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형무소 개소(開所) 백주년 기념 개정증보판에 부쳐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 등 우리 근현대사의 아픈 기억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는 서대문형무소는, 근대적 시설을 갖춘 한국 최초의 감옥으로 1908년에 문을 열어 올해로 개소백주년을 맞았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이 책을 다시 발간하여, 우리 근현대사의 그늘이 짙게 드리웠던 이 모순과 역설의 장소를 기억하고자 한다.
이 책은 1988년 ‘열화당 사진문고 23‘ 으로 발행했던 ‘서대문형무소」의 개정증보판으로, 판형을 확대하고 기록적 가치가 뛰어난 사진과 도면 자료 등을 추가했으며, 독립지사 세 분의 글을 덧붙여 서대문형무소에 관해 다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자료 사용에 협조해 주신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국립중앙도서관에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2008년 1월편집자 - P5

초판 서문
죄짓지 않고는 들어가 볼 수 없었던 서대문형무소, 우리는 1988년 1월 8일 특별한 기회로 그 고통의 세월에 찌든 모습을 대할 수 있었다. 빈 감방과 사형장에 남아 있던 수감자들의 한(恨)과 흔적은 1월의 맹추위보다 더 우리의 마음을 얼어붙게 했다. 한정된시간 내에서 굴절 많은 우리 역사의 현장을 제대로 기록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라도 전할 수 있게 된 것을 우리의 행운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1988년 8월
김동현(金東鉉) 민경원(閔庚遠) - P5

서대문형무소의 기억
리영희(李禧) 한양대학교 명예교수

나와 서대문형무소(구치소)와의 만남은 무슨 잘못된 인연인지 언제나영하 십도 이하의 혹한에서였다. 그런 탓인지 무악재 고갯마루에 빗겨서 있는 우중충하고 음산한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를 회상하면 먼저초대면의 그 추위부터 생각난다. 하필이면 내가 갈 때마다 그렇게 추웠는지.. 세 번 모두 다 그랬다. - P9

박정희 시대에 두 번, 전두환 시대에 한 번. 박정희 시대인 1964년과1977년, 전두환 정권 때인 1982년. 해방 후 현대사에서 아마도 극악의시대로 역사에 기록될 그 이십 년 사이에 세 번이나 그들에 의해서 묶여들어갔으니, 적은 횟수가 아니다. 생각만 조금 고쳐 먹으면 태평성세를구가하면서 영화와 입신도 웬만큼 누릴 수 있었을 터인데, 생각하면 나도 꽤나 우직한 삶을 살아온 셈이다. - P9

1964년 11월의 첫 대면은 조선일보 정치부 외교담당 기자로서였다. - P9

한참 깊은 잠에 취해 있던 새벽에, 대문이 부서지라고 두들기는 소리에 놀라 잠을 깼다. 그러고는 영문도 모르는 채 중앙정보부로 끌려갔고,
검찰에 넘어간 며칠 후에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졌다. 북한이 대한민국과 동격으로 유엔에 초대되거나 동시가입이 제안되는 따위의 이야기는, 비록 그것이 국제회의에서의 이야기일지라도 국내법으로 ‘적성국가·단체 고무찬양‘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 악명 높은 ‘반공법 제4조 2항‘이다. - P10

대나무를 아무렇게나 쪼개서 만든 젓가락은 굵기와 길이가 천차만별이었다. 얼마나 많은 손때가 묻었는지, 또 얼마나 많은 입이 빨고 지나갔는지, 끝에서 끝까지가 숯덩이 같았다. 아무렇게나 마구 생긴 시커먼젓가락은 병균 덩어리 같았다. 순간 소름이 끼쳤다. ‘이것을 빨아먹으라니! 이제 이 순간부터 인간이라는 존재는 말살되고 동물 취급을 받게 되는가 보구!‘ 라는 생각이 들었다. - P10

