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수영의 평생 레시피 - 죽을 때까지 나를 먹여 살릴 ‘어남선생’의 쉽고 맛있는 집밥
류수영 지음 / 세미콜론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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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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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지역 공업사들이 밀집해있는 곳에 하나둘씩 소규모 갤러리가 생기고 있다. 코소, 소소, 엔에이, 스페이스유닛4와 상업화랑, PS센터 그리고 형 등. 영국 서더크지역의 버려진 화력발전소를 재활용한 테이트모던이나 중국 베이징의 798예술구 같이 젠트리피케이션된 동네에 젊은 예술가가 진입하는 좋은 사례다. 다만, 한국의 이 갤러리는 모두 엘베없는 건물의 3-5층을 올라가야한다는 것이 특징.


이 지역 갤러리는 이런 식의 계단을 올라가야한다.


개인적으로는 더소소가 가장 가기 어려웠는데 입구를 도저히 찾을 수 없어서 두 바퀴를 뱅글뱅글 돌았다. 그렇지만 콘크리트로 그림을 그렸다니 흥미가 아니돋을 수가. 올라가서는 예상 외로 탁 트인 전망에 감동했다. 세운상가 근처를 대대적으로 재개발하고 공원화한다는 계획을 들었던 적이 있는데, 그 흔적인가보다. 방배의 마지막 거대개발 현대 디에이치, 부산 해운대 신사가지, 반포재건축 등 우리도 일본의 토라노몬힐즈나 아자부다이힐즈 못지 않게 권역 전체를 커뮤니티 시스템화하고 뒤집어 엎는 대규모 토목공사가 진행 중이다. 국제정세가 요동쳐서 건축자재가 비싸져서 수익실현하려면 다소 시간이 걸릴 것 같지만 말이다.




외부 경관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그림으로 눈길을 돌린다. 배종헌 작가는 골목의 콘크리트 벽, 시멘트 잔재, 조각상 표면의 풍화흔적 같이 도시의 피부에 주목한다. 어쩌면 도시의 씹창나 피부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콘크리트. 그러나 아무도 관리해주지 않은 버려진 도시의 생얼굴. 그 민낯 위에 축적된 물성과 자국에 주목하는 작가는 인간이 구축한 문명의 표면에서 배제되고 망각된 흔적들을 드러낸다. 관찰의 시선이 일상에 뿌리박기에 가능한 일이다. 전시주제는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럼에도 그곳에 있는 상태"라고 하였듯, 그러한 도가적 무용과 무위가 콘크리트에서 발견될 수 있을까?


작가는 장소성과 행위성의 부재 속에서도 여전히 작동하는 존재의 잔향을 탐구한다. 일상에서 무심코 스쳐 지나가는 크랙투성이 벽, 노후한 건물의 질감, 조각의 뒷면 등에서 새로운 풍경을 발굴해 회화에 옮겨와 번역한다. 그리하여 시선의 위계와 문화적 판별 기준을 교란하려는 조형적 저항을 추구한다. 보는 이는 마치 자연과학자가 외견상의 결과물만을 통해 보이지 않는 원리와 생태를 역추적하듯, 미술작품이라는 최종결과물을 보고 작가의 감춰진 생각을 거슬러 오른다. 곰곰히 생각하면서 눈으로 찬찬히 뜯어보면서 전시장을 나직히 걸으면서.


핵심 질문은 다음과 같다.

"왜 이 형상을 선택했는가?"

"왜 이 재료를 썼는가? 그리고 이 형상에 이 재료가 적합한가?"

"이 작품 배치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질문 세 가지는 각각 미시적 차원의 조형 분석, 소재 분석, 거시적 기획 분석으로 나뉘며, 이 셋의 교차점에서 배종헌 작업의 의미망이 형성된다.


