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에 비친 광의 내부. 그것은 뭐라고도 할 수 없이 괴이한 광경이었다. 인형들의 집회장이라고나 할까. 옷을 걸치지 않은 하얀 마네킹들이 방 여기저기에 너부러져 있다. 합쳐서 스무 개...... 아니, 더 많나.
"저기, 갑작스레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한데, 가능하면 방을 바꿀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이 방에 있자니 정신이 사나워서. 근처 아이들이 뜰에 들어와서 노는 데다 옆방의 구라타니라는 대학원생은 기타를 치더라고요. 시끄러워서 일이 안 됩니다."
아버지의 아틀리에. 이 도시로 돌아와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아버지가 홀로 창작활동을 하던 공간.......
어떤 인형은 팔이 하나 없고, 어떤 인형은 다리가 하나 없다. 두 팔이 없는 것, 하반신이 없는 것도 있다. 그리고 젊은 여자의 몸매를 한 그 모든 인형에는 역시 번번하다는 의미로 ‘얼굴‘이 없었다.
아버지에게 나는 결코 아내 미와코와의 사이에서 얻은 사랑의 결정이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나는 아내의 마음을 빼앗고 아내의 생명을 좀먹으며 성장하는 정체 모를괴물에 불과했으리라.
‘그녀’들에게 얼굴이 없는 것은 만년의 아버지가 결국 미와코의 얼굴을 잊어버렸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노쇠와 고독에 찌들어 아버지는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고 한다. 괴상한 모습으로 남은 이 인형들에게 그는 죽기 직전까지 무슨 이야기를 한 걸까.
원래부터 비뚤어진 인간으로 통하던 고요는 만년에 이르러 더더욱 사람을 꺼려해 이 집에 틀어박혀 지냈다고 한다. 새 작품도 더 이상 발표하지 않았다. 그사이 그는여기서 이 마네킹 제작에 몰두했다는 말인가? 이 인형들.
얼굴 없는 ‘그녀‘들에 둘러싸여 일부러 천천히 담배를 피웠다. 고인 공기 속에서 흔들리는 보랏빛 연기에 감싸여 있던 나는 겨우 한 가지 해답을 나 자신에게 제시할수 있었다. 그것은.
28년 전 가을에 요절한 어머니. 아버지는 어머니를 끔찍이 사랑했다. 끔찍이...... 그렇다,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아들인 나를 증오할 만큼 끔찍이. 아버지의 입으로 직접 들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차가운 불길 같던 그 눈......) 안다.
그것은 어머니다. 그의 아내, 내 친어머니, 히류 미와코에게 사로잡혔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그녀‘들을 처분할 수도 없었다. 현관과 복도에 있는 것을 포함해 이 집의 인형들은 전부 지금 있는 장소에 그대로 놓아두라는 아버지의 유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 없는 인형들도 익숙해지고 나면 별것 아니다. 거기에 담긴 아버지의 정념과 그가 내게 품었던 감정(증오가 분명한......) 역시 어차피 다 지나간 이야기다. 현재의나를 구속하는 힘은 없다.
부모는 울고불고 슬퍼하고 범인에게 분노하다가 이성을 잃었으리라. 시체를 발견한 학생은 얼마간 악몽에 시달릴 테고. 또래 아이를 둔 근처의 부모들은, 자기 아이는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여기는 한편 언제 자기들을 덮칠지 모를 재앙에 전전긍긍하고 있을 것이다.
15일 오후 9시 50분경, 교토 시 사쿄 구 기타시라카와 초町기타시라카와 수로에서 **초에 사는 회사원 우에데라 히토시 씨(35세)의 장남 미쓰시(5세)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먼저 온 손님이 그대로 두고 갔는지 탁자 맞은편 의자에 신문이 놓여 있었다. 새 담배에 불을 붙이려는데 신문에 인쇄된 검은 글자가 눈을 끌었다. 기타시라카와 강 수로에서 어린아이의 타살 시체 발견
"매일 밤 일을 하러 나가는 김에 해보는 거죠. 집을 나서서 처음 마주치는 사람에게 먼저 인사를 합니다. 상대가 아는 사람이라면 반응하는 목소리를 듣고 누군지 알아차릴 수 있겠죠?" "아아, 그렇군요.!" "그날의 운수를 시험해보는 거랍니다. 죽은 아내는 그렇게 짓궂은 짓을 하면 안 된다고 야단쳤지만요."
군! 어쩐지 온당하지 못한 것. 어쩐지 몸서리를 치게 만드는 것. ..마치 거대한 뱀의꺼림칙한 느낌이었다. 정체가 분명치 않은 만큼 그 꺼림칙한 느낌은 한층 증폭되어 내 신경을 벅벅 긁었다.