젓가락질 몇 번으로 자기 몫의 콩밥 한 덩어리를 삼켜 버리고 나를 지켜보고 있던 옆의 젊은이가 다급히 말을 건넨다. "안 먹겠어요? 안 먹겠으면 나 주세요." 죄수복을 입는 그 순간부터 연령의 차이도 밖에서 무엇을 했는가의 구별도 없다. 배를 채우는 동물적 본능만이 행위의 규범이 된다. 나는 말없이 ‘가다밥‘과 젓가락을 옆으로 밀어 버리고 눈을 감았다. 영하 십사 도의 추위 속에서 온몸이 계속 떨렸다. 이제부터 저런젓가락을 빨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비로소 내 몸이 교도소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 실감났다. - P11

두번째의 대면은 1977년 겨울. 날씨도 첫번째와 마찬가지로 영하 십도이하인 11월 23일 아침. 사실 나는 첫번째의 서대문형무소와의 대면이 11월 23일 밤중이었다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려서 해마다 그날이 다가오면 공연히 긴장하고 안절부절못하는 습관이 생겼었다. - P11

며칠 몇 밤을 지새우면서 추궁하는 심문은 나의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 『우상과 이성』의 내용에 관해서였다. 황당무계하고 한심스러운 심문과 대화가 끝나자 그들은 나를 검은 지프에 태우고무악재로 향했다. 뒷자리에 수갑을 차고 앉아 있는 나의 뇌리에 서대문형무소와의 첫 대면의 밤에 보았던 그 젓가락의 소름끼치는 모양이 떠올랐다. 그리고 혼자 중얼거렸다. "아! 또 동물이 되는구나!‘ - P12

그 뒤에 그 검사실에서 벌어진 일과, 나에게 일어난 내면적 경험은 십일 년의 세월이 흘러간 지금도 회상하고 싶지가 않을 정도로 가슴 아픈일이었다. 병석에 누워 계시던 어머니는 "아들이 어디로 갔느냐?" "왜돌아오지 않느냐?"는 말만을 되뇌시다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어머니연세 여든여섯이었다. - P13

전날 저녁, 나의 비보를 면회시간에 전해  들은 시인 김지하(金河)가몰래 소제 (교도소 안에서 잡일을 맡아 하는 기결수)를 시켜서 보내온알사탕 한 봉지를 그 옆에 바쳤다. 어머니가 누워 계실 집이 있는 성동구 화양동이 정확히 어느 방향인지 분간할 수는 없었지만, 어림짐작으로 대충 방향을 잡아 젯상을 차렸다. 그리고 영원한 불효자, 죄인으로서 제사를 지냈다. - P13

형태야 어쨌든, 적어도 그 혹독한 일제 식민지 감옥에서도 스팀난방을 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유물이었다. 태평양전쟁 시기의 물자결핍 상태에서는 아마 버려진상태로 있었으리라. 그렇지만 ‘불령 조선인‘을 처박아 넣었던 서대문형무소의 복도에서 일제의 스팀시설을 보았을 때 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없었다. ‘그래? 일제 식민지 시대에도 스팀난방을 해주었다고?
1977년 두번째로 서대문형무소(구치소)를 대면했을 때는 그것조차뜯기고 없었다. 서른 개의 감방이 한 줄로 배열돼 있는 긴 복도의 중앙부에 십구공탄 두 개를 때는 난로 하나가 있었을 뿐이었다. - P15

악랄한 일제식민 통치배들조차 스팀시설을 했었는데, 해방된 국가의 정권이 자기국민 동포를 수용한 교도소에 현대식 스팀시설을 가설하지는 못할망정일제가 남기고 간 스팀시설을 뜯어 버린 것에 대해서 분노가 치밀었다.
"이게 누구의 정부인가. 차라리 일제보다도 못한 정권이 아닌가. 나는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감정과 신념으로 박정희 정권과 그 뒤의정권을 대하게 되었다. - P15

여름이면 낮에도 컴컴한 이 관 속 방바닥에서 ‘식사‘라는 것을 차려놓고 먹을라치면, 막힘이 없이 통해 있는 변소의 구멍에서 누런 구더기떼가 줄줄이 기어 나와 더불어 생존하기를 요구합니다. 처음 며칠은 음식이 넘어가질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처음 며칠뿐이지요. 안 먹고야살 수 있습니까? 그래서 며칠이 지나면 구더기떼를 빗자루로 쓸어내면서 ‘맛있게‘ 먹어야 합니다. - P16

