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이승우 지음 / 민음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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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왜 우리 윗 세대의 감수성은 이렇게 감정이 주체할 수 없도록 벅차오르게 만드는걸까.


이 감정을 또 받아들이기 망설여져 두번 읽긴 힘들것 같은 생각이 들정도로 먹먹한 소설.

이승우 작가 소설은 나같이 평소 기독교에대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도 독서에는 전혀 무관할 수 있다는 점이 놀랍다.

연희에게 일어난 일은 그가 라면을 먹지 않았어도 일어났을 일이다. 그가 라면을 먹은 사건과 연희의 사건 사이에는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다. 그러니까 그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라면을 먹지 않았는데도 그 사건이 일어났다면 그는 자기가 행한 다른 어떤 일을 끄집어내어 그 사건의 원인으로 상정하고 자책했을 것이다. 무엇이든 끌어냈을 것이다. 자신에게 죄의식을 덧씌우기 위해 무엇이든 찾아냈을 것이다. 만들어 내기라도 했을 것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죄의식이었으니까. 죄의식을 느끼지 않으면 죄의식이 느껴져서 괴로웠을 테니까.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자신을 견딜 수 없었을 테니까. 차라리 죄의식을 만들어 자기를 괴롭히는 것이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자기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며 괴로워하는것보다 나았을 테니까. 그는 죄의식을 피하기 위해 죄의식을 필요로 했다.- P41

우연하지 않고 막연하지도 않은 동기를 숨기기 위해 우연과 막연을 전면에 내세운다고 할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우리는보기 싫은 물건은 우연히‘ 손이 닿지 않는 깊숙한 곳에 숨기고, 만나기 싫은 사람과의 약속은 우연히 잊어버린다. 박 중위를 그 자리에 앉게 한 것은 왼쪽 창가에 앉은 사람이 그의 마음속에 불러일으킨, 그 자신이 아직 의식하지 못하거나 의식하지 못한 척하는 어떤정서, 추억이거나 기대 혹은 욕망일 수 있다. 왼쪽에 앉은 사람에게서 감지한 어떤 요소가 그의 과거나 미래와 연결된 어떤 줄을 흔들었고 그는 그 줄에 걸려 넘어졌다는 식이다.- P46

예컨대 자기가 정말로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라 무료한 한 때를 견디기 위해 가벼운 파트너를 필요로 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그 자신도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모를 필요가 있거나모르는 게 유리하기 때문에 모르기로 작정했다고 가정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토끼를 잡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하는 호랑이의 프로 근성 같은 것과는 상관없다는 말인가. 아니, 자기 자신조차 감쪽같이 속여서 진심으로 간절하게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그 복잡한 암시와 조작이야 말로 토끼를 잡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하는 호랑이의 진면목인지 모를 일이었다.- P65

후는 형제가 어떤 판단을했는지 그 판단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수 없었는데, 그것은 형제가 어떤 해석을 했는지 알 수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자기가 어떤 의사를 가지고 있는지, 아니, 어떤 의사를 가지고 있기는 한 건지 분명하게 알지 못했기 때문에 형제의 해석을 판가름할 능력이 없었다. 후는 그 순간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선택을 해야 하는 부담으로부터 달아났다. 선택은 그의 권리였지만 책무이기도 했다. 그는 책무를 다하지 않은 죄책감을 권리를 포기한 희생과 맞바꿈으로써 자신의 무고함을 확보하려고 했다. 자연스러운 양도가 이루어졌다. 어쩔 수 없이 선택의 권리와 책무가 형제에게 떠넘겨졌고, 형제는 그 권리와 책무를 양도하지 않았다.- P102

암논은 자기 사랑을 어떤 것이든 요구할 수 있는 권리증처럼 내민다. 사랑한다. 그러니까 나와 자자. 사랑한다는 것이 그에게는 모든것을 할 수 있고 무엇이나 용납되는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간주된다. 그렇기 때문에 억지스럽고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하면서도 그 요구가 억지스럽고 어처구니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간주된 그의 사랑이 상대에게는 폭력일 수 있다는 사실을인지하지 못한다. 아름답고 순결한 다말은 이 폭력의 희생자이다.
그녀는 자기를 욕되게 하지 말라며 이복 오빠를 뿌리친다. 그리고상식과 이치를 앞세워서 설득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나에게는 치욕이고 당신에게는 어리석음이다. 이런 식으로는 안 된다. 지금 이러지 말고 아버지인 왕에게 말해서 나를 원한다고 하라. 아마 왕은당신의 청을 들어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당신의 차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말은 논리적이다. 그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논리에 맞는 생각은 사랑 이전이나 이후의 것이다. 논리에 맞게 생각하고 논리에 따라 말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하지 않거나 이제 더 이상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P106

