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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가슴이 뜨거워져라 - 열정 용기 사랑을 채우고 돌아온 손미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손미나 지음 / 삼성출판사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다시 가슴이 뜨거워져라』 ― 밥벌이의 지겨움을 넘어, 가슴을 다시 뛰게 하는 풍경들
손미나를 따라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걷다 보니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삶에서 눈길을 끄는 모습이 하나 있었다. 먹고사는 직업과 자신이 좋아하는 예술을 굳이 하나로 만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직업은 직업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그 곁에 또 하나의 자기 삶을 자연스럽게 놓아두고 있었다.
은행원이면서 가수이고, 변호사인데 춤을 춘다. 버스기사로 일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여행사 직원이면서 어릿광대로 무대에 선다. 루카스의 여동생은 생물학자가 본업인데 서커스까지 한다.
물론 ‘버스를 몰면서 그림을 그린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다가는 사고 난다. 버스를 모는 것이 밥벌이라면 그림을 그리는 것은 그 사람의 또 다른 삶이라는 이야기다.
몇 사람의 모습만으로 아르헨티나 사람 전체가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손미나가 만난 사람들에게서는 예술이 특별한 사람들의 전유물도 아니고, 먹고살 만큼 벌고 시간과 돈이 남아야 비로소 누릴 수 있는 사치도 아니었다. 노래하고, 춤추고, 그림을 그리고, 서커스를 하는 일이 생활 한쪽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었다.
삶을 예술처럼 산다는 것은 어쩌면 이런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예술가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밥벌이가 한 사람의 삶을 전부 차지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자기 가슴을 뛰게 하는 무엇인가를 일상 속에 품고 사는 것이다. 직업이 그 사람의 전부일 필요는 없다.
김훈은 말한다. 밥벌이는 지겨움이라고.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이 언제나 즐거울 수는 없다. 아르헨티나 사람이라고 월요일 아침마다 신나게 출근하고 직장 일이 늘 즐거울 리도 없다. 밥벌이는 어디에서든 지겨울 수 있다. 그래서 오히려 밥벌이 바깥에 또 하나의 자기 삶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김훈의 ‘밥벌이의 지겨움’과 손미나가 아르헨티나에서 본 ‘생활 속 예술’은 반대말이 아니라, 어쩌면 서로를 보완하는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노래와 춤이 있고, 누군가에게는 그림과 서커스가 있다.
나에게는 산이 있다. 내게 등산은 예술이다.
산길을 걷고, 능선을 넘고,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숲과 바위를 바라보고, 정상에 올라 인간이 만들어놓은 세상을 내려다보는 시간은 내게 단순한 운동이 아니다. 그 시간만큼은 직함도 밥벌이도 잠시 내려놓고 한 사람으로 걷고 보고 느낀다.
꼭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거나 악기를 연주해야만 예술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자기 삶에 밥벌이와는 다른 리듬 하나를 만들어놓고 그 시간을 즐기며 살아가는 것. 넓게 보면 그것 역시 생활 속의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프롤로그에서 말했던 ‘억겁과 찰나’도 여기에서 다시 이어진다. 찰나에도 미치지 못하는 짧은 삶을 밥벌이에만 모두 내줄 수는 없다. 자기 삶을 값지게 만드는 무엇인가를 하나쯤은 품고 살아야 한다.
그것이 예술일 수도, 산일 수도, 여행일 수도 있다.
책을 덮고 나니 내 가슴을 다시 뛰게 하는 아르헨티나의 다섯 가지 풍경이 떠올랐다.
1. 나의 영웅, 체 게바라 ― 여행이 한 사람의 눈을 바꾸다
첫 번째는 에르네스토 게바라. 우리가 알고 있는 ‘체 게바라’다.
쿠바 혁명의 상징으로 더 유명하지만, 본명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는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에서 태어나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한 아르헨티나 청년이었다.
