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프린스턴대, 예일대 대학출판사 책 떨이세일할 때 산 책인데 생각난 김에 다시 읽어봅니다.


2차대전때 미국정부에 고용되어 전략사무국(OSS)에 제출한 마르쿠제, 노이만, 키르하이머 등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구성원의 업무보고서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상적 흐름 속에 위치시키고 재구성해보는 책입니다. 보고서 번역 편집본의 1차 사료이기 때문에 읽으셨을 가능성이 없지만, 2차 해석서를 쓸 때는 반드시 참조해야하는 책이죠. 역사가에게 있서 1차사료는 카페의 커피머신 같은 필수재, 공장의 기계같은 설비시설같은 역할입니다.


전쟁 중 수집된 정보분석을 하는 과정이 나치박해를 피해 망명한 독일계 유대인 학자 세 명에게 사상의 형성과 발전의 불쏘씨개 역할을 해주었다는 게 제 인상입니다. 특히 1940년대 마르쿠제의 나치 독일에 대한 분석과 이해를 읽으면 그가 이후 1960년대에 급진적 아이콘으로 떠오르게 되는 과정에서 중심테마로 자리잡게 될 문제를 어떻게 선취하고 있었는지를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하버마스나 니클라스 루만 같은 이후 세대의 글에서 보이는 사회시스템 전체에 대한 구조적, 메타인지적 견해의 (지금도 별로 바뀌지 않은) 초창기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방법론과 이론이 당면한 구체적 현실분석(도표 등)과 결합되어 히틀러의 제3제국에서 자본, 기술, 군국주의, 정치, 문화, 반유대주의 간의 복잡한 상호작용에 대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나치즘을 하나의 사회경제적 체제로서 상세히 분석하고 나치즘에서 반유대주의가 수행하는 역할을 규명하며 전후 독일을 사회주의적 경제체제를 갖춘 민주주의 정치 체제로 재건하기 위한 일관된 구상을 만듭니다.


마르쿠제 등의 일원이 독일 파시즘에 효과적으로 맞서기 위한 대응방안을 구체적인 제시한 이 로메테리얼들은 프랑크푸르트학파 비판이론에 대한 흥미로운 창을 열어주죠.


비단 대전중 뿐 아니라 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예컨대 탈나치화와 뉘른베르크 재판준비를 포함한 전후 연합군 정책 수립에 기여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마르쿠제와 다른 두 명의 행보가 달랐고 달랐기에 다른 독해와 평가가 가능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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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아카데미아에서 얻은 학술지 리뷰 글을 챗지피티로 요약한 버전

From Critical Theory to Psychological Warfare:

How Frankfurt School Intellectuals

Fought the Nazi Enemy

Ulrich Plass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정보기관을 재편하고 확장했다. 도노반(William J. Donovan)의 주도로 1942년 6월에 전략정보국(OSS)이 설립되었고, R&A(Research and Analysis) 부서가 중심 역할을 맡았다. 이 부서는 유럽 출신 지식인들을 포함한 학자들을 모집해 학제 간 연구를 수행했으며, 이는 전쟁 이후 미국 사회과학의 기반이 되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네우만(Franz Neumann), 마르쿠제(Herbert Marcuse), 키르히하이머(Otto Kirchheimer)는 R&A의 중부유럽 섹션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 특히 네우만은 1943년부터 부서의 부책임자로서 15명 정도의 학자들과 함께 나치 점령 하 유럽의 상황 분석과 전후 재건 정책을 제안하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세 명의 학자는 독일 좌파의 붕괴 이후 미국 정보기관에서 반파시즘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들의 워싱턴 근무는 프랑크푸르트 연구소의 재정 악화와 해고 등의 배경에서 비롯되었다. 마르쿠제는 원래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학문적 연구를 하길 원했으나, 정보국으로부터의 채용 요청으로 인해 입사했고, 심리전 관련 문서를 작성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Laudani의 책에는 나치 독일의 패배, 반체제 가능성, 탈나치화 전략에 관한 보고서들이 포함돼 있다. 네우만과 키르히하이머는 나치 인사의 해임과 독일 행정 시스템의 개혁을 주장했으나, 일부 낙관적인 전망은 현실을 과소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마르쿠제는 독일 내부에 민주주의적 저항이 존재한다고 믿었으며, 공산주의 지하 조직의 활약에 주목했다.



