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이삼촌 ㅣ 현기영 중단편전집 1
현기영 지음 / 창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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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밤하늘은 거의 보름 동안이나 토벌군의 소까이로 중산간 부락들이 타는 불빛으로 노상붉게 물들여져 있었다. - P132

폭도 가족이라는 누명이 벗겨졌다. 서호로 소까이 내려와서 병정들이 폭도 가족을 가릴 때 귀리집은 무사했다. 사람마다 살려달라고 도수장 소 울듯 울부짖고 심지어는 행여 아기 핑계로 동정을 얻을 수있을까 하고 팔을 꼬집어 젖먹이 아기까지 울려놓은 그 생지옥에서 살아나올 수 있었던 건 오직 죽은 시어머니 덕분이었다. - P133

그러나 이 짐승들은 제 주인인 중산간부락민들이 소까이하여 내려간 해변까지는 결코 내려오지 않는다. 사람이 두려워져서 먼빛으로라도 사람만 보이면 혼쭐나게 도망치는 이것들은 산에 오르지도 해변에 내리지도 못한 채 어중간한 곳에서 야산을 헤매다닌다. 순원이 아방이 살아 있다면 바로 그런 신세이리라. 이 짐승들이 산폭도의 전화줄 올가미가 무서운 목장에서 내려오면 이번엔 또 군경의 사격 표적이 되어야 한다. 그대로 놔두면 산폭도들의 겨울 양식이 된다고 하나하나 쏘아 죽였다. - P134

그런데 이 한길이 도령마루에서 차단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냐? 이년 전 해방 이듬해 호열자가 창궐했을 때부터다. 노형에 생긴 호열자가 다른 지방으로 전염될까봐 이 고개에다 돌을 쌓고 가시나무를 베어다 길을 차단하고 사람 왕래를 막았다. 호열자는 순구 또래의 어린것들을 무더기로 죽이고 물러갔다. 좌익사상인가뭔가 하는 것도 딱 호열자병을 닮았다. 그건 호열자처럼 무섭게 번지고 일단 거기에 걸리면 꼭 죽게 마련인 무서운 전염병이다. - P135

귀리집이 영순이 어멍과 함께 담가로 두번째 돌을 날라다 붓고막 돌아서려는데 뒷전에서 "당가 개진 사람들 이켠으루 다 모이시오" 하는 소리가 들린다. 돌아다보니까 가랑이를 쩍 벌리고 화톳불을 찍고 있던 서호지서 까마귀 오가 앞으로 뒤뚝뚝 걸어나오면서 또 한번 소리친다.
"아이들은 안되고 어른 당가만 오라우요. 다른 일을 시킬 거이니끼니."
까마귀 오는 귀리집네까지 담가 여섯을 고르더니 자기를 따라오라고 손짓한다. 무슨 일 시키려고 어딜 데려가나? - P137

까마귀 오가 십분 내에 마치라고도 했지만 어서 이 지긋지긋한 곳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에 여편네들은 분주히 움직인다. 그들은 맨손으로 송장을 잡아끌어 담가에 얹고 종종걸음 치면서 들고가밭 가운데 구덩이에 처넣는다. 귀리집은 까마귀 부리에 쪼인 시체 얼굴들이 차마 끔찍하여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싶은데, 웬일인지 자꾸 눈길이 눈망울 파먹힌 그 흉측한 얼굴들에게 간다. 이런, 내가 몹쓸 년이다. 빌어먹을 년이다. 여기서 순원이 아방을 찾다니. 그이가 이렇게 쉽사리 죽었을 리가 없지. 그러나 그게 아니다. 포개진 시체를 끌어내다가 "저걸 보게 하고 영순이 어멍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다행히 다른 시체 밑에 들어가 있어서 까마귀부리에 쪼이지 않은 채 온전한 얼굴, 구레나룻이 사뭇 자라 얼굴을반쯤 덮고 있지만, 그건 깔축없이 순원이 아방이다. 가슴이 터질 듯뛴다. 어찌할까? 어찌할까?
"저 구뎅이에 들어가면 후제 시 영영 못 찾앙(찾고) 말아………………영순이 어멍도 초조한 목소리로 걱정한다.
"저 밭담 뒤에 숨겨야 하키여."
귀리집은 얼른 머릿수건을 풀어 시체의 얼굴을 싼다. 영순이 어멍도 자기 머릿수건을 풀어서 내준다.
"까마귀가 얼굴 못 해치게 하젠 허민 더 많이 싸야 헐 거여." - P139

