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 계
장아이링 지음, 김은신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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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대표하는 여성문호 장아이링의 작품인데 책이 절판되어 더 이상 시중에서는 구할 수가 없었다. 영화로도 유명한 작품인데 쇄를 더 찍거나 개정판이 나오지 않고 있다는게 좀 의아하지만 나름 그럴만한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소설의 문장을 중간 중간 떼먹은 느낌이랄까. 함축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는데 사실 불친절한 전개일 뿐이다. <못잊어>정도는 매끄럽게 이어지는 맛이 있지만 다른 작품들은 소설의 진위를 파악하기가 좀 힘들어 소설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모호한 경우가 많았다.

섹계는 전혀 선정적인 작품이 아니었다. 당시 시대를 생각해봐도 문학이 옌롄커의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와 같은 정도의 수위를 오간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사실 영화도 보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를 한다는 건 말이 안되지만 주변에서 들은 바에 의하여 영화에서 각인된 이미지를 떠올려 비교해 보자면 과연 장아이링은 이안감독의 영화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궁금해진다.

그녀의 눈에 이렇게 변해버린 그의 모습은 하나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를 너무나도 증오하는 동시에 너무나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사람을 진심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분명 ‘사랑‘ 이라는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었지만 증오 역시 뭔가를 철저하게 이해하는 특이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P104

그녀는 가끔 ‘오래되고 낡은 것은 하찮게 여기면서도 새로운 것은 또 할 줄 아는 게 없는’자신이 속한 세대 사람들이 제일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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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때와 죽을 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6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지음, 장희창 옮김 / 민음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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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찾아보게 된 건 은희경작가의 <빛의 과거>에 나왔던 구절 덕분이었다. 브론스키와 안나, 제롬과 알리사, 베르테르와 로테가 나오는 작품은 알았는데 에른스트와 엘리자베스는 어느 작품의 주인공인지 궁금해 찾아보다가 <사랑할 때와 죽을 때>라는 작품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사실 4개의 작품 중 3개의 작품을 보았지만 감동을 주는 작품은 딱히 없었고, 재미있는 작품이라면 방대한 분량과 비극적 결말에도 불구하고 유쾌하고 재치 넘치는 필력이 매력적인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 정도였나? <사랑할 때와 죽을 때>역시 문체가 어렵거나 내용이 전위적인 것도 아니었지만 감동이나 재미를 안겨다주는 작품은 아니어서 그런지 빠르게 읽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2차 세계대전 당시 3주간의 휴가를 얻은 독일군 에른스트가 고향에 돌아와 폭격을 맞은 자신의 고향 집을 보며 부모를 애타게 찾고, 어렸을 적 친구들의 다양한 변모를 느끼며 혼란스러워 하다가 아버지가 강제수용소에 갇혀있는 엘리자베스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는 등의 혼동의 전쟁 시기를 묘사한 작품이다.
당시 독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책들 중 고전으로 살아남기 위한 조건인 유대인에 대한 원죄의식 또한 두드러지고, 전쟁의 비극적인 참상을 묘사하는 데 뛰어난 작품이다.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시대를 아우르는 인간 감정에 대한 통찰력을 키우고, 단편적이고 일방적으로 받아들였던 과거에 대한 기록을 보다 입체적이고 폭넓게 이해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부담스러운 분량의 고전이라도 묵묵히 참고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물론 톨스토이나 헤세같이 시대가 지나도 흥미를 돋아주는 필력의 작가들의 작품이라면 좋겠지만....

음식보다 더 긴요한 것은 희망이 아니던가? 희망은 그 어떤 알 길 없는 뿌리들로부터 솟아오르지 않던가?- P143

"선생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답을 구하는 것은 결정을 회피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저도 선생님께 실제로 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실은 자신을 향해서 물어본 것이지요. 종종 다른사람에게 물어본다는 것은 곧 자신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P251

무치히는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걸어갔다.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니 그래도 위안이 된다고 그래버는 생각했다.
자신의 불행이 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P306

