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에 물들다 1 - 흔들리는 대지
아라이 지음, 임계재 옮김 / 디오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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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세계곳곳의 소수민족들은 그들의 존재자체 마저도 제대로 알리지 못한채 그저 변방의 작은 민족집단으로 그들만의 생활을 영위해 나가고 있다. 얼마전 독립 시위로 중국 당국과의 마찰을 일으키며 전세계에 자신들의 의지를 보여주었던 티벳 역시 그러한 많은 소수민족의 하나이기도 하다. 18세기 부터 시작된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도 그들만의 독립적인 국가성격을 유지했던 티베트는 중국 공산군에 의해 자치구라는 이름으로 결국 중국 영토로 편입되고 마는 역사적 아픔을 간직한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책 <색에 물들다>는 그러한 티베트족 자치구에서 태어나 누구보다도 그들의 정서에 민감할 수 밖에 없는 작가 아라이가 펴낸 장편소설이다. 현대로 이어지는 티베트 최고 권력층의 아픔을 통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그들의 슬픈 역사를 살아있는 색채를 통해 전하고 있다.

소설은 주인공의 1인칭 시점으로 시작되며 주인공 '나'는 티베트 최고 권력자 투스의 둘째아들이다. '투스'란 티베트의 여러집단을 이끌고 있는 일종의 족장 성격을 띠고 있으며, 중국의 황제에 의해 영주로 책봉받아 각자의 지역을 다스리고 있다. 그렇기에 티베트 내에는 여러명의 투스들이 동시에 존재하지만 분명 그들 사이에도 영역과 힘의 우위가 나타나고 있으며, 주인공의 아버지 '마이치 투스'는 그 여러명의 투스들중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세습제인 투스라는 권력의 속성상 주인공은 배다른 형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기에 겉으로 바보행세를 하며 목숨을 겨우 연명해 나가고 있다. 또한 투스의 큰아들이며 다음번 투스이기도 한 형은 그에 걸맞게 다른 집단과의 전쟁이나 세력다툼에서 늘 강력한 힘을 보여주며 자신만의 자리를 확고히 다져가는 중이기도 하다. 그러던 중 주변의 왕뻐 투스가 마이치 투스에 대항하는 일이 발생하면서 청의 특파원이 그들의 마을에 오게 되고 그에 의해 양귀비 씨앗이 전해지게 된다. 어쩌면 시대를 상징하는지도 모르는 양귀비는 채 익기도전에 끝없는 마력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양비귀꽃이 피었다. 커다란 빨간 꽃은 마이치 투스의 영지를 찬란하고 웅장하게 만들었다. 모두가 우리의 땅에 처음으로 나타난 이 식물에 홀렸다."
새빨갛게 피어난 양귀비는 그들에게 현대식 무기와 함께 보다 강력한 힘을 가져다 준다. 하지만 주인공은 분명 그때부터 세상에서 가장 튼실할 것만 같았던 대지가 흔들리고 있다는 느낌을 감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러한 불길한 예감은 서서히 현실로 다가온다. 양귀비로 인해 형성된 강력한 그들의 힘은 양비귀 씨앗을 달라는 주변 세력들의 끊임없는 위협을 받게 되고 그 과정에서 마이치 투스는 더욱더 주변 세력을 과도하게 평정하려 한다. 결국 위협은 마침내 형의 암살로 이어진다. 주인공은 그러한 흐름 속에서 혼자서 독립할 결심을 하고 자신만의 영역을 확보하게 되면서 또 하나의 투스로 자리잡아 간다. 시대는 흐름은 변하고 함께 일본을 몰아냈던 국민당과 공산당은 중국 영토를 건 싸움에 돌입한다. 그리고 곧이어 그들의 마을에도 쫓겨온 국민당과 그들을 추격하는 공산당의 세력이 부딪히게 된다.

새빨간 양귀비의 열매는 하얀 액체를 가뜩 뿜어낸다. 이 책의 제목 <색(色)이 물들다>는 그러한 강렬한 빨간색과 하얀색의 대비를 극명히 그려내고 있다. 두가지 빛깔은 중국 현대사를 가른 두개의 한족 즉 붉은 색을 대표하는 공산당과 하얀색을 대표하는 국민당을 상징하고 있기도 하다. 그들의 마을에 중국인에 의해 양귀비가 전해졌던 것처럼 그 두가지 빛깔은 그들에게 또하나의 절망을 안겨다 주는 색깔로 형상화 되고 있다. 화려한 양귀비는 그들의 마을에 번영을 안겨다 주기도 했지만 그 양귀비로 인해 그들은 끝없는 전쟁을 치뤄내야 했으며, 주변 세력들은 그들의 목숨을 바치면서 까지 양귀비를 얻으려 한다. 죽어가면서 자신들의 귀에 양귀비 씨앗을 넣어 자신들의 마을에 양귀비를 피워내게 한 왕뻐 투스의 전사들의 예가 바로 그것이다.

양귀비는 그 화려함 뒤에 감추어진 치명적인 유혹으로 끝내 사람들을 몰락하게 만든다. 마이치 투스의 슬픈 가족사를 통해 티베트 민족의 불우한 현대사를 조망해 보는 이 작품의 원제는 먼지는 결국 아래로 떨어진다는 뜻의 진애낙정(塵埃落定)이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권력의 덧없음과 함께 양귀비의 화려한 빛깔은 작품을 관통하는 정서로 작용한다. 어쩌면 누구보다 현명했고 똑똑했던 주인공이 스스로 바보임을 칭했던 것 역시 화려한 빛깔속에 감추어진 인간의 욕망을 직시했기 때문만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자신들만의 영역에서 고유함을 지키기보다는 그저 밀려오는대로 낯설기만한 새로운 종교와 문화, 신기한 물건과 질병까지 그 모두를 가감없이 받아들여야만 했던 그들의 아픈 현대사가 色이라는 형상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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