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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명문가 -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위하여
조용헌 지음, 백종하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묵향 그윽이 풍기는 고풍스런 고택에 들어 서 나온 기분이 이러할까. 읽는 내내 개운함으로 온몸을 휘감아 돌더니 종내에는 흐릿한 정신을 명징하게 해 준다. 실로 고마운 책이지 싶다. 역사에 분연히 스며든 명문가들의 향기에 취해 어떻게 지나쳐 버렸는지 모르게 홀연 진한 여운을 오래도록 남긴다. 아마도 그들의 족적에서 드러난 비범한 기개와 장중한 스케일에 절로 압도당하여 숙연해짐을 느껴서 인지 모르겠다.
저자 조용헌이 생생하게 온몸으로 체득하여 담아 펼쳐 낸 <명문가>는 참으로 깊은 맛이 우러난다. 첨단산업화 시대에 함몰된 우리네 얼을 되살리고 무엇이 올바른 삶인지,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본보기가 무엇인지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 흥망성쇠의 부침을 당하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지켜낸 그것은 지조에 다름 아니라 하겠다.
책은 고택을 중심으로 분연히 살아 버팀목이 되고 있는 명문가를 중심으로 소개하였다. 여기에 해박한 풍수지리를 바탕으로 명문가가 발원한 지역을 살피고 재미난 일화를 곁들여 놓아 또 다른 재미를 더한다. 이렇게 저자가 밟아 찾아 간 명문가를 따라가다 보면 볼거리 많은 문화유산답사 기행을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저자는 우리네 민족에 담긴 명문가를 통해 사분오열 갈라진 우리 사회를 통합하는 본보기로 삼고자 하였음을 말한다. 구태의연한 사고의 일환으로 가두어 버리기에는 담긴 가르침의 깊이가 넓고 크다 하겠다. 혈통을 따져 묻기 이전에 명문가에 발현된 가풍, 규율, 원칙은 아무나 흉내 내어 따라 할 수 없음은 두말할 나위 없음은 물론이다.
나라가 위태로움에 빠져 풍전등화의 시국에 이르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분연히 일어나 큰일을 도모하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우당 집안과 창평 고씨 집안에게서 우리는 갚을 수 없는 빚을 졌다는 저자의 말에 뼈저리게 통감하게 한다. 진정한 오피니언 리더이기에 가능한 것으로 제 몸 건사하기에 바쁜 현재의 우리와 비교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대목이다.
명문가의 가풍은 반듯한 기운에서 비롯되어서 그런지 남달리 출중한 인재를 배출한 모양이다. 대개는 한 가문에 두서너 명의 수재만 나와도 바라보는 모양새가 달라지는 법인데 인동 장씨의 계보에서 드러난 탁월한 수재의 면면은 분명 명문가의 DNA와 평범한 필부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라도 한참을 다른 모양이다.
경물중생(輕物重生). '외물(名利)을 가볍게 여기고 생명을 중시한다.'는 인본중심의 사상을 몸소 실천한 평산 리의 강진 김씨, 일제의 억압에 굴복당하지 않고 분개한 안동 고성 이씨의 행적에서 외경심마저 샘솟게 한다.
분명 지켜낸 외양은 달라도 그들에게서 고유한 정취와 기풍을 흠뻑 젖게 한다. 씨줄과 날줄처럼 얽힌 신산한 삶을 걸어 온 명문가의 고단한 삶이 교활한 수단과 재력을 통해 일군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임은 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하겠다.
조선의 얼은 우리 것에 깃들여 있다는 보편적인 진리를 펼쳐 보인 간송 전형필의 대범한 행적은 오늘날 재력가의 본보기가 아니라 할 수 없다. 우리네 문화를 지켜 내기 위해 조선왕조의 진정한 로열패밀리의 자존감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 전주 이 씨의 행적은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하겠다.
옛것에 대한 각별한 관심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역사를 통해 오늘을 되살리고 매몰된 민족정기를 이어가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후손들의 몫임은 자명한 이치이다. 세계화되고 평준화된 이때 혈통을 중심으로 가문의 우열을 논하는 것이 자칫 하릴없는 일로 여겨질 수는 있을지 모르나 그 속에 담긴 역사의 흔적은 무시할 수 없다 하겠다. 흔적에 담긴 명문가의 정신은 동천경지(動天驚地)함 그 이상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