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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종의 라틴화첩기행 ㅣ 문학동네 화첩기행 5
김병종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늘 짜여진듯한 현실의 일상은 언제나 현대인들을 지치게끔 한다. 그래서 가끔은 모두들 일탈을 꿈꾸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생활의 법칙은 그것조차도 쉽게 허락하질 않는 것 같다. 아마도 그 대안중의 하나가 다른이 들이 몸소 체험하고 걸었던 자취를 따라가보는 것이 아닐까. 현대문명의 이기인 TV에서는 언제나 낯선 곳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전한다. 스쳐 지나가듯한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지만 이국적인 풍경들은 이내 기억저편으로 묻혀버리곤 한다. 책이라는 전달방식은 그래서 그 여운이 좀더 진한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으며 이국적인 문화를 자신이 체험하는듯한 상상에 빠지기도 하니까. 그러한 일반적인 생각으로 이 책을 꺼내 들었다.
이미 <김병종의 화첩기행>시리즈로 유명해진 김병종 화백의 글과 그림은 그러한 혼자만의 여행을 더욱 더 감미롭고 실감나게 즐길 수 있는 멋이 있다. 그의 손을 거쳐 탄생한 그림들은 낯선 이국의 풍경을 우리 눈앞에 생생하게 활짝 펼쳐준다. 이 책 <김병종의 라틴화첩기행>은 저자가 직접 남미를 여행하며 보고 듣고 느끼며 체험한 감성들을 독자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주는 살아있는 기록이기도 하다. 여행의 중간중간에서 저자는 다양하고 폭넓은 인문학적 지식을 글에 담아내고 예술적인 상상력이 더해진 그림을 그려내 이 여행기를 생동감나는 색깔을 입혀준다.
국내부터 시작된 저자의 이번 여행지는 남미다. 남미라는 곳은 어쩌면 세상의 중심에서 조금은 비켜나 있는듯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 옛날 스페인의 식민지였고 그들의 아름다웠던 전통문화는 그렇게 외세의 총칼앞에 소리없이 사라져 갔다. 아픔만을 남겨 놓고 그들이 떠난후 맨땅위에 그들은 특유의 정열과 리듬을 타고 삶의 새로운 방식을 기억해낸다. 저자가 처음 도착한 쿠바에서도 처음으로 느끼는 것이 바로 리듬이다. 광장이나 골목 어디에서
나 경쾌한 타악기 마라카스의 북소리와 룸바, 손, 과히라로 대표되는 쿠반재즈는 낯선 이방인에게 라틴 아메리카의 정열을 전한다. 저자는 닿는 곳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물이나 유명지를 통해 이국의 풍경을 보다 친근하게 그려내려 하고 있다. 20년이 넘는 기간을 쿠바에서 보내며 자신의 인생중 가장 빛나는 한때를 보낸 대문호 헤밍웨이의 숨결이 남아있는 암보스 문도스에서 저자는 그의 정신적 고뇌를 상상해보며 상념에 잠기기도 한다. 이미 제임스 딘 처럼 하나의 상징이 되어버린 체 게바라 그를 빼놓곤 쿠바를 이야기 할수 없을 듯하다. 음영짙은 서늘한 눈매에 시가를 꼬나문 그에게서 우리들은 낭만적 상상을 떠올린다. 혁명, 자유라는 입간판이 가득한 이념의 거리에 쿠바의 연인으로 기억되는 체 게바라 역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쿠바인들에게 언제나 늙지 않는 영혼 불멸의 연인이기도 하다. 저자가 길에서 만난 한 중년사내는 체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그냥 공기 같은 것이다. 쿠바인에게 그는 사랑의 공기다."
무용수들이 뿜어내는 현란한 춤사위에 녹아들어 있는 억압과 흑인노예의 절규를 느끼며 저자는 멕시코로 향한다. 백만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멕시코혁명, 그리고 그 주검위에 서있는 멕시코혁명 기념탑 앞에서 저자는 웬지모를 외로움만을 느낀다. 그 기록을 벽화로 남긴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의 고통스런 사랑을 기억하면서...
아르헨티나에서 저자를 안내하던 어느 교민은 이 도시의 공기가 자신을 붙잡았다고 한다. 알 수 없는 문화적 마력이 그를 주저 앉히게 한 것이다. 환상과 현실을 오고가는 시로 매혹적인 아르헨티나를 노래했던 보르헤스의 숨결은 아직도 부에노스아이레스 곳곳에 남아 있으며 그 밤의 거리에서 저자는 그의 소설속에 있는 것같은 착각을 느끼기도 한다. 또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불멸의 연인 에비타가 잠들어 있는 묘역 레콜레타에서 그녀를 기억하고픈
수많은 민중들의 열광과 아우성과 손짓을 느끼며 그녀의 극적인 삶을 떠올려 본다. 아르헨티나의 탱고가 개개인이 안고 있는 상처와 격정과 사랑, 상실과 후회를 보여준다면 브라질의 탱고는 무지개와 같은 극한의 화려함뒤에 숨어있는 고통과 슬픔, 한과 저항의 몸짓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고 한다. 노예선을 타고 온 이역만리에서 떠나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배고픔과 피로를 이겨내고 낯선 대륙에서 삶의 무게를 이겨내는 마지막 힘이 되어준 춤과 음악 그것이 삼바이며 그들의 카니발이다. 가난한 일상에서 그들은 그 한판 축제를 위해 일년을 기다린다. 나흘간 혼신을 다해 놀고나면 덧없이 사라지지만 그들은 그렇게 삶의 고통과 슬픔을 비워내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났나 보다.
이 책 <김병종의 라틴화첩기행>을 단순히 즐기기 위한 여행서적으로 봐서는 곤란할 듯하다. 저자의 발길이 닿는 6개국 쿠바,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에는 저마다의 아픔과 슬픔이 처연하게 아로새겨져 있음을 느끼게 된다. 저자의 여정을 통해 리오데자네이로의 거대한 예수상이 두팔 벌려 바라보고 있는 부촌에 가리워진 뒷편의 달동네의 가난한 영혼을 느껴보기도 했고, 노래와 눈물 그리고 살육당한자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아직도 남아있는 마추픽추의 망연자실을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리고 저자가 세계의 끝이라고 표현했던 자살바위에서 바다로 몸을 던지는 남자를 바라보며 느꼈던 여행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사람들이 세계의 끝을 찾아오는 건, 다시 돌아가기 위한 것.'
삶과 예술 그리고 열정과 리듬이 있는 곳, 그곳 남미대륙의 곳곳에서 우리는 저자의 시선을 통해 새롭게 자신의 삶을 즐겨나가는 사람들을 만난다. 어쩌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너무나 과거에 집착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고통과 슬픔을 딛고 그것마저도 열정이란 이름의 에너지로 발산해버리는 그들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