전후 나치 지도자들에 대한 법적 책임 문제에서 키르히하이머와 헤르츠는 구체적인 명령 없이도 정책 실행에 관여한 인물들에게 형사책임을 물을 수 있는 새로운 책임 개념을 제안했다. 이는 나치 유대인 학살과 관련된 구조적 책임을 규명하려는 시도로, 나치 정책에 기여한 모든 관리에게 책임을 묻자는 주장이었다.



마르쿠제는 22만 명 이상의 나치 관련자 명단을 제공했으나, 탈나치화가 실패하고 미국의 주적이 소련으로 바뀌자 많은 프랑크푸르트 학자들은 정책에 영향을 주지 못한 현실에 실망했다. 헤르츠는 전후의 무력감을 회고하며, 미국 정부 내 이민 지식인의 영향력이 미미했다고 밝혔다.



전후 마르쿠제는 국무부 정보연구국에서 냉전기 공산주의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는 미국이 냉철한 사실 중심의 심리전을 통해 나치의 냉소적 이데올로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상적 가치보다 구체적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는 그의 입장은 기술적 합리성을 이용해 그 자체를 무너뜨리는 전략이었다.



OSS는 보고서에서 개인의 표현을 억제하고 집단 저작물로 다뤘지만, Laudani는 이 책에서 각 보고서의 개별 저자성을 복원했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단일한 학파처럼 묘사되는 것은 오해이며, 실제로는 다양한 이론을 가진 개인들의 느슨한 네트워크였다. 보고서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정식 학문 성과로 제시하는 것은 다소 과장된 해석일 수 있다.





다음은 링크에 있는 리뷰글을 챗 지피티로 요약한 버전


https://www.historicalmaterialism.org/the-frankfurt-school-against-the-nazis/


1. ‘New Left Guru’ with a ‘Scandalous’ Past?

1960년대 후반 허버트 마르쿠제는 신좌파와 반문화의 ‘구루’, 학생운동의 ‘아버지’로 간주되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다른 이론가들과 달리 자발적이고 반권위적인 투쟁을 지지했다. 그의 저서 『에로스와 문명』(1955)과 『일차원적 인간』(1964)은 성적 자유, 해방 문화, 개인과 사회의 총체적 해방, 억압 체제에 대한 ‘위대한 거부’ 등을 강조하며 당시 젊은 급진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2. 반면에 그에 대한 평가에는 분열이 있었다.

많은 이들이 그를 존경했지만, 어떤 이들은 그를 ‘수정주의자’, ‘관념론자’, ‘엘리트주의자’로 비판했다. 급변하는 1960년대 급진주의 환경에서 일부는 그를 CIA 요원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3. 이러한 CIA 관련 의혹은 처음에 미국의 마오주의 단체인 진보노동당(PLP)에 의해 제기되었고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1969년 로마에서의 강연에서 다니엘 콘-벤디트는 공개적으로 마르쿠제에게 CIA와의 관계를 캐물으며 도발했다.


4. 마르쿠제는 자신이 CIA 요원이라는 주장이 거짓이며 명예훼손이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그는 오히려 CIA와 미국 외교정책의 비판자였으며, 1950년대 초부터 FBI의 감시 대상이었고, 1960년대 중반부터 그 감시는 더욱 심화되었다.


5. 그러나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정부 소속으로 일한 경력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OSS(전략정보국)의 정치 분석가로 활동했으며, 1944년 나치당 해산 선언문 초안을 작성했다. 이는 1945년 5월에 발표된 공식 선언의 기초가 되었다.