말하자면 압살롬은, 암논이 사랑한 것처럼 다말을 사랑했던 것이 아닐까. 암논이 사랑한 것처럼 사랑했지만, 암논이 행한 것처럼 행할 수는 없었던 것이 아닐까. 암논이 사랑한 것처럼 사랑했음에도 암논이 행한 것처럼 행할수 없었기 때문에 암논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P110

신분을 증명하는 일은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이었다. 믿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증명할 수 있지만 믿지 않으려고하는 사람에게는 누구도 증명할 수 없는 것이 신분이었다. 장은 그것을 잘 알았다. 장은 칼자루를 쥔 자였다. 그는 언제든 칼끝을 겨누거나 거둘 수 있었다. 믿어 주거나 믿어 주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것에도 연연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 앞에서 그의 칼끝은 무안하고 무색했다.- P140

아내는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다르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능력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다 헤아릴 수있는 것처럼 판단하고 평가하고 비판하는 건 옳지 않다고 답했다. 한정효는 전능자의 권력 사용에 의문을 제기했지만 아내는 전능자의 권력 사용에 대한 사람의 판단 능력에 이의를 제기했다. 한정효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듣지 않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했고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듣지 않았다. 하나님이 그렇게 독실하고헌신적인 사람을 이런 병에 걸리게 할 수 있는가, 거기에서 무슨 뜻을 찾으란 말인가, 하고 미친 사람처럼 소리만 질러 댔다.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아내의 무반응과 침묵은 도에 지나치게 항변하는그를 무안하게 했다. 그때는 명쾌하게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는 눈앞에 보이지 않는 신을 원망의 표적으로 삼음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징벌을 피하고 있었다.- P180

의로운 사람이 당하는 고통은 불의한 사람이 누리는 행복만큼 이해할 수 없는 문제이다. 인간은 질문한다. 이성이 대답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질문은 이성 너머, 신에게로 향한다. 신의 대답은 그러나 언제나 흡족하지 않다. 그 대답을 듣는 인간이 이성 너머를 사유할 수 없기 때문이고, 그 대답이 이성 너머를 사유할 수 없는 인간을 통해 전달되기 때문이다. 한정효의 아내는 신의 대답에 흡족하게 수긍하는매우 드문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녀가 이성 너머를 사유할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녀는 다만 인간이 이성 네머를 사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뿐이다. 그녀는 말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다른 일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겪는 고난 역시 우리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나님은 우리 이성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다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라고, 우리의 옳음을 주장하기 위해 하나님이 옳지 않다고 말하면 안 된다고, 알기 쉽고 다루기 쉽고 우리의 좁은 머리에 갇히는 하나님은하나님일 수 없다고,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라고, 그래서 믿는 거라고, 우리는 어떤 상황이든 왜냐고 묻지말고 네라고 대답해야 한다고.- P182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려면 위에 있는 것을 밟을 수밖에 없다고, 밟지 않고 오를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그는스스로를 합리화했다.- P193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어. 궁금한 것을 궁금해하지 않았던(않으려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알 것 같은 심정이었거든. 불러내지는 죄책감, 감정의 혼란, 양심의 가책, 행동의 제약…… 그런 성가신 것들과 대면하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동기 말이야. 자신의 비겁함을 똑바로 대면하지 않을 때만 군인은 용감해질 수 있는 거지. 그러니까 용감한 군인이 되기 위해서는 비겁해야 하고, 비겁함을 의식하지 않아야 하는 거지. 나는 또 다시 비겁해지고 싶지 않았으므로 지금이야말로 비겁해져야 한다고 설득했어. 신념을 지키기 위해 신념에 반하는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제넘은 충고를 다 했어.- P217

요약하면 이렇다. 처음에는 그녀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했지만 점차 찾아다니는 일 자체가 의미 있어졌다. 처음에는 그녀를 찾아내는 것이 그에게 내려진 계명과 같았지만 점차 그녀를 찾아다니는 것(찾아다닌다는 명분)이 그의 삶이 되었다. 계명일 때는 그 일을 이루는 데 자기 삶을 써야 했지만, 삶이 되자 그 일이 그의 삶을 누비는 재료가되었다. 그 미묘한, 그러나 현저한 차이를 후는 오랫동안 인식하지못했다.- P238