이 남자는 발소리와 체취만으로 내가 히류 소이치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여기로 이사 오고 나서 아직 한 번밖에 대화를 나눈 적이 없는데도.
"하하, 놀라셨군요." "몇십 년이나 눈이 보이지 않는 생활을 하다 보면 눈치가 빨라지는 법이죠. 사소한 냄새와 소리로 주변의 상태를 알아차릴 수 있답니다."
피해자는 이케다 마스미라는 여섯 살배기 여자아이로 근처에 사는 고등학교 교사 부부의 자녀다. 22일 저녁부터 모습이 보이지 않아 경찰에 신고가 접수된 상태라고한다. 살해 방법은 이번에도 역시 액살이었다.
심야. 변함없는 방, 변함없는 정적 속에 OO는 있었다. (......때가 왔다.)의식적으로 표정에 웃음을 덧붙였다. OO는 웃었다. 그 남자, 히류 소이치의 거처는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자신을 향한 이쪽의 의지를 모른다. 이제 와서 안달할 필요는 없다. 서둘러서는 안 된다. 맨 먼저 해야 할 일, 그것은.. OO는 웃었다. 목구멍 속 깊숙한 곳으로 희미하게.
가케바 히사시게와 재회한 지 나흘째인 9월 24일 조간에 또 교토 시내에서 어린아이 살해사건이 일어났다는 기사가 실렸다. 현장은 역시 사쿄 구로, 긴가쿠지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간 곳에 있는 호넨인法然院이라는 절의 경내다. 풀숲에 버려져 있던 시체를 23일 오후에 참배객이 우연히발견했다고 한다.
누가 들어올 수도 있으니 고치는 편이 낫지 않냐고 어머니에게 말했지만 어머니도 제법 느긋한 구석이 있어서 "조만간에"라고만 대답하고 그냥 내버려두었다.
방의 환경에 불평을 마구 늘어놓는 깐깐한 소설가. 지나쳐가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 그날의 운세를 점치는 맹인 마사지사. 심야에 쥐를 쫓아다니는 대학원생. 정말 묘한 사람들뿐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복도를 되짚어 돌아왔다.
문제의 문은 우리가 이 집에 이사 온 당시부터 자물쇠가 망가진 상태였다. 미즈지리 부인이 말하기로는 벌써 몇 년이나 망가진 채로 방치되었다고 한다. 굳이 수리할필요는 없으리라는 것이 아버지의 의향이었던 듯하다.
짤막한 복도 안쪽에 서 있는 인형의 희끄무레한 형체가 나를 맞이했다. 이제 그 괴이한 모습을 봐도 놀라지는 않지만, 집 여기저기서 마주치는 ‘그녀‘들에게 드는 위화감은 역시 완전히 씻어내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아버지의 책장에 있는 문헌을 읽고 알았는데, 마네킹은 보통 붙이거나 뗄 수 있는 다섯 부분으로 구성된다. 머리, 윗몸, 아랫몸, 오른팔, 왼팔, 이렇게 다섯 부분이다.
다만 허리 아래 다리 부분을 포함하는 아랫몸은 대개 한쪽 다리가 빠지게 되어 있다. 그렇지 않으면 바지를 입히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한쪽 다리‘ 까지 계산에 넣으면 보통 마네킹은 여섯 부분으로 이루어진 셈이다.
여기에 있던 인형들은 전부 문 오른쪽 구석에 모아 하얀 천을 씌워놓았다. 아무리 그래도 원래대로 방 여기저기에 방치해두려니 마음이 찜찜했기 때문이다.
OO는 웃었다. 목구멍 속 깊숙한 곳으로 희미하게. (두려워해라.)입술 끝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실컷 두려워해라.)서두르면 안 된다. 일단 공포를 안겨주며 서서히 몰아붙이다가, 그리고....... (그리고.......)
아버지는 어째서 그 인형들을 이렇게 불완전한 모습으로 만들어 일부러 저택 여기저기에 놓아두었을까. 또한 무슨 까닭으로 인형들을 그 자리에 그대로 놓아두라는유언을 남겼을까.
인형은 피투성이였다. 목에서 봉긋한 가슴까지...... 얼굴이 없는 ‘그녀‘의 상반신에는 피로 착각할 만큼 새빨간 그림물감이 흠뻑 묻어 있었다.
나는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신음소리를 꿀꺽 삼켰다. 있을 리 없는 것이 거기 있었다. 인형이었다. 방 한쪽 구석에 모아두었을 마네킹 중 하나가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째서 이런....... 의자 등받이 위로 드러난 어깨와 목, 뒤통수가 보였다. 그것은 분명 마네킹의 무기적인 하얀 피부였다.
어머니도 근심이 많았을 것이다. 아버지 고요가 남긴 재산 덕분에 당장의 생활을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교토에는 허물없이 대할 수 있는 친구가 하나도 없으니까.
