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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가몽, 조선 최후의 48년
박성수 지음 / 왕의서재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조선은 불과 100년전까지도 이땅에 존재했던 마지막 왕조국가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왕조의 교체는 여러번 이루어지고 그때마다 많은 변화를 겪었겠지만 조선은 외세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려다니다가 결국 그 운명을 다했기에 우리에겐 더욱 애틋할 수 밖엔 없을듯 하다. 그 흔들리던 왕국의 한 가운데 있었던 임금이 바로 고종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왕이었던 그 조차도 꺼져가는 조선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었다. 짧은 기간 수많은 변화를 몸소 체험하며 아파한 비운의 군주라고 할 수 밖엔 없을듯 하다.
이 책 <남가몽(南可夢) - 조선 최후의 48년>은 그러한 혼란의 시기 고종의 곁을 지켰던 한 시종이 바라본 조선 왕실의 살아있는 역사를 기록한 글 <남가몽>을 바탕으로 주변 정황과 해설을 함께 실어 놓은 책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급박하기만 했던 당시의 정황과 함께 아무런 대처도 할 수 없었던 조선왕실의 무력함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다. 남가몽의 지은이 정환덕은 1897년 가을, 나이 40이 되어서야 궁에 발을 들여 놓게 된다. 이미 임오군란, 동학혁명, 갑오경장 그리고 을미사변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회오리 속에서 신경쇠약에 걸려있던 고종에게 누군가 옆에서 조언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역학에 조예가 깊던 정환덕이 천거된 것이다. 그때부터 정환덕은 고종의 최측근에서 그를 시종하며 역사의 현장을 그대로 체험하게 된다.
"공자로 정승을 삼고 그 수제자인 안연으로 사부를 삼고 자로로 집금오를 삼고 백이로 서울의 판윤을 삼고 항우로 상장군을 삼고 조조로 모사를 삼더라도 쉽게 중흥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정환덕이 남가몽의 서두에서 이렇게 말할 만큼 당시의 상황은 어려웠다. 잇따른 정변으로 인한 공포로 심한 불면증에 시달리던 고종은 많은 일들을 역술가에게 의지할 만큼 불안에 떨고 있었다고 한다. 때마침 정환덕이 예언한 덕수궁 함녕전의 화재가 적중하면서 정환덕은 늘 고종의 곁에 있게 된 것이다. 20세기가 되면서 나라의 재정은 더욱더 어려워지고 백성들은 굶어 죽기까지 했지만 왕실은 1902년 고종 즉위 40년을 맞이하여 어마어마한 경축잔치를 벌일만큼 민중과의 거리가 멀었다. 또한 정세의 파악에도 부족해 군함을 제조하겠다는 말에 속아 국고를 탕진하기도 했으며, 조정의 대신이라는 자는 제 멋대로 나라의 땅을 팔아먹어 월미도가 일본인의 수중에 들어가는 등 조선의 운세는 이미 기울어질때로 기울어진 것처럼 보였다. 당시의 정세를 정환덕은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이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은 결국 위와 아래가 통하지 않는 상하불통(上下不通)때문이며, 안과 밖 또한 끊어진 내외격절(內外隔絶)의 상태 때문이다. 나라안에 임금을 보필할 신하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방어할 장수가 없기 때문이다."
정환덕이 고종의 최측근 인사였기에 남가몽은 그동안 우리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거나 감추어진 몇가지 사건에 대한 언급이 전해진다. 영친왕의 생모인 엄비의 졸도사건 뒤에는 고종과 엄비 역시도 여타 부부들처럼 부부싸움이 있었다는 것을 전하기도 하며, 순종에게 후사가 없는 이유를 측근의 입장에서 밝히기도 한다. 또한 헤이그 밀사 사건 직후 위기를 느낀 고종이 이거(移居)를 위해 정환덕을 통해 은신처를 구해 두었다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 을 통해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을 전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관심을 끄는 대목은 고종이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강제퇴위의 위기에 몰렸을때 끝까지 버티려 하는 고종의 모습을 전하는 것이다. 측근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그 기록을 통해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이 전해지는듯 하다.
정환덕이 이 책의 제목을 남가몽이라 한 것처럼 조선은 한순간의 꿈처럼 사라져 갔다. 책의 곳곳에서 그는 힘없는 왕실을 개탄하기도 하고, 그 누구도 왕실에 힘이 되어 주지 못함을 안타까워 하기도 한다. 그것은 한낱 시종인 그 역시도 어쩌면 마찬가지 이다. 그가 실제 궁 안에 머물렀던 기간은 15년 남짓이었지만 그는 역사의 현장을 생생하게 경험한 산증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가 전하는 역사의 기록은 우리 후세에게 힘없는 나라의 설움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있다. 조선의 마지막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이의 기록이기에 우리에게 그 아픔이 더욱 생생하게 전해지는 것만 같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