6. 마르쿠제는 미국의 반히틀러 전쟁 참여를 반파시즘 투쟁으로 보았고, OSS에서의 활동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하지만 전쟁 후 OSS는 1945년 폐지되었고, 1947년에 냉전을 위해 CIA가 창설되었으며, 마르쿠제는 CIA에서 일한 적이 없었다.


7. A Place to Fight Fascism

마르쿠제의 전쟁 중 OSS 근무 경력을 이해하기 위해선 당시 미국의 반파시즘 정보기관 구성과 맥락이 중요하다. 1942년부터 미국은 OSS를 통해 체계적인 정보 분석을 시작했고, 이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와의 연관 속에서 설명될 수 있다.


8. 프란츠 노이만은 OSS에 먼저 참여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유대계 망명자였다.

그는 SPD 소속 법률 고문이자 런던과 뉴욕에서 학문 활동을 이어가다 1942년 OSS에 합류했다.


9. OSS 산하 R&A(Research and Analysis) 부서는 1943년 초 창설되었으며, 1,200명 이상의 인원을 고용했다.

그중 좌파 학자들도 다수 있었으며, 반유대주의적 편견이나 정치적 경향이 승진에는 영향을 주었으나, 채용 자체를 막진 않았다.


10. 노이만은 곧 중앙유럽부 부국장이 되었고, 마르쿠제는 1943년 3월 그 팀에 합류해 독일 분석 책임자가 되었다.

이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재정난을 완화하고자 한 결정이기도 했다. 마르쿠제는 기관을 떠나는 데 주저했지만 결국 정부 일을 선택했다.


11. 마르쿠제, 노이만, 키르히하이머는 OSS에서 비판 이론을 나치에 맞선 실천으로 적용했다.

『Secret Reports on Nazi Germany』는 이들이 작성한 30편 가까운 보고서를 수록하고 있으며, 이 자료들은 1970년대 중반에 비밀 해제되었다.


12. 이 보고서들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전쟁 시기 활동과 이후 신좌파 및 현대 비판 이론과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편집자 라파엘 라우다니는 문서들의 작성자를 분석을 통해 구분했으며, 이 자료는 기존 연구들과 상호보완적인 의미를 가진다.


13. Who Makes the Nazis?

OSS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분석가들은 나치 방송, 도서관 자료, 정보기관 보고서, 전쟁포로 심문 등 다양한 출처에 접근할 수 있었다.


14. 이들은 나치 체제 내 인물 변화, 시민 사기, 공습의 심리적 영향, 반나치 지하조직 등을 분석했다.

보고서는 이론적 언어 대신 실용적 언어로 작성되었지만, 이들은 비판적 사고에 기초하여 자료를 조직했다.


15. 그들의 보고서는 실용성과 이론을 결합해 미국 정부에 정책 제안을 했으며, 일부는 내부 정치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들의 급진적인 제안은 대부분 수용되지 않았다.


16. 한 예로, 마르쿠제는 나치 경제 체제에 기여한 1,800명의 기업인 목록을 작성해 경제적 전범으로 기소할 것을 제안했다.

이는 단순한 정치/군사적 제거를 넘어, 나치즘의 경제적 기반까지 제거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17.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전체주의적 지배 시스템을 자본주의, 스탈린주의, 자유민주주의 모두에 걸쳐 분석했으며, 독일 특수론을 거부했다.

하지만 학파 내에서는 나치 체제에 대한 해석에서 견해차가 존재했다.


18.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폴록은 나치즘을 시장이 제거되고 권력욕이 지배하는 ‘국가자본주의’로 보았다.

이들은 미국의 ‘관리자 자본주의’도 유사한 구조로 파악하며 문화적·심리적 요소의 분석도 중시했다.


19. 반면 마르쿠제, 노이만, 키르히하이머는 나치즘의 핵심을 경제적, 자본주의적 구조에서 찾았다.

이들은 파시즘이 자본주의 위기와 계급투쟁을 통제하기 위한 지배계급의 해법이라고 보았다.


20.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전체주의 하에서도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재생산이 가능하다는 모순에 주목했다.