화가라고는 하지만 나는 작품을 세상에 알리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병약하여 결혼할 뜻도 없으니 당연히 어머니에게 손자를 안겨줄 수도 없으리라. 그런 내가 어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쓸데없는 걱정을 끼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 정도다. 그러니 인형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어머니는 결코 강한 여자가 아니다. 오히려 마음이 몹시 여린, 극히 평범한 여자다. 죽은 친자식의 ‘환생‘이라 여기며 나를 한결같이 사랑하고 키워준 것은 어머니의 강인함을 나타내는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어머니는 나를 키움으로써 무너져 내릴 듯한 마음을 의지하며 자기 인생을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났을 때쯤 내 주변에서 다시, 이번에는 조금 다른 형태로 기묘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피안화가 피었다. ‘만주사화‘ ‘저승화‘라고도 불리는 그 꽃이 넓은 안뜰 한구석에 붉게 무리 지어 피었다. 7월에 이사 온 후로 뜰은 앞뜰 안뜰 할 것 없이 특별히 손질한 적이 없다. 이따금 어머니가 현관과 툇마루 부근을 청소하는 것이 전부다.
그 이름 그대로 꽃은 지난달 하순부터 피기 시작했다. * 10월 들어 이제 슬슬 한창때가 지나가려는 참일까.
*일본어의 피안(彼岸)에는 춘분, 추분을 중심으로 한 7일간이라는 뜻도 있다.
여전히 밤중에 자다가 깬다. 누군가, 뭔가가 같은 지붕 아래 있다는, 예의 ‘이물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양식 저택 어딘가에서 움직이고 있는 세입자의 기척이 전해지는 것이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쪽이 일일이 불평을 할 만한 사항은 아니다.
서늘한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붉은 꽃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그 움직임에 맞추어 호흡하는 것처럼 문득, .붉은 꽃. 내 마음 어딘가가 부르르 떨렸다. .두 줄기 검은 선의...... 당황해서 눈을 감았다. .마치.마치......거대한 뱀의... 붉은 잔상이 남은 눈꺼풀 안쪽에 한순간 어쩐지 머나먼 과거의 풍경이 비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을도 점점 깊어져 무성하던 잡초도 눈에 띄게 시들시들해졌다. 메밀잣밤나무와 호랑가시나무, 소나무 따위의 상록수가 담을 따라 어수선히 늘어선 한편으로, 뜰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벚나무가 홀로 서 있다(......봄에는 분명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 흐드러지게 핀 피안화는 아버지가 목을 맸다는 벚나무 맞은편에 보였다. 전체적으로 가라앉은 뜰 전체의 색조와는 대조적으로 자극적일 만큼 선명하게 눈으로 뛰어들어온다.
누가 그랬을까. 뭣 때문에 그랬을까. 그 문제는 당분간 미루어둔다 하더라도 아무튼 흙광 문에도 자물쇠를 다는 편이 좋으리라. 나는 바로 열쇠집에 가서 튼튼한 자물쇠를 하나 사왔다. 광문에 단 자물쇠를 보고 어머니는 약간 의아해했지만, 나는 그저 "조심하는 게 최고니까요"라고만 설명했다.
광에서 찜찜한 일이 일어난 뒤로 묘하게 예민해져서, 그전엔 낮에는 풀어두었던 현관문까지 꼼꼼하게 잠근다. 외출할 때는 물론 집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가운뎃손가락 끝이었다. 빨간 핏방울이 동그랗게 맺혔다. 나는 놀라서 우편함 속을 들여다보았다. ..유리? 그렇다. 유리였다. 길이 5센티미터쯤 되는 유리 조각이 우편함에 들어 있었다. 가늘고 긴 삼각형 모양으로 깨진 조각, 그 뾰족한 부분에 손끝을 베인 것이다.
"요즘 묘한 일이 자꾸 생기네." 식탁에서 어머니가 말을 꺼냈다. 우편함에 유리 조각이 들어 있던 날로부터 사흘이 지난 10월 12일 밤 이야기다. "분명 애들이 장난친 걸 거야."
어머니는 내 반응에는 개의치 않는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하지만 오늘 아침까지 합하면 벌써 세 번째인가." "어떤 장난인데요?" "현관에 돌을 놓아두더라고." "돌?" "응, 이 정도쯤 되려나." 어머니는 양손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을 붙여서 타원을 만들어 보였다. "꽤 큰 돌을 덩그러니 하나만 놓아두는 거야."
어머니는 이날 오후에 나갔다. 어머니는 월, 수, 금, 이렇게 한 주에 세 번 샤미센을 배우러 간다. 수업을 마친 후에도 그곳 동료들과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므로 대개 어두워져서야 돌아온다.
앞뜰의 수풀에 유리 조각을 내던지며 나는 무의식중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누군가 일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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