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 / 자본주의 사용설명서 / CEO, 정조에게 경영을 묻다>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CEO, 정조에게 경영을 묻다 - 분노와 콤플렉스를 리더십으로 승화시킨 정조
김용관 지음 / 오늘의책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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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임금 ‘영조’ 하면 정조, ‘정조’ 하면 영조가 생각난다.
학창시절 시험기간엔 영조ㆍ정조가 헤깔려서 ‘영-탕-정-규’로
앞글자만 이어서 외웠던 기억도 난다.
‘태정태세문단세에~ 예성연중인명서언~ ♪’ 입에 붙은 멜로디로
임금 이름이나 겨우 외우는 나에게 ‘역사는 너무 어려워~’ 흐흐.

그래도 드라마 「이산」을 보고 난 뒤로는 좀 나아졌지?
이젠 ‘영조’ 하면 이순재, ‘정조’ 하면 이서진이 떡하니 자리잡고
있어서 헤깔리지를 않잖아!^^

『CEO, 정조에게 경영을 묻다』라는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도 다 드라마 덕분이라니깐~ 땡큐「이산」!

하긴. 책에서 만나는 정조와, 이서진이 연기한 정조는
달라도 너무 많이 달라.
처음엔 그걸 맞춰보느라고 책에 빠져들지 못했는데
나중엔 그것마저도 한가지 재미로 추가해서 생각해버렸지.
(흠흠- 아주 현명한 독자로다!)

내가 이 책을 통해 만나본 정조는 참 독한 사람이다.
어떻게든 살아남았고, 왕이 되었고, 끝까지 왕으로 살아냈다.
그 기간이 짧았든 길었든, 결실을 맺었든 못맺었든,
중요한 건 그가 포기하지 않고 끝끝내 자신이 생각한 그 길을
갔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책 제목은 참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정조에게 경영을 묻다니. 왜?
정조가 끊임없이 개혁을 시도했기 때문에?
실물경제에 지식과 관심이 많았던 왕이라서?
...... 아무리 그래도 정조는 왕이지 CEO가 아니다.
뭐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이렇게 저렇게 갖다 붙이자면 안될것도 없겠지만.
그렇다해도,
명령 하나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었던 조선시대의 왕에게,
실적을 내지 못하면 얄짤없이 퇴출당하고 마는 기업의 CEO가,
대체 뭘 물어보겠다는건지!?)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다.
책 제목이 마음에 안들어도 재미있는 책이 있고,
삼분의 일 분량까지 지루하게 읽다가도 중간부터 재미있어지는
책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재미와 더불어 이 책은 나에게 또 한가지 중요한 삶의 태도를
새겨주었다. 견디고 참아내고 인내하고 그러면서 삶을 포기하지
않는! 질긴 그것!


*
책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정조의 다양한 면모를 옮겨본다.
양이 꽤 된다. 시간이 남아돌아서가 아니고,
내가 다음번에(정조를 다시 만나보고 싶을 때)
좀 더 쉽게 만나보기 위한 조치다.


필자는 정조를 알기 위해 정조가 할아버지 영조 밑에서 착실하게 후계자 교육을 받던 14년의 세손 시절, 그리고 집권 24년을 세세히 기록한 『영조실록』과 『정조실록』을 꼼꼼하게 여러 번 읽었다. 그렇게 실록을 아주 꼼꼼하게 읽는데 약 반년이 걸렸다.(4p._머리말)

권력은 언제나 상대가 있는 법이다. 권력(權力)이라는 낱말의 ‘권(權)’이 저울추를 뜻하는 것은 이런 의미다. 권력은 아주 정밀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정치는 종합예술이다. 정치가 혐오의 대상이 된 상황은 누구보다 올바른 정치지도가자 없어 그렇다. (5p._머리말)


∎‘인권’이란 말을 처음 사용한 군주

1778년 1월 12일 발표한 ‘흠휼전칙(欽恤典則)’은 법치주의를 근간으로 한 ‘나폴레옹 법전’과도 같은 인권법의 시작이다. 1804년 프랑스혁명을 통해 나폴레옹이 집권하고 ‘나폴레옹 법전’을 만들어 유럽 최초의 인권 법률안을 만들었다면 조선에서는 이미 1778년 정조에 의해 인권법이 처음 사용된 것이다. 이 법의 첫 서문은 인권에 대한 언급이 들어 있고 아무리 죄를 지었어도 정확한 법적 근거와 형량(매를 맞는 회수와 매의 치수까지 기록)을 준수하게 했다.