까마귀 오는 여전히 등을돌리고 앉은 채 이번엔 모자를 벗고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모양이다. 귀리집이 눈짓한다. 둘은 힘껏 담가를 쳐올려 시체를 담 밖으로내던진다. - P140

문중호는 출근하자마자 어머니 일로 마음이 뒤숭숭했다. 자꾸만전화기 쪽으로 신경이 가고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그는 흠칫흠칫 놀라며 조바심을 태우는 것이었다. 혹시 어머니가 아닐까? 지금 내게 전화가 걸려온다면 그건 분명 파출소 순경이 대신 걸어주는 전화이리라. 어머니가 짤막한 편지는 쓸 정도로 글자를 깨치고 있기는 하지만, 전화라곤 난생 한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분이다. 게다가 전에 알려드린 집 전화번호는이사 관계로 보름 전에 반납해놓은 처지이니, 당신이 역전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번호책을 끌어내가지고 기억이 어렴풋한 아들 직장 이름을 떠올리고 번호를 찾아낸다는 것은 전혀 무망한 노릇이었다. 그러니 전화가 걸려온다면, 역전 파출소에서 걸려올 공산이 큰 것이다. - P142

열한시가 되도록 어머니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 다만 이사실에서 한시간 내에 데이터 보고를 마감해달라는 전화가 한번 왔을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일은 손에잡히지 않고 자꾸만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설마 무슨 사고가 생긴건 아니겠지.... - P143

어머니가 타고 온다는 아침 열차는 이미 둘 다 도착한 셈이고 다음 열차는 저녁에나 있었다.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곡절일까? 혹시 워낙 키가 작은 분이라 사람들 틈에 묻혀지나가버린 게 아닐까? 그래서 한참 대합실과 역 광장 여기저기를뛰어다니며 둘러봤으나 역시 허탕이었다. 역 광장 구석과 대합실벤치에는 뒷모습이 어머니 비슷하게 초라해 보이는 노인들이 더러있긴 했지만 어머니는 아니었다. - P143

전보 문안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중호는 그때 갑자기 화들짝 놀란다. 이게 뭐야? 아니나 다르랴, 이 전보는 두가지 해독이 가능하지 않은가. 아이고, 살았구나! ‘3일 아침 도착하는 목포발 열차‘와
‘3일 아침 출발하는 목포발 열차‘ 그렇지. 아침에 목포를 출발하면오늘 저녁 아홉시쯤에 서울역에 도착한다. 아침에 도착하는 게 아니라 저녁에 도착하는 것이 분명하다. - P144

"야, 야, 나여, 나, 춘호, 놀래기는, 쪄석허군."
중호는 울컥 화가 치민다. 재수없는 녀석. 장난쳐도 분수가 있지.
이런 무지막지한 놈이 있나. 은행 대리로 있는 제나 내나 하루 종일 전화 앞에 호출되어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쩔쩔매기는 마찬가지일 텐데, 그걸 악용해서 이따위로 사람 기죽이다니.
그러나 중호는 입술을 한번 잴근 씹고 화를 참아버린다. 무슨 일에나 참아 버릇해온 그로서는 도대체 노골적으로 화낸다는 것 자체가 낯선 감정이었다.
"야, 중호, 오늘이 무사(왜) 마지막 금요일 아니가? 우리 고향촌놈들 만나는 날 말이여. 혹시 잊어부러시카 하고 전화하는 거쥬." - P145

하기야 마침 막 부장으로 승급된 흥분이 채 가라앉기도 전이라 동창들 앞에서 새로 박은 명함을 돌리면서 은근히 빼기고 싶은 생각도 실은 없지 않았다. 세상이 다 알아주는 대종합상사의 판매부장이라면 누가 봐도 부러워할 출세가 아닌가. 거기에 따른 월봉 오십만원에 보너스 팔백 퍼센트. - P146

그날 중호는 이렇게 좀 당해가지고 돌아온 편이었지만 불쾌한기분은 전혀 없고 자꾸만 혼자 웃음이 쿡쿡 새나는 것이었다. "어디 살암니?" "어디 살암니?" 역시 촌놈들이 좋긴 좋구나. 정말 신나는 놈들이야. 하여간 다음 달에 나가서 이번 낭패를 만회해야지.
그래서 지난달 모임엔 일부러 술을 주는 대로 다 받아먹어 혀를꼬부라뜨린 다음에 사투리를 씨부리니 그렇게 술술 잘 나올 수가없었다. 하도 재미 좋아서 눈물이 글썽거릴 지경이었다. - P147

그날 중호가 정작 충격을 받은 것은 헤어질 무렵에 부른 명국의 노래였다. 그 노래는 느닷없이 중호에게 삼십년 전의 아픈 기억을 확되돌려주었던 것이다.

