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 / 자본주의 사용설명서 / CEO, 정조에게 경영을 묻다>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CEO, 정조에게 경영을 묻다 - 분노와 콤플렉스를 리더십으로 승화시킨 정조
김용관 지음 / 오늘의책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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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임금 ‘영조’ 하면 정조, ‘정조’ 하면 영조가 생각난다.
학창시절 시험기간엔 영조ㆍ정조가 헤깔려서 ‘영-탕-정-규’로
앞글자만 이어서 외웠던 기억도 난다.
‘태정태세문단세에~ 예성연중인명서언~ ♪’ 입에 붙은 멜로디로
임금 이름이나 겨우 외우는 나에게 ‘역사는 너무 어려워~’ 흐흐.

그래도 드라마 「이산」을 보고 난 뒤로는 좀 나아졌지?
이젠 ‘영조’ 하면 이순재, ‘정조’ 하면 이서진이 떡하니 자리잡고
있어서 헤깔리지를 않잖아!^^

『CEO, 정조에게 경영을 묻다』라는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도 다 드라마 덕분이라니깐~ 땡큐「이산」!

하긴. 책에서 만나는 정조와, 이서진이 연기한 정조는
달라도 너무 많이 달라.
처음엔 그걸 맞춰보느라고 책에 빠져들지 못했는데
나중엔 그것마저도 한가지 재미로 추가해서 생각해버렸지.
(흠흠- 아주 현명한 독자로다!)

내가 이 책을 통해 만나본 정조는 참 독한 사람이다.
어떻게든 살아남았고, 왕이 되었고, 끝까지 왕으로 살아냈다.
그 기간이 짧았든 길었든, 결실을 맺었든 못맺었든,
중요한 건 그가 포기하지 않고 끝끝내 자신이 생각한 그 길을
갔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책 제목은 참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정조에게 경영을 묻다니. 왜?
정조가 끊임없이 개혁을 시도했기 때문에?
실물경제에 지식과 관심이 많았던 왕이라서?
...... 아무리 그래도 정조는 왕이지 CEO가 아니다.
뭐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이렇게 저렇게 갖다 붙이자면 안될것도 없겠지만.
그렇다해도,
명령 하나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었던 조선시대의 왕에게,
실적을 내지 못하면 얄짤없이 퇴출당하고 마는 기업의 CEO가,
대체 뭘 물어보겠다는건지!?)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다.
책 제목이 마음에 안들어도 재미있는 책이 있고,
삼분의 일 분량까지 지루하게 읽다가도 중간부터 재미있어지는
책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재미와 더불어 이 책은 나에게 또 한가지 중요한 삶의 태도를
새겨주었다. 견디고 참아내고 인내하고 그러면서 삶을 포기하지
않는! 질긴 그것!


*
책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정조의 다양한 면모를 옮겨본다.
양이 꽤 된다. 시간이 남아돌아서가 아니고,
내가 다음번에(정조를 다시 만나보고 싶을 때)
좀 더 쉽게 만나보기 위한 조치다.


필자는 정조를 알기 위해 정조가 할아버지 영조 밑에서 착실하게 후계자 교육을 받던 14년의 세손 시절, 그리고 집권 24년을 세세히 기록한 『영조실록』과 『정조실록』을 꼼꼼하게 여러 번 읽었다. 그렇게 실록을 아주 꼼꼼하게 읽는데 약 반년이 걸렸다.(4p._머리말)

권력은 언제나 상대가 있는 법이다. 권력(權力)이라는 낱말의 ‘권(權)’이 저울추를 뜻하는 것은 이런 의미다. 권력은 아주 정밀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정치는 종합예술이다. 정치가 혐오의 대상이 된 상황은 누구보다 올바른 정치지도가자 없어 그렇다. (5p._머리말)


∎‘인권’이란 말을 처음 사용한 군주

1778년 1월 12일 발표한 ‘흠휼전칙(欽恤典則)’은 법치주의를 근간으로 한 ‘나폴레옹 법전’과도 같은 인권법의 시작이다. 1804년 프랑스혁명을 통해 나폴레옹이 집권하고 ‘나폴레옹 법전’을 만들어 유럽 최초의 인권 법률안을 만들었다면 조선에서는 이미 1778년 정조에 의해 인권법이 처음 사용된 것이다. 이 법의 첫 서문은 인권에 대한 언급이 들어 있고 아무리 죄를 지었어도 정확한 법적 근거와 형량(매를 맞는 회수와 매의 치수까지 기록)을 준수하게 했다.

