진 담배를 한 번 더 빨아들이고 재떨이에 버렸다. - P-1
"신경 쓰지 마세요. 적어도 저는 조용한 방과 뜨거운 커피만 있으면 대만족이니까요." "조용한 것만은 보증하겠습니다. 숲속의 독채거든요." - P-1
뜻밖에도 예의 바른 상대의 태도에 나는 약간 당황했다. "다른 분들은?" "저쪽 라운지에 있어요. 금방 올 겁니다." - P-1
"처음 뵙겠습니다. 유키, 가자마 유키의 사촌 히카와라고 합니다. 히카와 하야토. 일부러 데리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 P-1
"저는 도쿄 23구 안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이렇게 도쿄를 떠나보니 그 도시는 이상하다는 실감이 나는군요. 도시의 진화라는 측면에서 따져보면 거기는 틀림없이 어딘가에서 방향이 어긋난 괴물입니다." - P-1
"어제는 어디를 구경하러 가셨습니까?" 나는 히카와에게 물었다. "혼자 이곳의 명물이라는 감옥 터에 다녀왔습니다." 대답하고 나서 청년은 가볍게 코를 훌쩍였다. "옛날에 아바시리의 형무소에도 가본 적이 있는데, 역시 분위기가 다르더군요. 그렇게 비교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기는 합니다만." - P-1
다시금 네 사람을 관찰했다. 과연, 듣고 보니 히피인 양 차려입은 가자마 유키와 기노우치 신의 모습은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 - P-1
그러더니 무슨 신호인지, 집게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을 세운 오른손을 내밀고 내게 "예이" 하고 소리를 질렀다. "요컨대 밴드 해산 기념 여행을 왔다는 거죠. 사내놈 넷뿐이라 울적하기는 하지만. 뭐, 이삼 일 잘 부탁해요." - P-1
"그런데 히카와 씨." 나는 여전히 이따금 코를 훌쩍대는 조수석의 청년에게 마음에 걸리던 일을 물었다. "호텔 로비에서 이곳의 저택에 개인적인 흥미가 있다고 하셨는데, 무슨 뜻입니까?" 히카와는 "아아" 하고 목소리를 흘려내더니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아까 전에 피우지 않고 넣어두었던 담배를 다시 꺼내 입술 끝에 물면서 불쑥 중얼거렸다. "아모 다츠야." - P-1
"엄청 산골이네." 가자마 유키가 불만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말하고 운전석 시트를 쿡 찔렀다. "저기, 아저씨, 얼마나 더 가야 돼요?" "이제 절반은 지났습니다." - P-1
"도쿄의 열대야에 비하면 저한테는 천국입니다. 땀 흘리는 걸 정말 싫어해서요." "올해는 이상하게 덥다고 들었는데요." - P-1
"T** 대학 이학부 출신의 아는 사람만 아는 생물학자죠. 최근 유행하는 이른바 뉴사이언스보다 몇 발 앞서 독특한 학설을 수없이발표한 사람으로, 결국 학계에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일부에서는 노벨상을 받을 만한 시도였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저 역시 그 ‘일부‘에 포함되죠." "삿포로에서 대학교수로 재직하셨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요." - P-1
"풍향고양이라고나 할까요." "그게 뭡니까?" "풍향닭의 닭 대신에 함석으로 된 고양이가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새카맣게 칠해져 있거든요." "아아, 그래서.......!" "뭐, 아마도 그게 흑묘관이라는 이름의 유래겠죠." - P-1
"저는 이학부에서 형태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생물학의 한 분야죠. 그러다 보니 그의, 아모 다츠야 박사의 이름을 접할 기회가있었습니다." - P-1
"제가 여기 온 후에 받은 수고양이가 한 마리 있습니다. 이름은 칼로입니다." "칼로?" "네팔어로 ‘검다‘는 뜻이죠. 나중에 소개해드리지요." - P-1
"새끼 양인데 입에 안 맞으십니까?" 내 말에 가자마는 더 이상 불평을 하지 않고 명령했다. "와인 좀 더 가져와요." 히카와를 제외한 세 사람은 술을 꽤 좋아하는 듯 이미 두 병이나 비웠다. - P-1
현관홀에서 왼쪽, 그러니까 동쪽으로 뻗은 복도를 따라 2층과 거의 동일하게 네 개의 방이 위치해 있다. 북쪽 앞편이 거실 겸 식당, 뒤편은 앞방과 이어진 응접실로 나는 ‘살롱‘이라고 부른다. 남쪽에는 앞편에 주방과 팬트리(식료품 저장실)가, 뒤편에 내가 쓰는침실이 있다. 1층에는 방이 하나 더 있는데, 현관홀 서쪽의 2층까지 뚫린 장서실이다. 차 안에서 히카와에게 이야기한 아모 다츠야박사의 책은 장서실에 늘어선 책장에 남아 있다. - P-1
그 후에도 식사가 진행되는 동안 젊은이들은 똑같은 패턴의 이야기를 되풀이한 것 같다. 가자마가 뭐라고 말하면, 기노우치가 그말을 받아 시시한 농담을 늘어놓는다. 아사오가 나지막하게 웃는다. 히카와는 그저 모르는 척. - P-1
"제 사촌 동생이기는 하지만 정말 한심합니다. 이성을 잃은 인간만큼 추한 건 없죠." 실연하든 술을 마시든 자신은 늘 이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 P-1
그 후에도 젊은이들의 술자리는 계속되었다. 팬트리에서 술을 더 꺼내어준 후에 나는 그들을 남겨놓고 살롱에서 나왔다. 그때 문득귀에 이런 말이 들어왔다. - P-1
"..요전의 엘, 아직 있지?" 가자마 유키가 기노우치 아니면 아사오에게 한 말이었다. "나중에 가져와. 뭘 걱정하고 그래. 여긴 우리 아빠 별장이라고......." - P-1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절을 이어받고 소설가는 그만둘 거야. 절의 주지가 부업으로 사람 죽이는 이야기를 쓰다니 보기에 그다지안 좋잖아." 어디까지 진심인지 긴가민가하기는 한데....... - P-1
시시야 가도미는 가와미나미가 현재 담당하고 있는 추리작가 중 하나인 동시에, 몇 년을 알고 지낸 친구이기도 하다. 원래 오이타현에 있는 어떤 절 주지의 아들로, 제대로 된 직장 없이 결혼도 않고 빈둥대며 30대 중반을 보내고 있었다. 가와미나미는 그 무렵부터 그를 알고 지냈는데, 그 후에 어쩌다 보니 기단샤에서 데뷔작이 나오게 되었다. 재작년, 1988년 9월의 일이다. - P-1
각설하고, 갑작스레 이런 말씀을 드려 몹시 죄송합니다만 실은 간절한 바람이 있어 펜을 들었습니다. 아주 특별한 사정이 있어 작가 시시야 가도미 선생님을 꼭 한 번 뵙고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몰상식한 부탁임은 잘 압니다만, 어떻게 배려해주실 수 없을까요? - P-1
"실은, 기억을 잃었습니다. 병원에서 의식을 되찾기 이전의 기억을 깡그리!" "기억상실증이라고요?" 급히 되묻자 상대는 한숨을 쉬는 듯한 목소리로 "예" 하고 대답했다. "역행성 건망증이라고 하던가요? 이름, 주소, 직업 어느 것 하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 P-1
"저는 그때 그 호텔에 묵고 있었습니다. 미처 탈출하지 못해 중상을 입었죠. 위기일발의 상황에서 구출되어 살았습니다만."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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