후는 원장의 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틀리지 않은 말을하는 원장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다른 문제였다. 말의 내용은 옳지만 말하는 행동은 옳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 있다. 어떤 옳은 말은 말해지는 순간, 말해졌기 때문에 옳지 않은 것이된다. 어떤 옳은 말은 옳음을 유지하기 위해 말해지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만 말해지지 않으면 그 말이 옳다는 걸 이해할 길이 없기 때문에 그 말이 옳다는 걸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말을 하는, 옳지 않은 방법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옳지 않은 행동을 통해서만 옳음이 증명된다는 것,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옳지 않음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 옳지 않은 실천을 통해서만 그 옳음을 이해시킬수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누군가의 옳지 않은 실천이 옳은 말 때문에 용납되기도 하고 누군가의 옳은 말이 옳지 않은 실천 때문에 의심스러워지기도 한다. 후는 원장을 의심했다. 무엇보다 그녀가 그런 말을 하는 동기를 추측할 수 없었다. 후는 당신 말이 옳다고도 하지 않고 당신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도 하지 않았다.- P255

사람은 자기를 지배하는 사람이 누구보다 강하고 탁월하기를 원한다. 그다지 강하지 않은 상대에게부림을 받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지만 누구나 두려워하는사람에게 부림을 받는 것은 우쭐하고 자랑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운동 경기에서 자기를 이긴 상대가 모든 사람을 이기고 최강자가 되기를 바라는 심리와 무관하지 않다. 나를 이긴 상대가 누군가에게 지면 기분이 언짢아지는데 그것은 내가 충분히 강하지 않은 상대에게 졌다는 사실이 무참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이기는 것이 가장 좋지만, 그러지 못할 바에는 누구도 이길 수 없는 강한 자에게 지기를 바란다. 나를 지배하는 자가 나를 지배할 만큼 강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지배받지 않는 것이 제일 좋지만 (이것은 확실하지 않다. 지배할 조건을 갖추지 못했거나 그럴 만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한 사람이 누군가의 지배조차 받지 못할 때,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해서 아무도 그 사람을 지배하려고 선택하지 않을 때, 소외감을 느끼거나 불안정한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는 의견이 있다. 그렇다면 지배받지 않는 것이 제일 좋다고 단정해서 말하긴 어렵다. 그렇긴 해도, 어쨌든) 불가피하게 지배받아야 한다면, 나를 지배하는 자가 당당하고 강할수록, 심지어잔인할수록 나를 만족시킨다고 할 수 있다. 이 당당하고 강하고 잔인한 지배자가 아주 가끔 아주 작은 친밀감을 표시하거나 아주 사소한 친절을 베풀 때 우리는 황송하고 고마워서 어쩔 줄 몰라 한다.
지배 방법이 엄할수록 이 효과는 크게 나타난다. 그러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이 황송함과 고마움은, 그의 친밀감과 친절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의 당당함과 강함, 심지어 잔인함을 향한 것이다.- P263

연희가 꿈 이야기를 하며 괴로움을 털어놓았을 때 후가 충격을 받은 것은 연희의 고통에 대한 새삼스러운 깨달음이나 공감 때문이 아니라(그것이 아주 없었다는 뜻은 아니지만) 자기의 은밀한 쾌락이 발각되고 통박되었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가 모르길 바랐고, 모를 줄 알았다. 심지어 그는 그 자신도모르길 바랐고, 모를 줄 알았다. 그런데 그녀는 그의 쾌락을 똑바로 보게 했다. 그는 치욕과 충격의 구렁텅이로 떨어졌고 죄의식에 사로잡혔다. 쾌락은 그에게 죄였다. 그는 그녀를 볼 수 없었다. 그러니까어떤 의미에서 그는 연희에게 쫓겨난 것이 아니라 연희로부터 달아난 것이었다.- P301

그는 마침내,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어쩔 수 없다는 듯, 거듭되는 제안을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포즈를 취하며, 의지가 아니라 숙명이라는 식으로, 당연하고 불가피하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선택을했다.- P317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다."라는 여행기 저자의 문장이야말로 가장 정확한 진술이라는 생각이들었다. 그 생각은 다른 많은 생각들을 거느리고 떠올랐다. 정확한 내막을 알아낼 수 없는 일이 있고, 정확한 내막을 알아내는 것이 적절하지 않거나 무의미한 경우가 있고, 정확한 내막을 알아낼 수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이 있고,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다고 말해야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 있다. 그는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다고썼고, 그것은 어느 쪽인가의 진실을 대변할 것이다. 그러자 다시금강영호가 초소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그가 언급한 1970년대 초는 초소가 세워진 시기라는 데 생각이 미쳤고, 그러자 뜻밖에 그가 초소에 대해 아주 잘 알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초소에 대해 아주 잘 알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않았다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그것에 대해 아무 언급도 하지 않은 것이야말로 그것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역설적인 증거일 수 있다는 생각이 뒤따랐다.- P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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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수염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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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소설......
지루하지도않고 흥미진진하지도 않고...
이 세상이 원래 내가만든 착시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해본 사람이라면 가볍게 공감할 만한 소설. 아주 지독한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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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여행자들 오늘의 젊은 작가 3
윤고은 지음 / 민음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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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만든 재난에 몰입하던 중에 자연의 재난에 깜짝 놀라는 반전.
‘윤리적 관광’이라는 문제도 한번 상기시킨 소설.
너무 신박한 참신함이 놀랍다.

