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절한 균형 아시아 문학선 3
로힌턴 미스트리 지음, 손석주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세상의 다수는 소수의 힘에 의해 자유를 짓밟히고 유린당하며 살아간다. 그들에게 지워 진 타고 난 운명은 어떤 노력으로도 변화되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맞서 싸운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불변의 법칙일까?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고 국가를 만들고 권력이 잉태되면서부터 파생된 계급문화는 불확실성의 산물이다. 권력에 대한 욕망은 어느 체제를 막론하고 강자에게로 집중되는 현상은 비일비재하다. 계급이 분화되고 계층을 이루는 주된 동기 또한 그 몫의 크고 작음을 떠나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욕망에서 분출한다. 노암 촘스키는 축적된 소수의 힘은 불안한 다수를 동조하고 굴복시키기 위해 정치를 이용한다고 말했다. 정치는 종교와 결탁하고 민족주의를 부추기고 파시즘으로 흐를 때 부패의 정도는 최고조를 넘어 선다. 이처럼, 정치적 환경이 다수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패배감에 젖게 만드는 이유는 단련된 익숙함과 체념이다.

 

        굴복된 시간만큼 부패의 정도는 더 악랄해지고 맹렬해진다. 제도화된 폭력이 자행되고 부정부패가 공공의 가치를 넘어 트리며 정의가 실종된 세상은 희망이 없다. 다수의 희망은 사치다. 갈급 하는 기본적 욕구가 우선이며 사는 것이 먼저다. 계층의 바닥은 부패가 들짐승처럼 배회한다. 이 책 <적절한 균형>은 아이러니컬한 현실이야기다. 알다시피 인도는 카스트제도의 신분계급이 뿌리 깊게 박힌 국가다. 불가촉천민의 바닥 끝 계층은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산다. 먹고 자는 기본적인 1차적 욕구를 해갈하기도 바쁘다. 그들에게 실종된 존엄성은 억압과 핍박의 산물이다. 이러한 기이한 사실은 비단 인도만의 이야기는 아니겠다. 오랜 봉건주의체제동안 여러 나라가 그랬고 유신정권 당시 우리나라가 그랬으며 수없이 많은 국가들이 거대 권력의 부패에 힘들어 했다. 이 책의 저자는 이러한 신분사회의 폐단과 인간성 실종, 권력의 부패, 폭력의 광기, 가난의 불평등을 소재로 세세하게 그려 냈다. 그의 사실적 표현주의에 입각한 조밀한 행동묘사는 저자의 눈과 귀를 독자에게 모두 내어주며 세상을 향해 소리친다. 이 미쳐 돌아가는 광기로 물든 세상을 직시하라고. 

 

        이야기는 주요등장인물 디나, 마넥, 이시바, 옴프라카시 4명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들은 각기 다른 환경에서 트라우마를 안고 성장한다.  뱉어 낼 수 없는 아픔을 연대하고 있는 그들로부터 모종의 동질성을 갖는다. 마넥은 전통을 고수하는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디나는 보수적이고 사악한 오빠와의 갈등으로, 이시바는 불가촉천민에 대한 사회 편견의 갈등으로, 옴프라카시는 아버지 나라얀과 지주와의 대립으로 인해 비열한 폭력에 처참히 살육 가족해체의 비극을 겪은 신분사회와의 갈등으로 모두에게 소외된 하층민의 삶을 산다. 저자는 이들을 통해 다양한 사회현상을 폭로하고자 했다. 비상식은 상식을 압도하고 거짓은 진실을 비웃는다. 과거는 미래가 되고 미래는 과거가 되어 시간은 전복된다. 이러한 암울한 상황에 처한다면 그들의 아픔과 고통은 글이나 말로 표현하기에는 어림도 없다.

 

        어쩌면 사소한 우연이 또 다른 우연을 낳고 불행한 삶이 이어진다는 마넥의 대사는 이 책을 체념적으로 흐르는 현실의 무기력함을 대변하고 있는지 모른다. 인간의 사악함과 부패권력의 카르텔은 견고하고 높은 철옹성처럼 넘기 힘든 벽이다. 계급과 정치라는 명분으로 세워진 실체는 진실을 포섭하기에는 차갑고 너무 어둡다. 이 작품이 세태소설의 사실성에 기반으로 한다고 볼 때 주인공들에게 설정된 인생 역경은 사적인 영역을 넘어 사회적 문제를 반드시 포함하게 된다. 그것의 핵심은 차별이다. 상호관계가 야기할 수 있는 모든 차별을 뜻한다. 차별은 결국 인간을 향한 신뢰를 허물고 의심의 올가미에 갇히게 만든다. 이러한 사회현상에 따른 차별의 영향은 인간성 상실의 문제를 생산해 낸다.