1952년, 스물세 살의 게바라는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함께 ‘라 포데로사 Ⅱ’라는 오토바이를 타고 남미 여행을 시작했다. 오토바이는 여행 도중 고장 나 더 이상 함께하지 못했지만 두 사람은 걷고, 차와 배를 얻어 타면서 여행을 계속했다.
그 과정에서 젊은 게바라는 광산노동자와 가난한 농민, 원주민과 나병환자들을 만났다. 강의실이나 책 속에서가 아니라 자기 눈으로 라틴아메리카의 빈곤과 불평등을 보았다. 이 여행 하나만으로 그가 혁명가가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훗날 그의 세계관이 형성되는 데 중요한 경험 가운데 하나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때 남긴 기록은 훗날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로 세상에 알려졌다. 1952년 남미 여행 당시의 기록은 게바라가 1967년 볼리비아에서 죽은 뒤 26년이 지난 1993년, 스페인어판 『Notas de viaje』로 처음 출간되었다. 여행을 떠난 지 약 41년 만이었다. 영어판 『The Motorcycle Diaries』는 1995년에 출간되었다.
국내에서는 2000년 출판사 **‘이후’**에서 『체 게바라의 라틴 여행 일기』라는 제목으로 처음 번역되었고, 2004년 황매에서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라는 제목으로 새롭게 출간되었다. 2012년에는 황매(푸른바람)에서 개정판이 나왔지만 현재 2004년판과 2012년판 모두 절판되었고, 새 책으로는 구하기 어렵다.
나는 2004년 황매판으로 이 책을 읽었고, 지금도 그 책을 소장하고 있다.
손미나에게 아르헨티나 여행이 흔들린 자신의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한 시간이었다면, 젊은 게바라에게 남미 여행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바꾸어놓은 시간이었다. 두 사람의 삶과 지향은 전혀 다르지만, 여행이 단순한 장소의 이동을 넘어 한 인간의 삶에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는 맞닿아 있다.
어떤 여행은 자신의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하고, 어떤 여행은 세상을 바라보는 방향 자체를 바꾸어놓는다.
2. 마라도나와 메시 ― 축구, 전쟁의 기억을 넘어
두 번째 풍경은 축구다. 마라도나와 메시.
특히 디에고 마라도나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이다. 아르헨티나와 잉글랜드가 맞붙은 그해 8강전에는 축구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역사가 깔려 있었다.
불과 4년 전인 1982년, 아르헨티나와 영국은 포클랜드 전쟁을 치렀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말비나스 전쟁이라 부른다.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자국에서 훨씬 가까운 포클랜드 제도를 기습 점령했다. 영국 본토에서는 1만 킬로미터 넘게 떨어진 남대서양의 섬이었다. 아르헨티나 지도부는 영국이 그 먼 섬을 되찾기 위해 대규모 군사력을 실제로 투입할 가능성이 낮다고 오판했다.
그러나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의 대처는 달랐다.
영국은 항공모함을 중심으로 대규모 기동함대를 남대서양까지 보냈다. 그 먼 남대서양까지 해군과 공군력을 투입했고, 영국 핵잠수함은 아르헨티나 순양함 제네랄 벨그라노를 격침했다. 영국군은 포클랜드에 상륙했고, 전쟁은 약 74일 만에 아르헨티나의 패배로 끝났다.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이 영국의 대응 의지를 과소평가했다면, 대처는 그 오판에 함대를 남대서양까지 보내는 것으로 대처했다.
말 그대로 대처의 대처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리고 4년 뒤인 1986년 6월 22일, 멕시코시티 아스테카 경기장에서 아르헨티나와 잉글랜드가 다시 만났다.
전쟁은 끝났지만 기억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두 나라 선수들이 총을 들고 싸우는 것도 아니었고, 축구경기의 승패가 전쟁의 승패를 뒤집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포클랜드 전쟁에서 패배한 지 겨우 4년밖에 지나지 않은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이 경기가 그저 월드컵 8강전 하나로만 느껴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후반 6분, 마라도나가 잉글랜드 페널티지역 안으로 파고들었다. 공이 높이 떠오르자 골키퍼 피터 실턴도 함께 뛰어올랐다.