1789년 2월 4일, 정조는 한양 성 밖 거리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유골들을 수습해서 작은 무덤을 만들어주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런 지시는 조선 역사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작지만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다. 그래서 임금의 명을 받은 진휼청에서는 4월 13일까지 약 두 달 반 동안 37만 개의 유골을 수습해서 무덤을 만들어주었다. 이런 조치는 애민사상이 가슴 깊이 있지 않으면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작지만 정조의 생각을 잘 보여주는 것들이 1777년 5월 5일, 기우제를 지낼 때 술은 마시지 못하지만 담배는 피우게 했다. “매번 기우제를 지낼 때 관리들에게 담배 피우는 것을 금하니 오히려 담배 생각이 간절해 정성을 다하는 마음이 사라졌다. 사람이 즐기는 것을 금하게 해서 마음이 어수선한 것보다 차라리 담배는 허용하고 술만 금하게 하라.” 담배를 기우제 때 피우지 못하게 하니 담배를 몰래 피우기 위해 나갔다 들어왔다 혼란스런 광경을 보고 그렇게 결정한 것이다. 아주 작은 일이지만 정조의 예민함을 드러난다.

1789년 사도세자 묘를 수원으로 이장한 뒤 정조는 능행을 자주 했는데 특이한 것은 관리들에게 능행 때 반드시 도시락을 지참하게 했다. 능행을 가는 길 주변 민가의 피해를 없애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임금도 도시락을 지참하고 능행에 나섰다.(121~122p.)




∎기념일을 꼼꼼하게 챙기는 임금

정조는 1년 중 5월 13일에는 모든 정사를 접고 칩거했다. 즉위한 첫 해 아버지 기일에는 두 가지 일을 했다. 한 가지는 아버지 묘에 비문을 직접 써서 새겼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숙의 문씨(淑儀 文氏)를 ‘문녀’라고 호칭했는데 그녀의 죄악을 일일이 열거하며 분노했다. 그 다음 해 1777년에는 아예 5월 13일 기록은 없고 5월 14일 비가 오지 않아 기우제를 올린 것으로 돼 있다. 그리고 1779년 5월 정조는 공식적으로 5월 13일부터 22일까지 공식적인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그것을 승정원에 명해 매년 그걸 공식화하라고 지시했다.

정조는 하루에 많은 일을 했다. 부지런한 것은 할아버지 영조를 빼닮았다. 그러나 영조는 매사 토론은 오래하지만 결단력이 약해 일을 성취함이 적었다. 하지만 정조는 치밀하고 매사 매듭짓고 정리하는 것이 강단 있어 많은 일을 추진했다. 그래서 말년에는 눈도 보이지 않을 만큼 자신을 혹사시켰다. 그런 정조는 해마다 5월 13일은 자숙하는 시간을 자신에게 주었다. 1년 가운데 약 1주일 정도 휴식을 겸한 침묵의 시간을 가지면서 장차 해야 할 일과 앞으로의 계획들을 면밀히 점검했다.

침묵이 효과적인 것은 비열한 상대가 사방에 넘쳐날 때다. 적은 언제나 외부에 있는 것 같지만 침묵을 유지하다보면 내 안에 더 무서운 적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더 무서운 적을 제압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기술이 바로 침묵이다.

정조에게 매년 5월 13일에서 짧게는 1주일, 길게는 열흘 동안 침묵하고 자숙하고 과거를 반성하고 앞으로의 일을 치밀하게 구상하는 시기였다. 1년 가운데 중간 무렵이 그런 시간이라면, 마무리가 돌 무렵인 12월 3일은 좀 다른 의미에서 각별하다. 1775년 11월 20일, 그러니까 영조가 승하하기 불과 3개월 전, 영조는 고령이라 세손에게 대리청청을 수행케 하려 했지만 좌의정 홍인한 등이 격렬하게 반대했다고 앞서 언급했다. 그러자 1755년 12월 3일 행사부직 서명선이 영조에게 상소를 올려 홍인한을 탄핵한 일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정조가 집권할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그래서 정조는 매년 해가 끝나가는 12월 3일에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인물들을 초청해서 다과회를 갖고 그날의 뜻을 기렸다. 그것은 한해도 거르지 않았다. (144~146p.)