1789년 2월 4일, 정조는 한양 성 밖 거리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유골들을 수습해서 작은 무덤을 만들어주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런 지시는 조선 역사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작지만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다. 그래서 임금의 명을 받은 진휼청에서는 4월 13일까지 약 두 달 반 동안 37만 개의 유골을 수습해서 무덤을 만들어주었다. 이런 조치는 애민사상이 가슴 깊이 있지 않으면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작지만 정조의 생각을 잘 보여주는 것들이 1777년 5월 5일, 기우제를 지낼 때 술은 마시지 못하지만 담배는 피우게 했다. “매번 기우제를 지낼 때 관리들에게 담배 피우는 것을 금하니 오히려 담배 생각이 간절해 정성을 다하는 마음이 사라졌다. 사람이 즐기는 것을 금하게 해서 마음이 어수선한 것보다 차라리 담배는 허용하고 술만 금하게 하라.” 담배를 기우제 때 피우지 못하게 하니 담배를 몰래 피우기 위해 나갔다 들어왔다 혼란스런 광경을 보고 그렇게 결정한 것이다. 아주 작은 일이지만 정조의 예민함을 드러난다.

1789년 사도세자 묘를 수원으로 이장한 뒤 정조는 능행을 자주 했는데 특이한 것은 관리들에게 능행 때 반드시 도시락을 지참하게 했다. 능행을 가는 길 주변 민가의 피해를 없애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임금도 도시락을 지참하고 능행에 나섰다.(121~122p.)




∎기념일을 꼼꼼하게 챙기는 임금

정조는 1년 중 5월 13일에는 모든 정사를 접고 칩거했다. 즉위한 첫 해 아버지 기일에는 두 가지 일을 했다. 한 가지는 아버지 묘에 비문을 직접 써서 새겼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숙의 문씨(淑儀 文氏)를 ‘문녀’라고 호칭했는데 그녀의 죄악을 일일이 열거하며 분노했다. 그 다음 해 1777년에는 아예 5월 13일 기록은 없고 5월 14일 비가 오지 않아 기우제를 올린 것으로 돼 있다. 그리고 1779년 5월 정조는 공식적으로 5월 13일부터 22일까지 공식적인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그것을 승정원에 명해 매년 그걸 공식화하라고 지시했다.

정조는 하루에 많은 일을 했다. 부지런한 것은 할아버지 영조를 빼닮았다. 그러나 영조는 매사 토론은 오래하지만 결단력이 약해 일을 성취함이 적었다. 하지만 정조는 치밀하고 매사 매듭짓고 정리하는 것이 강단 있어 많은 일을 추진했다. 그래서 말년에는 눈도 보이지 않을 만큼 자신을 혹사시켰다. 그런 정조는 해마다 5월 13일은 자숙하는 시간을 자신에게 주었다. 1년 가운데 약 1주일 정도 휴식을 겸한 침묵의 시간을 가지면서 장차 해야 할 일과 앞으로의 계획들을 면밀히 점검했다.

침묵이 효과적인 것은 비열한 상대가 사방에 넘쳐날 때다. 적은 언제나 외부에 있는 것 같지만 침묵을 유지하다보면 내 안에 더 무서운 적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더 무서운 적을 제압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기술이 바로 침묵이다.

정조에게 매년 5월 13일에서 짧게는 1주일, 길게는 열흘 동안 침묵하고 자숙하고 과거를 반성하고 앞으로의 일을 치밀하게 구상하는 시기였다. 1년 가운데 중간 무렵이 그런 시간이라면, 마무리가 돌 무렵인 12월 3일은 좀 다른 의미에서 각별하다. 1775년 11월 20일, 그러니까 영조가 승하하기 불과 3개월 전, 영조는 고령이라 세손에게 대리청청을 수행케 하려 했지만 좌의정 홍인한 등이 격렬하게 반대했다고 앞서 언급했다. 그러자 1755년 12월 3일 행사부직 서명선이 영조에게 상소를 올려 홍인한을 탄핵한 일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정조가 집권할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그래서 정조는 매년 해가 끝나가는 12월 3일에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인물들을 초청해서 다과회를 갖고 그날의 뜻을 기렸다. 그것은 한해도 거르지 않았다. (144~146p.)




∎현란한 화술로 상대를 설득하다

정조는 정치인 혹은 관리들은 말과 글이 중요하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래서 정조는 집권 초부터 신하들의 상소문을 꼼꼼하게 살피고 잘못된 양식이나 문체에 비판을 가했다. 종조는 조선 군주 가운데 가장 똑똑하다 평가받는 선조와 비슷하게 머리가 비상했다. 그래서 한 번 읽은 책은 대개 외웠다. 책을 읽는데 깊고 넓게 읽었다. 그런 폭넓은 지식을 정조는 신하들을 만나 적절하게 잘 구사했다. 집권 초반부터 정조는 신하들과 논쟁을 좋아했다. 그래서 『정조실록』은 임금과 신하의 논쟁거리들을 담고 있어 지루한 편이다. 그런데 대개 논쟁에서 정조가 억지로 눌러 이기는 것이 아니라 고대 역사의 여러 사례들을 들어가며 논리정연하게 설득했다.

