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개관한 국내 최초 사진전문 서울시립사진미술관에 다녀왔다. 창동역 바로 앞에 위치해있고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과 멀지 않은 편이다. 올해 말에 서서울 미술관과 63빌딩 아쿠아리움 자리에 한화 퐁피두센터도 개관하니 미술계는 풍년이자 호재다.
그러니까 서울시립 미술관은 총 8지점 체제다. 본관 북서울 남서울 서서울, 메이저 4개에다가 아카이브 레지던시 백남준기념관 그리고 사진전문, 이렇게 주제별로 4개다. 다양한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는 제국, 다양한 장르의 F&B를 보유한 프랜차이즈와도 같아서, 효율적으로 운영한다면 미술계의 담론을 선도하고 예술의 공공성에 크게 기여를 할 것 같다.
구 벨기에 영사관을 리모델링한 건축과 조각의 남서울, 평창의 아카이브, 시청역 본관, 난지 레지던시와 종로 백남준 기념관. 그리고 문화시설이 없던 금천지역에 곧 개관해 기후, 젠더, 노동 등 당대 아젠다와 호흡하고 지역사회 연계성을 강화하려는 서서울. 확실히 서울로 문화자본이 쏠리게 되었다. 10년의 치열한 고뇌와 첨예한 논의를 거쳐 개관한 사진전문 미술관의 외부는 사진조리개의 개폐를 본땄다. 참고로 여의도 지하, 차지철이 몰래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지하벙커에 있더 SeMA벙커는 없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
왜 사진 전문이어야만 하는가? 에 대한 답은 3층에 있다. 전시된 한국 1세대 사진가들의 작품은 미학적으로도 아름답고 역사사료로서도 의미가 있다. 피사체, 구도, 빛과 그림자에 대한 전문적 이해가 있는 사진가가 1940-60년의 한국 모습을 담아 예술로서도 역사로서도 배울 가치가 있는 것. 무엇보다 사진을 사진답게 대우 했다는, 영어로 말하자면 do justice to photography했다는 데 중요성이 있다.







경성에서 조선인 최초로 사진전을 열었던 정해창의 사진 속 경성거리는 정비되지 않은 도로에 진흙탕길이라 돌맹이를 두고 징검다리를 만들어 건너가는 순간을 포착하며 저고리를 입은 조선여인의 피사체는 꽃나무 사이에 살포시 가려져 오늘날 인스타 사진과 구도가 같다. 2차대전이나 일제침략으로만 이해하던 40년대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임석제는 진남포제련소 제철공과 소작농 어르신, 단양광부를 포착해 거대서사는 지우고 노동자라는 인물에 집중한다.