그만하면 아시겠어요? 시체를 넣는 관이 아니라, 지난 세월, 비인간적인 독재정권 아래서 수천, 수만의 정치수, 사상수, 양심수, 확신수들이 처넣어져서 신음해야 했던 이 나라의 교도소와 형무소의 감방, 독방의 모습입니다. 이 시간에도 수없이 많은 이 나라의 자랑스러운 꽃봉오리들이 그런 관 속에서 그렇게 시들어 가고 있습니다. - P17

해방 이후 역대 독재정권의 법복을 입은 분들이, 법정의 단상과 단하에서 ‘구형 칠년‘ 하면 ‘징역 오년‘ 따위의 소리를 아무런 감동도 없이주고받은 결과로 그들은 그 속에서 살거나 죽어야 했고, 지금도 그렇게살고 있습니다. 이 관은 21세기를 바라보는 세계 문명사회의 가려진 치부입니다. 분명 그래요. - P17

나는 어제까지 독재체제의 법복을 입었었거나, 지금도 입고 있는 분들에게 한 가지 간절히 권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육법전서(六法典書)라는 메마른 책을 잠시 덮어 놓고  그 관 속에 한번 들어가 보시라는말입니다. 많은 고생을 해서 사법고시라는 시험에 합격한 영광을 누리는 분들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일 년은 너무 길고, 단 하루만이라도 그 관 속에서 살아 보십시오." - P17

그래서 나는 한 가지 건의를 드리고 싶습니다. 검사와 판사는 연수기간이나 임용 전후에 반드시 이 관 속에, 또는 관 속이 싫다면 냉장고 속에 단 하루만이라도 들어갔다 나오는 것을 의무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육법전서의 국가보안법이나 반공법이나 집회시위법이니 하는 법조문의 활자보다도 ‘인간‘의 얼굴이 조금은 크게 보이겠지요.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이 나라 사법부의 권위도 서고, 교도소나 형무소가‘사람‘을  잡아넣는 곳이 될 것입니다. - P18

그 서대문형무소도 팔십 년 가까운 역사와 함께 문을 닫았다. 조금은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는 교도소로 탈바꿈할 것인지.... - P18

현저동(峴洞) 101번지,
서대문형무소는 암울했던 우리의 현대사를증언해 주는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이요,
민족저항사와 민족수난사 그리고민주화의 열망이 농도 짙게 집약된 곳이다. - P23

이곳에 수용되었던 사람들은서울형사지법에 계류 중인 미결수와서울고법 관내의 미확정 무기수, 사형수들로, 우리나라의  큰 형사사건 연루자는거의 모두가 거쳐 가며 수용되어 왔다.개소(開所) 칠십구 년 동안 줄잡아삼십오만여 명이 이곳에 어떤 형태로든한(恨)을 묻었다. - P32

일제시대에 지은보안과 건물의지하감방은 그 시대의애국지사들이주로 애용(?)했다.
문 안쪽의 ‘+‘자표시가 이색적이다. - P41

한 사람이 겨우발을 뻗고 누울 수있을 만큼의 공간만주어진 독방.
양동이는변기로 사용했다. - P49

여사 입구.
‘제한구역, 공무 외출입금지‘라는경고문과 스마일표지가 이곳이구내의 이색지대임을나타내 준다. - P50

감방의 마룻바닥에새겨져 있는 고누판과장기판. 감방은침실 겸 거실이면서 또오락실이기도 했다. - P59

여사 감방 안 화장실. 벽에 정부미 부대로 만든, 생리대를 넣는 주머니가 걸려 있다. - P61

외국인 감방 안 화장실.
번듯한(?) 창문이 달려 있고,
좌변기가 설치돼 있다.
이는 두 개의 감방 사이에 있어 이실(室)공용이다. - P62

철조망까지 쳐 있는 담장 안에 펌프와 집수통이 마련돼 있는 것으로 보아  여사 수감자들의 빨래터였던 듯하다. - P65

서대문형무소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것이 사형장이다. 구치소 안 재소자 운동장의담벽을 끼고 신작로를 따라가다가 속칭
‘지옥의 삼정목(三丁目)‘이라는 삼거리에서교도관들이 사형수를 오른쪽으로 인도하면,
예의 그 죽음의 집에 도달한다. - P68

