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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산장 살인사건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1990년대 말 영화화되어 히로스에 료코라는 요정을 탄생시킨 <비밀>이후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은 거칠것이 없이 질주중이다. 그가 써내는 작품마다 일본을 넘어 우리나라까지도 그 판권을 따내려 안간힘이다. 무엇이 그토록 히가시노 게이고에 열광토록 했을까. 그의 작품이 워낙 많기에 전부 읽어볼 수는 없었지만 <용의자 X의 헌신>을 필두로 내가 읽은 그의 작품들은 한결같이 책속으로 빠져들 수 밖엔 없도록 만들었던 힘이 있는듯 느껴졌다. 추리소설이라는 분야에서는 그는 이미 독보적인 존재가 된지 오래이며, 거침없이 달려나가는 속도감 있는 스토리 전개는 작품의 시작부터 끝까지 팽팽한 긴장감으로 단 한순간도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그만의 매력으로 작용한다. <백마산장 살인사건>은 우리가 흔히 만날 수 있는 추리소설의 기법들을 한데 모아놓은 듯한 작품이다. 암호에 감추어진 사건의 열쇠, 밀실속에서 이루어진 의문의 죽음, 반복되는 연쇄살인, 그리고 마지막의 반전까지 어디선가 본듯한 장면들은 이렇게 한데 모아져 전혀 어색함 없이 숨가쁘게만 흘러간다.
"마리아님은 집에 언제 돌아왔지?"
나오코의 오빠 고이치는 1년전 한겨울 지방의 작은 산장에서 독약을 먹은 사체로 발견되었다. 대학원 시험에 떨어져 불투명해진 장래를 걱정하다가 새롭게 마음먹고자 전국일주를 위해 집을 나섰지만 나오코에게 짧지만 활기찬 엽서 한장을 남기곤 죽음을 맞았다. 사건을 담당한 형사도 당시 산장에 머물던 사람들도 모두 그가 노이로제 때문에 자살했을거라는 결론을 내린채 사건은 마무리 된다. 그리고 1년이 지난후 나오코는 오빠의 죽음에 의문을 갖고 마치 남자처럼 보이는 덩치큰 친구 마코도와 함께 직접 오빠가 숨진 산장으로 찾아간다. 일년전 산장에 머물었던 사람들이 다시 모이는 때가 바로 지금이었기에 나오코는 마코토와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산장을 찾아갈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머더구스'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펜션은 모두 8개의 객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원래 영국사람의 별장이었지만 어떠한 사연으로 인해 지금의 주인이 매입하여 펜션으로 개조되었으며, 각 방에는 전주인의 요청대로 영국의 전승동요집 '머더구스'에 나오는 동요들이 새겨진 벽걸이가 걸려있다. 앞면에는 영문 그대로 뒷면에는 펜션의 주인이며 마스터라 불리는 남자가 일본어로 해석한 문구들이 새겨져 있다. 나오코와 마코토의 방은 1년전 고이치가 사체로 발견된 '험프티 덤프티'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 방이다. 마코토는 그곳에서 나오코가 오빠의 죽음을 납득하지 못하고 있기에 그곳에 왔음을 밝힌다.
"생판 모르는 곳에서 이상한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긴 힘들죠. 우리들이 여기에 온 것은 납득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이상도, 그이하의 목적도 없습니다. 물론 자살이라는 결론에 대해 의문점이 생기면 철저히 조사할 생각입니다."
이제 그녀들의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된다. 풍차라는 방에 묵고 있는 가미조란 남자에게서 2년전에도 이곳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정보를 입수히기도 하고, 함께 그곳에 왔던 의사의 부인으로부터 '머더구스'의 노래들에 대한 기본적인 접근 방법들을 소개받기도 한다. 세인트 폴이라는 방에 묵고 있던 오오키란 남자는 사람들이 모두 궁금하게 여기는 벽걸이 속의 노래에 대해 그저 마케팅을 위한 수단일뿐 자신은 도통 흥미가 없음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또한 사람들에게서 오빠가 벽걸이 속의 노래를 암호로 여기고 그 해독에 가까이 다가섰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들도 오빠가 엽서에서 얘기한 마라아를 발견하기까지 한다. 다음날 저녁 모두를 위한 파티가 시작되고 슬그머니 사라져버린 오오키가 또다시 변사체로 발견되면서 펜션은 또다시 공포속에 휩싸여 버린다. 자살이라 하기엔 너무나 의문점이 많기만 하다. 결국 작가는 교통조차 불편한 산간속의 오지이기에 다른 사람이 절대 근접할 수 없는 산장이라는 조건을 갖추게 했다. 이로써 3년 연속으로 일어난 의문의 살인사건의 범인은 분명 산장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 중의 하나라는 것이 명백해진다. 소설은 마치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연상하게 만든다. '머더구스'의 동요가사를 차용한 것이나 외부와의 연결이 단절된 곳이라는 설정이 그러하다. 사건의 모든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벽걸이 속의 동요 '머더구스'일 뿐 범인은 좀처럼 윤곽을 드러내지 않는다.
작품을 읽는 내내 히라시노 게이고가 만들어놓은 암호를 풀어보는 재미가 쏠쏠하기만 하다. 전혀 연관성이 없는 듯한 벽걸이 속의 동요들은 어떠한 일정한 규칙에 의해 재조합돼 사건 해결의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오빠의 죽음뒤엔 어떠한 비밀이 숨어 있을까. 펜션의 손님들이 전부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머더구스'와 관련이 있다. 2년전에 죽은 50대의 남자도, 작년에 죽은 나오코의 오빠도, 지금 죽어버린 오오키도, 펜션의 주인인 마스터도, 그리고 전 주인이었던 영국인까지도...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그곳에서 모든 사람을 모아놓고 사건의 해결을 맡은 무라마사 경부는 범인을 지목한다.
무엇보다도 눈길을 끄는 것은 작가가 맨 뒤에 첨부한 두개의 에필로그이다. 이를 통해 뭔가 찜찜했던 모든 것이 해결된다. 여운없이 간결하게 끝을 맺어주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선택이 놀라울 뿐이다. 1년전 그리고 또 그 1년전 그리고 또 그 몇년전 마스터가 산장을 인수하던 그때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