이러한 분석은 오늘날 생태운동 등 급진적 정치 담론에도 여전히 의미가 있다.


21. 나치 체제의 자본주의 분석 (노이만의 『베헤모트』)

노이만은 OSS 입직 전인 1942년에 발표한 저서 『베헤모트』에서 나치 체제를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지속 및 심화로 보았다. 그는 나치 독일이 관료제와 인종주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대중을 통제하면서도, 독점 자본주의를 강화하고 중산층과 노동계급의 지위를 약화시키며 산업 자본가의 권력을 확대했다고 분석했다.


22. 나치 경제의 구조와 대중 통합 전략

노이만은 나치가 노동조합을 파괴한 후, ‘완전고용’과 인종주의적 대중문화를 통해 독일 국민을 국가에 통합시키고, 이들을 대규모 산업체계에 맞춰 재편함으로써 국가와 독점 기업의 이익을 극대화했다고 주장했다.


23. 반유대주의 해석에 대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내부 이견

1943년, 노이만은 나치의 반유대주의가 단지 유대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더 광범위한 억압 전략의 선봉(‘spearhead’)이라고 주장하며 OSS를 설득했다. 그는 유대인의 박해가 폴란드인, 체코인, 프랑스인, 반나치 독일인 등 더 넓은 대상을 향한 박해의 전조라고 분석했다.


24. 반유대주의의 정치적 해석 문제

노이만의 분석은 유대인 대학살(Judeocide)의 고유성을 강조해야 하는지, 혹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모든 희생과 어떻게 균형 있게 다뤄야 하는지 등 논쟁적 쟁점을 건드렸다.


25. 로벤탈의 ‘희생양 이론’과 마르쿠제 설득

로벤탈은 『계몽의 변증법』의 ‘반유대주의의 요소들’ 장을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작업하며 마르쿠제에게 노이만의 분석이 문제적임을 설득했다. 그는 나치의 반유대주의는 국민의 불만과 공포를 돌리는 ‘희생양 전략’이었다고 보았다.


26. 전쟁 말기의 공통 인식과 뉘른베르크 재판 기여

프랑크푸르트 학파 내 인물들은 여전히 관점 차이는 있었지만, 나치의 반유대주의가 독일인을 나치와 동화시키거나 처벌받게 만드는 수단이었다는 점에는 공감했다. 이들은 유대인에 대한 범죄와 대학살의 증거 수집에 기여했고, 이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27. 전후 독일 재건과 정책 제안

이들은 전후 독일 붕괴를 예측하는 보고서를 다수 작성했고, 전후 재건 방향에 대해서도 논쟁에 참여했다. 마르쿠제는 1차 대전 이후의 처벌적 접근(예: 독일 농업화) 재현을 반대했다.


28. 미국 정책 비판과 소련의 영향 경고

1943년 마르쿠제는 독일인이 독립성을 유지한 채 나치를 전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지 않은 것이 미국 심리전의 치명적 실책이라 지적했다. 그는 소련이 나치 반대 세력을 포섭할 수 있다고 경고하며, 미국이 개입하지 않으면 소련이 독일을 지배하게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29. 경제 전범과 법조계의 면죄 문제

프랑크푸르트 학자들은 고위 정치·군사 인사뿐 아니라 경제적 협력자들도 기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반영되지 않았다. 많은 경제 전범들이 전후 독일에서 다시 요직을 맡았고, 법조계도 대부분 정화되지 않았다.


30. 네우만의 사임과 OSS의 해체

이런 좌절 속에서 네우만은 전범 연구팀 수장에서 사임했고, 이후 학계로 전향했다. OSS는 1945년 해체되었고, 마르쿠제와 키르히하이머는 국무부 산하 정보 부서로 전근되었지만 냉전이 심화되며 이 부서도 공산주의 연루 혐의로 위협받았다.


31. 마르쿠제의 실망과 전환점

마르쿠제는 아내 소피의 암 투병으로 워싱턴을 떠날 수 없었고, 국무부 내 역할도 점차 의미를 잃었다. 1949년에는 공산주의 위협이 과장되었다는 보고서를 제출했으나, 정책에는 반영되지 않았다.