∎현란한 화술로 상대를 설득하다

정조는 정치인 혹은 관리들은 말과 글이 중요하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래서 정조는 집권 초부터 신하들의 상소문을 꼼꼼하게 살피고 잘못된 양식이나 문체에 비판을 가했다. 종조는 조선 군주 가운데 가장 똑똑하다 평가받는 선조와 비슷하게 머리가 비상했다. 그래서 한 번 읽은 책은 대개 외웠다. 책을 읽는데 깊고 넓게 읽었다. 그런 폭넓은 지식을 정조는 신하들을 만나 적절하게 잘 구사했다. 집권 초반부터 정조는 신하들과 논쟁을 좋아했다. 그래서 『정조실록』은 임금과 신하의 논쟁거리들을 담고 있어 지루한 편이다. 그런데 대개 논쟁에서 정조가 억지로 눌러 이기는 것이 아니라 고대 역사의 여러 사례들을 들어가며 논리정연하게 설득했다.

1772년 2월 어느 날 정조는 신하들과 야간 대담을 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당신들이 알고 있는 것을 내가 모를 수 있고 내가 아는 것을 당신들이 모를 수 있으니 이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정조는 정말 모르는 것이 있으면 그 사람이 가진 지식을 다 흡수하려 했다. 이 점이 선조와 달랐다. 선조는 총명했지만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들의 지적 감수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150~151p.)


1783년 10월 도승지를 비롯한 비서관 회의에 참석해 정조는 이런 말을 했다. “요즘 세상은 세속이 날로 야박하다. 그래서 좋은 말을 해도 같은 당 사람이 아니면 모른 척한다. 국가의 앞날은 생각하지 않고 저 한 몸 편하게 지내려 한다. 그래서 나는 이들에게 ‘무모릉(無模稜)’ 이란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모나지 않게 그럭저럭 넘어간다는 모습을 정조는 ‘무모릉’이라 표현했다. 또 그 무렵 사자성어 신어를 만들었는데 ‘욕교반졸(欲巧反拙)’이란 말도 종종 썼다. 열심히 했다가 도리어 졸렬한 결과를 보게 되었다는 뜻을 말한다. 집권 7년이 지났지만 정조는 노론의 비협조적인 자세에 답답함을 느끼고 ‘욕교반졸’이란 말로 그들 졸렬함을 비판했다.(153p.)


1789년 2월 4일, 귀양을 간 윤시동(尹蓍東, 1729~1797)을 특별히 방면하라 하면서 정조는 이런 말을 했다. “쥐를 잡으려다가 아끼는 그릇을 깨뜨릴 수도 있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효도가 근본이다. 그에게 90세 노모가 있다고 한다.” 윤시동을 아끼던 정조는 그의 굳은 심지를 높이 평가했다. 그래서 집권 초부터 길들이는 작업을 했다. 1776년 6월에 서명선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남해로 유배를 보냈던 정조는 1년 뒤 그를 다시 특별히 석방시킨다. 그리고 4년을 참은 뒤 공조판성 임명했지만 그는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길 여러 차례 집요하게 설득하던 정조는 1788년 11월 그를 다시 귀양 보낸다. 그런데 그가 건강이 많이 나쁘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말한다.

“쥐를 잡으려다 아끼는 그릇을 깰 수 있다.” 윤시동의 고집은 쥐다. 그러나 윤시동의 목숨은 아끼는 그릇이란 뜻이다. 뜻이 강한 사람을 좋아했던 정조는 정교한 솜씨로 날선 기질의 윤시동을 좀 무디게 한 뒤 1795년 12월 우의정으로 발탁했다. 그렇다고 기개까지 꺾지는 않았다.(153~154p.)