그들은 계속 걸어갔다. 저녁놀은 더 짙고 더 깊어졌다. 그들의 얼굴과 손이 붉게 물들었다. 그래버는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사람들을 보았다. 갑자기 그들이 이전과 달라 보였다. 각자 자신의 운명을 지고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을 때는 판단을 내리고 용감해지는 것이 쉽다. 그러나 무언가를 가지게 되면 세상은 달라 보인다. 더 쉬워질 수도 더 어려워질 수도 있으며 때로는 거의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 용감해지는 것은 언제든 가능했지만, 이제 그것은 다른 모습이고 전혀 다른 이름으로 나타나며 또 바로 거기서 출발해야 한다. 그는 숨을 깊이 들이켰다. 적의 점령지에서 정찰대에 쫓겨 아슬아슬하게 피난처로 도피했지만, 이전보다 더 안전하지도 않고 잠깐 동안만 한숨을 돌릴 수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신기해요. 그래도 봄이 온다는 게. 여긴 파괴된 거리이고 봄이 올 이유도 전혀 없어요. 그런데도 어디선가 제비꽃 향기가 나는 것 같아요."- P339

그래버는 발길을 돌리며 생각했다. 나는 나를 지탱해 줄 무언가를 가지려고 했어. 하지만 그것을 가지게 되면 그것이 오히려 나를 두 곱이나 고통스럽게 한다는 점은 몰랐던 거야.- P385

"죽어야 할 운명이었다면 그보다 더 나은 죽음을 맞았으리라고는 단정할 수 없는 겁니다. 점심은 들었든가요?"
"예. 정식으로, 포도주와 좋아하시는 후식도 곁들여서 말입니다. 생크림을 얹은 사과 케이크를요."
"그렇군요, 클라이네르트 부인. 그 정도면 훌륭한 죽음입니다. 나도 그런 식으로 죽고 싶어요. 그러니까 부인도 그렇게 목을 놓아 우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너무 이른 나이라."
"언제 죽어도 이른 건 마찬가지랍니다. 일흔이 되어도 마찬가집니다. 장례식은 언제인가요?"- P419

슈타인브레너가 웃었다. 그는 남이 비웃는 것을 알아차리는 귀가 없었다. 그의 잘난 얼굴이 만족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P499

요제프가 어깨를 으쓱했다. "증오! 그런 건 사치야! 증오하면 경계심을 잃게 돼."- P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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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르발 남작의 성
최제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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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런 독특한 취향의 유머리스트라니!!

성호와 강지민이 우리의 단골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은은한 촛불의 울타리 안에서 그녀는 성호를 바라보며 나른하게 웃었다. 몸을 돌려 덜컹거리는 철제 계단을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강지민이 나를 설핏 본 것도 같았다. 나는 <태>에 다른사람을 데려온 적이 없었다. 밀약 같은 건 없었지만, 둘만의 아지트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성호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강지민이 내가 미치지 못하는 영역에서 성호를 채워줬다면훨씬 견디기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나와 성호의 교집합부분만을 잠식해 들어왔다. 친구가 아닌 연인으로서.- P92

네가 왜애? 어젯밤 이 대답을가장 고심해서 갔다. 직접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내가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눈치챌 수 있는 대답, 수치심을 걷어내고 제안을 수락하면서도 자괴감은 남겨두게 만드는 대답.- P94

솔직히 내가 다른 누군가로 변한다는 환상은 매혹적이잖아요. 선생님도 가끔 꿈꿔보지 않나요?- P121

혹자는 말한다. 과거 특정 시점의 현상을 현재의 세계관으로 판단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P164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상자가 열린 이후 인간들은 순수한 선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 이것은 베이징 나비의 날갯짓처럼 전혀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했으니, 신들의 사회에 구조 조정의 칼바람이 몰아친 것이다. 인간들은 점차 강력한 리더십으로 자신들을 이끌어줄 완벽하게 선한 신을 원했다. 신이라면 모름지기유한한 삶을 넘어설 수 있는 영원의 비전을 제시해주어야 한다.
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신성한 빛으로 둘러싸인 절대자, 지상의악을 소탕하는 정의의 사도, 신축 중인 천국 아파트 분양권을독점한 존재. 그런 신이 있을 턱이 있나. 그러나 인간들은 가끔불가능한 일을 해내는 뚝심을 보여준다. 마치 오만 신들을 원심분리기에 집어넣고 엑기스를 뽑아낸 듯한, 순도 99.9%의 순결한 신들이 탄생했다. 태생부터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이들은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며 세력을 넓혀갔다. 바야흐로 글로벌 경영을 추구하는 무한 경쟁의 시대가 왔건만, 철밥통을 꿰차고 있던올림포스 신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했다. 1차 정리해고 대상자였던 디오니소스에게 당시 상황에 대해들어보자.

