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한 유산
이명인 지음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피를 이어받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렇게 우리는 미리 결정지어진 성씨를 갖고 혈연으로 이어진 인간관계를 갖는다. 아마도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고 거침없이 바뀌어가는 현세태속에서 가족관계 역시 과거처럼 몇대가 어우러져 사는 대가족의 모습은 이미 찾기 힘들어져 버렸다. 그저 편한대로 가족아라는 틀에 구애받지 않고 보다 자유롭게 자신의 인생을 즐기는 것이 바로 현대를 살아가는 가족이란 개념이기도 하다.

 

이명인의 소설 <은밀한 유산>은 100여년에 걸친 두 집안의 삶을 통해 잊혀져 가고 있는 가족과 뿌리에 대한 의미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 해 주는 작품이다. 한국인의 핏줄이라는 것, 뼈대라는 것이 과연 현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주는 것은 무엇일까.


소가 몸을 휘어 마을을 담뿍 감싸안고 있는 형상을 지닌 우각산 아래 고라실 마을은 연암이씨 충숙공의 후예이며 대대로 조정에 위세를 떨친 세도가의 집안이다. 이에 비해 너븐들 김씨 집안은 큰 벼슬없이 안락하게 살아가는 것을 자신들의 지표로 삼는 그저 향반에 머무름을 자신들의 위치로 여기며 살아가는 가문이다. 그 바탕은 무오사화때 연루되어 멸문의 화를 겨우 면해 이곳 너븐들에 터전을 잡은 자신들의 선조 수양공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고장을 대표하던 두 집안은 그런 연유로 인해 아무래도 권세나 세도면에서는 늘 고라실이 우위에 서는 형국을 지닌채 살아오지만 너븐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기회를 노린다. 고라실 집안은 재물쪽으로도 풍족함이 없었지만 늘 제사를 모실 자손이 너무나 적어 위태위태하게 대를 이어오다가 결국 양자로 대를 잇게 된다. 그렇게 우여곡절끝에 맞은 양자가 윗말에서 들인 청강 이재우였으나 그는 집안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종손이라는 위치를 부담스러워하고 집안 가산을 거의 탕진한채 숨을 거둔다. 또한 그가 탕진한 토지의 대부분을 너븐들쪽에서 매입함으로써 두 집안의 갈등의 골은 점점 더 깊어만 간다.

 

청강의 두아들 연식과 경식은 비록 기울어져가고 있는 가세이지만 뼈대있는 가문이라는 것을 긍지로 여긴다. 고라실의 장손이 된 죽비 이연식의 두아들 정우와 영우 그리고 동생 경식의 아들 찬우로 인해 자손이 번창함을 고라실은 그나마 위안으로 여긴다. 옛부터 자손이 번창했던 너븐들의 장손은 원봉 김익준이다. 그들은 그것을 대대로 전해오는 집안의 가보인 원앙에서 기인한다고 믿고 있다. 익준은 급격히 변해가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장자 희태를 제외한 나머지 자식 종태, 윤태, 용태와 외동딸 난설까지도 경성으로 보내 신식공부를 시킨다. 이제 더이상 너븐들에서 움츠리지 않고 세상을 향해 나가겠다는 그들의 의지이기도 했다. 결국 고라실에서도 정우와 영우를 경성에 터전을 잡고있는 아우 경식에게 보냄으로써 이제 자손들의 무대는 경성으로 옮겨진다. 세상은 바뀌었지만 젊은이들의 열정만큼은 불타오른다. 두 집안의 젊은이들은 독립이라는 문제에 직접적으로 부딪히면서 일제에 항거한다. 누구보다도 정우와 난실이 대표적이다. 고라실의 장손 정우는 장손이라는 부담을 지고 가는 아버지 연식의 고단함을 누구보다도 잘알았지만 끝내 자신의 이상을 포기하지 못한다. 총명한 난설은 아버지 익준의 반대를 무습쓰고 올라왔지만 누구보다도 조직적이고 열정적으로 지하운동에 참여한다. 일제에 쫓기던 정우와 난실은 그렇게 서로에게 빠져들고 반대하던 두 집안의 결혼승락을 받아낸다. 하지만 정우는 체포되고 그런 정우를 잊지못하는 난실은 미국유학에 오른다. 그렇게 시대는 고라실과 너븐들 젊은이들을 쓰러지게 만들어 버린다. 감옥에서 숨을 거둔 형 영우의 뒤를 따라 정우 역시 감옥에서 숨을 거두고 너븐들의 종태 역시도 감옥에서 숨을 거둔다. 그렇게 암흑기는 찾아온다. 고라실 연식의 아내 백씨는 이제 기댈곳이 없다. 연식의 동생 경식마저도 찬우를 데리고 중국으로 떠나 연락이 두절됐기에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기던 고라실의 집안의 대가 끊긴 것이다. 백씨는 이전부터 경식의 집에 드나들던 사옹원 공인 몽득의 사촌 연화를 통해 고라실의 핏줄을 이어가려 한다. 백씨의 노력은 처절하다. 자신이 평생 지켜왔던 고라실의 안주인 자리마저 포기하면서까지 그리고 이미 늙어버린 남편 연식의 마지막 남은 힘까지 짜내 대를 이으려 너븐들의 가보 원앙을 몽득에게 훔쳐올 것을 부탁한다. 원앙을 손에 쥐게 되면 백씨는 소망이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하지만 너븐들의 원앙을 갖고도 백씨는 끝내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렇게 그 시대는 막을 내린다.