32. 학계 복귀와 프랑크푸르트 학파와의 거리

1951년 소피가 사망한 후, 호르크하이머 등은 프랑크푸르트로 돌아갔지만 마르쿠제는 학파의 정식 일원이 되지 못했다. 그는 미국 대학에서 일자리를 구하며 학계 활동을 시작했다.


33.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질문들과 비판 이론의 힘

이 책은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나치즘의 ‘이데올로기적’ 외양 뒤에 있는 사회적·경제적 논리를 분석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나치는 전통을 파괴하고 현대적 기술과 통제, 통합경제 체계를 동원해 목표를 달성하려 한 근대적 체제였다고 본다.


34. 이 보고서들이 제기한 중요한 이론적 질문들

저자들은 반복적으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핵심 질문들—현대 사회의 구조, 급진주의적 개입 방식, 문화·심리적 요소와 사회적 흐름의 상호작용—을 염두에 두고 분석을 수행했다.


35. 비판 이론의 실제 사례로서의 『Secret Reports』

이 책은 자본주의, 기술, 문화 지배, 억압 정치가 어떻게 결합하는지를 분석한 사례로, ‘전체 사회화(total socialisation)’라는 개념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36. 마르쿠제의 기술사회 비판과 생태정치의 선구적 통찰

비록 이 책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마르쿠제의 1941년 논문 「현대 기술의 사회적 함의」는 기술합리성이 비판적 사고를 억누르는 구조를 보여주며, 『일차원적 인간』 및 1970년대 생태정치 비판으로 이어진다. 그는 기술이 전체주의적 지배 도구가 되는 가능성을 경고했다.


37. 결론: 오늘날을 위한 교훈

오늘날 ‘파시즘’이나 ‘극단주의’라는 개념이 자주 남용되는 상황에서, 『Secret Reports』는 개념의 남용이 아니라, 철저한 비판 이론을 바탕으로 실질적 설명력을 지닌 분석과 정치적 실천을 지향해야 함을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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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는 인간을 먹고 자란다 - 인공지능 신화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노동자들
마크 그레이엄.제임스 멀둔.캘럼 캔트 지음, 김두완 옮김 / 흐름출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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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은 무엇인가?

수학으로 무엇을 배우고 있을까?

도대체 수학은 왜? 왜? 공부할기 어려울까? (감정 과잉 버전)

에 대한 시민들의 가지각색 왁자지껄 답변이 재밌다.

지금은 끝난 광주시립미술관 전시다.


작년 여름에 했던 우주의 언어 - 수의 포스트잇 코너

게시판에 가서야 진실된 목소리가 들린다


수학 공부, 어떻게 해야 즐겁게 할 수 있을까?

에 대한 답변이 인상적이다.

"그런 방법은 없다. There is no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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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개관한 국내 최초 사진전문 서울시립사진미술관에 다녀왔다. 창동역 바로 앞에 위치해있고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과 멀지 않은 편이다. 올해 말에 서서울 미술관과 63빌딩 아쿠아리움 자리에 한화 퐁피두센터도 개관하니 미술계는 풍년이자 호재다.


그러니까 서울시립 미술관은 총 8지점 체제다. 본관 북서울 남서울 서서울, 메이저 4개에다가 아카이브 레지던시 백남준기념관 그리고 사진전문, 이렇게 주제별로 4개다. 다양한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는 제국, 다양한 장르의 F&B를 보유한 프랜차이즈와도 같아서, 효율적으로 운영한다면 미술계의 담론을 선도하고 예술의 공공성에 크게 기여를 할 것 같다.