가장 눈에 띄는 〈비너스의 등〉은 작가의 생각을 가장 잘 읽어낼 수 있는 작품이다. 루브르 박물관의 대표 조각상인 〈밀로의 비너스〉는 부단히 모방되고 유통되는 전형적 미의 표상이나 대부분의 이미지 소비자는 그 조각의 전면만을 소비한다. 뒷모습은 전시 공간 내에서도 조명에서조차 배제되기 일쑤다. 그런데 배종헌은 이 소외된 뒷면에 주목한다. 조각을 한 바퀴 빙 둘러서 걷다가 그가 시선의 사각지대에서 포착한 비너스의 등은 고대 조형미에 가려진 무용성의 공간이다. 그 무용한 공간은 동시에 미술제도와 시각권력이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지워내는지를 증언한다. 무엇을 실제로 보았는가?, 라는 행위자의 주체성이 관람의 핵심인데, 선택된 작품의 선택된 표면은 누군가의 취사선택이라는 점에서 관객의 주체성이 탈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작가가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등은 신체의 일부라기보다는, 미술제도의 뒷면, 사회적 관심에서 멀어진 것들의 표면을 시각화한 것이다. 거기엔 묘한 고요와 동시에 강한 현실감이 함께 공존한다. 앞부분의 이상화된 신화가 만들어낸 절대적 미의 규범과는 달리, 뒷면은 그 규범에서 이탈한 감각, 곧 대체되지 않는 우연성과 비표준의 정서, 심지어 비애감마저 품고 있다. 강하게 긁힌 듯한 등, 그러나 피나 뜯긴 생물의 흔적보다는 콘크리트의 파열같은 느낌이다. 이는 조형으로 그 콘크리트의 느낌을 전한 것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비너스의 등은 시멘트를 사용한 작품은 아니다.


그 앞의 다른 작품은 아예 시멘트라는 산업적이고 무기질적인 물질을 소재로 사용했다. 



창동표착일록- 무명산순례 Étape 06_ 콘크리트 바닥의 줄눈흔, 균열, 도시먼지, 2023-2024, 자작나무패널에 시멘트와 유채, 162.2x112.1cm 




무행無行_콘크리트 균열과 페인트 박락, 도시 먼지, 2024, 목판에 유채, 31.9×27.7cm


시멘트로 지질학적 침전처럼 자연스럽게 드러난 풍경을 그려낸다. 자연을 그리지 않았는데 자연스럽다. 콘크리트는 건축물의 내장재에서 외부로 노출되기에 풍화되고 오염되며 흠집이 생기는 물성이 특이하다. 시멘트가 마르고 양생되는 것도 물감이 마르는 것과 같다는 점에서 회화적이다.


특이한 것은 시멘트를 얇게 발랐다는 점이다. 흔히 상상하는 브루탈리즘적 질감이나 육중한 물성보다는 오히려 얇고 침잠하는 회색 유화같다. 차라리 캔버스에 두텁게 쌓은 마티에르감이 더 돌출감이 있었겠다. 올드 홀랜드나 윌러엄스버그같은 입자감있는 물감에 임파스토로 볼륨감을 준다며 말이다. 배종현 작가는 석회질 성분의 박편처럼 얇은 콘크리트 표면 위에 미세한 필치로 색을 얹어서 작품 설명이 없었다면 재료가 시멘트인지 모르고 지나칠 법했다. 여기서의 콘크리트는 단순히 구조적 기반이 아니라 도시의 지층이자 기억의 단면이기 때문에 나이테처럼 미세하게 발랐으리라 생각한다. 고의적으로 마티에르를 억제한 듯한 그의 콘크리트는 단단함보다 침묵을 견고함보다 시간의 퇴적을 드러낸다. 이러한 재료적 전략은 원래 의도가 아닌 곳에 사용된, 주기능을 상실한 물질의 표면이 품을 수 있는 시적 감각을 복원하기 위함이다.


