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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못 된 세자들 ㅣ 표정있는 역사 9
함규진 지음 / 김영사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동서양을 통해 왕권의 쟁탈 과정은 상상을 초월하기 힘들만큼 역겨운 피비린내를 풍긴다. 왕권을 향한 도전자의 삶과 수성하기 위한 삶은 항상 교차점에서 맴돌 수밖에 없다. 더불어 역사의 무대에 가려지고 왜곡된 그들은 다름 아닌 패배자의 멍울을 온전히 뒤집어쓰게 되며 형장의 이슬로 생을 마감한다. 이렇듯 절대왕정의 욕망과 영욕의 세월에서 사라진 조선왕조 5백년과 운명을 같이 한 왕이 되지 못한 세자들의 삶은 실로 신산하기 그지없다.
이 책 <왕이 못 된 세자들>은 권력의 심장부에 섰던 왕들의 일생을 그린 것이 아닌 권력의 틈바구니에서 이용되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고독과 비운의 운명을 살다 왕이 되지 못한 권력의 2인자인 조선의 한 맺힌 세자들의 삶을 녹아냈다. 실록과 약전을 토대로 당시의 시대상황을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을 겸비하여 정황적 자료를 토대로 굳어 버린 역사의 흔적을 되살렸다.
조선왕조는 전통적인 유교주의 사대국가이며 전제왕권이 통치하는 절대권력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의 이면에는 비록 혈육이라 할지라도 권력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피륙을 도살하고 비겁한 술수를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일이 비일비재 하였다. 대권의 승계와 견제를 위해 세자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왕과 세자의 관계가 미묘하고 복잡한 애증의 관계로 밖에 점철될 수 없었던 연유 또한 왕을 위협하는 것으로 막강한 정적으로 해석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가 증명하듯 끊임없이 반복되고 되풀이되어 왔던 현상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권력의 정점과 알력의 중심에 오롯이 서 있던 세자는 어떠한 심정이었을까?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어린 나이부터 서연과 학문에 몰두할 것을 강요받아야 했으며 자유를 빼앗긴 삶을 살아야 했다. 심지어 하고픈 일조차 맘 놓고 하지 못하는 마치 날개 꺾인 새처럼 항상 감시와 견제 속에 고독의 삶을 감내해야만 했다. 차재에 권력을 승계하여 손아귀에 넣어 권세를 쥐락펴락한들 그 고단함과 위선으로 가득 찬 삶과 맞바꾸어 희생할 만큼 값진 것이었을까? 하물며 제대로 피어 보지도 못한 채 사라져 버린 바람에 진 꽃봉오리라면 어찌 원통하지 않을까.
저자는 조선왕조의 영욕과 오욕의 세월동안 왕이 되지 못하고 져버린 세자 12인의 삶과 애환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문헌에 기록된 성마르고 건조함 일색인 내용을 심리적 정서의 상황관계를 흥미롭게 재정립하였기에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여태껏 우리가 알고 있던 왕권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승자의 입장에서 기록된 역사의 이면을 타자의 시선으로 담아 정리하여 놓았기에 그들의 삶이 더 없이 애처롭다.
실제 사도세자는 영조대왕의 무한한 애정과 관심을 받았으며 스스로도 신동에 가까운 영민함을 보였다. 영조의 권력이양소동의 속내에 매번 알면서도 석고대죄하며 뜻하지 않는 불충의 죄를 묻는 삶을 살았다. 세자를 통해 조정을 견제하고 왕권을 확립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었다. 이렇듯 구중궁궐 속에서 펼쳐지는 서민들과는 유리된 그들의 삶이 얼마나 가혹하기까지 하였을까 못내 안타깝기 까지 하다.
타고난 천성과 품은 원대한 뜻이 왕의 눈에 거슬릴까 광기로 내달렸을 양녕대군의 삶은 차마 필설로 형용하기 힘든 그것이었다. 인조를 대신하여 명나라의 인질로 심양에서 오랜 세월을 유배 보낸 소현세자의 고단한 삶과 엉켜버린 이기적인 시선들은 무엇이 이토록 왕권에 집착하게 하는지 되묻게 하여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내 쳐져 진 삶이 굴욕스럽기까지 하다. 또한 지나친 부정으로 아버지 광해군과 함께 폐위되어 버린 폐세자 이질은 누가 그의 시커멓게 타버린 속을 헤아릴 수 있을까.
이렇듯 조선왕조에 깃든 왕권을 둘러 싼 권력투쟁은 치열하고 비극적이기 짝이 없었다. 어찌 보면 국운이 다 해 쓰러 져 버린 조선의 침몰은 예견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대주의에 젖어 상업을 배척하고 붕당에만 치우쳐 근시안적인 국수주의에 몰두한 채 세상의 변화에 둔감하였다. 조선왕조의 몰락은 자가당착의 결과였다. 그 속에서 한반도의 운명과 함께 한 고종, 순종에 이어 조선 마지막 왕 영민왕의 기구한 삶은 조선의 명멸과 쇠락의 흥망성쇠가 고스란히 오버랩 됨을 굳이 일러 주지 않아도 자연스레 겹쳐진다. 역사는 누구의 입장에서 어떠한 관점으로 기술되었느냐에 따라 해석과 평가가 달라짐을 여실히 보여 주는 책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