디오니소스 (술의 신, 제우스와 세멜레의 아들)
그게 무슨 신이야, 사이보그지. 감정도 없는 사이보그, 어디서 근본도 없는 것들이 튀어나와 나대는데 말이야, 정말 같잖아서……… 그래도 나는 오픈 마인드를 가진 신이야. 하루는 아후- P174

정말 미쳤나 봐, 그 사이코를 …… 그 사이코는 영문과조교라고 했다. 교수들에게 아부로 붙어살면서 학생들에게는성깔 더럽고 인정머리 없기로 악명이 자자하다는 설명이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추한 것을 미워하지. 그러니 어떤 생명체보다도 추한 내가 얼마나 혐오스러울까! 그대, 나의 창조자여,
하물며 당신까지도 자신의 피조물인 나를 혐오하고 멸시하고있소. 그래도 그대와 나는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풀릴 끈으로묶여 있소. (……] 삶은 비록 고뇌 덩어리라고 해도 내겐 소중한 것이오. 그러니 난 삶을 지킬 것이오. 명심하시오. 당신은나를 당신 자신보다 더 강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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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담한 빛
백수린 지음 / 창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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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천년을 사는 방법이 있다고. 독서라는.... 삶의 다양한 이면들을 여러각도로 보는 기회라고...
읽을 때는 잘 몰랐는데 노트를 정리하니까 좀 더 진하고 묵직하게 다가오는 듯하다.

당장 따라가지 못하는 수업을, 끝내지 못한 과제를, 마칠 수 없을 것 같은 논문을 걱정하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들은 언제나 내게 그렇게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들 앞에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안달하는은 언제나 창피하고 조금쯤 비참했다.- P22

확신이 없는 사람들은 쉽게 우연에서 어떤 계시의 흔적을 찾고 싶어하는 법이다.- P70

오빠는 정신 차리고 열심히 살아야 해, 하고 내게 말했다. 네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은 우리 때와 달라. 그렇게도 말했다. 그래도 열심히 하면 경쟁에서살아남을 수 있어. 오빠는 아무것도 몰랐다. 오빠는 정말 그렇게 믿는 것 같았다. 열심히 하면 된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오빠는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때까지 오빠는 열심히 해도 아무것도 되지 않는 세상을 아직 살아보지 못했던 거니까.- P79

교수들도 포기한 원서 독해를 추구하는 선배의 열정은 무모해 보였다. 처음에는 스무명쯤에 달했던 스터디의 인원이 줄고 줄고 줄어서 한 학기 만에 열명도 채 남지 않았다. 그중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별히 러시아어에 열정이 있었던것은 아니었다. 씨를 뿌렸으면 거둬야 한다는 부모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온 19년 동안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 결과였다고나 할까.- P109

이해는 했지만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무례가 난무하는 시절이라지만 기분이 상했다.- P127

나는 죽음이 슬픈 이유는 잊히기 때문이 아니라 대체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렇게 배웠다.- P128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번번이 괴로워졌으므로 나는 그때마다 이렇게 되어버린 것은 그저 세상의 이치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어쩐지 변명 같았고, 그래서 결국은 씁쓸한 기분이 되고 말았지만.- P148

적어도 그때까지는, 나는 창밖을 내다보며 나의 무심함으로 인해 지켜내지 못한 모든 것들을 생각했다. 눈부시도록 찬란한 햇살이 우리가 타고 있는 차를 부드러운 파도처럼 집어삼켰다.- P273

삶에 생로병사가 있듯 사람 간의 관계에도 생로병사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은 한때 내게 위로가 되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말을 처음 한 사람은, 모든 관계가 생로병사를 겪으며 자연사하는 것이 아님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나는 지척에서 우리에게 닿을 것처럼, 닿을 것처럼, 밀려왔다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며,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사고사로 끝나는 수많은 관계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기습적으로, 불시에, 사멸하는 관계들.-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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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랄프 로렌
손보미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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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허구이지만, 누구에게나 익숙한 사실과 그럴싸한 거짓말이 범벅이 된 난장판이라면 그건 그냥 독자를 기만하려는 허위일 뿐이다. 대체 그럴싸한 허구를 지어내기 위해 그 많은 허구의 인물들과 인터뷰, 저작물을 창조해 내다니, 이 작가는 기자가 되지 못한 한을 소설로 풀어보려는 심산인가.
영화감독 장 자크 밀레노를 열심히 찾아본 멍청한 독자가 나만은 아니길.....(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필모그래피까지 다 찾아본 나는 정말 두서없이 앞서가는 멍청이였다.)
그래, 화자가 거짓말쟁이였으니 이 소설의 주제는 그냥 미천한 구라다.

믿을 수 없는 진실을 주제로 담기위해 직설적으로 믿을 만하지 못한 인물들을 나열하고 화자가 지속적으로 거짓말을 써내는 단순성이 문학적인 가치가 있나? 정말 최악이다.

