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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공주
카밀라 레크베리 지음, 임소연 옮김 / 살림 / 2009년 8월
평점 :
추리소설의 재미는 파편처럼 흩어진 범죄의 조각들을 그러모아 하나로 연결시키는 과정에 있다. 그렇게 모아진 흔적의 편린들은 하나의 연결고리를 형성하고 윤곽을 만든다. 여기서 다시 필요, 불필요로 나누어 추스르고 헤아리면 답이 완성되는 결과다. 그래서 그 과정이 재밌고 흥미진진하다. 이러한 구조에 탐닉하고 몰입하는 재미는 어떤 장르보다 추리소설이 앞서 있는지 모른다. 재미도 있거니와 숨 막히는 스릴과 서스펜스가 또한 매력이다. 이처럼 추리소설은 고도의 두뇌 플레이와 묘한 호승심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스웨덴의 작가가 쓴 작품은 읽은 것 중 기억의 굴곡에 깊이 각인된 책을 굳이 꼽으라면 단연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시리즈다. 생소한 지명과 낯선 이름이 이야기의 흐름을 매끄럽게 이어주지 못하는 단점이 있으나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이야기의 구조에 흥에 겨워 밤새 읽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그런데 이 책 <얼음공주>또한 상당히 다르면서도 유사한 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작품이다. 저자 카밀라 레크베리의 인생 경험과 정서적 섬세함이 골고루 배어 완성시킨 합작품이다.
세간에서는 그녀를 두고 애거서 크리스티를 잇는 차세대 천재작가라고 평한다. 압도적인 평가와 시선을 곧이곧대로 믿을 순진한 이가 있겠는가마는 그녀가 완성시킨 짜임애 있는 추론능력은 긴장감을 동반한 농익은 자태를 맘껏 뽐내고 남는다. 처참한 범죄의 현장이 남긴 흔적의 조각들을 따라 수사망을 좁혀 나가는 흥미진진함은 추리소설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자 즐거움이다. 근래에 들어 그 수요층이 두터워진 미국 드라마 CSI에서나 볼 수 있는 스릴과 심리적 긴장감이 그대로 재현되는 느낌이다.
이야기는 스웨덴의 작은 항구도시 피엘바카에서 펼쳐진다. 살을 에는 추위와 동토의 바람이 매섭게 휘몰아치는 조용한 마을에 젊은 상류층 여인 알렉스의 자살사건은 초미의 관심을 모으기에 충분하다. 현장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는 명제처럼 이야기의 궤적이 흘러가는 방향은 알 수 없는 미궁으로 내몬다. 하지만 이 책에서 펼쳐진 긴장구조는 의도적인 보이기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마치 이중함정의 덫을 쳐 놓고 긴강의 고삐를 죄어 올 것 같은 기분이다. 뭔가 존재할 것 같은 묵직한 긴장감이 의심의 가지를 모락모락 자라게 만든다.
하지만 너무 익숙해져 버린 구조탓일까? 아니면 미디어가 생산해 내는 극악무도한 범죄수사과정을 너무도 상세하게 보고 들어서 식상해져 버린 탓일까? 모든 일반적인 관점을 투사해서 본다면 이 책의 얼개는 한 꺼풀 낮춘 추리소설이자 로맨스소설로 비쳐진다. 이 책의 주인공 에리카와 파트리크의 러브라인이 형성하는 멜랑꼴리한 상황도 그렇고 에리카를 둘러싼 연정의 삼각관계도 그렇다. 차라리 살인으로 빚어진 진정한 사랑찾기에 나서는 모습이니 말이다.
그러나 자세히 가만가만 드려다 보면 이 작가의 비범함이 고스란히 스며 있음을 은연중에 발견하게 된다. 인간의 심리 본성에 내재된 분노, 원망, 갈등, 번민에 대한 집착이 씨앗이 되어 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 유발하는 인과관계는 인간이 만든 심리적 원인이다. 인간이 가진 음습한 본성에 덮인 두꺼운 막을 걷어내면 나약하기 짝이 없는 벌거숭이가 된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주변인이 범인으로 밝혀진다면 더욱 충격의 무게가 크다. 이 책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추리과정을 유지하는 이유도 의외의 결론을 갖추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증오나 미움도 사랑의 한 형태다. 사회적 시선과 명예, 위치를 지키기 위해 타자의 권리를 묵살한다면 그 죄책감은 엄청날 것이다. 일평생 드러내지 못한 죄책감의 그림자에 억눌려 산다면 냉소와 자책만이 남는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후 피해당사자가 자신의 권리를 되찾겠다고 판도라의 상자를 연다면 그 두려움과 공포심은 극한의 상태로 향해 갈 것이다. 이런 모든 최악의 외부적 압력은 인간의 판단력을 흐리고 이성을 상실케 한다. 간단하고 단락적인 피드백의 결과다. 이것이 작가가 짚은 신선한 추리소설에 포갠 인간을 향한 통찰이다.
이렇듯 피해자의 충격이나 파장이 최고치에 달할 소재로 아동 성폭력에 초점을 맞추어진 것의 속내는 사회적 시선과의 공감이다. 실제로 일어난 일들을 매개체로 이야기를 맞추어 간다는 것은 감성적인 면보다 이성적으로 무장할 여지가 높다. 아울러 피해자들에게 닥친 물리적, 심리적 트라우마의 전이가 전염병처럼 퍼져 영향을 끼치기 매우 쉬운 구조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크고 작은 각기 다른 트라우마를 안고 산다. 누구나 상처는 있기 마련이다.
가볍게 잡아 넘긴 책에서 기대하지 못한 뜻밖의 느낌을 받았다. 또, 이 책의 의도와는 다르게 엉뚱한 발상을 떠올려 끼적였는지 모르겠다. 선입견처럼 박힌 애거서의 오마주를 기대하였을 수도 아니면 숨 막히는 대결구조를 상상했는지 몰라도 상당한 괴리감이 있는 서평임을 밝혀둔다. 오히려 읽을 내내 사회문제와 인간관계에 대해 성찰하고 고민하는 시선이 담겼으니 말이다. 하지만 익숙한 대결구조보다 이렇게 조금 이완되고 느슨해진 긴장구조가 나름 재밌기도 하고 신선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