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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이 있는 침대
김경원 지음 / 문학의문학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웬지 그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면 조금은 어색해지기까지하는 것이 바로 와인이다. 사실 와인은 포도즙을 발효시키고 숙성시킨 세상의 많은 술 중의 하나일 뿐이지만 와인은 그 특유의 빛깔과 감미로운 향내 때문에라도 각자의 추억에 잊지 못할 기억들을 하나쯤은 만들게 하는 신비로운 술 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러한 와인의 신비로운 힘이 이 소설 <와인이 있는 침대>를 더욱 매혹적이고 추억에 빠져들게끔하는 또하나의 요소로 작용하는지도 모르겠다. 구속받기 싫어하고 자유로움을 추구했기에 다니던 잡지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는 이제 서른네살이 된 독신녀 채다현은 함박눈이 거리를 흰색으로 지우고 있는 어느 겨울날 홀연히 사라진 버린 한 남자를 생각하며 과거의 회상속으로 빠져든다.
다현은 어린시절 사촌오빠에게 유린당한 잊지못할 기억이 있다. 그 상실감은 오래도록 다현을 억누르며 나중에 만나게 될 미지의 남자에 대한 부채감으로 자리하게 된다. 또한 젊은 제자와 눈이 맞아 가정을 버리고 떠나버린 아버지의 선택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며 진한 화장에 집착하고 나날이 살이 오르는 어머니를 그저 연민의 눈길로 밖에는 바라볼 수 없다. 사실 다현이 바라던 것은 그저 남들처럼 단란하게 모여 저녁식사를 하는 평범한 가정의 모습이었지만 다현의 가정은 그것조차 허락하질 않았다. 스물셋이 되던 해 다현은 독립을 선언하고 싱글생활을 시작하지만 결국 그녀에게 남겨진 것은 자유라는 홀가분함만큼이나 외로움과 불편함 뿐이었다. 몇 번의 연애를 거쳐 20대가 지나갔고 서른셋이 된 다현의 곁에 있는 남자 세호는 유부남이었다. 그저 다현을 성적 욕망을 채워주는 하나의 도구로만 생각하는 그에게 이젠 서서히 지쳐가기만 한다. 더 이상 그가 기다려지지 않는 자신의 감정을 전하고 그에게 결별을 선언한다.
다현은 잡지에 '21세기의 이색적인 직업'이라는 기획기사를 연재하기에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을 만난다. 주로 그 선택은 잡지사의 편집장인 친구 은혜와의 회의를 거쳐 선택된다. 이미 결혼과 이혼을 한번 거친 은혜는 남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잘 열지 못하는 다현에 비해 활동적이고 개방적이며 자유롭기까지 한 친구이다. 그런 은혜를 보며 다현은 이성을 사귈 때 성과 도덕을 일치시키는 남자를 만나고 싶다고 생각한다. 다현에게 사랑은 어느 순간 찾아온다. 기획기사의 취재대상으로 만난 항공관제사 연우에게서 다현은 다정다감함과 함께 고독이라는 어쩌면 자신과 비슷한 무언가를 갖고 있는 남자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또한 무엇보다도 다현을 사로잡는 것은 와인에 대한 그만의 해박한 지식이기도 하다.
"겉으로는 모두들 서로를 이해한다고 말하고, 또 이해하려고 들지만 그 내면은 언제나 스스로의 고독에 빠져서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지도 연민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하지만 이 남자는 어쩌면 나와 비슷한 주파수를 가진 사람인지도 모른다. 고독과 외로움을 이해하고, 진정으로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
다현은 지나온 자신의 연애들을 기억하면서 좀 더 영리해지고 싶다고 생각한다. 서로에게 상처받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집착하지도 않으며, 그에게 모든 것을 헌신하는 것 보다 자신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여자로 살고 싶고, 그를 통해 내면의 외로움이나 세속적인 욕망보다는 현실적인 사랑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기로 한다. 다현의 바램처럼 그는 조용히 다현에게 다가온다. 로맨틱한 색깔의 와인처럼 때로는 향긋한 레몬의 신맛처럼...
"와인은 감정의 술입니다. 와인이 고급스러운 것은 감정을 읽는 술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감정을 가질 때는 좋은 와인이 되고, 감정이 나쁠 때는 나쁜 와인이 되는 것입니다...."
다현은 창백한 인상을 가진 연우의 여동생을 만나면서 연우와 그녀가 남모를 비밀을 갖고 있을거라는 확신을 갖고 그녀에게서 알 수 없는 질투심과 함께 혼자 버림받았다는 느낌에 사로 잡힌다. 그리고 그러한 그녀의 확신은 마침내 현실로 다가온다. 그가 떠나고 죽음을 목전에 둔 처량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다현은 그를 생각한다. 라틴어의 진심이라는 뜻을 가진 '인 비노 베리타스'를 읊조리면서 연우는 다현을 향한 자신이 마음이 진심임을 재차 확인 시킨다. 그리고 그는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향긋한 와인향이 가득한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자극적인 쾌락만을 쫓는 현대인들에게 사랑은 기다림을 필요로 하는 와인의 속성과 닮아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 어떤 것도 믿을 수 없었던, 자신을 그저 세상에 혼자 버려졌다고만 생각하는 다현은 연우를 통해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그것을 통해 다현은 가정마저 버리면서까지 제자와의 사랑을 택했던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고 아버지의 여자 희수가 진정 아버지를 사랑했음을 깨닫게 해주기도 한다.
소설은 풍부한 와인 상식을 담고 있다. 어쩌면 와인에 대한 입문서라 느껴질만큼 다양한 와인에 대한 소개는 계속해서 책에 집중할수 있게 만드는 촉매제와도 같다. 소설 속에 가득한 많은 와인 중에서도 마지막을 장식하는 '마데리라'는 작품의 많은 의미를 담아내고 있는 듯하다. 포기하려 했던 다현에게 아프리카의 어느 화산섬에서만 제조되는, 세월이 흘러도 그 맛이 변하지 않는다는 불멸의 와인을 보내는 그의 마음은 가다림이라는 또 다른 사랑의 모습으로 다현에게 다가오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