바닷물이 철썩철썩 타고 남은 제주도
불사르던 폭도들은 어디로 갔나
국방군도 그리워라 경찰관도 그리워
제주도 사백리에 양민이 운다 - P148

여전히 군 소개작전에따라 소각되었던 폐허 그대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꺼먼 먹칠로 지워진, 지금도 여전히 사람이 살지 않는 폐촌, 총소리와 불에 미쳐버린 동네 개들만이 아직도 주인 떠난 집터에 남아 소막이나 말막에고베 매인 채 타 죽은 가축들 사체나 소개 내리지 않고 몰래 남아있다가 총 맞아 죽은 사람 송장들을 뜯어 먹으며 살고 있는 것처럼느껴지곤 했다.
Halal - P148

그 무섭던 소까이(疏開). 온 섬을 뺑 돌아가며 중산간 부락이란부락은 죄다 불태워 열흘이 넘도록 섬의 밤하늘을 훤히 밝혀놓던소까이 통틀어 이백도 안되는 무장폭도를 진압한다고 온 섬을 불지르다니. 그야말로 모기를 향해 칼을 빼어든 격이었다. 그래서 이백을 훨씬 넘어 삼만이 죽었다. 대부분 육지서 들어온 토벌군들의혈기는 그렇게 철철 넘쳐흘렀다. 특히 서북군은 섬을 바닷속으로가라앉힐 만큼 혈기방장하였고 군화 뒤축으로 짓뭉개어 이 섬을지도상에서 아주 없애버릴 만큼 냉혹했다. - P149

게릴라란 물고기와 같아서 인민이라는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존재라고 월남에서 배웠지만, 교본대로라면, 인민이란 물을 퍼내서게릴라가 서식처를 잃고 자멸하도록 해야 옳지 않았던가. - P149

중호 아버지도 소까이 보름 전 어느날 마루에서 아침밥 먹다가 문득 마당가의 수리대숲이 바람에 한쪽으로 쏠리면서 저편 고샅길로 올라오는 토벌군들 한떼가 보이자 기겁해 일어나 뒷담 넘어 도망쳤던 거였다. - P150

구롬보라면 중호 또래 어린아이들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원수 인간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그게 바로 그런 막다른 궁지였다. 그 작자는 일정 말기 한창 공출이 심할 때, 이 집은 양식을텃밭의 작박(돌무더기) 속에 묻어놓고, 저 집은 보릿짚가리 속에 숨겨놓았다고 고자질하고 다니던 일본놈 끄나풀이었다. - P151

해방이 되어 세상이 뒤바뀌자 동네 젊은 축들이 구롬보 집에몰려들어 개 패듯 패고 질퍽한 두엄에다 거꾸로 메다꽂아 앙갚음했다. 아버지도 그 축에 끼여 있었다. 그후 이년 동안 종적을 감추었던 구롬보가 이제 토벌군의 정보원이 되어 세거리 길로 나타날줄이야. - P152

폭도 가족이랍시고 어른 다섯에 한명꼴로 골라내어도, 수가 적다고 옆에서 멜띠 두른 당직사관이 윽박지르는 판국에 구롬보가자기를 몰매 때렸던 자의 가족을 몰라볼 리가 없었다. - P153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중호는 갑자기 가슴이 오그라들었다. 얼른 책상 위의 담배를 피워물고 뛰는 가슴을 진정시킨다. 방심할 때면 문득문득 떠오르는 저 피 젖은 흰 저고리, 그때마다 숨가빠 헐떡거리는 이 감정은 도대체 뭐냐? 겁이냐, 분노냐? 아니, 내가 언제한번이라도 분노를 느껴봤더냐? 이건 두말할 것 없이 겁이다. 백주에 가위눌림이다. 더위 먹은 소달 보고 헐떡거림이다. - P154

고향마을 한길가 옴팡밭에서 떼송장을 본 적이 있는 그들이라얼마나 혼겁했던가. 그러나 실은 최종적인 소개민 성분조사를 위해서 그렇게 집단수용했던 모양이다. 다른 해변으로 내린 사람들을 제외하고도 사오백이나 되는 소개민들이었으니, 그 수를 수용할 만한 시설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래서 돌담으로 에워진 밭 세개를 노천수용소로 사용한 것이었다. 밭 하나에 병정 두사람씩 감시했다. - P155