지금은 열려 있지만, 그 닫힌 마룻바닥 위 작은 의자에사형수가 앉혀지면 목에 밧줄이 감기고 커튼이 닫힌다. - P75

입을 벌린 교수대 앞에 사형수가 최후로 앉던 의자가 놓여 있다.
왼쪽은 사체를 점검하기 위해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 입구. - P77

‘덜커덕‘, 교수대 마룻바닥이 내려앉으면 목에 밧줄이 걸린사형수의 몸은 아래로 곤두박질친다. - P79

사형이 집행된 사형수의 몸이 이곳에 놓이면, 검시의(醫)가 내려와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다. - P81

반 평쯤 되는 교수대 마룻바닥이 내려앉을 때의 충격과 소음을 줄이기 위해지하실 벽에 타이어를 부착해 놓았다. - P82

교수대 뒤편에 장치돼있는 사형집행 레버.
이것을 당기면사형수가 앉아 있는마룻바닥이내려앉는다. - P84

사형집행자와 사형수는 판자벽을 사이에  두고 생(生)과 사(死)를 달리한다. - P85

사형수는 주검이 된 다음에라야 이 계단을 통해 바깥 세상으로나간다. - P89

뒤편에서 내려다본사형장의 전경.
멀리 인왕산이 보인다. - P92

숱한 민족의 수난사를 이젠 안으로만 간직한 채, 서대문시대 그 칠십구 년의 역사를 마감한 서대문형무소는 오늘,
아직은 철문에 빗장을 지르고 텅 빈 채로 침묵에 싸여 얼룩진 벽돌담과 감시탑만으로 말없이 오가는 시민들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 P112

소내(內) 중앙에 위치한 남9-11사(오른쪽부터). 이들은 서울시가역사적 유물로 보존하고 있는 수감동의 대표적인 건물이다. - P116

물은 없어도 성(城)의 해자와 같은 역할을 한 이중 담벽.
왼편의 격벽장을 끼고 가면 속칭 ‘지옥의 삼정목(丁目)‘이 나온다.
사진의 가운데 미루나무 있는 곳이 사형장이다. - P118

"나는 이천이백이십삼번
죄인의 옷을 걸치고
가슴에 패를 차고
이름높은 서대문형무소
제삼동 이호실
북편 독방에 홀로 앉아
‘네가 광섭이냐‘고 혼잣말로 물어보았다."

시인 김광섭(金燮)이 일제시대 붉은 벽돌담  안 독방에 웅크리고 앉아서도 시심(心)을 가다듬었던 ‘이름높은 서대문형무소.‘ 그곳은일제(日帝)의 침략사와 궤를 같이하며 한민족의 수난을 깊숙이 응축시켜 온, 민족사의 원(怨)과 한(恨)이 서리서리 똬리를 틀었던 환부(患部). - P121

현저동(峴洞) 101번지, 이름갈이를 여러 번 했으면서도 우리의 뇌리에 끝내 서대문형무소로 박혀 버릴 수밖에 없는, 근대적 시설을 갖춘한국 최초의 감옥. 그러기에 당연히 감옥의 대명사가 될 수밖에 없었던이 서대문형무소는 암울했던 우리의 현대사를 증언해 주는 살아 있는역사의 현장이요. 바로 민족저항사와 민족수난사 그리고 민주화의 열망이 농도 짙게 집약된 곳이기도 하다. - P121

우리의 주권을 반신불수로 만든 을사조약(乙巳)을 전후하여 감방의 태부족을 느낀 일제 괴뢰정부와 형정권(刑政權)까지 강탈한 일제통감부는 무악재 고개 아래, 서대문 밖 인왕산 기슭, 병풍처럼 금계산(金鶴山)을 북으로 둘러친 영천(靈泉)이라 일컫는 삼십여만 평 명당자리 금계동(金鶴洞)에 대규모의 신식 감옥을 짓기 시작, 고종(高宗)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純宗) 황제가 등위한 1907년에 착공했다. 이것이 바로 서대문형무소다. - P123

