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 트라이앵글’ 중 국립 소피아 왕비 예술센터 미술관(Museo Nacional Centro de Arte Reina Sofia)이 남았다. 줄여서 ‘소피아’라고 하겠다. 소피아는 다음날 똘레도 소풍을 마치고 오후 늦게 돌아와 서둘러 관람했다. <게르니카>를 직접 볼 기회를 놓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소피아는 프라도보다 규모가 작다. 회화·판화·조각·사진·공예 등 여러 분야의 왕실 수집품과 정부 소유 예술품의 극히 일부인 300여 점만 전시한다. 피카소·달리·미로를 비롯한 현대 작가뿐만 아니라 조르주 브라크·르네 마그리트·로이 리히텐슈타인·프랜시스 베이컨 등 20세기 후반에 활동한 다른 나라 화가의 작품도 있다. 소피아는 프라도나 TB와 달리 사진 촬영을 허락하기에 <게르니카>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좀처럼 하지 않는 짓인데 거기서는 하고 싶었다.

게르니카는 바스끄 지역에 있는 작은 도시다. 1937년 4월 26일 독일 공군이 프랑코를 지원하려고 공화파 병력이 집결해 있던 그곳을 폭격했다. 정밀 타격 기술이 없던 때여서 폭탄은 도시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고 민간인을 수백 명 죽였다. 파리 세계박람회 스페인관의 벽화 제작 의뢰를 받았던 피카소는 그 사건 직후 가로 776.6 센티미터 세로 349.3 센티미터 대작을 그렸다.

<게르니카>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반전(反戰) 회화 작품이다. 독일 공군이 프랑코 군대와 함께 그보다 더한 만행을 숱하게 저질렀지만, 이 그림 때문에 게르니카 폭격이 스페인 내전의 가장 참혹한 사건인 것처럼 알려졌다. <게르니카> 앞에서 고야를 생각했다. 고야처럼 피카소도 단지 프랑코와 히틀러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전쟁 그 자체의 비인간성을 고발했다. 1951년 작품 <한국의 학살>도 같은 맥락이었다.

믿음으로 충만한 인생을 살았다. 두 살 때 콜레라에 부모를 잃고 이모 부부의 보살핌을 받았던 그는 열일곱 살에 만난 여인과 혼인해 자녀 셋을 낳았다. 화가로 성공해 세계를 여행하면서도 꾸준히 자신의 가족을 그렸다. 주로 풍경화와 정물화를 그렸지만 당대의 사회 현실을 드러내는 작품도 남긴 그에게는 아내와 아이들이 영감과 열정을 주는 ‘뮤즈’였다.

소로야가 밝고 따뜻한 그림만 그렸던 건 아니다. 젊은 시절에는 잔혹했던 ‘정글 자본주의’ 시대의 사회 현실과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두었던 ‘사회적 사실주의’를 추구했다. 그런 작품 하나가 0층의 잘 보이는 공간에 걸려 있었다.

열차 3등 객실 같은 좁은 공간, 긴 나무의자, 쓰러져 잠든 젊은 여인들, 검은 망토를 두르고 앉아 내려다보는 늙은 여자, 낡은 가방, 물건을 싼 보자기, 슬픔과 절망감을 느끼게 하는 그림이었다. 제목은 <인신매매(Trata de blancas)>, 흑인 노예가 아니라 백인 여자들이라 ‘흰(blanca)’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을 것이다. 소로야는 왜 젊은 시절 그렸던 그 작품을 끝까지 보관했을까? 사려는 이가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런 작품을 거실에 걸고 남한테 자랑할 부자가 있었겠는가

소로야는 대중이 이해하고 좋아할 수 있는 그림을 그렸다. 스스로 행복했고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했다. 집도 그랬다. 적절히 놓아둔 탁자와 소파, 광택이 없는 나무 장식장, 저마다의 사연이 있을 법한 조각품, 벽장식, 집안의 나무 계단, 모든 것이 품격 있고 안온한 예술가의 일상을 보여주었다.

나는 행복한 남자와 사랑 넘치는 가족을 보았다. 덧없는 우리의 삶에서 그보다 더 귀한 것이 있겠는가. ‘골든 트라이앵글’에서 기력을 탕진한 여행자에게 소로야 미술관을 권한다. ‘잠시 쉬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정갈하게 가꾼 정원 벤치에 앉아 자신의 삶에서 소중한 게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드리드는 권력의 힘으로 외부 자원을 끌어다 쓴다. 이베리아반도는 바다 가까운 곳일수록 기후가 순하고 식생이 다양하며 토질도 양호해서 인구밀도가 높다. 마드리드는 내륙 한가운데여서 산업이 발전하기 어려웠다.

로마 군대의 요새, 서고트 왕국의 수도, 이슬람 왕국의 군사기지, 레콩키스타 시대 까스띠야 왕국의 행정수도였던 똘레도에는 마드리드에 없는 모든 것이 있었다.

