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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런 벽지
샬럿 퍼킨스 길먼 지음 / 내로라 / 2021년 4월
평점 :
만약 이 책에 대한 설명을 하나도 알지 못한 채로 읽기 시작했다면.... 아마 공포 소설인 줄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중반 이후부터는 천천히 정독을 했음에도 어느 순간 헉! 하고 숨을 들이쉴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장면은 기괴하다고 할 수밖에. 그 시대에 처음 이 소설이 발표된 후 의사들로부터 충분히 항의 글을 받을 수 있었음이 이해되는 부분이다.

책은 시작 부분에 "누런 벽지를 쓴 이유"로 시작하여 <누런 벽지> 본문은 일기 형식으로 첫 번째 일기부터 열 한 번째 일기까지가 본문이다. 그 뒤로는 작가인 샬럿 퍼킨스 길먼에 대한 설명이 두 장 정도, 휴머니즘에 대한 설명과 작가와 소설 속 주인공이 처방받았던 "휴식 치료법"에 대한 설명이 있다. 그렇게 이 짧지만 깊은 소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된다.
사실 이 소설은 단편이다. 그래서 길지 않다. 한 손에 쏙 들어올 정도의 크기로 125페이지밖에 되지 않고 그나마 왼쪽 페이지는 영어로, 오른 페이지는 한글로 된 영한 편집판이다. 영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대체로 오른 페이지만 읽어서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는데 잠깐씩 왼쪽 페이지로 눈길이 가도 그리 어려운 영어가 아닌 걸로 보면 영어 공부를 하시는 분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다.
자, 본문으로 들어가 볼까?
'나'는 의사인 남편 존과 자신의 집을 고치는 동안 여름 한철 동안 유서 깊은 대저택을 얻어 지내게 된다. 이 집은 굉장히 크고 아름답지만 비워진 지 오래된 집이라 어딘가 이상한 점이 있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느껴지는 집. 나는 그런 느낌에 대해 남편에게 이야기하지만 무척이나 현실적인 남편은 한마디로 무시해 버린다.

처음에 나의 상태는 그저 조금 예민해서 불안하고 우울했다. 남편은 그저 자꾸 쉬라고, 신선한 공기를 쐬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며 동생에게 집안일을 맡기고 아기도 '나'에게서 분리시킨 채 "완전히 건강해질 때까지 모든 '일'을 절대 금지"(...27p)시킨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지내게 된 방의 누런 벽지가 신경쓰이게 되고 그것에 대해 여러 번 남편에게 이야기하지만 그때마다 남편은 일을 쉬라고만, 낮잠을 자라고만 이야기한다. 급기야 '나'는 남편과 시누이,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벽지를 하루종일 관찰하고 함께 행동하기 시작한다.

벽지가 공포가 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어릴 적 우울하거나 다소 침울했을 때의 내겐 오히려 같은 무늬가 반복된 벽지가 장난감 같은 거였기 때문이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것 같은 최면 상태가 느껴지기도 했고 그러면서 위로가 되기도 했고 그러다 잠들고 일어나면 한결 나아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정신적 묘사가 정말 뛰어나다. 처음엔 빛바랜 누런 벽지의 관찰에서 시작되었지만 이윽고 그 안에 비친 무언가에게로 옮겨가고 그 무언가로부터 자신의 행동으로까지(스포가 될까 조심스럽다...ㅠㅠ) 이어지는 과정이 정말로 탁월해서 정신분석학에 대해 잘 모르는 나조차도 오싹해지는 기분이다.
앞부분 "누런 벽지를 쓴 이유"에서 작가는 분명 <누런 벽지>는 자신의 완전한 경험담은 아님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분명 자신의 산후우울증에서 비롯된 경험을, "파멸의 문턱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것을 기뻐하며 그 주장을 생생히 그려 내기 위해 장식을 달고 첨가제를 섞었다"(...17p)고 말이다. 그러니 이 소설은 분명 자전적 소설이라 할 것이다. 휴식 치료법은 말 잘 듣는 여성, 아내로 만들기 위해 그 시대 의사들이 만들어 낸 치료법으로 이 소설로부터 그 치료법이 사라지게 되었다니 그야말로 다행이 아닐 수가 없다.
#월간내로라 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는데 무척 인상적이다. 다른 작품들도 한 번 읽어보고 싶어졌다.
*이 후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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