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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일기 - 최인호 선답 에세이
최인호 지음, 백종하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가끔 산행을 하다 산중턱에 호젓이 자리잡은 산사를 보노라면 쉽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즈넉함과 함께 속세를 떠나 또다른 세계로 와있는 잠깐동안의 착각에 빠지게 된다. 나름대로의 세상살이가 힘들어서인지 아니면 공기 좋은 곳에 자리잡은 그 청명함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목탁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낭랑한 불경소리는 산사를 찾는 모든이의 마음을 평안하게 만든 묘한 힘이 있는 것으로 느껴질 뿐이다. 이미 이순을 넘어버린 자신을 세상살이에 있어 여전히 모자르다고 말하는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최인호는 <산중일기>라는 산문집을 통해 우리가 느끼는 산사의 이미지처럼 산사를 찾아 승려들과 교우하면서 느낀 불교의 가르침과 깨달음 그리고 저자 자신이 다른 어떤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가족이라는 존재에 대해 잔잔히 이야기를 엮어 나간다.

'깨깨 씻어라 인호야!'
우리들의 바쁘기만한 일상속에서 우리들은 가족이란 그들이 늘 곁에 있기에 그들의 소중함을 잠시 잠깐 잊어버리고 지내게하는지도 모른다. 저자 역시 책의 곳곳에서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현한다. 넉넉지 못했던 시절을 함께 지나와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하는 아내에게 '늙어가는 아내가 마음 아프다'라고 연민을 보이며 자신은 아내를 존경하고 또한 아내 만한 친구도 없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두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감정적이었으며 그 때문에 일관성이 없었던 변덕쟁이 아버지였음을 고백하며 일찌기 돌아가신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려 보며 훌륭한 아버지란 무엇인지 생각에 잠겨 보기도 한다. 책에서 가장 인상깊은 구절은 '깨깨 씻어라 인호야!'라는 어머니의 외침이다. 6학년이 될때까지 그저 아홉살이기만 했던 저자는 어머니를 따라 여탕에 들어가면서 느꼈던 수많은 매서운 눈초리를 피해 처음으로 남탕에 들어 간다. 이제 제대로 된 나이대접을 받나 싶었던 그에게 칸막이 너머로 들리던 어머니의 연이은 '뜨거운 물에는 들어갔느냐?' '머리는 세 번 감았느냐?'는 잔소리는 머언 옛기억으로 그저 억척스럽기만 했던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저자를 눈물짓게 만들 뿐이다. 어머니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저자의 목욕탕 이야기는 한편으로는 재미있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슴 찡한 감동과 그리움을 안겨다 주기도 한다. 남자들에게 어머니와 함께 했던 여탕의 기억은 그때까지 아직은 자신이 어머니의 품속에 존재하는 유아임을 의미했지만 더이상 여탕을 가지 못하게 되는것은 이제 유아기에서 벗어나 평생 그 품을 그리워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집에서 가장 유치하고 정신연령이 낮은 저능아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내와 아이들은 여전히 내 스승이자 부처님들이다. 어쩐지 나는 그것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
저자는 '우리가 살고 있는 가정이야말로 하나의 엄격한 수도원'이라는 말을 통해 가족과 함께 하는 하루하루가 언제나 가르침을 얻을 수 있는 나날임을 이야기 한다. 저자는 그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9개월 밖에되지 않은 손녀딸 정원이에게서도 또하나의 깨달음을 얻는다고 말한다. 할머니에게 가기 위해 연신 턱방아를 찧어가며 혼신의 힘을 다해 기어 오는 손녀를 보면서 정원이가 자신에게 온 예수이자 문수보살이라고 말로 그때의 감동을 전하기도 한다. 그러한 저자의 표현을 종합해 본다면 그가 가족안에서 풍요로웠고 가족안에서 스승과 부처를 만났다고 하는 것에 대해 저절로 동의하게 되어 버리는 것 같다. 