 

        따라서 저자 로힌턴 미스트리가 이 책을 통해 던진 메타포는 인간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고발한 이야기임을 알게 된다. 하층민의 삶에 드리운 억압과 폭력, 거대 세력의 무자비함 등은 끝없는 분노로 들끓게 하기 때문이다. 분노에 처한 상황도 욕망의 차단 앞에서는 쉽게 변질된다. 소수가 다수를 굴복시키는 상황은 무지에서 오는 공백보다 불신에서 오는 공백이 더 크다. 이러한 상황적 장면은 이 책의 곳곳에 드러난다. 이시바와 옴이 살던 판자촌의 철거현장에서도, 종교 간 알력에 의한 대립에서도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어 버리는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상황이 자주 연출된다. 일종의 집단강박증세처럼 말이다.

 

        실제 마넥과 옴은 다른 성장환경에서 자랐으면서도 둘은 서로 잘 어울리는 끈끈한 우정을 보여준다. 하지만 강자의 논리에 희생된 옴의 장애를 방관하는 마넥의 모습에서 우정이 쉽게 변질되는 모습을 목도하게 된다. 이시바가 세상을 향해 타협하고 순리대로 흘러가기를 바라는 낙관적 자세도 포악한 그들에게서는 힘없는 반항의 몸부림이다. 또한 디나의 도덕률과 현실의 무관용 사이에서의 갈등은 살아가기 위한 또 하나의 방편처럼 그려진다. 이처럼 저자가 설정하고 만들어 낸 인물의 탁월한 심리 및 성격묘사가 이 책의 사실성을 배가시켜 주는 작용을 한다.  이는 미시적인 관점을 통해 거시적인 상황을 만들어간다는 것은 알고리즘의 치밀함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이 작품은 이러한 모든 치밀함의 건설이 오롯이 담고 있다고 하겠다.

 

        적절한 균형은 계급이 만든 수요와 공급의 논리에 따라 정해진 탐욕의 균형이다. 희망과 절망 사이의 균형,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균형은 무기력함에서 오는 결과다. 권력에 유린되고 계급에 억눌린 하층민의 울분은 희망의 꿈조차 어울리지 않는다. “희망이야 항상 있죠. 우리의 절망에 균형을 맞출 만큼 충분한 희망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린 끝장이죠.” (p.803) 자조 섞인 희망은 작은 장애에 불과하다는 머리털 수집장이의 말은 흡수되지 못하는 이질감이다. 이미 구조적 소외를 체득한 그들에게는 희망의 본질을 상실했다. 체념함으로써 날카롭게 삐죽삐죽 솟아오르는 원형질의 욕망을 억제하며 대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끼의 식사가 더 소중하고 처마 밑이라도 편안한 잠자리가 되는 비루한 현실이 더욱 소중한 하천민의 삶은 과거와 현재가 양립할 수 없는 오랜 아픔이다.

  

        한 남자의 엄지손가락 끝에 지지한 채 장대 위에 올라선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표정에서 인간의 이중성을 떠올린다. 이쪽과 저쪽의 경계는 변할 수 없는, 변한 적 없는, 지워 지지 않는 선이라는 결함을 남긴다. 계급과 권력이 해체되었지만 또 다른 권력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 누군가의 불행은 누군가의 행복이 되고 명분은 당위를 구실로 삼는다. 도시를 미화하기 위해 소박한 삶이 철거되고 인종을 순화시키 위해 이교도를 몰아내는 폭력적 상황은 당위의 실체가 멸실된 전형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정의에 대한 믿음은 어느 순간에도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힘의 근원임을 잊지 않는다. 바람 앞에 촛불처럼 가녀린 힘에 불과할지라도 그들의 삶을 지탱하게 하는 힘은 균열이 생길 것이라는 믿음이다. 부조리한 상황은 인간의 본질적인 관념이고 근원적인 태도임을 카뮈는 말했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이 책이 품은 균형의 의미는  부조리 속의 균형이다. 삶은 우연에서 기인하여 일파만파 퍼져 나간다는 비정형 질서만이 남는다. 그렇지만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는 그들에게서 우리는, 인간을 향한 내면의 깊은 울림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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