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거주하는 지역이라면 전쟁과 가난과 영양실조가 만성적으로 있어 왔고, 대기오염과 수질오염, 자원과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약탈이 있어 왔습니다.
오늘의 결론을 말씀드리면, 외람되지만 인류학은 분명 어떤 이로운 점을 우리에게 기여하고 제공한 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류학의 이점 가운데 하나(아마 이것이 결국 가장 주요한 이점이겠지만)는 부유하고 강한 우리 문명국 구성원들에게 겸손함이라는 미덕과 지혜를 가르쳐준 것이니까요.
인류학자들이 연구하는 사회는 다른 온갖 종류의 규칙들에 대해 듣는 것보다 더 많은 교훈을 줍니다. 앞서 말했지만, 이는 우리가 더는 보장할 수 없게 된 인간과 자연환경 사이의 균형을 가능하게 해줄 수도 있을 교훈입니다. 우선은 여기까지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19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는 인간 진화에는 세 단계 법칙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두 가지 연속적 단계를 지나게 됩니다. 종교적 단계, 이어서 형이상학의 단계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인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단계에 도달하려는 참입니다.
인구수가 극히 적지만 천연자원에 대한 풍부한 지식이 있어, 우리가 풍요라고 부르기에는 망설여지는 조건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제법 잘 삽니다. 오스트레일리아, 남아메리카, 멜라네시아와 아프리카 등에 대한 세세한 연구가 보여주고 있지만, 일을 할 수 있는 인원이 하루에 2~ 4시간만 노동을 해도 생산 활동에 아직 참여하지 않았거나 더는 참여할 수 없는 어린아이와 노인을 포함한 모든 가족의 생존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공장이나 사무실에서 길고 긴 시간을 보내는 우리 현대인과는 얼마나 다른지요!
원시 부족이 환경의 명령에 얽매인 노예였다고 생각하는 건 큰 오산입니다. 이들은 밭을 재배하는 농민이나 짐승을 사육하는 목축업자보다 환경으로부터 훨씬 독립적이었습니다.
긴 여유 시간을 가지고 더 많은 창의적인 일을 했고, 서로 더 많이 교유하고, 외부세계와의 접촉도 더 많았습니다. 일종의 충격을 완화하는 쿠션이라 할 만한 신앙, 몽상, 의식, 의례 같은, 한마디로 우리가 보통 종교적ㆍ예술적 활동이라 부르는 일들을 한 것입니다.
인류학자는 문화의 차이점에 관심을 갖고 이를 존중하는데, 인류학 연구 방식의 핵심이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인류학자는 각 사회가 자기의 제도와 풍속과 신앙만이 유일한 것이라고 믿지 말 것을 권유합니다.
루스 베네딕트는 그 책을 쓰기 전 일본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습니다. 베네딕트는 전혀 다른 분야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인류학자였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믿을 수 있던 인류학적 정신과 영감과 방법론을 통해, 사전 경험이 전혀 없는 문화에 다가가 밖에서 그 문화의 구조를 파악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인류학은 우리 문화와 비교해보았을 때 너무나 충격적이고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다른 문화의 풍속과 종교도 하나의 체계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몇 세기가 흐르면, 어떤 체계든 그 체계의 내적 균형이 생깁니다.
첫째, 인류학은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간주하는 것이 사실은 사물의 질서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합니다.
둘째, 인류학은 인간의 실제 경험들을 아주 방대하게 수집합니다. 이것들은 인간이 실제 거주하는 곳에서, 그리고 수세기 동안 지속되어온 수천 개의 사회들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노동은 단지 이익을 창출하는 것만이 아니라, (아마도 가장 중요한 점은) 공동체의 명예와 부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순전히 경제적 성격의 행위가 다른 사회에서는 기술적이고 문화적이며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행위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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