고대부터 철강업이 발달해 최고 품질의 칼과 갑옷을 생산했고, 기독교·이슬람·유대교 등 다양한 종교가 공존했다. 오래된 성벽과 유대 예배당과 대성당이 있는 똘레도는 스페인 내전 시기 공화파의 거점이었던 탓에 집중 폭격을 당했고, 프랑코 정권이 날림 복구공사를 한 탓에 오래된 건축물들은 문화적 가치를 잃었다.

무엇보다 좌측 예배실 벽의 나무 장식이 대단했다. 그런데 예수 탄생 장면에 말이 아닌 소가 있었다. 나중에 보니 가우디가 만든 바르셀로나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탄생의 문 파사드 역시 그랬다. 화가들의 ‘예수탄생’ 그림에도 말과 소가 함께 나왔다. 중세 유럽에서는 말과 소를 한 우리에서 키웠던 게 아닌가 싶다.

무엇보다 좌측 예배실 벽의 나무 장식이 대단했다. 그런데 예수 탄생 장면에 말이 아닌 소가 있었다. 나중에 보니 가우디가 만든 바르셀로나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탄생의 문 파사드 역시 그랬다. 화가들의 ‘예수탄생’ 그림에도 말과 소가 함께 나왔다. 중세 유럽에서는 말과 소를 한 우리에서 키웠던 게 아닌가 싶다.

엘 그레꼬는 ‘그리스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기나긴 본명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그는 크레타섬에서 태어나 베네치아에서 티치아노한테 그림을 배웠고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받았다. 펠리페 2세의 궁중 화가가 되어 주로 종교화와 초상화를 그렸고 유럽 미술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엘 그레꼬는 말 그대로 ‘똘레도의 화가’였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에 버금간다고 하는 그 벽화를 보려고 가톨릭 순례자들은 긴 줄을 선다. 하지만 무신론자가 보기에는 크기만 할 뿐 특별할 건 없었다. 엘 그레꼬가 살았던 집 근처의 저택을 개조해 만든 박물관이 있었지만, 작품은 없다고 해서 들어가지 않았다.

공예품을 만드는 공방과 매장이 불을 밝히고 있어서 유대인지구라기보다는 무슬림 골목이라 하는 게 맞을 듯했다. 은실로 감싼 장식용 칼과 금속 세공품은 중동의 아부다비나 두바이 기념품 상점에서 본 것과 같았다.

왜 70킬로미터 떨어진 마드리드로 천도했는지 이해했다. 똘레도는 세 방향에 타호강의 급류가 흐르고 북쪽은 가파른 비탈이다. 외부의 공격을 막기에는 유리했지만, 당시 기술로는 강을 건너 도시를 확장할 수 없었다. I가 남서쪽의 제일 오래된 다리를 건너 맞은편 비탈의 호텔 레스토랑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똘레도 시가지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왕의 심정은 이랬을 것이다. ‘무슬림 세력을 완전 제압했고 왕권을 확고히 세웠으니 외부 침략은 걱정할 필요가 없어. 급류와 비탈에 둘러싸인 똘레도는 너무 답답해. 강이 흐르고 농사가 잘되고 넓은 평지가 있는 마드리드로 가자.’

경복궁·창덕궁·종묘가 없고 서촌·북촌·한양도성이 없는 서울을 상상해 보라. 마드리드는 그런 곳이다.

가끔 가는 우리 동네 스페인 식당의 음식값과 비교해 보니 확신이 들었다. ‘유럽 여행을 할 때는 역시 현지 음식이 답이군!’

아직 시차 적응이 되지 않아 마드리드의 ‘밤 생활’을 마음껏 즐기지는 못했지만, 플라멩코(flamenco) 공연과 재즈 카페는 예약을 해둔 터라 포기하지 않았다. 마드리드에는 플라멩코 공연을 하는 극장과 공연장이 여럿 있었다. 낮에는 미술관에 가야 해서 밤에 그랑비아 거리 뒤편 주택가의 상설 공연장에서 하는 정통 플라멩코 공연을 보았다. 마드리드 치안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이 있지만 시내 주택가의 밤거리는 조용했고 골목 식당들은 젊은이로 붐볐다.

공연 막바지에 흥에 취한 손님들이 춤을 추었다. 밴드 멤버들이 화답하면서 재즈 바는 놀이터가 되었다. 공연이 끝난 뒤 밴드 멤버들은 손님들과 와인 잔을 부딪치면서 사진 촬영에 응해 주었다. 런던에서도 뉴욕에서도 서울에서도 그런 재즈클럽은 본 적이 없다. ‘스페인 사람들이 한국 사람보다 더 잘 노나?’ 한 군데만 보고서 어찌 판단할 수 있겠는가. 혹시 마드리드에 다시 간다면 다른 재즈 바에 가서 확인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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