∎적은 항상 앞에 두고 싸워라!

... ... ...

결국 1786년(정조10) 12월 9일, 상계군 이담(常溪君 李湛, 1769~1786)의 역모사건으로 연루된 구선복은 남대문 밖에서 효수됐다.

... ... ...

한편 정조가 구선복을 얼마나 미워했는지 자신의 마음을 언급한 것은 구선복을 죽이고도 한참 뒤여다. “그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치를 떨었다. 내가 매번 경연에 오를 적마다 그 자의 얼굴을 보면 심장과 뼈가 모두 떨려 차마 하루라도 얼굴을 대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가 병권을 움켜쥐고 따르는 무리가 많아 갑자기 처치할 수 없어 오랫동안 괴로움을 참고 견디었고 드디어 나쁜 짓이 발각돼 법으로 처결했다. 전후 흉악한 역적들을 끝내 성토하고 처벌하지 못한 것은 실로 선왕 시대에 있었던 일이라서 말하기 곤란하기 때문이었는데 의리가 이로 인하여 어두워질까 나름대로 염려해 왔다.”

이런 말을 정조는 1792년 영남 유생들 1만 명이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달라는 상소를 접하고 처음 내뱉었다. 정조가 이런 말을 구선복을 죽인 뒤 곧바로 하지 않은 것은 끝에 언급한 것 처럼 그 일로 인해 다시 대궐에서 복수의 칼바람이 일어날까 염려해서였다고 한다. 참으로 지독한 인내심이고 치밀한 성격이 잘 드러난다. 만약 감정이 격해 구선복 일가를 소탕하면서 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면 1786년 정국은 끝없이 혼돈으로 빠져들었을 것이다.

구선복은 사도세자가 죽을 당시 포도대장이었다. 그는 별명이 ‘뒤주대장’이었다. 죽어가는 사도세자를 놀리거나 핍박했다는 소문은 대궐 안팎에 자자했다. 그런 소문을 정조는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정조는 소문만 가지고 그를 죽일 수는 없었다. 그저 때를 기다린 것이다. 그리고 24년 만에 아버지의 원수를 제거한 것이다.(174~179p.)


∎책으로 낚시질을 하다

1781년 3월, 화성유수로 임명됐지만 규장각 일까지 맡아 보던 유언호가 약간 태만한 기운을 보이자 정조는 다음과 같은 따끔한 글을 남겼다.

“활에는 느슨함과 팽팽함의 뜻이 있고, 화살에는 굳세고 곧은 성질이 있다. 내가 지금 이 활과 화살을 경에게 주는 뜻은 그 물건이 갖는 의미 때문이다. 경은 아무쪼록 규장각 각신들을 양성하는 일에 한 치의 소홀함도 없이 이 활과 화살처럼 해야 할 것이다.”

정조는 춘장대에서 활을 자주 쏘았다. 50발을 쏘면 49발은 정중앙에 명중시키고 나머지 한 발은 쏘지 않았다. 태조 이성계의 활솜씨가 신의 경지까지 올랐다고 하는데 정조는 조선의 임금 가운데 태조 다음으로 명궁이란 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활쏘기를 즐긴 정조는 그것을 다분히 스포츠로 즐긴 것이 아니라 정신 수양으로 생각했던 듯하다. 규장각 제학으로 있던 유언호가 화성유수까지 보면서 두 가지 일을 처리하는데 버거워 하자 정조는 유언호에게 활과 화살을 주면서 한 말이다. 일에 있어 느슨함과 팽팽함을 잘조화시키라는 의미였다

정조는 이렇게 따끔한 충고와 함께 전복죽 50상자를 규장각에 보내 그들을 격려했다. 정조는 이렇게 신하들에게 자주 자기 마음이 담긴 선물들을 자주했다. 정조는 더위가 시작되면 신하들에게 부채를 선물했다. 선물의 대상도 정승 반열의 대신들에서부터 저 아래 규장각의 검서 이덕무 같은 인물까지 챙겼다. 아픈 신하들에게는 스스로 지은 약제들을 선물했다. 책을 좋아하는 정약용 같은 인물들에게 죽기 불과 한 달 전까지 책을 선물했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은 회고록에서 “노론 벽파들의 모함에 걸려 형조참의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광주에 은둔하고 있었는데 달이 훤한 5월 어느 날 사립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여니 주상의 당직 내관이 보자기를 풀면서 『한서(漢書)』(중국 후한시대의 역사가 반고가 저술한 기전체의 역사서) 5권짜리 두 질을 보이며 한 질은 집안에 보관하고 다른 한 질은 다시 편집해 올리라는 어명을 건네고 황급히 돌아갔다”고 회고하고 있다.(180~182p.)