전시장에는 대형의 〈비너스의 등〉 옆에 소형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같으나 다르다. 보통 갤러리에서는 작품크기의 다양성은 상업적 목적과 직결된다. 즉, 고가의 대형과, 가성비의 소형, 이러한 가격대 다양화를 위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서의 배열은 상업적 기획을 넘어 주제의 변주와 반복, 비교분석을 위한 배치같은 느낌이 강했다.


작품의 크기를 달리함으로써 관람자는 단일 시점에서 벗어나 시차적 시야를 갖게된고 다채로운 감각적 몰입을 경험하게 된다. 대형 작품은 관객을 압도하는 존재감을 통해 비너스의 등이 가지는 사회적 맥락을 환기시키고 소형 작품은 마치 스케치처럼 비공식적이고 친밀한 감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 크기 대비는 흡사 마이크로필름과 대형 지도로 구성된 고고학적 전시로 비유해볼 수도 있겠다. 비너스의 등이라는 조형 요소를 탐색하는 두 개의 상이한 관점과 시간을 함께 전시한다. 그리고 되묻는다. 우리가 중요하다고 믿는 것, 정도라 여기는 것, 아름답다고 정의한 것들은 과연 무엇인가? 그 반대편, 소외되고 무용하다고 간주된 것들은 왜 그렇게 되었는가? 조각의 뒷면, 콘크리트의 자국, 시멘트의 잔흔, 상처 입은 표면은 미적 가능성이 없는가?


그러한 생각의 실타래 속에서 보는 이는 무심코 지나쳤던 풍경 속을 다시 응시할 수 있는 힘을 기른다. 침묵하는 재료의 물성을 매개로 감각의 권력 구조와 가치의 위계를 비평할 수 있게된다. 미를 재정의하자, 라는 현대예술의 선언은 시시하다. 무엇을 어떻게? 라는 팔로우업 퀘스쳔이 없다면 진부한 외침이다. 우리는 이제 존재의 조건으로서의 보잘것없음, 무용함, 비가시성을 주목해보자. 배종현이 그린 비너스의 망가진 콘크리트풍 뒷모습과 시멘트 소재로 그린 도시의 지층회화를 보면서


또한 그 시선에 끝에 걸린 도시의 재개발 풍경을 보면서. 도시의 민낯. 씹창난 피부. 콘크리트. 풍화, 부식, 침식, 파열을 보면서. 생얼굴을 사랑할 수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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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팝 데몬헌터스 리뷰 쓸 게 많은데 핵심만 일단 정리


1. 디즈니 영화의 계보를 계승했다. PC논란없이 초중등 아이들에게 추천할만한 헤테로(이성애) 액션 뮤지컬 영화.

과도한 PC논란으로 글로벌 출판계는 몇 년전부터 헤테로 판타지만 달라는 분위기인데, 글로벌흥행은 덤이고 미국 등지의 보수적 시골까지도 퍼질 수 있을 만한 잠재력있는 서사다. 톤다운되고 진화된 디즈니라고도 볼 수 있다. 너무 미국식으로 남녀 키스신에 가족중심(집착)서사가 없기 때문


2. 소프트 매직이라 환상적 분위기에 데몬이니까 참참참 베어버리는 시원한 액션을 겸비. 디즈니 영화에서도 이정도로 적을 쓸어버리는 액션은 없었다. 제목도 스튜어디스 같은 여성형 어미가 아니라 그냥 헌터스 그대로라서 주체성을 상징

3. 일월오봉도 배경의 무대. 하이컬쳐의 요소를 대중문화에서 차용한다.


4. KPOP의 향기가 많다. 신곡을 내기 위한 영화가 아니니까 기존 흥행곡을 현명하게 오마주했다

YG,스타십,SM,JYP모두 보인다


비행기 트랙 How it's done과 새로 짓는 곡 take down은 YG 블랙핑크풍.

영어는 돈돈돈 리듬에 done을 살렸는데, 프랑스어는 주다 se donne 돈돈돈을 살렸다. 프랑스어 번역+노래 만점

골든은 스타쉽의 아이브스러운데, 특히 킬링 멜로디에서 IM느낌이 있고 안무는 JYP와 하이브가 약간 섞여있다. 막 데뷔한 신인보다는 중견에서 나올 법한 힘찬 곡.