키 165cm의 마라도나가 183cm의 실턴보다 먼저 공을 건드렸다.
머리가 아니었다.
손이었다.
심판은 보지 못했고 골을 인정했다.
훗날 마라도나는 그것을 이렇게 불렀다.
‘신의 손.’
그런데 불과 4분 뒤, 마라도나는 이번에는 누구도 시비를 걸 수 없는 골을 만들어냈다.
자기 진영에서 공을 잡은 그는 잉글랜드 선수들을 차례로 제치며 약 60m를 질주했고, 마지막에는 골키퍼 실턴까지 따돌린 뒤 골문 안으로 공을 밀어 넣었다. 훗날 ‘세기의 골’이라 불리게 된 장면이다.
한 골은 손으로 만들었고, 다른 한 골은 오직 자신의 두 발로 만들었다. 하나는 명백한 반칙이었지만, 다른 하나는 마라도나가 왜 불세출의 축구선수로 불리는지를 보여주는 골이었다.
아르헨티나는 그 두 골로 잉글랜드를 2대 1로 꺾었다.
전쟁에서의 패배를 축구경기 하나로 되돌릴 수는 없다. 그러나 불과 4년 전 영국에 패했던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그날의 승리가 어떤 감정으로 다가왔을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마라도나 역시 훗날 이 경기를 포클랜드 전쟁의 기억과 연결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는 준결승에서 벨기에를 꺾고 결승에 올랐다. 상대는 서독이었다. 3대 2 승리.
1986년, ‘신의 손’과 ‘세기의 골’을 남긴 마라도나는 마침내 월드컵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그 장면으로부터 36년이 흐른 2022년, 이번에는 리오넬 메시가 카타르에서 아르헨티나의 월드컵 우승을 이끌었다. 마라도나가 있던 시대와 메시가 있던 시대는 달랐지만, 두 사람을 통해 보이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축구에 대한 열정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3. 탱고 ― 두 사람이 함께 걷는 삶
세 번째 풍경은 탱고다.
축구가 경기장을 뜨겁게 만드는 열정이라면, 탱고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리와 사람들의 삶 속에 스며든 또 다른 열정이다. 탱고를 생각하면 다시 이 책에서 만난 ‘생활 속 예술’로 돌아오게 된다.
책에는 한 노인이 피아노 반주에 맞춰 탱고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카를로스 가르델은 아름다운 탱고 선율과 노랫말로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상처와 한(恨)을 달랬고,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의 노래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이어지고 있었다. 탱고는 그들에게 단순히 듣고 즐기는 음악이 아니라 사랑과 이별, 상처와 추억을 담아내는 삶의 한 부분이었다.
손미나가 만난 현지인은 탱고에 사랑과 인생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며, 머리가 아닌 가슴과 영혼으로 느끼는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탱고를 두고 ‘두 사람이 함께 걷는 것’이라고 했다. 다만 누군가와 제대로 함께 걷기 위해서는 먼저 혼자서도 잘 걸을 수 있어야 한다.
춤 이야기인데 듣고 보면 삶의 이야기다.
서로 기대어 걷되 자기 발로 설 수 있어야 하고,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상대의 움직임을 느끼며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야 한다. 어쩌면 탱고는 사랑과 인생을 두 사람이 함께 걷는 모습으로 보여주는 춤인지도 모른다.
은행원이 노래를 부르고, 변호사가 춤을 추고, 생물학자가 서커스를 하는 도시. 그렇게 예술이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들어와 있는 곳이니, 탱고가 공연장의 춤에 머물지 않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의 삶과 함께 이어져온 것도 이해할 만하다.
4. 파타고니아 ― 인간을 작게 만드는 대자연
네 번째 풍경은 파타고니아다.