정조가 집권한 뒤 윤시동은 곧바로 남해로 유배됐다. 당파 갈등의 주범이라며 보낸 귀양이다. 정조의 윤시동 다듬기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몇 개월 뒤 그는 석방됐다. 석방된 후 4년 만에 윤시동을 공조참판으로 제수했지만 아직은 거친 면이 강한 그는 바로 정조의 뜻을 거부했다. 여러번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1782년에는 이번에는 대사간 자리를 제수했다. 그러나 그 역시도 나서지 않자 정조는 1786년 2월 그를 특별히 불러 책자 하나를 주었다.

그거이 바로 『갱장록(羹墻錄)』이다. 정조는 마음에 드는 신하들을 유인할 때 책으로 낚시질을 했다. 선비들에게 책을 선물한다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닌다. 특히 임금이 신하에게 책을 선물한다는 것은 나와 뜻을 함께하자는 의미다.

정조는 그 책을 주며 다시 편찬하자고 한 것이다. ‘갱장(羹墻)’은 선왕을 추모한다는 뜻이며, 요임금이 죽은 뒤 순임금이 그를 생각하며 지은 것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 정조는 선왕 영조 이전 임금들의 언로⋅인재 등용⋅민생⋅각종 제도⋅국방⋅풍속 순화⋅경제 정책 등이 수록된 그 책을 주면서 윤시동을 크게 쓰고자 함을 암시했다. 8권의 그 책을 받아들고 윤시동은 정좌 가고자 하는 세상을 본 것이다. 그래서 정조는 그 책을 통해 윤시동의 자기 사람 만들기가 성공한 것이다.(183~18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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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의 경제학>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불평등의 경제학
이정우 지음 / 후마니타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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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 경제학』을 읽기 전과 후, 무엇이 달라졌나.
환경은 여전한데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나. 또는 무엇을 해야 하나.
답이 없다. 갑갑하다. 
기껏 생각해낸 게 '다음 대통령 선거는 언제지?' 라니.
하는 수 없다. 이게 딱 내 수준인걸 어쩌겠나. 
그나마 책을 읽고 확실한 기준 하나를 얻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자.
선거때만 되면 허무주의자로 변신해서, "어차피 그 나물에 그 밥이니까 
이왕이면 제일 잘 생긴 후보, 또는 제일 젊은 후보를 뽑자"는 허무개그나 날리던 내가,
다음 선거에는 최소한 '진보'냐 '보수'냐를 따져보겠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말이다.
하나 더. 그게 가능하다면, '성장'이냐 '분배'냐 역시 꼭 따져봐야겠지.

   
 

우리나라에는 1960년대 개발독재 시절부터 먼저 파이를 키운 뒤 나중에 갈라 먹자고 하는 이른바 '선성장 후분배'의 철학이 워낙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문제는 40년간 성장에 매진해 왔으면서도 좀처럼 분배에 관심을 돌릴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혹시 '선성장 후분배'가 아니고 '선성장 무분배'가 아닌지? _(서문11p.)

 
   

크크. 농담같은 진담, 선성장 무분배! 

   
 

우리나라가 상당히 높아진 소득수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진국이 못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지배계급의 역사의식 부족과 지상주의 매몰 탓이 크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쓴 가장 큰 이유는 이런 풍조를 조금이라도 바꾸어 보고 싶어서다. _(서문12p.)

