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을지로지역 공업사들이 밀집해있는 곳에 하나둘씩 소규모 갤러리가 생기고 있다. 코소, 소소, 엔에이, 스페이스유닛4와 상업화랑, PS센터 그리고 형 등. 영국 서더크지역의 버려진 화력발전소를 재활용한 테이트모던이나 중국 베이징의 798예술구 같이 젠트리피케이션된 동네에 젊은 예술가가 진입하는 좋은 사례다. 다만, 한국의 이 갤러리는 모두 엘베없는 건물의 3-5층을 올라가야한다는 것이 특징.


이 지역 갤러리는 이런 식의 계단을 올라가야한다.
개인적으로는 더소소가 가장 가기 어려웠는데 입구를 도저히 찾을 수 없어서 두 바퀴를 뱅글뱅글 돌았다. 그렇지만 콘크리트로 그림을 그렸다니 흥미가 아니돋을 수가. 올라가서는 예상 외로 탁 트인 전망에 감동했다. 세운상가 근처를 대대적으로 재개발하고 공원화한다는 계획을 들었던 적이 있는데, 그 흔적인가보다. 방배의 마지막 거대개발 현대 디에이치, 부산 해운대 신사가지, 반포재건축 등 우리도 일본의 토라노몬힐즈나 아자부다이힐즈 못지 않게 권역 전체를 커뮤니티 시스템화하고 뒤집어 엎는 대규모 토목공사가 진행 중이다. 국제정세가 요동쳐서 건축자재가 비싸져서 수익실현하려면 다소 시간이 걸릴 것 같지만 말이다.


외부 경관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그림으로 눈길을 돌린다. 배종헌 작가는 골목의 콘크리트 벽, 시멘트 잔재, 조각상 표면의 풍화흔적 같이 도시의 피부에 주목한다. 어쩌면 도시의 씹창나 피부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콘크리트. 그러나 아무도 관리해주지 않은 버려진 도시의 생얼굴. 그 민낯 위에 축적된 물성과 자국에 주목하는 작가는 인간이 구축한 문명의 표면에서 배제되고 망각된 흔적들을 드러낸다. 관찰의 시선이 일상에 뿌리박기에 가능한 일이다. 전시주제는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럼에도 그곳에 있는 상태"라고 하였듯, 그러한 도가적 무용과 무위가 콘크리트에서 발견될 수 있을까?

작가는 장소성과 행위성의 부재 속에서도 여전히 작동하는 존재의 잔향을 탐구한다. 일상에서 무심코 스쳐 지나가는 크랙투성이 벽, 노후한 건물의 질감, 조각의 뒷면 등에서 새로운 풍경을 발굴해 회화에 옮겨와 번역한다. 그리하여 시선의 위계와 문화적 판별 기준을 교란하려는 조형적 저항을 추구한다. 보는 이는 마치 자연과학자가 외견상의 결과물만을 통해 보이지 않는 원리와 생태를 역추적하듯, 미술작품이라는 최종결과물을 보고 작가의 감춰진 생각을 거슬러 오른다. 곰곰히 생각하면서 눈으로 찬찬히 뜯어보면서 전시장을 나직히 걸으면서.
핵심 질문은 다음과 같다.
"왜 이 형상을 선택했는가?"
"왜 이 재료를 썼는가? 그리고 이 형상에 이 재료가 적합한가?"
"이 작품 배치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질문 세 가지는 각각 미시적 차원의 조형 분석, 소재 분석, 거시적 기획 분석으로 나뉘며, 이 셋의 교차점에서 배종헌 작업의 의미망이 형성된다.


가장 눈에 띄는 〈비너스의 등〉은 작가의 생각을 가장 잘 읽어낼 수 있는 작품이다. 루브르 박물관의 대표 조각상인 〈밀로의 비너스〉는 부단히 모방되고 유통되는 전형적 미의 표상이나 대부분의 이미지 소비자는 그 조각의 전면만을 소비한다. 뒷모습은 전시 공간 내에서도 조명에서조차 배제되기 일쑤다. 그런데 배종헌은 이 소외된 뒷면에 주목한다. 조각을 한 바퀴 빙 둘러서 걷다가 그가 시선의 사각지대에서 포착한 비너스의 등은 고대 조형미에 가려진 무용성의 공간이다. 그 무용한 공간은 동시에 미술제도와 시각권력이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지워내는지를 증언한다. 무엇을 실제로 보았는가?, 라는 행위자의 주체성이 관람의 핵심인데, 선택된 작품의 선택된 표면은 누군가의 취사선택이라는 점에서 관객의 주체성이 탈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작가가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등은 신체의 일부라기보다는, 미술제도의 뒷면, 사회적 관심에서 멀어진 것들의 표면을 시각화한 것이다. 거기엔 묘한 고요와 동시에 강한 현실감이 함께 공존한다. 앞부분의 이상화된 신화가 만들어낸 절대적 미의 규범과는 달리, 뒷면은 그 규범에서 이탈한 감각, 곧 대체되지 않는 우연성과 비표준의 정서, 심지어 비애감마저 품고 있다. 강하게 긁힌 듯한 등, 그러나 피나 뜯긴 생물의 흔적보다는 콘크리트의 파열같은 느낌이다. 이는 조형으로 그 콘크리트의 느낌을 전한 것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비너스의 등은 시멘트를 사용한 작품은 아니다.
그 앞의 다른 작품은 아예 시멘트라는 산업적이고 무기질적인 물질을 소재로 사용했다.