파타고니아는 한 나라의 특정 지역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아르헨티나와 칠레 두 나라에 걸쳐 펼쳐진 남아메리카 남부의 광대한 지리적 영역이다. 안데스와 빙하, 끝없이 펼쳐진 대지와 바람이 이어지는 곳이다. 인간이 만들어놓은 것보다 자연의 크기가 훨씬 크게 느껴지는 땅이다.
손미나는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의 산타크루스주 엘 칼라파테까지 내려갔다.
프롤로그에서 지구 밖의 우주로 시선을 옮겨 인간이라는 존재를 티끌에 비유했다면, 파타고니아에서는 굳이 우주까지 나가지 않아도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끝없는 대지와 거대한 빙하, 안데스의 산줄기 앞에 한 사람을 놓아보면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그대로 드러날 것 같기 때문이다.
산과 웅장한 자연을 좋아하는 나에게 파타고니아는 언젠가 반드시 직접 걸어보고 싶은 땅이다.
그리고 손미나를 따라 엘 칼라파테까지 내려간 내 시선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더 남쪽으로 향한다.
5. 우수아이아 ― 정수일 교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세상의 끝으로
다섯 번째 풍경은 티에라델푸에고주의 우수아이아다.
우수아이아 역시 넓은 의미의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에 속한다. 남아메리카 남쪽 끝자락에 자리해 흔히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도시다.
손미나는 산타크루스주의 엘 칼라파테까지 갔지만, 나는 언젠가 그보다 더 남쪽으로 내려가 우수아이아까지 가보고 싶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내가 존경하는 문명교류학자 정수일 교수님은 『문명의 보고 라틴아메리카를 가다』를 쓰기 위한 답사에서 노구를 이끌고 우수아이아까지 내려가셨다. 책에는 아예 「지구의 땅끝 마을, 우수아이아」라는 장이 있고, 그 뒤로 비글해협과 마젤란해협 답사가 이어진다.
언젠가는 나도 정수일 교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파타고니아를 더 남쪽으로 내려가 우수아이아와 비글해협 앞에 직접 서보고 싶다.
6. 다섯 풍경이 가리키는 곳 ― 다시 뜨거워지는 삶
체 게바라, 마라도나와 메시, 탱고, 파타고니아, 그리고 우수아이아.
책을 덮고 떠올린, 내 가슴을 다시 뛰게 하는 아르헨티나의 다섯 가지 풍경이다.
혁명가와 축구선수, 춤과 음악, 거대한 자연과 세상의 끝에 있는 도시. 서로 전혀 다른 풍경들이지만 하나씩 따라가다 보니 결국 한곳으로 모인다.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이 짧은 삶을 무엇으로 채우며 살아갈 것인가.
손미나는 자신의 삶이 흔들리던 시기에 아르헨티나로 떠났다. 그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과 풍경을 따라가며 나 역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다시 생각했다.
나에게는 산이 있고 여행이 있다.
그것들이 밥벌이와는 다른 삶의 리듬을 만들어주고, 내가 아직 가슴 뛰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해준다.
프롤로그에서 생각했던 ‘억겁과 찰나’도 결국 여기로 돌아온다.
억겁의 세월에 비하면 인간의 삶은 찰나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렇다고 허무하게 살 이유는 없다. 오히려 너무 짧기 때문에 더 알차고 찰지게 살아야 한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가고 싶은 곳에 가고,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살아가는 것. 밥벌이에 삶 전체를 내주지 않고 나를 움직이게 하는 무엇인가를 하나쯤 품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찰나보다 짧은 인생을 값지게 살아가는 한 방법일 것이다.
그래서 『다시 가슴이 뜨거워져라』라는 제목은 책을 덮은 뒤 처음보다 더 넓은 뜻으로 다가왔다.
다시 뜨거워져야 할 것은 사랑만이 아니다.
삶을 향한 가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