 
   

아, 예~ 교수님! 그런데 어쩌죠. 저는 지배계급도 아니면서 이 책을 읽었구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배계급이 될 가능성이 희박한데도 이 책을 읽었습니다.
저는 역사의식이 아주 많이 부족하거든요.
(부족한게 아니라, 실은, 역사의식이 아예 없습니다.)
아무튼, 교수님이 쓰신 책을 읽고 야트막하게나마 역사의식의 씨앗을 심긴했는데요...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도록 나름 노력은 해보겠습니다만, 그래도 역시,
제가 지배계급과 함께 그 열매를 나눠 먹을 수 있을지? 그건 정말 모르겠습니다.
우선은, 지배계급에게 교수님의 책을 읽어보도록 권해야할텐데 말이죠.
뭐.. 지금의 지배계급에게 권하기 어렵다면, 차기 지배계급에게라도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책 끝에,
'성장 만능주의의 결과'로 오히려 우리가 불행에 빠졌고,
'이제야말로 40년 성장 만능주의를 반성하고, 정상적인 나라를 만들어야 할 때다.', 
'양극화가 날로 심해지고 출산율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_(13장 한국의 불평등 499p.)
'고 하신 말씀을
그들과 꼭 함께 나누고 싶은데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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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 / 자본주의 사용설명서 / CEO, 정조에게 경영을 묻다>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 - 참을 수 없이 궁금한 마음의 미스터리
말콤 글래드웰 지음, 김태훈 옮김 / 김영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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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 사람을 안다. 

누구를 안다고 하면 무엇을 아는 것일까.

내가 안다고 생각한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어.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거..
그게 나한테는 정말 중요해.
그래서 술을 많이 마시는건지도 몰라.
그런데 사실 그건 참 불가능해.
누군가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알기는 정말 어려워. 
하지만 나한테는 정말 중요한 문제야."

라고  말했을 때,
'내가 아는게 아는게 아니었구나.'고 생각하며
입을 다물었던 기억이 난다.

'다른이의 머릿속을 있는그대로 들여다보고싶다'는 열망을 가진 사람.
'그래서 뭘 어쩔건데?' 이러고 지나쳤던 내가,
지금 책 한 권을 받아놓고 한참 설렌다.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를 쓴 말콤 글래드웰.
(말콤.. 말콩?~ 마르콤, 마알콤~ ^^부르기 편한 이름은 아니군.)
말콤 이야기.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러 글쓰기도 직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기자가 되었다.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내게 심각하고 위압적인 일이었지만, 글쓰기는 재미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나는 6개월간 인디애나에 있는 조그만 잡지사 <아메리칸 스펙테이터>에서 일했다. 그 뒤 워싱턴으로 이사해 몇 년간 프리랜서로 일하다가 <워싱턴포스트>에 들어갔다. 나중에 <워싱턴포스트>를 나와 마지막으로 들어간 곳이 <뉴요커>다. 그렇게 직강을 옮기는 중에도 나는 글쓰기의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독자 여러분도 이 책에서 그 신명을 느꼈으면 좋겠다.

누군가가 내 글이나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화를 내며 "사지 않겠어"라고 말하는 것만큼 실망스러운 일도 없다. 왜 그들은 화가 났을까? 독자를 설득하는 힘이 있어야만 좋은 글일까? 이 책은 독자를 설득하지 않는다. 나는 독자를 끌어들이고 생각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게 할 수 있어야 좋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설사 그 사람의 머릿속이 불쾌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말이다. 

따라서 이 책에 실린 글을 읽는 것은 어쩌면 '모험'일 수도 있다. 하긴 내 본래 의도가 그것이니 그냥 모험을 즐기시기 바란다.(11쪽_머리말)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겠다.
이 책이 '비즈니스' 또는 '자기계발', '성공학', '마케팅' 분야에 해당한다면,
'글쓰기' 또는 더 넓게 '인문학' 분야로 분류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글쓴이가 머리말에서 밝혀둔 내용만 봐도 그렇고,
실제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느낌은 더욱 그런데,
뭐가 그러냐면, 이 책은 '글쓰기 또는 생각하기를 보여주는 책'이라는 점이다.

말콤 글래드웰이 한 말에 동감한다.
'독자를 끌어들이고 생각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게 할 수 있어야
좋은 글'이라고.