특히

도도 미레도시 라라라 솔라시시시라솔팔미미미 시레파솔라

너는 누군가의 딀컮츌 제일좋은어느날의데자뷰 알비팔어웨

이 아이브 IM이 생각난다.


마지막 트랙은 걸스 파워 워킹을 포함한 디즈니 정석 곡이다. 이것은 나중에 또 이야기.


사자보이즈의 소다 팝은 한창 때 SM 여름곡에 슈퍼주니어스러운 안무다.



소다팝은 러시아어는 라임을 맞추기 위해 엘릭시르라고 했다. 와우.

ты мой целый мир 띄 모이 쩰릐 미르(너는 내 세상 전부)

Маленький Эликсир 작은 엘리시르

여기서

참고로 한약을 영어에서는 토닉, 다른데서는 시럽이라고 번역했는데 외국에서 한국의 무언가를 바라볼 때는 자국문화의 용어로 번역해야하기 때문.


미국인 아빠와 한국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미셸 자우너는 H마트에서 울다에서 미역국을 해초수프라고 표현한 적 있는데 그런 식의 문화적 번안이다

5. 비행기에서 떨어지는 신에서 피프티피프티 문샤넬이 잘 지은 여돌의 내리까는 듯한 남돌 표정이 보인다.



6. 임산부전용 핑크빛좌석있는 지하철이 잠수교 지날 때 부산행처럼 데몬이 좀비처럼 쏟아진다. take down 트랙을 배경으로 조이 신검 액션의 리듬이 PS 갓오브워를 생각나게 할 정도로 맛깔있다.

7. 일본만화,애니에서 3시 귀가, 부활동, 자전거통학, 전철감성, 주술회전의 시부야사변 같은 소재가 나왔을 때 일본인이 느낄 법한 친연성을 이제 우리도 느낄 수 있다. 북한산 배경 기와집이라든지. 픽션에서 우리가 익히 알던 현실이 등장할 때 느끼는 친근감 말이다. 드라마는 당연히 현실배경이고, 픽션 판타지를 볼 때 한국적인 정서를 느낄 경우가 별로 없었다. 한국은 애니의 불모지 였기 때문.. 원더풀데이즈, 마리이야기 등등 모두 빛을 보지 못했다. 최근 퇴마록에서 GS25스러운 파란 플라스틱 의자 편의점이나 버스터미널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국적 배경도 픽션의 너른 세계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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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친구가 미술관에서 너무 만나고 싶어하는 BTS의 RM이 어디서 출몰할지 알아냈습니다


그곳은 바로 오늘 오픈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한국현대미술2(50-90년대)!


2달 전 5/1부터 한국현대미술1(1900-60년대)가 오픈해서 이로서 상설전 2개에 볼 작품이 가득


2층 4전시실 별도 공간에 윤형근의 3미터 남짓의 대형작품만 6점이 따로 배치됐어요. 부산시립 이우환공간처럼 수공간적 느낌에 조용한 사운드 스케이프가 공간감을 주어 몰입적 경험을 할 수 있는데, 윤형근 작가를 좋아하고 그의 작품을 컬렉팅한 것으로 유명한 RM과 자만추할 수 있을 것도 같네요


과천은 오늘로서 모든 전시실이 풀로 가동 중이니 방문하기 가장 적절한 타이밍이죠


1층에 와엘과 아크람의 베니스전 출품영상 1시간반 보고

젊은 작가전에서 동시대 미술의 흐름을 읽다가

2층의 하이라이트2와 3층 하이라이트1로 넘어가 익숙한 옛 작품을 보는 구성


확실히 현대는 20세기, 당대는 21세기라는 느낌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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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서 사진 찍는 문제에 대해