'나는 요즘 내 집을 산속에 틀어박힌 절처럼 이 사회의 망망대해에 고립된 섬으로 만들어 놓고 그곳에 칩거하며 느림과 무사(無事)의 철학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책의 제목이 <산중일기>인 만큼 책 속에는 많은 스님들과의 교우를 통한 가르침또한 눈에 많이 띤다. 욕망이라는 것만을 쫓는 현실의 우리들에게 저자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들을 조용히 전하고 있다. 글이 잘 써지지 않을때 찾던 청계사 근처에서 수많은 행락객의 쾌락을 보면서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가라고 푸념해 보기도 하지만 이내 한번도 본 적 없는 낯선 나그네에게 밥한끼 대접하는 절간의 인정을 느끼며 경허스님을 떠올려 보기도 한다. 그리고는 수덕사 방장이었던 원담 스님으로부터 받았다는 선필 '내가 머무는 곳이 청산(靑山)일 것, 하루하루의 생활이 산중(山中)일 것'이라는 생활철학을 실제생활에서 그대로 실천하려 노력하며 욕망과 해탈이라는 인간의 업보에 관한 선답을 얻어 내려 하나보다. 

사람들은 현실이 힘들게 느껴지거나 버거워질때 지난날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 안에는 그리움과 아름다움이라 표현할수 있는 우리들의 과거가 있다. 철부지 시절 어둠이 내려올 무렵까지 함께 뛰놀던 친구들과의 모습을 떠올려보거나 그런 나를 부르러 오는 젊은 어머니의 모습은 우리들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저자 역시도 그러한 어린시절의 추억부터 가족, 산, 그리고 불가와의 만남을 통해 우리네가 가끔은 잊고 있는듯한 소중한 것을 떠올리게 하는 것 같다. 또한 일상속에서 느낄 수 있는 종교적 가르침과 깨달음을 통해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의 진리가 과연 무엇인지 저자를 통해 배워보고 한번쯤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느껴진다. 

산도 절도 푸르고 물도 절도 푸른데
맑은 바람 떨치니 흰 구름 돌아가네.
종일토록 바위 위에 앉아서 노나니
내 세상을 버렸거니 다시 무엇을 바라리오.
- 경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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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놀이
크리스토프 하인 지음, 박종대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우리는 흔히 인생의 덧없음을 이야기하곤 한다. 그도 그럴것이 대부분 우리네 소시민들의 삶이란 그저 먹고 살기 위해 일해야하고 그렇게 힘겹게 살아나가는 바쁜 일상이 반복되고 게속 이어지면서 우리는 자기자신의 현실을 돌아볼 여유를 제대로 찾고 있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 인생의 쾌락을 오로지 '놀이'라는 하나의 게임으로 즐기는 사내가 있다. 그는 남들이 보기에는 대단히 성공한 변호사이며 거기에 따르는 부와 명예 그리고 사회적 지위까지 어쩌면 우리사회에서 모든 것을 이룩했고 또한 그것을 누리는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자신의 현실마저도 그저 자신의 놀이에 필요한 부수적인 요소로 삼을 뿐이다. 이제 그의 인생 그의 놀이속으로 들어가 보자.

독일의 작가 크리스토퍼 하인의 작품 <나폴레옹 놀이>는 이렇게 인생을 그저 즐기는 놀이로만 인식하고 있는 남자 뵈블레가 어느날 살인을 저질러 형무소에 갇혀 재판을 기다리면서 자신을 변호해 줄 변호사 피아르테스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 형식을 띠고 있다. 뵈블레는 자신과는 일면식도 없는 바크날이라는 남자를 지하철에서 잔인하게 살해했지만 그것이 불가피한 살해였고 정당방위에 해당하는 살해였다는 점을 강조하며 자신을 위해 최선의 변호를 해 줄 것을 부탁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저지른 살인이 정당했음을 입증하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낱낱히 고백하는 심경을 편지에 비교적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그의 편지에 따르면 그는 중소기업인 사탕공장을 경영하는 아버지와 사교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뽐내는 어머니 사이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공장의 후계자로 인식되면서 그에게는 비밀스런 놀이가 한가지 생기게 된다. 그것은 바로 여공들의 무릎위에 앉아 그들의 육체와 몸의 굴곡을 즐기는 비밀스런 놀이였다. 하지만 전쟁은 그에게서 많은 것을 앗아가게 된다. 아버지의 공장은 물론 어머니의 목숨, 그리고 그만이 즐기던 비밀스런 놀이마저도. 하지만 그는 열두살의 자극 즉, 강렬하고 흔쾌히 다가오던 여성적 자극의 기억을 오래도록 간직한다. 그러면서 그는 그러한 흥분된 자극이 자신의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존재라고 믿게 된다. 패전 후 그의 아버지는 재혼하고 되고 그가 '후레자식'으로 부르는 의붓동생을 상대로 그의 놀이는 계속해서 이어진다. 대학생이 된 그는 공부라는 놀이에 집중하게 된다. 공부는 그에게 새로운 놀이였고 승리를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기에 그는 공부라는 놀이에 마음을 한동안 빼앗기게 된다.

