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표지에 있는 바리는 여러가지 모습을 상상하게 해준다. 어찌보면 연약해 보이기도 하고 꾹다문 입술에서는 비장함마저도 엿보인다. 전작 <심청>에서 근대를 배경으로 심청을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독립된 자아를 지닌 적극적인 여성으로 변모시킨 황석영 작가는 이번 <바리데기>에서는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오는 한 여인의 인생을 통해 우리에게 우리가 어쩌면 잊고 지내는지도 모르는 우리의 반쪽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하는 조심스런 시도를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바리데기 설화'를 현대적으로 새롭게 해석한 황석영의 <바리데기>는 여러가지 면에서 상당한 문학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보여진다. 바리데기는 천덕꾸러기 일곱째 딸로 태어나 왕과 왕비인 부모에게서 내쳐졌으나 그 부왕의 병을 고치고자 갖은 고난과 역경을 딛고 생명수를 구해오는 일종의 영웅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설화에서 그 모티브를 따왔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설화속의 바리데기가 따뜻한 온실속의 화초에서 세상에 내던져지면서 자신의 의지와 판단으로 새로운 인격을 이뤄내는 과정을 통해 단순한 서사구조의 진행 보다는 그녀가 그러한 성취를 가져오기까지의 험난했던 역정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북한에서 어느정도 안정적인 상태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원하지 않던 일곱째 딸이었기에 바리는 설화속의 바리공주처럼 엄마에 의해 버려지기도 한다. 그래서 아마도 할머니가 붙인 바리라는 이름이 지어지는 계기가 된다. 그렇게 외로운 바리에게 바리의 모든 것을 아껴주고 보듬어 주던 할머니와 강아지 칠성이는 그녀 삶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바리에게는 할머니에게서 전해진 특수한 능력이 있다. 그것은 상대의 마음을 읽어내는 능력이다.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몰랐던 바리에게 할머니는 조금씩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이야기 해준다. 또한 바리가 버려졌을때 바리를 물어온 흰둥이의 새끼 칠성이를 바리는 서로가 외로웠고 바리의 능력으로 마음이 통하는 상대였기에 진심으로 아껴주고 평생 동생으로 지켜줄것을 다짐한다. 북한의 생활자체가 어려워지고 때맞춘 외삼촌의 탈북은 그나마 행복하기만 했던 바리의 가족에게 재앙으로 다가오고 뿔뿔이 흩어진채 바리는 할머니, 언니 현이, 그리고 칠성이와 강을 건너게 된다. 아버지가 합류했지만 고향을 떠나 아무 연고없이 시작한 백두산자락에서의 움막 생활은 낯설고 힘든 생활이었다. 하지만 함께 강을 건넜던 가족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칠성이마저도 바리의 곁을 떠나면서 정말 바리는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진다. 바리에게 할머니와 강아지 칠성이의 존재는 남다르다. 그것은 바리가 기나긴 어둠의 나날을 보내는 순간 즉, 아버지가 가족을 찾으러 떠났을 때 비바람치던 움막안에서 할머니와 둘이 있으면서 할머니의 바리이야기를 듣는 순간이나 영국으로 향하던 배안에서 그저 껍데기이지만 살아야하는 육신을 지탱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꿈속에서 바리는 그저 칠성이가 인도하는대로 달빛같은 하얀길을 따라 할머니를 만나러 가기도 하고, 세상끝의 생명수를 찾아가는 설화속의 바리가 되어 고행의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탈북이라는 새로운 시대적 요구는 어쩌면 그들에게는 살기 위한 몸부림일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이념의 선택도 아니며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는 자유의 몸짓 또한 아니다. 그들은 그저 인간답게 살기위해 두만강을 건너고 당장 내일을 모르는 중국땅에 숨어 지낸다. 우리는 사선을 넘어온 그들을 어떠한 시선으로 바라볼까. 이전의 시대에 그들은 반공투사였고 이념과 자유를 찾아 새로운 세상으로 넘어온 개척자였다. 우리들은 그들을 보며 열광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데올로기에만 집착했던 시대의 지나간 추억으로 우리들에게 남아버렸다. 바리 역시 탈북이라는 길을 헤쳐나왔지만 그녀에게는 이념이나 전쟁이나 종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바리에게는 무기와 화약으로 점철됐던 지난 세기를 잊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려는 작가의 노력이 투영되어 있다. 그런 연유로 바리가 향하게 된 곳이 영국이며 또한 알리라는 파키스탄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의 아이를 낳게 되나 보다. 바리는 세상을 향해 외친다. "말 좀 해봐. 우리가 받은 고통은 무엇때문인지. 우리는 왜 여기에 있는지..." 사람들의 욕망은 그 끝이 없다. 전쟁에서 승리한 자는 아무도 없으며 그저 이승의 정의란 늘 반쪽일 뿐이다. 남편이 실종되고 마지막 그 희망의 끈인 아이마저 떠나보내는 바리의 현실은 아득한 절망 뿐이다. 죽은 딸 홀리야 순이를 기억하려 애쓰는 바리에게 작가는 압둘 할아버지의 입을 빌어 이야기한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힘센 자의 교만과 힘없는 자의 절망이 이루어 낸 지옥이다. 우리가 약하고 가진 것도 없지만 저들을 도와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희망을 버리면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다름없지. 네가 바라는 생명수가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만,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 설화속의 바리가 생명수를 구해 부모를 살려냈다면 소설 <바리데기>속의 바리는 과연 생명수를 찾아 냈을까. 작가는 숨은 그림찾기라는 표현을 쓰며 그것을 독자에게 돌린다. 하지만 한가닥의 남은 희망을 찾아 머나먼 고행의 길을 떠난 설화속의 바리처럼 소설속의 바리도 이렇게 현실로 우리에게 다가오려 노력한다. 그것이 압둘 할아버지의 말처럼 결코 버리지 말아야 할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이라는 이름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