그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이 좋은 글을 쓰는 작가임을 증명한다. 충분하게.

증명1)
이 책에 들어있는 19개의 이야기 가운데 나는 특히 일곱 개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한 두개만 되어도 고마울텐데 일곱 개라니!) 

    진정한 색깔(염색제로 본 전후 미국이 숨겨진 역사)
    공공연한 비밀(엔론과 첩보, 그리고 정보 과다의 위험)
    밀리언 달러 머레이(노숙자 문제의 해법)
    실패의 두 얼굴(위축과 당황이 차이)
    대기만성형 예술가들(조숙성은 천재성의 필수 조건인가)
    성공의 이면(그가 진짜로 잘하는 게 뭐야)
    인재경영의 허울(똑똑한 사람들의 가치는 어떻게 과대평가되었는가) 
  
증명2)
이 책을 읽는 일주일동안, 나는 평소보다 훨씬 많은 생각을 했다. 
생각을 많이 하니 얘깃거리도 많아져서 훨씬 수다스러운 주말을 보냈다.

예를 들어,
나는 40년만에 처음으로 '도시'에 살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지난 토요일에 문경에서 대구까지 국도로 운전을 하면서 황홀한 꽃구경을 했다.
벚꽃도 만개하고 개나리, 진달래, 복사꽃, 배꽃, 온갖 나무에 물오른 가지 가지...
문득 문득 차를 세우고싶은 충동에 한참이나 정신이 없었다.
'아.. 이러다 내가 미치겠구나. 그래, 내가 삭막한 도시에 살기 망정이지,
안그랬으면 해마다 봄마다 저 꽃에 눈이 멀어 어찌 살았겠는가.' 싶은거다. 
'봄엔 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
안그랬다간 꽃에 바람에 홀려서 바보가 되고말거야.'
이러면서 아주 낯간지러운 편지를 쓴다.
몇 년 만에 쓰는 손글씨 편지를.
'다른이의 머릿속을 있는그대로 들여다보고싶다'는 열망을 가진 그 사람에게.
......

이렇게 당당하게 봄을 탈 수 있는 것도,
몇 년 만에 편지를 쓸 수 있는 것도,
그게 다 이 책 덕분이라면, 어떤가?
한번 읽어볼만 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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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감상하게 되는 책
    from ♪새벽비가 주룩주룩 얼굴을 적시네~ 2014-01-17 17:55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러 글쓰기도 직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기자가 되었다.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내게 심각하고 위압적인 일이었지만, 글쓰기는 재미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나는 6개월 간 인디애나에 있는 조그만 잡지사 <아메리칸 스펙테이터>에서 일했다. 그 뒤 워싱턴으로 이사해 몇 년간 프리랜서로 일하다가 <워싱턴포스트>에 들어갔다. 나중에 <워싱턴포스트>를 나와 마지막으로 들어간 곳이 <뉴요커&
 
 
 
리틀 블랙북 - 아무도 경고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말라
페르난도 트리아스 데 베스 지음, 권상미 옮김 / 이레 / 2010년 2월
절판


다른 이들이 '성공'한 이유를 알면 '실패'를 막을 수 있다?
거짓말이다.
실패를 피하려면 남들이 실패한 이유를 알아야 한다.
성공을 분석하는 것은 실패를 이해하는 데 별 의미가 없다. 성공은 다른 이들이 이미 충분히 써먹은 기회인데, 그걸 연구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10쪽

사업이 실패하는 것은 대개 기술적인 역량 부족 때문이 아니라, 훨씬 더 사소한 데 원인이 있다. 두려움이나 사소한 실수들, 개인적인 문제, 동업자들과의 의견차, 상식 부족, 과잉 기대치 등이 바로 그 원인인데, 이처럼 사소해 보이는 원인들은 시간이 지나면 사업이 제대로 굴러가지 못하게 하는 진정한 문제로 변한다.-9쪽

제일 큰 적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모든 실패의 원천은 자신의 무지에 대한 무지이다.-2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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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블랙북 - 아무도 경고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말라
페르난도 트리아스 데 베스 지음, 권상미 옮김 / 이레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창업하지 마십시요.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말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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