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TV 역사드라마의 패턴이 바뀌었다. 천편일률적으로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권력 다툼이나 여인네들의 궁중 암투를 그리던 것에서 벗어나 고구려와 발해라는 대륙을 호령했던 나라들을 그 소재를 확대시키기 시작했다. 물론 자기땅에서 일어난 일은 모두 자신들의 역사라는 말도 안되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기인한 바가 크긴 하지만 그러한 드라마들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우리 민족의 자주성과 자긍심을 보여주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한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제 TV 역사드라마들은 또 한번의 변신을 꾀하고 있다. 그것은 그저 언제나 역사의 뒤편에 서서 주변인으로 비추어졌던 여성들에 대한 재해석이다. 물론 권력의 중심에 서있던 여성들을 다룬 드라마가 없진 않았지만 있다고 해도 대부분 좋지않은 말로를 보여준 인물들 뿐이었다. 그런 면에서 '천추태후'나 '선덕여왕'등 직접 권력을 쥐고 흔들었던 여걸들의 모습은 분명 새로운 시선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신용우의 역사소설 <천추태후>는 실제 나이 어린 국왕을 대신해 그 모후로서 권력을 쥐고 섭정을 했던 헌애왕후 즉 천추태후의 일생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천추태후는 역사속에서 여걸이라는 이미지와는 다소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조선초에 쓰여진 <고려사>에는 경종의 왕후였지만 경종 사후 천추궁이라는 곳에서 머물며 김치양이라는 인물과의 불륜을 통해 낳은 아이를 차기 국왕으로 만들려 했던 요부이자 권력에만 눈이 먼 여인으로 천추태후를 묘사하고 있다. 오랫동안 그렇게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던 천추태후가 천년이란 시간이 지난 지금 새롭게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여 재평가받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만드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녀는 그저 눈앞의 권력을 쫓던 요부였을까 아니면 진정 고토회복을 꿈꾸는 진정한 여걸이었을까. 천추태후가 어떠한 인물이었나 평가하기 이전 당시의 정세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듯 싶다. 태조 왕건과 함께 후삼국 통일에 기여했던 많은 호족들은 대부분 광종대에 숙청되고 얼마 남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뒤를 이은 경종대에 이르러 비로소 움츠려든 권력에의 의지를 표방하고 반격에 나서기 시작한다. 그러한 혼란의 시기 경종이 맞이한 왕후가 헌애왕후이며 경종과의 사이에서 낳은 목종의 모후가 되는 천추태후가 된다. 그녀의 친동생 역시 경종에게 시집오게 되어 헌정왕후가 되면서 자매가 모두 경종의 왕후가 되지만 경종은 호족 세력들의 견제에 부딪히면서 정치 자체에 염증을 느끼게 되고 정사를 게을리하게 된다. 결국 그는 그의 사촌동생이자 천추태후의 친오빠인 성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숨을 거둔다. 천추태후가 김치양과 통정하고 복잡한 혼인관계는 태조 왕건이 호족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펼쳤던 혼인정책에서 기인한다. 왕건은 29명의 부인과 30명이 넘는 자식을 남겼고 왕건강화를 위해 족내혼을 적극 장려했다. 천추태후 자매가 경종에게 시집가게 된 이유도 결국 왕족간의 세력결집을 위함이기도 했다. 성종은 즉위 이후 유교적 이념아래 송과의 적극적인 외교를 펼치고 거란과 대립하게 되고 마침내 거란이 칩입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천추의 한을 풉시다." 소설은 병자호란 이후 북벌을 계획하던 효종과 어영대장 이완의 밀담속에서 효종이 북벌에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강력한 표현으로 천추태후의 원대한 꿈을 거론하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외세를 이용해 힘을 키우는 방법을 택할 것을 이야기 한다. 결국 그것은 천추태후의 외교력이 어떠한 것이느냐이며 이 소설에서 가장 크게 다루는 초점이기도 하다. 천추태후가 남성스런 호방함을 갖추었다는데는 이견이 없겠지만 그 용맹함을 넘어 소설속에서 다루어진 거란 성종을 찾아갔다는 내용이나 서희의 외교담판을 지시했다는 내용 등은 너무 과대평가한 것이 아닌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듯 소설과 이미 시작한 TV드라마는 조금은 그 포인트를 조금 달리하는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는 오빠인 성종과의 갈등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시작하지만 소설속에는 그러한 모습이 없다. 소설 속에서 그들은 동지이며 뜻을 같이하는 오누이로 묘사된다. 또한 강조 역시 천추태후와의 연결고리가 보이질 않는다. 다만 김치양과의 사랑만은 소설속에서나 드라마 속에서나 실제 역사속에서 진실처럼 보여질 뿐이다. 역사의 기록에 의해 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릴수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소설속 효종의 표현처럼 그녀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유교사상과 중국에 대한 사대가 국가이념이었던 나라가 조선이었기에 그들이 쓴 고려의 역사 역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방향으로 밖에는 해석할 수 없고 천추태후에 대한 기록 역시 그러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볼 대목이기도 하다. 목종의 죽음과 천추태후의 실각이 서기 1009년이니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천 년전이다. 그녀 스스로가 천추태후라 부르기도 했던 것처럼 천 개의 가을이 지난 지금 그녀의 존재가 새롭게 부각되는 것이 어쩌면 우연의 일치만은 아닌것으로 보여지는 것 같다. 역동적이고 자주적인 고려인의 모습을 책 속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치열한 경쟁만이 존재하는 오늘날의 국제 정세에서 과연 실리적인 외교가 무엇인지 한번쯤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사랑을 갈망했고 권력만을 쫓던 요부와 시대를 앞서갔던 야심찬 여성리더라는 두 가지 모습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천추태후에 대한 재조명은 편협한 역사관에서 우리를 깨어날수 있게 해주는 기회를 만들어 줄 수 있는듯 보여진다. 다만 그녀의 쓸쓸한 퇴장이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지난날에 대한 자부심도 앞으로 다가올 희망도 없었다. 남은 것이라고는 잠시 머물다 사라진 구름처럼 되어버린, 고구려의 기백을 가슴에 안고 요동 땅을 차지해 그날의 영예를 다시 누려 보겠다는 빛바랜 꿈뿐이요, 바람처럼 왔다가 스쳐 가버린 권력이라는 허무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