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의 시대 - 누가 세계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
장 지글러 지음, 양영란 옮김 / 갈라파고스 / 200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든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적어도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인간들에게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며 또한 인간으로서 살아가야할 최소한의 권리이기도 하다. 현재의 우리나라 역시 개개인 모두에게 내일에 대한 희망이 있고 그것을 향해 우리 모두는 살아간다. 적어도 그것이 우리들의 존재이유이며,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지구상의 어느 곳에서는 당장 한끼의 식량이 없어 죽어가는 이들이 존재한다. 그들에게 한끼의 식량은 인간의 존엄성도 희망의 모습도 아닌 생명의 몸부림 바로 그것이다. 이미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통해 기아와 불합리한 세계 식량 문제에 대해 낱낱이 고발하며 문제를 제기했던 유엔 인권위원회 식량문제 특별조사관 장 지글러는 이 책 <탐욕의 시대>를 통해 혁명이라는 새로운 화두를 던진다.

 

"기아는 하루하루 대규모 학살을 저지르지만 이는 냉혹한 현실일 뿐이다. 이 지구상에서는 5초마다 10세 미만의 어린이 한명이 기아로 목숨을 잃는다. 비타민 A의 부족으로 4분에 한명씩 시력을 잃는다."

지구 반대쪽 아프리카나 남미 국가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은 올곧지 못하다. 우리는 그들이 천성적으로 게으르고 나태하기 때문에 제대로 일을 하지 않고 그렇기에 그들은 늘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알고 있다. 혹은 부패한 정권이 일반 민중들을 핍박하여 소수 권력자들만이 그 모든 부를 향유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장 지글러는 그것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림을 지적한다. 물론 미국이나 여타 강대국의 입김에 의한 정권이 들어선 곳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구조적인 문제 즉, 가난이 가난을 낳고 있는 끝이 없는 현재의 신자유주의 국제 시장 경제가 주요원인이라 이야기한다. 그것은 현재 지구상에서는 객관적으로 재화가 부족하다기 보다는 그 재화 자체의 공평한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저자는 그 주요 원인을 부채라고 답한다. 강대국이나 그 주요 기업들이 후진국에 빌려준 부채는 해당국의 발목을 죄고 있다. 그 부채를 갚기 위해 농업을 개량할 수도 없고 도로와 같은 사회기반시설에 투자할 수 없기에 생산을 하여도 운송을 할 수 없는 결론에 이르고 만다. 결국 부채는 부채를 낳고 또한 기아를 낳는다. 그리고 후진국들은 그 부채의 덫에서 영원히 헤어나올수 없는 것이 현재의 시스템인 것이다. 현재 세계인구의 1퍼센트가 매년 사망하는데 그중 굶어죽거나 영양결핍이 그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즉, 기아는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커다란 사망원인인 것이다. 우리에게 절망을 주는 것은 바로 그 기아가 인간이 만들어낸 살인무기가 되어버린 부채라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 또한 공허한 헛소리에 불과하다. 현재의 고통은 영원히 계속되는 고통이며, 어디에도 희망은 없다."
살인은 어떤이가 다른 어떤 이를 죽이는 행위를 말한다. 즉, 저자 지글러가 부채를 살인이라 한 것은 누군가에 의해 그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일컫기도 한다. 다시 말해 살인을 막을수 있는 것처럼 기아 역시도 얼마든지 막을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상호성의 단절과 구조적인 폭력은 그 모든 가능성에 재앙으로 다가온다. 자원을 놓고 벌이는 의미없는 전쟁은 언제나 그 선두에 서있으며 테러와의 전쟁 역시 희망없는 그들을 더더욱 나락으로 몰아넣을 뿐이다. 그 비용의 일부 만이라도 그들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 절망에서 그들을 구할 수 있다 저자는 단언한다. 하지만 그들 뿐만 아니라 신흥 봉건적 권력인 거대 다국적 기업은 오히려 그들보다도 더 많은 지배자가 되어 그들 앞에 나타난다. 사실상 커피생산 하나만으로 생계를 유지해온 브라질, 에티오피아, 베트남 등 세계 70여개국 수많은 농부들의 생산 지급단가를 줄여 그들에게 절망을 안긴 이들을 저자는 봉건제후라 명한다.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진 네슬레를 필두로한 세계 5대 커피기업의 막강한 지배력 앞에 그들의 아이는 죽어가지만 그들은 원가는 줄이고 상품가격은 높이는 철저한 자본주의의 이념 아래 창립이후 최고의 이익을 창출해내며 계속되는 고공행진을 하고 있는 중이다. 네슬레의 담당자가 하는 얘기는 무책임을 넘어 가히 충격적이다.
"커피 생산자가 2500만명쯤 되는데 이들 중에서 적어도 1천만명은 기꺼이 사라질 것을 수락해야 한다."    

