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에 골몰합니다. 아마 이것은 고쿠가쿠[국학]8 학파가 그 뿌리일 것입니다.

한국인들 역시 유럽이나 다른 먼 민족이 아닌 자기 나라의 시골 생활이나 민간 풍속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세세한 사실들의 목록을 다량 수집하고, 직접적인 관찰을 통해 기록된 문서에 누락되어 있거나 불충분한 것들을 보충하며, 어떤 작은 집단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상상하면서 현재를 사는 방식을 알아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마침내 하나의 독창적인 유형의 자료를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인용하자면 야나기타 구니오가 ‘분카가쿠文化学’, 즉 문화학이라 부른 것에 진입한 것입니다. 문화학,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인류학입니다.

인류학의 첫 번째 야망은 ‘객관성objectivité’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인류학이 주장하는 객관성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관찰 대상인 어떤 사회의 고유한 가치들을 객관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사회를 바라보는 사고방식도 객관화하는 것입니다.

보어는 1939년 이렇게 썼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들 간에는 전통적인 차이들이 있는데, ······ [이것도] 물리학적 실험의 결과들을 묘사하는 다양한 방식들에 상응해 묘사할 수 있다."

인류학의 두 번째 야망은 ‘전체성totalité’입니다. 사회생활의 모든 양상들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하나의 체계를 보자는 것입니다.

잠시 자리를 비울 때(우체국에 편지를 부치러 가거나, 신문을 사러 가거나, 담배를 사러 잠시 나갈 때), 일본인은 이렇게 말한다는 겁니다. ‘다녀오겠습니다行って参ります.’ 그러면 이렇게 대답합니다. ‘다녀오세요行ってらっしゃい.’ 비슷한 상황에서 서양 말은 나가겠다는 결정에 강조점을 두지만, 일본에서는 곧 돌아오겠다는 의도에 강조점을 둡니다.

독립적이고 이미 구성된 전체로서의 ‘나’로부터 출발하는 대신, 일본 사람들은 모든 게 바깥에서부터 출발하여 이어 나로 옵니다. 일본의 ‘나’는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나’에 도달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일단 밖으로 나갔다가 ‘나’를 향해 돌아온 결과물처럼 보입니다.

서양의 정신세계와 일본의 정신세계를 도식화하면, 구심적 운동성과 원심적 운동성으로 대조된다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도식은 두 문명 간의 상호성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인류학자의 연구 가설로도 쓰입니다.

우리 근현대사회에서 타자와의 관계는 우연적이고 파편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만, 이 방식이 우선은 주체들끼리 서로를 파악하게 하는 전체적이고 총괄적인 경험에 기초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촘촘히 이어져 있는 작은 공동체에는 상당한 항상성이 있다. 이것은 문명화된 나라의 매우 개발된 공동체에도 해당하고, 원시의 야생 마을의 공동체에도 해당한다."

"그러므로 영향을 받아 교란될 위험이 높은 대도시 집단이 원시 마을의 작은 집단보다 모든 사람이 접근할 수 있는 정보를 덜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모든 공동체가 인간적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인류학을 아주 멀리 혹은 아주 가까이에 아직 살아남아 있는 잔재를 찾아 연구하는 것만으로 한정할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생존 형태에 대한 고고학이 아니라, 이 생존 형태들 간의 차이 또는 그 형태들과 우리의 생존 형태들 간의 차이입니다.

독자에게 인류학적 고찰의 이중적 본질을 알려드리고 싶어서였죠. 하나는 관찰자의 문화와 매우 다른 문화를 아주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관찰자 스스로가 마치 다른 문화에 소속된 것처럼 자신의 문화를 멀리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택한 제목이 《멀리서 보는 시선Le Regard éloigné》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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