2007년 애플 출시 후 화질 좋은 스마트폰이 상용화되며 2010년대 중반 즈음부터 전시장에서 사진찍는 사람의 문제가 생겨났다. 이전에는 무거운 캐논 카메라를 들고와서 찍는 사람들이 일부 있었지만 이들은 사진을 찍는다는 자각이 있었고 갤러리와 양해를 구하거나 사전협약을 했다. 그 당시에도 사진 찍는 것은 권고되는 행동은 아니었던 것 같고 더러는 찍으면 안된다고 써있던 것 같기도 한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지금처럼 엄격하게 사진금지라는 공식표기가 보일정도로 공론화되거나 문제시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크게 의식이 안되었다고 생각. 가벼운 폴라로이드는 기념 사진용이었지 예술사진촬영용은 아니었다.


안드로이드폰 보급 이후엔 비전문가도 모두 사진을 찍고 기록하는 문화가 되었고 전시장에 너도나도 사진을 찍게 되는데 관계자 입장에서는 작품보다는 자기 얼굴 찍고 인증샷 남길 뿐인 그들의 의도가 더 불편했을 것 같다. 예술에 관심없고 저작권에 대한 존중이 없는 사람들이 최소한의 윤리적 태도도 견지하지 않는다는 것에 불만이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사진을 찍어 사이버스페이스에 올리면 그만큼 사람들이 작품을 보러 오지 않으니 티켓 수익이 더디다는 재정적 문제도 있었고. 그렇게 작품촬영금지를 공언하자 이제 관객들의 불만이 생긴다. 나는 1년에 한 두번 전시보러 오는데 사진도 못 찍게 하냐? 뭐가 그렇게 대단한데? 나 혼자 볼건데 왜 이리 깐깐하게굴어?


사회트렌드는 더 많은 사진을 찍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계속 무분별한 사람들을 제지하기도 어려운데다가 현장관리직원의 스트레스도 이만저만이 아니라 10년대 후반 이후 플래시 없이 사진촬영, 다만 상업적 이용은 금지로 대폭 완화된 것 같다. 이제 희생되는 것은 조용히 전시를 감상하는 자들의 평화. 사진 셔터 소리에 몰입이 깨지고 온전한 감상을 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나 이를 뚫고 어쨌든 찍는 사람들도 우후죽순 생긴다. 국내 전시 중 저작권 문제로 사진 촬영 금지하는 작품은 김환기고, 관객 경험을 제고하고자 사진 촬영 금지하는 전시는 제임스 터렐이다. 


둘 다 내가 안 찍는다기 보다 얖에서 찰칵찰칵 대는 사람이 없으니 작품이 뚜렷하게 보이고 기억에 오래남는다. 그런데 이들은 유명하고... 아직 유명하지 않아서 SNS에 홍보가 필요한 작가는 관객이 더 많이 찍어서 언급해주기를 원한다. 양극화되는 셈. 절대 찍지 마세요와 꼭 찍어 주세요.

일본은 저작권문제도 있고 몰입적 관객경험을 위해 아직 엄격하게 촬영금지를 하는데 나는 심지어 중국인들이 바디캠으로 몰래 찍는 것도 보았다. 어떻게든 뚫고 촬영하는 사람은 있는 법.


몰입방해, 타인의 감상 방해, 저작권 침해, 예술에 대한 진지하지 않은 태도, 그러나 홍보를 해야하는 문제, 양극화 등등 수많은 문제가 겹쳐있는 가운데 또 다른 문제는 선별적 정의다.