창동표착일록- 무명산순례 Étape 06_ 콘크리트 바닥의 줄눈흔, 균열, 도시먼지, 2023-2024, 자작나무패널에 시멘트와 유채, 162.2x112.1cm

무행無行_콘크리트 균열과 페인트 박락, 도시 먼지, 2024, 목판에 유채, 31.9×27.7cm
시멘트로 지질학적 침전처럼 자연스럽게 드러난 풍경을 그려낸다. 자연을 그리지 않았는데 자연스럽다. 콘크리트는 건축물의 내장재에서 외부로 노출되기에 풍화되고 오염되며 흠집이 생기는 물성이 특이하다. 시멘트가 마르고 양생되는 것도 물감이 마르는 것과 같다는 점에서 회화적이다.
특이한 것은 시멘트를 얇게 발랐다는 점이다. 흔히 상상하는 브루탈리즘적 질감이나 육중한 물성보다는 오히려 얇고 침잠하는 회색 유화같다. 차라리 캔버스에 두텁게 쌓은 마티에르감이 더 돌출감이 있었겠다. 올드 홀랜드나 윌러엄스버그같은 입자감있는 물감에 임파스토로 볼륨감을 준다며 말이다. 배종현 작가는 석회질 성분의 박편처럼 얇은 콘크리트 표면 위에 미세한 필치로 색을 얹어서 작품 설명이 없었다면 재료가 시멘트인지 모르고 지나칠 법했다. 여기서의 콘크리트는 단순히 구조적 기반이 아니라 도시의 지층이자 기억의 단면이기 때문에 나이테처럼 미세하게 발랐으리라 생각한다. 고의적으로 마티에르를 억제한 듯한 그의 콘크리트는 단단함보다 침묵을 견고함보다 시간의 퇴적을 드러낸다. 이러한 재료적 전략은 원래 의도가 아닌 곳에 사용된, 주기능을 상실한 물질의 표면이 품을 수 있는 시적 감각을 복원하기 위함이다.

전시장에는 대형의 〈비너스의 등〉 옆에 소형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같으나 다르다. 보통 갤러리에서는 작품크기의 다양성은 상업적 목적과 직결된다. 즉, 고가의 대형과, 가성비의 소형, 이러한 가격대 다양화를 위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서의 배열은 상업적 기획을 넘어 주제의 변주와 반복, 비교분석을 위한 배치같은 느낌이 강했다.
작품의 크기를 달리함으로써 관람자는 단일 시점에서 벗어나 시차적 시야를 갖게된고 다채로운 감각적 몰입을 경험하게 된다. 대형 작품은 관객을 압도하는 존재감을 통해 비너스의 등이 가지는 사회적 맥락을 환기시키고 소형 작품은 마치 스케치처럼 비공식적이고 친밀한 감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 크기 대비는 흡사 마이크로필름과 대형 지도로 구성된 고고학적 전시로 비유해볼 수도 있겠다. 비너스의 등이라는 조형 요소를 탐색하는 두 개의 상이한 관점과 시간을 함께 전시한다. 그리고 되묻는다. 우리가 중요하다고 믿는 것, 정도라 여기는 것, 아름답다고 정의한 것들은 과연 무엇인가? 그 반대편, 소외되고 무용하다고 간주된 것들은 왜 그렇게 되었는가? 조각의 뒷면, 콘크리트의 자국, 시멘트의 잔흔, 상처 입은 표면은 미적 가능성이 없는가?
그러한 생각의 실타래 속에서 보는 이는 무심코 지나쳤던 풍경 속을 다시 응시할 수 있는 힘을 기른다. 침묵하는 재료의 물성을 매개로 감각의 권력 구조와 가치의 위계를 비평할 수 있게된다. 미를 재정의하자, 라는 현대예술의 선언은 시시하다. 무엇을 어떻게? 라는 팔로우업 퀘스쳔이 없다면 진부한 외침이다. 우리는 이제 존재의 조건으로서의 보잘것없음, 무용함, 비가시성을 주목해보자. 배종현이 그린 비너스의 망가진 콘크리트풍 뒷모습과 시멘트 소재로 그린 도시의 지층회화를 보면서
또한 그 시선에 끝에 걸린 도시의 재개발 풍경을 보면서. 도시의 민낯. 씹창난 피부. 콘크리트. 풍화, 부식, 침식, 파열을 보면서. 생얼굴을 사랑할 수는 없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