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진정한 관점이 없는 게 문제임을 이해했다. - P7
《빌리지 보이스》에서 일할 때 나의 관점은 타고난 논쟁가의 후예였는데, 그저 관점을 하나 ‘가지기만‘ 해도 정말로 할 말이 있을 때와 단지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종이 위에 검은 점을 옮기고 있을 때를 진지하게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빌리지 보이스》를 떠나 공개적이고 비판적인 글쓰기에서 물러나면서부터 다른 곳에서 내 관점을 찾아야 했다. 나는 에세이와 회고록, 서평을 쓰기 시작했고 눈앞의 소재에서 구출되기를 기다리는 귀중한 이야기를 찾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할 준비가 된 비대리자 페르소나의 관점에 점점 더 주목하게 되었다 - P9
소재 속으로 들어가면서 읽으면 생생한 활력을 주지만 소재로부터 거리를 두고 읽으면 단연 더 큰 보람을 안겨준다는 힘겹게 얻은 깨달음을 통해 자신의 비평 역량을 다듬어온 어느 작가의......2020년 뉴욕비비언 고닉 - P10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은 덕분에 나에 대해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다. 공개할 수는 없다. 그러지 않을 것이다. 사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꽤 여러 번(최소 스무 번 이상) 소설이 아니라 회고록을 읽는 기분을 느꼈는데 그렇다고 해서 작가에 대해 더 알고 싶다거나 그가 쓴 글들을 찾아 읽겠다는 식으로 말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소설을 읽고 나서 3주가 지났는데도 그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 사라지지 않고 나에게 자꾸 나를 찾아보게 만든다는 점과, 바로 이런 게 소설을 읽는 이유라면 이유겠거니 하는 심사를 밝혀두고 싶어서 리뷰(라기 보다는 짧은 소감을)를 쓴다.책은 '나'로 시작하고 나로 끝난다. 등장인물은 열 명 남짓인데 그 중 다섯 명은 끝끝내 이름을 알 수 없다. 나, 너, 문지기, 이름이 없는 그냥 커피숍 직원 그녀, 옐로 서브마린 소년, 이렇게 다섯 명이다. 어느 순간 당연하다는 듯 나는 이 사람들 모두가 무라카미 하루키 자신일 거라고 믿었다. 믿고 싶었다. 그래서 이름을 밝힐 필요가 없었을 거라는 식으로 말이다. 사실 이름을 몰라서 불편한 건 없다. 오히려 그들에게 나나 내 주변 인물들을 대입해가면서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갔던 건지도 모른다. 올해 유난히 장례식장에 갈 일이 많았다. 아직 9월인데 생각나는 것만 해도 10번이 넘는다.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처음엔 '벽'이 죽음을 뜻한다고 생각했다. 벽도 어디 그냥 벽인가. 움직이는 벽, '그 불확실한 벽' 아닌가 말이다. 누구나 죽는 건 알아도 언제일지는 알 수 없으니 얼마나 직관적인 비유인가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할 리가! 벽은 죽음을 상징하지 않는다.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포털도 아니다. 벽은 경계다. 말 그대로 벽. 이쪽과 저쪽을 나누는 도구. 높이 나는 새에게는 의미가 없는.. 새들에겐 없겠지만 나에게는 강력한 의미가 있는 벽.틀림없다. 나는 벽 안쪽에 있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렇게나 새들의 날개짓이 부러운 걸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나 말이다. 벽같은 명절이 코앞이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