 

무대는 현대로 바뀐다. 너븐들의 장손 현진은 자신의 인터넷 블로그를 통해 가문과 핏줄이라는 의미를 알린다. 그리고 그 블로그가 적지않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고 그 과정속에서 영인을 만난다. 놀랍게도 영인은 이전 중국으로 떠났던 고라실 청강 이재우의 둘째아들 경식의 후손임이 밝혀진다. 영인의 아버지 이필준이 찬우의 손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필준은 탄탄한 재력을 지닌 중견기업의 대표가 되어있다. 집안이 거의 멸문하다시피한 고라실에 이제 종손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제껏 눌려 지내왔던 고라실의 사람들은 필준을 통해 다시 한번 가문이 일어나 그 옛날의 영화를 회복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소설의 시기가 여러대에 걸쳐있을 만큼 작품의 스케일도 방대하다. 그것은 대하소설로 엮어도 될만큼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봐도 될 것이다. 소설의 기둥을 이루는 두 집안의 갈등 뿐만 아니라 정우와 난실의 이루지 못한 사랑, 고라실의 대를 이으려는 노력, 실존인물인 관순을 통해 서서히 의식을 깨어가는 난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정우와 난실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되내이며 현진과 영인이 새롭게 만들어 가는 인연 등 많은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다. 그중에서도 이 작품의 모든 키를 쥐고 있는 이가 바로 김몽득이다. 백씨와의 거래를 통해 고라실이라는 당대의 명문가와 사돈이 되었지만 끝내 고라실은 쓰러지려 하고 있다. 몽득이 겨우 잡은 신분상승의 꿈은 저 너머로 사라지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몽득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봐라, 나라는 망해도 양반은 망하지 않았느리라. 가문의 영광을 후광으로 삼은 너는 이제 세상의 중심이 되었느리라."

 

몽득의 되내임을 통해 이 작품 <은밀한 유산>이 보여주려 했던 것이 드러난다. 그것은 신분과 계급이라는 불변의 존재에 맞서는 한 개인의 처절한 몸부림이다. 또한 그것은 뿌리라는 겉으로 보이기만하는 외형적인 모습에 치중하는 우리들의 모습에 대한 고발이기도 하다. 이미 사라지고 없다지만 이전의 시대에 존재했던 신분은 어쩌면 족보와 혈통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지금도 계승되고 있다. 이전의 시대가 개개인의 사람보다 가문과 뿌리라는 것을 통해 개인을 평가했다고 넘겨버릴수도 있지만 그것이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은연중에 나타난다는 것은 조금은 우리를 씁쓸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은밀한 유산이라는 것이 어쩌면 우리들이 드로내고 싶지 않은 치부가 아니었을까란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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