1772년 2월 어느 날 정조는 신하들과 야간 대담을 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당신들이 알고 있는 것을 내가 모를 수 있고 내가 아는 것을 당신들이 모를 수 있으니 이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정조는 정말 모르는 것이 있으면 그 사람이 가진 지식을 다 흡수하려 했다. 이 점이 선조와 달랐다. 선조는 총명했지만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들의 지적 감수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150~151p.)


1783년 10월 도승지를 비롯한 비서관 회의에 참석해 정조는 이런 말을 했다. “요즘 세상은 세속이 날로 야박하다. 그래서 좋은 말을 해도 같은 당 사람이 아니면 모른 척한다. 국가의 앞날은 생각하지 않고 저 한 몸 편하게 지내려 한다. 그래서 나는 이들에게 ‘무모릉(無模稜)’ 이란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모나지 않게 그럭저럭 넘어간다는 모습을 정조는 ‘무모릉’이라 표현했다. 또 그 무렵 사자성어 신어를 만들었는데 ‘욕교반졸(欲巧反拙)’이란 말도 종종 썼다. 열심히 했다가 도리어 졸렬한 결과를 보게 되었다는 뜻을 말한다. 집권 7년이 지났지만 정조는 노론의 비협조적인 자세에 답답함을 느끼고 ‘욕교반졸’이란 말로 그들 졸렬함을 비판했다.(153p.)


1789년 2월 4일, 귀양을 간 윤시동(尹蓍東, 1729~1797)을 특별히 방면하라 하면서 정조는 이런 말을 했다. “쥐를 잡으려다가 아끼는 그릇을 깨뜨릴 수도 있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효도가 근본이다. 그에게 90세 노모가 있다고 한다.” 윤시동을 아끼던 정조는 그의 굳은 심지를 높이 평가했다. 그래서 집권 초부터 길들이는 작업을 했다. 1776년 6월에 서명선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남해로 유배를 보냈던 정조는 1년 뒤 그를 다시 특별히 석방시킨다. 그리고 4년을 참은 뒤 공조판성 임명했지만 그는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길 여러 차례 집요하게 설득하던 정조는 1788년 11월 그를 다시 귀양 보낸다. 그런데 그가 건강이 많이 나쁘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말한다.

“쥐를 잡으려다 아끼는 그릇을 깰 수 있다.” 윤시동의 고집은 쥐다. 그러나 윤시동의 목숨은 아끼는 그릇이란 뜻이다. 뜻이 강한 사람을 좋아했던 정조는 정교한 솜씨로 날선 기질의 윤시동을 좀 무디게 한 뒤 1795년 12월 우의정으로 발탁했다. 그렇다고 기개까지 꺾지는 않았다.(153~154p.)


∎적은 항상 앞에 두고 싸워라!

... ... ...

결국 1786년(정조10) 12월 9일, 상계군 이담(常溪君 李湛, 1769~1786)의 역모사건으로 연루된 구선복은 남대문 밖에서 효수됐다.

... ... ...

한편 정조가 구선복을 얼마나 미워했는지 자신의 마음을 언급한 것은 구선복을 죽이고도 한참 뒤여다. “그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치를 떨었다. 내가 매번 경연에 오를 적마다 그 자의 얼굴을 보면 심장과 뼈가 모두 떨려 차마 하루라도 얼굴을 대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가 병권을 움켜쥐고 따르는 무리가 많아 갑자기 처치할 수 없어 오랫동안 괴로움을 참고 견디었고 드디어 나쁜 짓이 발각돼 법으로 처결했다. 전후 흉악한 역적들을 끝내 성토하고 처벌하지 못한 것은 실로 선왕 시대에 있었던 일이라서 말하기 곤란하기 때문이었는데 의리가 이로 인하여 어두워질까 나름대로 염려해 왔다.”

이런 말을 정조는 1792년 영남 유생들 1만 명이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달라는 상소를 접하고 처음 내뱉었다. 정조가 이런 말을 구선복을 죽인 뒤 곧바로 하지 않은 것은 끝에 언급한 것 처럼 그 일로 인해 다시 대궐에서 복수의 칼바람이 일어날까 염려해서였다고 한다. 참으로 지독한 인내심이고 치밀한 성격이 잘 드러난다. 만약 감정이 격해 구선복 일가를 소탕하면서 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면 1786년 정국은 끝없이 혼돈으로 빠져들었을 것이다.

