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사 장기려
손홍규 지음 / 다산책방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중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빠르고 각박한 사회속에서 그저 자신만을 또는 자신의 가족만을 위해 살아갈 뿐이다. 혹자는 그것을 현대인들이 남을 생각하는 배려가 부족하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물론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생활방식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지나쳐 너무나 개인주의적인 삶에 젖어있는 것은 아닐까. 여기 자신의 인생을 바쳐 남에게 봉사와 배려가 무엇인지 진정으로 보여준 인물이 있다. 지나칠 정도로 남을 생각했기에 정작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여든 다섯의 나이로 운명한 이후 그가 누울 변변한 자리조차도 없었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를 일컬어 사람들은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부른다. 그가 바로 성산 장기려 박사이다. 일평생 그는 그에게 주어진 의사라는 직업을 천직으로 알고 그를 통한 사랑과 봉사가 무엇인지를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우리들에게 보여준 인물이기도 하다. 바보스러울 정도로 환자만을 위했던 그는 의사이기에 앞서 성자의 삶을 살다간 인물일 것이다.

 

이 책 <청년의사 장기려>는 장기려 박사의 학창시절 부터 전쟁의 혼란 속에서 부산으로 내려오기까지의 과정을 소설적인 구성으로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제목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장기려 박사의 청년시절에 그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평전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평안북도 용천에서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개성으로 올라와 송도고보에 진학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과 교유하며 비로소 세상에 눈을 뜨기 사작한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그에게 뚜렷한 목표는 없었다. 일제하의 현실은 부당하기만 했고 고보의 청년들은 동맹휴업에 참여하지만 그는 급격하고 과격한 변화보다는 신념과 끈기를 가지고 현실을 개선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그에게 늘 뜨거운 사람이 되라고 했던 할머니의 죽음은 그의 인생의 지표를 찾아주게 된다. 할머니의 소천을 기리는 교회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그는 충동적으로 세례를 받게 된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 뜻을 세워야지."
고향에서 종기의로 일하는 박의원의 권유를 통해 그는 자신의 원죄의식을 느낀다. 그리고 친구 김주필의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 그는 의사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을 모른척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이제 그의 목표는 정해졌고 그는 드디어 경성의전에 진학한다.


그가 대학에서 만난 스승 백인제는 뛰어난 의사였지만 장기려의 눈에는 현실을 외면하는 사람으로만 보여질 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장티푸스에 걸린 일본인 간호원의 뺨을 때린 사건으로 용서를 구하러 갔을때 스승은 그에게 진정한 의사의 길을 나지막히 이야기 한다.
"지금 당장 자네 앞에 고난이 있다 해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말게. 우리 같은 의사들에게 고난이란 기회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네. 나는 자네를 믿네. 자네는 ... 조선의 의사니까."
스승은 그에게 본교의 교수자리나 대전 도립병원의 외과과장직을 권유했지만 그는 자신의 서원을 잊지않고 그 좋은 자리들을 마다한다.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평양의 기흘병원,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지금껏 모른척 했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의사가 되는 첫발을 장기려는 그렇게 내딛는다.

 

책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있는 유명인사와 장기려 박사의 인연을 중간중간 소개하고 있다. 수련의 시절 그의 환자로 만났던 춘원 이광수는 그를 모델로 소설을 쓰기도 했으며, 우연히 만난 함석헌 선생과는 일생을 들어 좋은 인연으로 함께 했음을 여러차례 소개하기도 한다. 특히 김일성의 맹장 수술을 그가 직접 집도했다는 것은 그만큼 의사로서 그의 실력을 입증하는 일화이기도 하다. 평양에서 그는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의술과는 전혀 거리가 먼 그들을 바라보면서 그는 그가 해야될 것이 무엇인지를 직감한다. 평양을 휩쓸고 간 대규모 물난리 속에서 그는 그저 외로울 뿐이었다. 그 어떤 의사도 전염병이 도는 홍수지역에 나타나지 않았다. 자신의 피를 뽑아 수혈을 하면서까지 그는 환자를 살리기 위해 애를 쓰고 마침내 그는 쓰러져 버린다. 평양에서 해방을 맞고 소련군의 진주를 보면서도 그는 오로지 환자만을 위해 살아간다. 그에게 이념이나 분단은 그저 남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폭격의 와중에서도 수술을 집도했을 만큼 그는 의사를 천직으로 알고 있다. 평양을 국군이 점령하면서 그는 이제 인민에서 국민이 된다. 하지만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을 뿐이었다. 어차피 그는 의사였기에...

 

다시 밀고 내려오는 중공군의 위세에 눌려 국군은 평양을 내주고 후퇴하기 시작한다. 그 최악의 상황에서 그의 아내는 5남매중 둘째 아들만을 그에게 먼저 데리고 갈 것을 부탁한다. 중공군이 국군에 협조한 젊은 사내만을 죽인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렇게 해서 그는 둘째만을 데리고 남으로 가는 앰뷸런스에 오른다. 그리고 그게 그의 가족과 그의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만다. 부산에서 그는 북한에서 주요 요직을 지냈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고초를 겪기도 한다. 그렇게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그는 그 전쟁의 와중에서 이미 양수가 터진 산모의 수술을 통해 자신이 의사라는 것을 다시 깨닫는다.

 

가난한 사람들과 환자들만을 위해 살아갔던 장기려 박사는 성자의 삶을 살아간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몇 년전 TV 다큐멘터리를 통해 장기려 박사의 에피소드를 본 것이 기억에 남는다. 수술을 마친 환자가 돈이 없다고 하니 그 병원의 원장이었던 그가 모두가 잠든 새벽 병원 뒷문을 열어줘 그 환자를 도망시켜 주는 장면이었다. 그는 그런 의사 였다. 그가 북에서 유일하게 데리고 온 둘째 아들 역시 아버지의 길을 따라 걸었다고 한다. 서울대 의대에서 정년퇴직해 올초 운명을 달리했던 장가용 박사가 바로 그의 유일한 남쪽 혈육이다. 기사로 접한 그의 생전 인터뷰는 그의 아버지 장기려 박사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생생하게 들려준다.

 

장기려 박사는 이땅에 그의 이름 뿐만 아니라 많은 것을 남기고 떠났다. 사랑과 봉사라는 그가 일생을 바쳐 실천했던 의미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참다운 삶이 무엇인지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만 같다. 바보 의사란 소릴 들을 정도로 우직하게 그리고 묵묵하게 하늘이 준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떠난 그는 분명 살아있는 성자였다. 또한 그가 보여준 의사의 정의는 지금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것만 같다.  

"왜 아픈 사람을 일컬어 환자라고 하는지 아나? 환(患)은 꿰맬 관(串)과 마음 심(心)으로 이루어져 있다네. 상처받은 마음을 꿰매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네. 다시 말해 환자란 다친 마음을 어루 만져줄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야. 눈에 보이는 상처는 치유하기 쉽지만 마음에 새겨진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네. 자네가 진정한 의사가 되려면, 무엇보다 먼저 환자의 마음을 고치는 의사가 되어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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