구 벨기에 영사관을 리모델링한 건축과 조각의 남서울, 평창의 아카이브, 시청역 본관, 난지 레지던시와 종로 백남준 기념관. 그리고 문화시설이 없던 금천지역에 곧 개관해 기후, 젠더, 노동 등 당대 아젠다와 호흡하고 지역사회 연계성을 강화하려는 서서울. 확실히 서울로 문화자본이 쏠리게 되었다. 10년의 치열한 고뇌와 첨예한 논의를 거쳐 개관한 사진전문 미술관의 외부는 사진조리개의 개폐를 본땄다. 참고로 여의도 지하, 차지철이 몰래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지하벙커에 있더 SeMA벙커는 없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



왜 사진 전문이어야만 하는가? 에 대한 답은 3층에 있다. 전시된 한국 1세대 사진가들의 작품은 미학적으로도 아름답고 역사사료로서도 의미가 있다. 피사체, 구도, 빛과 그림자에 대한 전문적 이해가 있는 사진가가 1940-60년의 한국 모습을 담아 예술로서도 역사로서도 배울 가치가 있는 것. 무엇보다 사진을 사진답게 대우 했다는, 영어로 말하자면 do justice to photography했다는 데 중요성이 있다.

 


경성에서 조선인 최초로 사진전을 열었던 정해창의 사진 속 경성거리는 정비되지 않은 도로에 진흙탕길이라 돌맹이를 두고 징검다리를 만들어 건너가는 순간을 포착하며 저고리를 입은 조선여인의 피사체는 꽃나무 사이에 살포시 가려져 오늘날 인스타 사진과 구도가 같다. 2차대전이나 일제침략으로만 이해하던 40년대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임석제는 진남포제련소 제철공과 소작농 어르신, 단양광부를 포착해 거대서사는 지우고 노동자라는 인물에 집중한다. 


숙명여대 사진 동아리 초대회장으로 중앙공보관에서 여성사진가로서 전시회를 연 박영숙의 사진은 실험적이고 신체에 대해 피상적 이해를 넘고자한 시도가 보인다. 흑백사진에 조형성을 부각시킨 이형록과 더불어 이들의 사진은 어느 19-20세기 뉴욕사진가의 작품이라고 보아도 진배없다. 사진을 통해 전달하려는 감각에서만큼은 조선과 뉴욕이 자웅을 다툰다. 이를 통해 그 시절 우리에게 경제적 기반이 있었다면, 장비만 제공되었다면 흐드러지게 꽃 피웠겠지만 역사의 뒤안길로 푸석푸석 스러져간 안타까운 예술가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본다.


종전까지는 역사를 다룰 때 시각적 보조로서 사진으로만 이해해왔다. 역사책이나 박물관에서 텍스트 옆에 사진이 하나 배치되어 과거에 대한 시각적 상상력을 상기시키는 전달방식이다. 이는 텍스트가 우위인 상태에서 사진을 기록매체에 국한시키는 한계가 있었다. 역사 텍스트에 삽입된 회화, 사진 등의 시각정보는 보조적 역할에 그치다보니 자기 목소리를 내기 쉽지 않다. 


그러나 삽화로서 미술작품이 미술사학의 본령이 아니다. 왕조사에 시각자료를 보충하는데 국한된 것이 미술사가 아니다. 미술사와 역사학의 차이가 무엇이냐? 미술사는 미술이라는 물성을 중심으로 연속적인 네러티브를 엮어낸다. 물론 역사에도 과학사, 의료사, 경제사 등의 세부 주제사가 있다. 그러나 미술사는 역사학의 하위분과 학문으로서 주제사가 아니라 별도의 학과로서, 미술작품이라는 매체를 중심으로 스토리를 직조한다. 그러니 역사를 기준으로 삽화로서 미술을 포함하는 것과, 미술을 기준으로 역사와 함께 시각적, 문맥적 분석을 포함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무엇이 주이고 무엇이 부인가, 에 따라 네러티브가 달라진다. 


예컨대 1789년 프랑스혁명을 설명하면서 늘 외젠 들라크루아가 그린 민중으 이끄는 자유의 여신(라 리베르떼 기당 르 뾔쁠)이 곁가지로 등장한다. 회화작품으로서 설명은 없다. 미술사가 주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관계가 주기 때문이다. 드라마를 강조하기 위한 유화의 표현방법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 이러한 아쉬움을 제외하고도 1830년에 그려진 작품이라 1789년 그림이 아니며, 1830년은 제2차 혁명이라 프로파간다로서 더 과장되고 재해석되었다는 점은 종종 간과된다.


