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상수 감독의 33번째 영화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What Does That Nature Say to You 보고 왔다
권해준 부캐 최준이 배꼽냄새나는 병맛이라면 홍상수는 엄지와 검지발가락 가운데 낀 때 같은 시큼한 병맛에 가깝다. 아는 맛인데 어쩔 수 없이 매번 찾아본다. 일단 매몰비용이 아까워서다. 33번까지 봤는데..
하지만 지속적인 관람의 중요한 이유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소셜 코멘터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훗날 예술작품의 하나로서 특정 시대의 사회상에 대한 르포연구 사료가 될 것으로 본다. 있을 법한 캐릭터로 일반적인 마음을 그렸다. 일반적이라는 것은 대표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런 모습의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인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군상의 일부를 포착했다는 뜻. 대표성이나 보편성이 아니라 부분집합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 있을 법한 한 그 부분집합이 꽤 설득력 있는 편이다. 그래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사료에 기반해 사실관계를 전달하려고 하는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플롯에 기반해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픽션 네러티브가 아닌 또 다른 새로운 영역, 즉 소셜 코멘터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진명 소설에는 늘 대학에 의지하지 않고 도서관에서 독서하는 재야지성인 캐릭터가 나오듯 거의 대부분 홍상수 영화에는 꿍한 열폭 캐릭터와 별 생각 없이 말을 좀 밉게 하는 캐릭터가 나온다. 배우들에게 상황만 주고 알아서 대사를 만들어 연기하게끔하고 자신은 카메라 화면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어색한 대화가 가득한 롱테이크와 비디오 캠코더의 줌인줌아웃 사용도 변함없다.
비디오가 없던 조선시대와 있어도 기록매체로서 일부만 사용했던 개화기, 일제시대에 당대 사회상을 기록하 것은 텍스트였다. 그래서 대화와 인물이 있는 문학작품을 토대로 한국문학사를 쓰고 시대의 변화를 통찰하는 것은 일리가 있다. 미술사도 미술작품으로 통사를 써서 트렌드의 부침을 일변한다. 영화도 영화사가 있으나 이때 범죄도시나 부산행, 신과함께 같은 과장된 픽션이 우리사회를 대변한다고 볼 수는 없다. 일부 읽어낼 수 있겠지만 제한적이다. 한편 홍상수 영화는 인간군상, 양질의 대화 같은 소재가 한국예술문학사를 쓰기에 사료로 적합한 소셜 코멘터리다
만약 홍상수 영화의 관객이 하보우만이나 건국전쟁이나 일본애니나 공포나 퀴어처럼 특정 연령, 성별, 지역에 몰려있다면 영화의 소구력에 대해 의심해볼만할텐데 내가 지금까지 그의 영화를 봤던 영화관 건국대 시네마테크, 이대 아트하우스 모모, 명동역 시네라이브러리 등등에서 20대 여성에서 60대 남성까지 다양한 카테고리의 사람들을 보았었다. 물론 이것도 지역은 서울한정이며 내 개인경험에 의존한 것이지만 홍상수 감독이 그리는 캐릭터가 호불호가 갈릴지언정 아예 없는 인물이라고 볼 수 없다는 말이다. 오히려 너무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이어서 놀랄 수는 있어도.
대부분 롱테이크로 구성된 컷에 로케도 개인 자택(강성희네집?)과 신륵사와 보리밥집 세 개다. 컷은 총 35개로 셌다. 음악은 산정상 벤치에 누워 달보며 담배피우는 32번과 국도에서 프라이드 자동차 퍼져서 보넷 올려둔 35번에만 삽입되어 있다. 권해효가 기타치는 두 컷 제외.
컨테이너 아지트에서 부부가 동화의 부족함을 논하는 26, 28번 컷 사이로 25,27,29번은 동화가 술에서 깨어 화장실 갔다가/나왔다가/컨테이너 지나가는 컷인데 부부의 대화를 엿들었다면 새로운 갈등관계가 만들어질 것을 그렇지 않아서 기승전결의 네러티브가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술깸-부부 뒷담-화장실찾아들어감-부부 뒷담-화장실에서나옴 이런 순서로 삽입되었다는 것은 묘한 일이다. 3막 신륵사 앞 준희가 지나가는 16번 장면이 가장 짧은 컷이다.
부르디외의 제자 지젤 샤피로가 쓴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 라는 책을 감명깊게 읽은 사람이라면 홍상수 감독의 사적생활에 대해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이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고 별도의 논의가 필요한 사안이다. 비슷한 캐릭터에 비슷한 영화를 찍어낸다는 진부함, 호불호가 갈리는 캐릭터, 시큼한 병맛에 더해 감독의 여러 논란까지 합쳐서 작품에 대한 평가는 극단으로 갈릴 것 같다. 좋다 나쁘다를 넘어 내가 조금 더 초점을 맞추는 것은 영화의 소셜 코멘터리로서 기능에 국한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홍상수의 영화가 이 사회의 보편성을 다룬다고 보지 않고 외려 특수성을 다룬다고 보고 있으며, 캐릭터가 대표성을 지닌다기보다 개별성을 지닌다고 본다. 그러하기에 설득력을 지닌 특수성과 개별성이 일반적인 마음을 다루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반적인 마음의 순간들은, 특히 독일 같이 그에게 각본상, 감독상, 심사위원대상 등을 준 외국에서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해줄 것이다. 한국학과와 영화과가 설치된 대학에서 그의 작품을 토대로 한국을 들여다보려고할 것이다. 그정도로 대화나 상황은 정말 있을 법한, 베리시밀리튜드(verisimilitude, 핍진성)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말 편하게 놓으세요 그럴까? 하는 장면에서
프랑스관객은 vous→tu로 변환하는 tutoyer의 모먼트를 볼 것이다. 독일관객은 Sie→du로. 유럽사회의 존칭 전환은 사회적 지위와 관계 없고 자신을 기준으로 친하냐 안 친하냐의 심리적 거리가 기준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일단 위치, 나이, 계급이 기준이 되기도 하거니와 상호 친근함이 아니라 위가 아래를 향해 말 편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프: On se tutoie, non ?
독: Wir duzen uns, oder?
같은 번역어가 성립될 수가 없다. 둘 다 우리 "서로" 말 놓을래? 이지 "나보다 나이 많은 아버님'만' 저에게 말 편하게 하세요 저는 계속 존칭쓸게요"라는 말이 문화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준희가 아빠한테 쓰는 어투와 표현의 다름, 아내가 남편과 딸남친에게 쓰는 어투와 표현의 다름, 남편이 딸과 아내에게 쓰는 어투와 표현의 다름, 술문화, 제사문화, 기와불사 같은 것도 모두 공부대상이다. '그럴 것 같습니다' 라는 요즘의 말투도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