젊은 여성작가가 남성에 빙의해 화자가 되어보려한 시도도 정말 역부족이지 않았나 싶다. 남성작가가 여성화자로 소설을 쓸 때 여성독자들도 이런 이질감을 느끼나. ‘종수’라는 남자 이름의 여성화자라 생각하고 초반부를 읽어갔다. 그러다 화자가 명백하게 남자라는 걸 알게됐고, 이 감정선은 도저히 남자라고는, 심지어 여성성 충만한 감성적인 남성이라고 해도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찌질함’때문에 소설이 너무 거북해졌다.

재미는 너무 당연하게 없다. 중심을 잃고 마치 실존인물인냥 등장하는 어중이 떠중이들이 뒤섞여 있다가 그냥 이건 구라니까 결말도 구라처럼 끝내버리자는 나름 철저한 계산과 의도가 담겨있는 듯 하다.

어째서 그런 식의 논리가 성립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대부분의 선생님들은 그러한 엄격함의 기본은 복장 단속에 있다고 믿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는 겉모습에 신경쓰는 것을 막으면 모든 관심이 자연스럽게 공부 쪽으로 흐를 것이라는 명제‘가 있었다. 또한거기에 덧붙여 교복을 단정하게 입으면 입을수록 정신 상태가 좋은것이라는 ‘이론‘도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된 또다른 온갖 ‘이론‘이 있었다(저 모범생 좀 봐라, 얼마나 단정하게 교복을 입었니? 혹은, 저따위로 꾸미고 다니는데 무슨 공부람! 또는, 쯧쯧쯧……).- P52

돌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 내가 세상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단 한 가지가 있었다면, 그건 나 자신이 실패했다는 것을 사방팔방 알려야 하는 그 순간이었으니까.- P89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나는 그들의 목소리를 글자로 기록하면서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아주 조그마한 실마리라도 발견하게 되기를 아주 순수한 마음으로 바랐다. 그 당시 내가 세웠던 원칙 가운데 하나는그들이 해준 이야기 중 랄프 로렌(티모시)과 조셉 프랭클에 관련된내용만 기록해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 각각의 기억들은 지극히제한적이어서 때때로 정면으로 배치되고 모순되고, 순수하게 말이안 되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는 그러한 어긋남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들의 목소리를 나중에 들음으로써 그들이 혼란스러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 중 대부분은 이야기를 시작한 이후에야, 자신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풍부하고 생생한 기억의 토막들이, 언어화되는 동안 믿을 수 없을 만큼 단순해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들은 마치 안개 속을 더듬거리는 사람처럼 조심스러워진다. 그렇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방금 전까지의 머뭇거림이 무색할 정도로 이야기에 탄력이 붙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용케도 그 시절의 자기 자신을 끄집어낸다.- P151

"세상에, 당신, 동양인이었어요?"
그녀는 내 이름 같은 건 주의깊게 듣지도 않았던 것이다. 나중에야나는 그게 그녀의 성격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매사 그런 식이었는데, 남의 말을 귀기울여 듣지 않을 때가 많았고, 말을 함부로 했으며, 단정짓는 걸 좋아했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 대해 이런 식으로이야기했다. "직설적인 면이 있지만, 활달하고 대범하며 맺힌 곳이없죠." 그녀는 마치 국가공인이라도 받은 사실인 양 이야기했는데 나는 아무런 반박도 못하고 그저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나중에 나는 그 말에 완전히 동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이기적이고 독단적인면이 있어요. 정말 싫은 면이죠." 자기 자신에 대한 신랄한 평가에 오히려 내 쪽에서 그녀에 대한 변명을 할라치면 그녀는 내 말을 끊고 이렇게 말했다. "변명의 여지가 없어요."- P154

이미 조셉 프랭클이 예순 살을 넘은 시점부터 권투장의 젊은이들은 조셉 프랭클과 함께 링에 서는 걸 꺼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링 위에서가 아니라면 권투장의 젊은이들도 조셉 프랭클을 좋아했다. 아니, 좋아할 이유는 없었겠지만, 그렇다고 조셉 프랭클을 싫어하거나피할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젊은이들의 삶에 섣부른 참견이나 충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건 그가 그만큼 지혜로워서였다기보다는 그가 타인의 삶을 문자 그대로 타인의 삶으로 받아들였기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링 위에서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P215

나는 그녀의 편견에 기겁했지만, 그런 이야기를 아무 거리낌도 없이 하다니 한편으로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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