서대문형무소의 위치와 수용능력에 관해선 전설 같은 얘기가 전해온다. 조선초의 명승(名僧) 무학대사(無學大師)가 무악재 위에서, 뒷날 감옥이 위치할 자리를 내려다보며 ‘명당 중의 명당이나 삼천 명의홀아비가 탄식할 곳‘이라고 했다는 예언이 그것이다. 어쨌든 오늘날의시설 대부분은 휴전 후 새로 복구된 것들로, 육이오 동란으로 일제시대의 시설은 구십 퍼센트가량이 소실되고 골조만 남았다. - P126

경기도 시흥으로 이전할 당시의 (1987년 11월) 규모는 육만여 평의부지에 연건평 팔천여 평의 여든 개 동, 삼천이백 명의 재소자를 동시에 수용할 수 있었다. 재소자가 가장 많았던 1969년에는 칠천여 명이수용돼 포화상태가 되자, 영등포구치소를 신설해 분가시키기도 했다. - P126

시대의 변천에 따라 온갖 계층이 고루 거쳐 가면서 그 모습도 각각 특색을 보였다. 일제시절에는 민족지도자, 독립운동가와 사상범이 많았고, 사일구, 오일륙 같은 변혁기에는 국회의원 등 정치인, 장·차관을비롯한 고위관리, 부정축재자로 몰린 기업인, 세상을 주름잡던 세도가, 군장성 등으로 붐볐고, 삼선개헌, 유신쿠데타, 십이륙, 십이십이,
오일칠 등의 격랑 속에서는 재야인사, 대학생 등 민주화를 외치는 운동권의 목소리가 넘쳐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살인강도 등 흉악범, 대형경제사범, 간첩에서 자잘한 잡범에 이르기까지 그 성분이 다양했다. - P127

전국이 의병항쟁에 휩싸이고 십삼도창의군(十三道倡義軍)이 서울탈환작전을 벌이자 당황한 일제가 초만원이 된 구식 감옥 대신 앞에서언급한 것처럼 거대한 현대식 감옥을 신축했으나 당장엔 쓰질 못했다.
군대 해산으로 의병이 늘고 고종 강제 퇴위에 대한 항일(抗日)의 민심이 흡흡한데, 조선 사람을 가두어 넣을 감옥을 크게 짓는다는 건 그민심에 불을 지르는 격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수년 동안 이 서대문감옥은 잡초와 더불어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 P127

최근 법무부도 당시의 상황을 단편적으로 수록한 간행물과 수감경험자, 전직교도관들의 증언을 토대로 교정사(敎正史)를 정리해 왔으나, 자료의 빈곤과 고증의 어려움으로 애를 태우고 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박사는 1898년 3월, 만민공동회 (萬民共同會) 사건으로 피검, 종신징역형을 선고받고 옛 경성감옥인 전옥서에 수감됐었다. 청년 이승만은 쌀창고를 개조한 이 감옥에서 『매일신문(每日新聞)』의 논설을 쓰거나 영한사전의 원고를 집필하다가 1904년 8월 9일 사면 석방되었다. 이 박사는 대통령 재임시였던 1954년과 1960년 두 차례 서대문형무소를 방문, 자신이 어릴 적에 감옥을 ‘복당(福堂)‘이라 부른 기억이 있다며 당시의 명칭인 서울형무소를 ‘서울복당‘이라 하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했다고 한다. 해방 직후에도이 박사는 환국하자마자 자신의 수감시절이 떠올라서인지 서대문형무소의 감방을 둘러보았다는 일화를 남겼다. 구한말의 의병장 허위 열사도 항일전을 벌이다 1908년 4월에 체포되어 옛 경성감옥에 갇혀 있다가 그 해 9월 27일 처형당했다. 새 경성감옥에서는 1909년 한해에만도 스무 명이나 되는 항일의병 지도자들이 사형에 처해지기도했다고 전해진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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