  

저자 장 지글러 자신이 유엔에 속해 있기에 그는 개인적으로 유엔의 이름으로 그러한 문제에 다가설 것을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이 백악관의 승인하에 이루어지는 유엔과 유엔이라는 이름하에 조성된 국제법의 효력은 아무런 희망이 없음을 발견한다. 1999년 다보스 포럼에서 채택된 유엔과 주요 다국적 기업과의 글로벌 콤팩트(Global Compact)는 생산국들의 인권과 노동시장에 대한 차별을 금지했고 '모두를 위한 보다 나은 세계'라는 기본 강령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그들에겐 기업 이미지 제고 뿐만 아니라 유엔로고를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혜택까지 누리게 된다. 하지만 5년이 지난후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이 협약에 대해 국제적인 모니터링 기관을 창설하자는 제안을 하자 그들은 뜻을 모아 만장일치로 그 제안을 부결되고 만다. 새로운 희망은 커녕 무엇이 현실인지 보여주는 신랄한 사례이기도 하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다.'
기아와 질병으로 인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는 난민들의 행렬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유럽연합은 최첨단 군사장비를 동원해 그들의 행렬을 강제로 저지한다. 바다로 탈출한 난민들은 끝없이 표류하다 결국 사라져 간다. 저자 지글러는 그러한 절망과 어둠 사이에서 프랑스 혁명과 이마누엘 칸트를 떠올린다. 프랑스 혁명이 비록 추구하던 모든 것을 이루어내지는 못했지만 모순된 사회현실을 딛고 일어나 살기 위한 자유의 몸부림을 보여주었고 민주적인 집단 저항운동의 불씨가 되었던 것처럼, 사회적 불의에 분노하던 칸트가 가난한 자들의 해방이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프랑스 혁명에서 본 것처럼 그 정신의 계승이 오늘날의 세계 시민에게 공통적으로 던져진 화두임을 지글러는 일깨워 준다. 오늘날 신흥봉건제후들의 행위는 모든 인간규범 자체를 부정하고 자본의 흐름이 지배하는 시장경제만의 모습을 내세울 뿐이다. 제3 세계 국민들이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부채를 아무런 조건없이 탕감하더라도 부자들은 여전히 부자이며 가난한 사람들은 조금더 가난해질 뿐이다.   

 

그릇된 탐욕만이 남아있는 지금의 세상은 혼란스럽다. 하지만 우리는 그 누구도 그것을 우리 자신의 문제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듯 하다. 우리나라 역시도 그 어두운 그늘에서 벗어난지 불과 얼마되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기억조차 떠올리려 하지 않는다. 그것이 얼마나 아픈 기억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글러 역시 이 책 한권으로 모든 것이 바뀔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부조리에 반하는 정의감이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부터가 그 시작임을 믿고 있을 것이다. 더이상 나빠질 것도 없는 모든 구조적, 인위적 병폐의 극한점인 지금 그는 앞장서 외친다.     
"다시 혁명을 시작하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