그는 그렇게 해서 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법정에서의 재판은 놀이가 인생의 전부인 그에게 더할나위없는 놀이가 된다. 그의 철저한 준비와 탁월한 역량은 그에게 재판이라는 놀이에서의 연이은 승리를 가져다 준다. 아무리 불리한 재판도 이겨내는 그였기에 이제 적어도 법정에서는 그를 당해낼 검사나 변호사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또한 그의 승리는 그에게 많은 재산과 명성을 함께 가져다 주기에 이른다. 재판이라는 놀이가 실증날 즈음 그는 그가 벌어들인 많은 돈으로 투자를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많은 돈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다시금 절망감에 빠진다. 그 놀이의 규칙을 완전히 터득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놀이가 보이지 않게 되자 그는 인생마저 끝났다는 우울증에 빠져버리고 그것을 극복해보고자 어느 외딴섬의 별장을 사들여 그곳에 당구대를 설치해 놓고 당구라는 놀이에 심취하게 된다.

그에게 당구는 결코 새로운 놀이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조용히 집중해서 숙고하기 위해 놀이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는 당구를 치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다음 놀이로 정치를 선택한다. 당구와 같이 부단히 변하는 상황이나 한정 지을수 없는 가능성의 수를 내재한 놀이가 정치였기에 그는 그의 인생에서 비교적 긴 기간인 이십여년을 정치판에서 보내게 된다. 그는 정치를 하면서 자신의 놀이가 나폴레옹의 삶과 유사하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나폴레옹 역시 연이은 승리로 대부분의 유럽이 자신의 수중에 들어오자 어쩔수 없이 놀이의 무대를 모스크바로 밖에 돌릴수 없었고 러시아 원정에서의 패배는 그를 세인트헬레나의 유배로 몰아가게 된다. 하지만 그는 그것마저도 나폴레옹이 계산한 놀이였기에 자신도 나폴레옹의 길을 걷고 있다고 이야기 한다. 그렇게해서 그는 전혀 모르는 남자를 살해하는 놀이를 감행하고 체포된다. 그는 편지의 한 부분에서 이 모든 놀이가 자신의 의도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아직 놀이가 끝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앞으로도 두개의 놀이가 더 남았다고 이야기 한다.

작가가 만들어낸 뵈블레란 인물은 어쩌면 무언가에게 집착하는 광기에 빠진 현대인의 모습을 그리는듯 하다. 우리들 역시 어떤 하나의 일에 크게 집착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시종일관 책에서 눈을 뗄수 없게 만드는 이 소설의 매력 역시 그러한 우리들의 집착일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게 되면서부터 놀이는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 같이 느껴진다. 결과론적으로 그것이 인간에게 자유를 가져다 주긴했지만 실제로는 외부에 의한 통제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우리는 어쩌면 태초의 에덴동산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닐까. 자신이 살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 했고 그것이 정당하기에 자신은 풀려나야한다는 그의 주장마저도 게임의 일부라는 엄청난 반전은 작가가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를 게임의 상대로 대하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은 의심해보고 싶은 여지를 남기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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