사진전문 미술관이 사진에 주목하며 조선사와 강점기를 다룰 때는 역사가 중심이 아니라 역사 속 인물의 구도, 배경, 매체적 특성에 더 방점이 있다. 조선 개항과 신미양요 이야기를 하는데 BT깃발(장군 수 깃발)을 전리품으로 획득해간 미군의 증빙사진을 보여주는 역사학의 접근방식과, 사진기법, 피사체의 구도, 인화술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피사체의 역사적 정보를 다루는 사진사의 접근방식은 차이가 있다. 이느 새로운 접근방식이고 따라서 새로운 향유방식을 요한다. 역사박물관에서 보듯 보는 작품이 아니다. 사진전문 미술관에 역사를 공부하러 가는게 아니라 사진을 보러가는 것이다.


AI의 도래가 반복노동하는 저임금 일거리를 앗아간 것처럼, 축음기와 레코더가 마을별로 펍에 하나씩 있던 적당한 음유시인 뮤지션의 일거리를 앗아간 것처럼, 사진은 초상화가들의 일거리를 앗아갔다. 비단 회화 일거리의 일부를 대체하는데 그치지 않고 사진은 순간적 감정을 기록하는 자서전이자 피사체의 순간과 구도을 실험하는 예술로서 자기 포지션을 형성해갔다. 예술로서 사진은 회화만큼의 깊이가 있어 예술적 감상이 된다.


예술로서 사진은 어떠한가? 뮤지엄한미삼청에서 보듯 국제정세를 정지컷 하나로 포착해 복잡한 이해관계에 의한 충돌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매그넘 특종사진가들과 무엇이 다른가? 빛에 대한 섬세한 이해와 더불어 마네킹으로 연작으로 시리즈화하며 예술로서 사진연작을 승화시킨 베르나르 포콩이나 북유럽 추위어린 설경의 순간을 포착한 펜티 사말라티와는 무엇이 다른가?


그에 대한 답은 2층에 있다. 늘어지는 고무의 탄성이나 에나멜 구두의 광택이나 입체의 선이 사라지는 조형 등으로 물성과 시선을 실험한 작품이나, 건축중인 몇 천 장의 사진미술관 레이어를 겹쳐서 디지털화한 사진이나, 건축중인 미술관 공사판에 와서 설치작품을 만든 듯한 사진 등이 눈에 띈다. 


또한 AI 머신러닝과 미드저니 등을 통해 기계가 무엇을 학습하는지 그것을 통해 인간이 몰랐던 포인트를 알아낼 수 있는지, 인간보다 꼼꼼한 태깅, 라벨링과 아카이빙을 통해 복수의 작품에서 제작자도 몰랐던 숨겨진 인사이트를 발견할 수 있는지 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4층은 포토라이브러리로 좋은 도록들이 많으나 지금은 읽는 자보다 사진찍는 사람들 천어서 과천 국현미처럼 조용하게 읽으려면 한 소끔 바이럴의 광풍이 지나가야 할 것 같다.


사진미술을 보고자하는 이들은 이제 석파정 사라란전, 회현역 피크닉, 북촌 뮤지엄한미삼청, 공근혜와 부산 랄프깁슨 사진관에 이어 창동역에 가면 되겠다. 물론 멀리 이동하지 않아도 엄지손가락만 움직이면 소셜네트워크에 사진은 넘쳐나지만 무엇을 볼지 어떻게 볼지 앞으로 사진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알고 싶은 사람들은 따로 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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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5-30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석파정 사라란전, 부산 랄프깁슨은 다녀왔는데, 창동역 가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글을매일씁니다 2025-05-30 20:32   좋아요 1 | URL
생각해보니 그라운드시소도 사진전이 있네요
감사합니다! 나날이 행복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