그래도 지서 순경 중에 육촌 형이 아는 사람이 있어서, 당숙네와 중호는 그날 당장 지서 숙직실로 잠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그런데 형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아보기나 한다면서 토벌군이 주둔한 분교로 떠난 지 한식경도 못되어서 뜻밖에 어머니가 살아 돌아올 줄이야. 잡히면 보통 길어야 이틀밖에 못 사는데 이레 동안살아 있다 풀려나온 것은 정말 기적이라고 모두 놀라워했다. - P157

그러고서 이틀 후 그 지서 숙직실로 서북 사투리가 억센토벌군 하나가 무장한 채 찾아왔는데 어머니는 곧 아기를 들쳐업고 종종걸음 치며 그를 따라나섰다. 어머니를 살려준 그 병정이었다. 계급은 갈매기 세개에 작대기 두개 이등상사였다. 당숙어른은도무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짓고 혀를 끌끌 찼다.
둘은 그날 즉시로 중대장 지프차인지 무슨 차인지를 빌려 타고화북에 있는 친정을 찾아가 아기를 맡기고 나와 살림에 들어갔던모양이다. 그들은 나오다가 지서에 들러 말을 해놓고 갔던지 그후부터는 일절 순경이 와서 도피 중인 외삼촌 행방을 추궁한다고 외갓집을 못살게 굴지 않더란다. 그러나 그 대신 세살짜리 외손주를키워야 하는 치욕은 어떻게 견뎌냈을까? 하여간 이렇게 어머니가죽지 않고 살아난 것은 당신의 반반한 용모 때문이라고들 말했다. - P157

어머니의 그 뜨내기살림은 예상했던 대로 상대가 부대 따라 육지로 떠나버림으로써 일년 몇달 만에 파탄나고 말았다. 그동안 씨다른 동생 하나 생기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할까? 어머니는 친정으로 돌아갔다. 그때는 이미 불탄 고향마을이 재건된 때였지만당신은 거기로 돌아갈 낯이 없었다. 섬이 평정되어도 아버지는, 다른 남정들이 그랬듯이, 종내 돌아오지 않았다. - P158

중호가 지금도 아버지에 대해서는 그저 무덤덤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그 죽음이 아버지에게만닥친 특별난 것이 아니라, 이렇게 흔하디흔한 젊은 죽음들 중 하나라는 생각 때문이리라. - P158

그 악몽의 현장, 그 가위눌림의 세월, 그게 그의 고향이었다. 그러니 고향은 한마디로 잊고 싶고 버리고 싶은 것의 전부였고, 행복이나 출세와는 정반대의 개념으로 이해되었다. 중호는 고향의 모든 것을 미워했다. 측간에서 똥 먹고 사는 도새기 (돼지)가 싫고, 한겨울에도 반나체로 잠수질해야 하는 여편네들이 싫고,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 하는 속담이 싫고, 육지 사람이 통 알아들을 수 없는 고향 사투리가 싫고, 석다(石多)도 풍다(風多)도 싫고, 삼십년 전 그 난리로 홀어멍이 많은 여다(多)도 싫고, 숱한 부락들이 불타 잿더미가 되고 곳곳에 까마귀파먹은 떼송장이 늘비하게 널려 있던 고향 특유의 난리가 싫고, 그불행이 그의 가슴속에 못 파놓은 깊은 우울증이 싫었다. 걸핏하면버릇처럼 꺼질 듯한 숨을 내쉬는 어머니도 싫었다. - P159

지체 없이 말을 보리밭으로 몰아 백성의 일년 양식을 먹어치우게 하던 마정(馬). 백성을 위한 행정은 없고 말을 위한 행정만이 있던천더기의 땅. 저주받은 땅, 천형의 땅을 버리고 싶었다. 찌든 가난과 심한 우울증밖에는 가르쳐준 것이 없는 고향, 그것은 비상하려는 그의 두 발을 잡아끌어당기는 깊은 함정이었다. - P159

그는 촌스러운 고향 사투리를 훌훌 떨쳐버리고 남다른 정열로열심히 서울말을 익혔다. 수년 동안 가정교사라는 남의 집 고용살이를 하면서 서울말만 배운 게 아니라 눈칫밥 먹으며 서울말로 비굴하게 아첨하는 법까지 터득했다. 대학 졸업 후 직장을 가진 다음에도 얼마간 그 집에 눌러 있었는데, 그것은 소원대로 그 집 맏딸과 결혼했기 때문이었다. 남편의 본적을 따르기를 싫어하는 아내의 비위를 맞추려고 선선히 본적까지 옮기고 나니 그는 깔축없는서울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메뚜기가 제아무리 뛰어봐야 고작 풀밭이라던가. - P16