구선복은 사도세자가 죽을 당시 포도대장이었다. 그는 별명이 ‘뒤주대장’이었다. 죽어가는 사도세자를 놀리거나 핍박했다는 소문은 대궐 안팎에 자자했다. 그런 소문을 정조는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정조는 소문만 가지고 그를 죽일 수는 없었다. 그저 때를 기다린 것이다. 그리고 24년 만에 아버지의 원수를 제거한 것이다.(174~179p.)


∎책으로 낚시질을 하다

1781년 3월, 화성유수로 임명됐지만 규장각 일까지 맡아 보던 유언호가 약간 태만한 기운을 보이자 정조는 다음과 같은 따끔한 글을 남겼다.

“활에는 느슨함과 팽팽함의 뜻이 있고, 화살에는 굳세고 곧은 성질이 있다. 내가 지금 이 활과 화살을 경에게 주는 뜻은 그 물건이 갖는 의미 때문이다. 경은 아무쪼록 규장각 각신들을 양성하는 일에 한 치의 소홀함도 없이 이 활과 화살처럼 해야 할 것이다.”

정조는 춘장대에서 활을 자주 쏘았다. 50발을 쏘면 49발은 정중앙에 명중시키고 나머지 한 발은 쏘지 않았다. 태조 이성계의 활솜씨가 신의 경지까지 올랐다고 하는데 정조는 조선의 임금 가운데 태조 다음으로 명궁이란 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활쏘기를 즐긴 정조는 그것을 다분히 스포츠로 즐긴 것이 아니라 정신 수양으로 생각했던 듯하다. 규장각 제학으로 있던 유언호가 화성유수까지 보면서 두 가지 일을 처리하는데 버거워 하자 정조는 유언호에게 활과 화살을 주면서 한 말이다. 일에 있어 느슨함과 팽팽함을 잘조화시키라는 의미였다

정조는 이렇게 따끔한 충고와 함께 전복죽 50상자를 규장각에 보내 그들을 격려했다. 정조는 이렇게 신하들에게 자주 자기 마음이 담긴 선물들을 자주했다. 정조는 더위가 시작되면 신하들에게 부채를 선물했다. 선물의 대상도 정승 반열의 대신들에서부터 저 아래 규장각의 검서 이덕무 같은 인물까지 챙겼다. 아픈 신하들에게는 스스로 지은 약제들을 선물했다. 책을 좋아하는 정약용 같은 인물들에게 죽기 불과 한 달 전까지 책을 선물했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은 회고록에서 “노론 벽파들의 모함에 걸려 형조참의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광주에 은둔하고 있었는데 달이 훤한 5월 어느 날 사립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여니 주상의 당직 내관이 보자기를 풀면서 『한서(漢書)』(중국 후한시대의 역사가 반고가 저술한 기전체의 역사서) 5권짜리 두 질을 보이며 한 질은 집안에 보관하고 다른 한 질은 다시 편집해 올리라는 어명을 건네고 황급히 돌아갔다”고 회고하고 있다.(180~182p.)


정조가 집권한 뒤 윤시동은 곧바로 남해로 유배됐다. 당파 갈등의 주범이라며 보낸 귀양이다. 정조의 윤시동 다듬기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몇 개월 뒤 그는 석방됐다. 석방된 후 4년 만에 윤시동을 공조참판으로 제수했지만 아직은 거친 면이 강한 그는 바로 정조의 뜻을 거부했다. 여러번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1782년에는 이번에는 대사간 자리를 제수했다. 그러나 그 역시도 나서지 않자 정조는 1786년 2월 그를 특별히 불러 책자 하나를 주었다.

그거이 바로 『갱장록(羹墻錄)』이다. 정조는 마음에 드는 신하들을 유인할 때 책으로 낚시질을 했다. 선비들에게 책을 선물한다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닌다. 특히 임금이 신하에게 책을 선물한다는 것은 나와 뜻을 함께하자는 의미다.

정조는 그 책을 주며 다시 편찬하자고 한 것이다. ‘갱장(羹墻)’은 선왕을 추모한다는 뜻이며, 요임금이 죽은 뒤 순임금이 그를 생각하며 지은 것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 정조는 선왕 영조 이전 임금들의 언로⋅인재 등용⋅민생⋅각종 제도⋅국방⋅풍속 순화⋅경제 정책 등이 수록된 그 책을 주면서 윤시동을 크게 쓰고자 함을 암시했다. 8권의 그 책을 받아들고 윤시동은 정좌 가고자 하는 세상을 본 것이다. 그래서 정조는 그 책을 통해 윤시동의 자기 사람 만들기가 성공한 것이다.(183~18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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