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피여나다’라는 함경도 제땅말을 즐겨 썼던 시인의 어감을 살려주면 좋지 않을까. ‘피여나다’는 현재 북한의 표기법이다. 북한에서는 ‘이’ 모음을 포함한 ‘ㅐ, ㅔ, ㅟ, ㅢ, ㅣ’ 모음 다음에 ‘어’가 있으면 ‘여’로 쓴다. ‘깨어나다’를 ‘깨여나다’, ‘드디어’를 ‘드디여’, ‘띄어쓰기’를 ‘띄여쓰기’로 쓴다. 2009년 6월 중국에서 있었던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의’의 회의록에 남한과 북한이 서로의 표기법을 존중하여 "‘~어’와 ‘~여’ 둘 다 인정한다"는 구절이 나오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시인이 쓴 단어에 대해 배려해야 한다. - P-1

「별 헤는 밤」에서 ‘헤다’는 ‘세다’의 함북 제땅말이다. 지금 쓰고 있는 ‘헤아리다’와 어원이 같은 말로, 다른 지역에서는 ‘헤다’에서 ‘세다’로 변했지만, 함북에만 원래 발음이 살아 있다. ‘별 세는 밤’은 돈 세는 듯 차갑게 들리지만, ‘별 헤는 밤’은 훨씬 살갑고 둥그렇게 들린다. - P-1

김영랑의 전라도 제땅말, 박목월의 경상도 제땅말, 백석의 평안도 정주성 제땅말, 이용악의 함경도 제땅말은 살리면서, 왜 윤동주 시는 표준어로 고쳐서 낼까. - P-1

윤동주 시인이 살아 있다면, 자신이 쓴 함경도 제땅말을 모두 표준어로 고쳤을까. 시인의 뜻을 헤아리지 않고 표준어로 고친 것을 보고 실망하지 않을까. 어떻게 보면 동주의 의도를 살리지 않은 시집들은 정본定本이라 할 수 없다. 안타깝게도 현재 출판된 윤동주 시집들은 제땅말이 무시된 ‘표준어로 만든 윤동주 시집’들이다. - P-1

1894년 일본군과 관군에 패배한 동학농민군의 일파는 강원도를 지나 함경도까지 도피했다. 동학농민군이 러시아에 출병의 구실을 줄까 우려한 일본군은 그해 10월 17일 일본군 원산수비대 1개 소대를 함경도 함흥 정평 등지로 순찰하러 보낸다(『駐韓日本公使館記錄』 3, 377쪽). 일본군이 강원도에서 동학도를 샅샅이 찾아 학살하고, 함경도 문턱까지 다가오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여 간도로 이주를 단행한다. 동학운동에 가담했던 이들 중 몇은 독립운동가 이범윤(1856~1940)이 동포를 보호하려고 조직한 사포대私砲隊에 참여하기도 했다(김재홍 증언, 『북간도 지역 한인 민족운동』, 독립기념관, 2008). - P-1

명동학교는 졸업식 때 파인 김동환의 서사시 『국경의 밤』을 나누어주는 학교였다. 윤동주는 한글로만 작품을 남겼다. 중국어 점수가 높았던 윤동주지만 중국을 "패 경 옥 이런 이국소녀들"로 구별했고, 일본을 ‘육첩방은 남의 나라’라고 구별했다. 그에게 중국어 일본어 만주어는 이국어였다. 변두리에서 배운 때묻지 않은 한글과 투박한 제땅말을 버무려 그는 고소한 시를 썼다. - P-1

아버지를 일찍 여읜 맹자를 어머니가 묘지와 시장, 마지막에 서당 근처에서 키웠다는 맹모삼천지교 이야기는 『열녀전』에 나온다. 묘지 근처에서 생로병사를 본 맹자는 인仁이 무엇인지 깨닫고, 시장에서 "골라, 골라!" 상인들의 호객 소리를 들으며 욕망이 무엇인지 체득했겠다. 머리로만 공부한 사람들과 달리, 당연히 차원이 다른 말을 할 수 있었겠다. - P-1

1824년 경주의 변두리, 몰락한 양반집에서 서자로 태어난 수운 최제우는 보부상으로 전국을 십여 년 떠돌며 밑바닥의 염병과 눈물을 목도한다. 돌아와 생가 맞은편 깊은 산골 용담정에서 『동경대전』을 쓴다. 그의 호소를 기억한 농민들이 일으킨 동학농민혁명이야말로 변두리인의 ‘다시 개벽’이었다. - P-1

싯다르타, 공자, 맹자, 예수, 수운. 이들은 변두리 밑바닥을 처절히 기어가며 비애를 알고, 자신도 모르게 인간의 경계를 넘는 포월匍越을 경험한 인물들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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