한 친구가 최근 샤갈전을 두 번 갔는데 처음에는 왜 사진촬영금지라면서 찍는 사람들을 제지하지 않지? 왜 전시관별로 느슨한 태도를 취하지? 아직 운영이 세팅 안되서인가? 라고 생각하다가 나중에는 금지구역이 해제되고 확장된 것과 인스타에 자신은 못 찍은 사진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불만을 표한 적이 있다. 요컨대 왜 규칙을 지키는 자가 피해를 보느냐? 라는 화가 포함된, 이 사람은 허용하고 다른 사람은 제지하는 선별적 정의에 대한 문제다. 나는 그 샤갈전에서 찍지 말라는 작품사진은 찍지 않았지만 조명이 가려져 있는 작품은 이건 문제다 싶어서 사진 찍었다. 반고흐도 찍지말라해서 작품사진은 안 찍었지만 영어 문법오류와 오타가 있는 설명은 찍었다. 이 모두 작품기록용이라기보다 문제점 리포트용이었는데, 그 모든 전시에서 사진을 몰래 몰래 찍는 사람을 두엇 보았다. 걸리면 그냥 재수가 없는거야, 하고 생각하는 듯. 길에서는 새치기하고 도로에서는 칼치기하는 사람들처럼. 올림픽대로에서 강남진입할 때보면 특히 뒤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는 차들은 무시하고 입구 부근에서 새치기하려고 하는 사람들과 같다. 한 두번 어쩔 수 없이 그러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들. 대한민국 각자도생 사회야 규칙을 지키면 너만 손해야.. 이런 사람들이 사회 전체을 좀 먹는다.


규칙이면 모두에게 동등하게 적용되어야하는데 누군 봐주고 누군 봐주지 않으니 도덕을 자발적으로 지키는 사람만 바보가 되고, 그런 일이 반복되면 누가 도덕을 지킬까? 자기 손해를 입게되면 도덕을 지키려는 사람이 줄어들고 그게 회복되지않고 장기간 지속되면 사회 전체의 선이 하락한다. 적당히 대충대충 상황봐가면서 규칙 어기면서 성공하고 부를 이루어왔던 사람들이 사회를 안에서 썩게한다.


물론 제지는 운영사측의 업무이고 내가 일일이 신경쓰면 작품관람에 방해받으니 굳이 문제삼지 않는다. 그러는 편이 내게 이득이다. 다만 선별적 정의는 차별같이 느껴지는데. 샤갈전에 VIP로 초청받은 인플루언서들의 블로그엔 작품이 많이 올라와있었는 것을 보고 다음 날 실제로 갔더니 찍지 말라고 입구에서 제지할 때는 조금 의뭉스럽긴했다. 어디엔 올려져있던데? 그치만 꾹 참고 나도 작품 사진을 찍지 않았다.


좀 아니라고 생각하는 상황들은 한 두 번이 아니다.


나이 들고 권력있는 사람이 오면 주최측 팀장급 모시고 다니면서 아유 선생님은 찍으셔도 돼요~

김환기 작품이 촬영금지인데 중년 남성이 찍으면 아무 말도 안하다가 중년 여성이나 젊은 남성 여성이 찍으면 환기재단이.. 하면서 설명하는 직원도 봤고

중년 남성이 자기 찍겠다고 뒤에서 헛기침하며 눈치 주는 경우도 있었고

중년 여성이 작품찍겠다고 바로 옆에서 찰칵하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

촬영제지하자: 알았어 알았어 씁! 조용! 얼마 받는다고 뭘 이렇게 열심히해?



조금 다른 예시지만 현장직원에게 정신데미지를 크게 줄 것 같은 상황도 여러 번 봤다.

어디서 여자가 말대꾸야!

사전 협조 없이 학생들 데리고 개인 설명하는 어느 유명교수: 나 여기 사장하고 아는 사이야


관람객 전체에게 광역 데미지를 주는 경우도 있었는데

한 청년을 보면서: 요즘 애들 멘탈이 문제야 왜 몸에 뭘 저렇게 그려놨어?

한 여성을 보면서: 젊어서 아이를 낳아야 애가 건강한것도 모르고 쯧쯧 이런 거 보러다니지 말고 남자나 만나야하는데

둘 다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 쓰고 있어서 매우 다행이었지만 내 기분이 불쾌했다.

다들 정말 왜들 그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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