숙명여대 사진 동아리 초대회장으로 중앙공보관에서 여성사진가로서 전시회를 연 박영숙의 사진은 실험적이고 신체에 대해 피상적 이해를 넘고자한 시도가 보인다. 흑백사진에 조형성을 부각시킨 이형록과 더불어 이들의 사진은 어느 19-20세기 뉴욕사진가의 작품이라고 보아도 진배없다. 사진을 통해 전달하려는 감각에서만큼은 조선과 뉴욕이 자웅을 다툰다. 이를 통해 그 시절 우리에게 경제적 기반이 있었다면, 장비만 제공되었다면 흐드러지게 꽃 피웠겠지만 역사의 뒤안길로 푸석푸석 스러져간 안타까운 예술가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본다.
종전까지는 역사를 다룰 때 시각적 보조로서 사진으로만 이해해왔다. 역사책이나 박물관에서 텍스트 옆에 사진이 하나 배치되어 과거에 대한 시각적 상상력을 상기시키는 전달방식이다. 이는 텍스트가 우위인 상태에서 사진을 기록매체에 국한시키는 한계가 있었다. 역사 텍스트에 삽입된 회화, 사진 등의 시각정보는 보조적 역할에 그치다보니 자기 목소리를 내기 쉽지 않다.
그러나 삽화로서 미술작품이 미술사학의 본령이 아니다. 왕조사에 시각자료를 보충하는데 국한된 것이 미술사가 아니다. 미술사와 역사학의 차이가 무엇이냐? 미술사는 미술이라는 물성을 중심으로 연속적인 네러티브를 엮어낸다. 물론 역사에도 과학사, 의료사, 경제사 등의 세부 주제사가 있다. 그러나 미술사는 역사학의 하위분과 학문으로서 주제사가 아니라 별도의 학과로서, 미술작품이라는 매체를 중심으로 스토리를 직조한다. 그러니 역사를 기준으로 삽화로서 미술을 포함하는 것과, 미술을 기준으로 역사와 함께 시각적, 문맥적 분석을 포함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무엇이 주이고 무엇이 부인가, 에 따라 네러티브가 달라진다.
예컨대 1789년 프랑스혁명을 설명하면서 늘 외젠 들라크루아가 그린 민중으 이끄는 자유의 여신(라 리베르떼 기당 르 뾔쁠)이 곁가지로 등장한다. 회화작품으로서 설명은 없다. 미술사가 주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관계가 주기 때문이다. 드라마를 강조하기 위한 유화의 표현방법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 이러한 아쉬움을 제외하고도 1830년에 그려진 작품이라 1789년 그림이 아니며, 1830년은 제2차 혁명이라 프로파간다로서 더 과장되고 재해석되었다는 점은 종종 간과된다.
사진전문 미술관이 사진에 주목하며 조선사와 강점기를 다룰 때는 역사가 중심이 아니라 역사 속 인물의 구도, 배경, 매체적 특성에 더 방점이 있다. 조선 개항과 신미양요 이야기를 하는데 BT깃발(장군 수 깃발)을 전리품으로 획득해간 미군의 증빙사진을 보여주는 역사학의 접근방식과, 사진기법, 피사체의 구도, 인화술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피사체의 역사적 정보를 다루는 사진사의 접근방식은 차이가 있다. 이느 새로운 접근방식이고 따라서 새로운 향유방식을 요한다. 역사박물관에서 보듯 보는 작품이 아니다. 사진전문 미술관에 역사를 공부하러 가는게 아니라 사진을 보러가는 것이다.
AI의 도래가 반복노동하는 저임금 일거리를 앗아간 것처럼, 축음기와 레코더가 마을별로 펍에 하나씩 있던 적당한 음유시인 뮤지션의 일거리를 앗아간 것처럼, 사진은 초상화가들의 일거리를 앗아갔다. 비단 회화 일거리의 일부를 대체하는데 그치지 않고 사진은 순간적 감정을 기록하는 자서전이자 피사체의 순간과 구도을 실험하는 예술로서 자기 포지션을 형성해갔다. 예술로서 사진은 회화만큼의 깊이가 있어 예술적 감상이 된다.
예술로서 사진은 어떠한가? 뮤지엄한미삼청에서 보듯 국제정세를 정지컷 하나로 포착해 복잡한 이해관계에 의한 충돌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매그넘 특종사진가들과 무엇이 다른가? 빛에 대한 섬세한 이해와 더불어 마네킹으로 연작으로 시리즈화하며 예술로서 사진연작을 승화시킨 베르나르 포콩이나 북유럽 추위어린 설경의 순간을 포착한 펜티 사말라티와는 무엇이 다른가?



그에 대한 답은 2층에 있다. 늘어지는 고무의 탄성이나 에나멜 구두의 광택이나 입체의 선이 사라지는 조형 등으로 물성과 시선을 실험한 작품이나, 건축중인 몇 천 장의 사진미술관 레이어를 겹쳐서 디지털화한 사진이나, 건축중인 미술관 공사판에 와서 설치작품을 만든 듯한 사진 등이 눈에 띈다.



또한 AI 머신러닝과 미드저니 등을 통해 기계가 무엇을 학습하는지 그것을 통해 인간이 몰랐던 포인트를 알아낼 수 있는지, 인간보다 꼼꼼한 태깅, 라벨링과 아카이빙을 통해 복수의 작품에서 제작자도 몰랐던 숨겨진 인사이트를 발견할 수 있는지 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4층은 포토라이브러리로 좋은 도록들이 많으나 지금은 읽는 자보다 사진찍는 사람들 천어서 과천 국현미처럼 조용하게 읽으려면 한 소끔 바이럴의 광풍이 지나가야 할 것 같다.

사진미술을 보고자하는 이들은 이제 석파정 사라란전, 회현역 피크닉, 북촌 뮤지엄한미삼청, 공근혜와 부산 랄프깁슨 사진관에 이어 창동역에 가면 되겠다. 물론 멀리 이동하지 않아도 엄지손가락만 움직이면 소셜네트워크에 사진은 넘쳐나지만 무엇을 볼지 어떻게 볼지 앞으로 사진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알고 싶은 사람들은 따로 있을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