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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아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두행숙 옮김 / 상상공방(동양문고)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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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마르그, 그곳은 세상의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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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뿌윰한 대기 중으로 바스락 바스락 빨려 들어가 소리 없이 흩어져 버릴 것 같은 잿빛이 감도는 이야기에 시선을 멈추게 한다. 아픔을 겪은 기억의 조각들이 인간의 감정을 황폐하게 만들고 또 다른 아픔을 조장하는 것은 일종의 강박 관념일까? 더 이상 소통할 길 없어 평행선을 달리는 인간들에 대한 심리세계의 소묘는 가히 이 소설의 백미라 할만하다.
예정된 것 없는 우연의 시간 속에서 전직 외과의사 아드리안 헤르초크와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레아의 아버지인 대학교수 반 블리에트는 서로의 아픔을 붙들어 매는 것으로 시작한다. 저자는 두 인물간의 낯설음을 매개체로 그들 속에 내재된 감정변화에 따른 기복에 맞춰 스멀스멀 다가오듯 어색하게 내맡긴다. 아드리안의 시점을 통해 반 블리에크의 레아에 대한 집착과 애증이 생산한 현실과 과거를 넘나드는 기억의 편린을 바라보듯 진득하게 투영한다.
반 블리에크는 지독하게 사랑했던 아내 세실의 죽음으로 8살 레아와 아픔의 상처를 마음속 깊이 각각 안고 살아간다. 우연히 베른의 한 역사에서 마주친 기이한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장면을 목격한 레아는 엄마의 부재에 대한 허무함을 바이올린을 통해 치환하려 한다. 반면 반 블리에크는 바이올린이 딸과의 관계를 개선시켜 주는 동시에 자신으로부터 앗아 가 버릴 것 같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인다.
이러한 불안감은 레아의 천재적이고 매혹적인 선율을 통해 현실에 반영되고 타인의 감정이 레아의 마음속에 깃드는 또 다른 아픔을 겪게 된다. 성장할수록 레아는 바이올린에 더욱 집착하게 되고 소통의 유일한 매개체로 이용하고자 하나 어둡고 음습한 감정들에 지배당하게 되며 교만과 광기 어린 모습으로 정상인의 범주를 벗어난다.
광기의 소나타는 레아의 레슨교사 마리를 통해 서서히 드러나며 스폰서 레이와의 조우에서 폭발적인 감정의 변주 속으로 빠져든다. 레아의 황폐한 감정은 더욱 피폐하게 되고 반 블리에크는 나약함과 불안 속에 어린 시절 꿈꾸었던 도박사, 지폐위조를 꿈꾸던 소년의 허상을 간절히 갈구하게 되는 훗날 갈등의 소재가 될 것을 암시한다.
저자는 반 블리에크와 아드리안을 통해 소통부재에서 오는 신경성 강박 증상을 공유하게 되며 서로 간에 일종의 심리적 유대감과 묘한 연대의식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관계 속에 반 블리에크는 레아가 레이와의 허무하게 무너진 결별의 충격으로 침잠된 감정을 회복시키고자 한다. 반 블리에크는 자신의 연구지원금을 횡령하게 되고 최고의 바이올린 과르네리 델 제수를 얻기 위해 일생일대의 도박을 벌이게 되는 이성적 제어를 상실하게 된다.
결국 반 블리에크가 레아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기 위해 보인 비현실적이고 위험천만한 현실은 길을 잃고 어둠 속으로 잦아들게 되며 피할 수 없는 지독하고 냉정한 현실만이 그를 반기게 된다. 저자는 이를 통해 반 블리에크가 행한 비윤리적 행위가 자기 위안에서부터 파생된 억눌려진 자아의 또 다른 표출임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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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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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 현실은 무자비하고 파괴적인 종국을 예고하게 되며 레아와 반 블리에크를 이어 주던 바이올린은 더 이상 제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아드리안은 극도로 우울한 감정의 끝에서 시리도록 차가운 냉소적 허무함과 조우하게 되고 자신의 영혼을 갉아 먹고 있는 감정의 그늘이 릴리아네의 부재임을 인식하게 된다.
델마와 루이스. 지나 데이비스와 수전 서랜드가 열연한 그랜드 캐년의 벼랑 끝으로 질주하게 되는 라스트 신과 반 블리에크의 광란의 질주 속에는 잃어 버린 그들의 인생을 살기 위한 서투른 몸짓에 불과하였음을 저자는 대비시켜 보여 준다.

익숙지 않은 바라보기에 머뭇거림이 다소 거슬리게 하지만 독특한 서사구조의 낯선 스케치로 이내 적응하게 한다. 이렇듯 저자는 자아의 인식이 타자의 인식 속에 교차되듯 넘나드는 교감관계와 자연스럽게 처리한 심리묘사가 일품이라 하겠다. 몽환적인 레아를 중심으로 흘러가듯 풀어가는 이야기의 깊은 심연으로 빨려 들어 갈수록 알 수 없는 그들의 방황에 모종의 연대감과 연민의식을 느끼게 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