중호는 어머니의 그 해묵은 자격지심을 익히 알고 있었다. 당신의 말은 도움을 적게 주었으니 도움을 받는 것도 적게 받겠다.라는그런 뜻이 아니었다. 다만 막무가내로 아들이 어렵고, 육지 며느리에게 미안한 것이다. 당신은 아직도 삼십년 전 그 일을 가슴 갈피에다 꼬불치고 있는 것이다. 일년 몇달 동안 딴살림 차렸던 그 일말이다. 그 일로 여태 나를 어려워하는 거다! 어머니가 그 해묵은자격지심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상대적으로 중호 편에서도 그것은 도무지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못박혀버렸다. 잠재의식 속에 복병처럼 숨어 있는 아픈 기억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심상히 여기고유야무야 없었던 것처럼 낙천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도무지 그렇게 안된다. 그런 자격지심에 시달리는 어머니가 살아 계신 한. - P161

비록 살림 차린 상대가원수 같은 서북군이지만, 그것이 그후 서른해 동안의 홀어멍 생활로도 지울 수 없는 그리 더러운 얼룩이란 말인가? 밭일만 하는 중산간 부락으로 시집올 때 그만두었던 잠녀 물질을 다시 시작하여,청춘과수의 더운 몸을 바다 물결에 식히고, 간장 썩는 한숨을 호이호이 숨비질 소리에 날려보내며, 죽을 목숨을 삼십년 더 버텨온 당신을 누구라 더럽다 할 것이냐! 남의 얘기 하기 좋다고 입방아 찧는 당숙네라면 몰라도 자식새끼라고 하는 나까지 그런 생각을 품어서야 될 말인가. 내가 불효막심한 자식이다! 중호는 사무치는 자괴감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 P162

이념 때문에 폭동을 일으켜 살인, 방화를 일삼던 장본인들의 죽음이야 자업자득이라 하겠지만, 어째서 양민의 숱한 죽음들마저 자업자득이란 말인가. 그것을 자기 박복한 탓으로, 전생에 무슨 죄가있는 탓으로 돌리다니. 어머니의 자격지심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 P163

고향 섬 해변을 수시로 침범하여 섬여자를 약탈, 겁간, 살인을 자행하던 왜구들이 전설 속에서는 해룡)으로 묘사된 것도 바로 이러한 연유가 아니었을까?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인 해룡. 해룡에게 먹히는 사람들은 다 팔자소관일 뿐, 해룡에 대한 적개심은 털끝만큼도 없다. 오직덜덜 떨리게 두려울 따름이다. 피 묻은 흰 저고리와 시푸른 군복이문득 머리에 떠오를 때마다 숨이 가빠지는 것은, 그러니까 분노도증오도 아닌 바로 겁이었다. - P163

아내에겐 시집이 없다. 시집온 여자가 시집이 없다니! 어쩌다 일이이 지경이 되고 말았나? 모든 게 고향을 외면한 나 자신의 허물이구나! 아무래도 본적을 물러야 할까보다. 그래, 당돌하지만 본적을다시 고향으로 옮기자! 먼저 그렇게 해놓으면 모든 게 기정사실이되어 척척 따라올 게다. 내가 서울 사람이 되고 싶어 본적을 옮길적엔 나 자신에 대해서 호적이나 병적 관계 서류 떼기가 불편하다는 옹색한 변명을 달았었지만, 이젠 주민등록제가 생겨서 아내가그런 핑계를 들고나올 수 없게 되었다. - P165

어머니 외에는 십년이 넘도록 고향 사람이 드나들어본 적이 없는 성역-기름보일러 난방의 이층집에다 홈드레스가철철이 세벌 있는 아내, 토끼 같은 아들이 둘, 부장 전용차, 일요 테니스가 포함되어 있는 중류생활을, 고향 촌놈들을 떼거지로 끌고들어와 여지없이 유린하고 말리라. 춘호야, 연락연락해서 무지막지한 놈들 한 서른명만 데리고 오너라. 대낮부터 끌어들여 밤늦게까지 고향 사투리로 시끌덤벙 북새통을 벌여놔야지. 망할 놈의 집구석, 마구 소리지르며 푸닥거리를 해대는 거야. 나도 억병으로 취해가지고 겔겔거리다가 마누라 대신 밤늦어 집에 못 간 동창 녀석한놈 껴안고 곯아떨어져버려야지.
그때 전화벨 소리가 또 울렸다. 중호는 또 반사적으로 흠칫 놀랐다. 혹시 어머니가 아닐까? 아니지, 어머니는 저녁차로 오시는데,
과연 그것은 역전 파출소에서 걸려온 것이 아니라, 이사실에서 데이터 보고가 더디다는 득달같은 독촉 전화였다.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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