그는 유능한 상사였다. 정확히 말하면 유능한 상사가 아니라 유능한 부하였고, 덕분에 유능한 상사 역할도 유지할 수 있었다.- P19

이곳에서의 휴식은 쉼표가 아니라 마침표처럼 통했다. 자신이 고갈되었다고 생각하면, 그때 사람들은 우회적인 방법으로 휴직계를 던졌고,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P31

"하긴, 먼 데서 재난을 찾을 것도 없네요. 우리나라도 이제쓰나미 안전지대가 아니라니까요."
"남해안 일대가 초토화됐더라고요."
"그런데 왜 우리는 여기까지 왔을까요?"
어느새 돌아온 교사가 그렇게 물었다.
"너무 가까운 건 무섭거든요. 내가 매일 덮는 이불이나 매일 쓰는 그릇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야 더 객관적으로 보이지 않나요?"- P55

재난 여행을 떠남으로써 사람들이 느끼는 반응은 크게 ‘충격 → 동정과 연민 혹은 불편함 → 내 삶에 대한 감사 → 책임감과 교훈 혹은 이 상황에서도 나는 살아남았다는 우월감’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어느 단계까지 마음이 움직이느냐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결국 이 모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재난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나는 지금 살아 있다는 확신이었다. 그러니까 재난 가까이 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안전했다는 이기적인 위안 말이다.- P61

조르주 바타이유는 여기서 전도된 에로티시즘을 발견했다. 그가 말하는 에로티시즘은 고통이 주는 강한 삶의 열망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타인의고통 속에서 살아갈 힘, 에로스를 얻는다. 고통은 망막에 새겨졌을 때 강력한 이미지로 인식된다. 지독한 고통에 시달리는 이웃을 이미지로 확인할 때, 사람들은 값싼 우월감을 구매한다. 어마어마한 재난 지역을 뉴스로 보며 사람들은 감히체험키 어려운 숭고를 접한다. 직접적 체험으로서의 재난이위대한 자연의 숭고를 깨우쳐 준다면 렌즈를 거친 재난은 흥미로운 스펙터클과 다를 바 없다.- P240

윤고은이 『밤의 여행자들에서 보여 주는 회사라는 세계는 감수성이 사라진 현실이다. 감성(sensitivity)이 정보를 처리하는 인간의 감각 능력이라면 감수성(sensibility)은 맥락을 이해하고 관계를 공감하는 능력이다. 그런 점에서, ‘정글은 감성만 있고 감수성이 부재하는 공간이다. 비단 정글만이 아니다.
정글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 감수성 없이 감성의 인식만으로 세상을 버텨 나가는 여기, 이곳의 반영에 가깝다. 정글이 곧 현실이라는 상상력은 윤고은이 우리가 처한 삶을 이윤 창출의 회사와 다를 바 없다고 판단했음을 보여 준다.-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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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밖에 없네 큐큐퀴어단편선 3
김지연 외 지음 / 큐큐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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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현, 조해진, 정세랑 작가라니. 큐큐단편선 라인업은 마치 음악 페스티벌 라인업을 기대하는 것 만큼 설레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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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아나 도쿄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한정현 지음 / 스위밍꿀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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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얼마나 많이 덮었는가.
전개를 이어서 받아들이기엔 조금은 긴 텀이 필요한 구간이 많았다.
‘선택’이라는 명사에는 능동형의 의미가 담겨있지만 ‘선택지’는 수동적으로 주어진다. 이미 전제가 책임을 물을 수 없는데 그걸 강요한다. 폭력이 다양하게 변형되어 산재해있다.

쉽게 뱉어서는 안되는 단어와 문장이 많다는 걸 살면서 체감하게 된다.

그녀는 눈을 감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참 이상했다. 상처는 완전히 잊혀진 듯했다가, 가장 용기가 필요한 순간에 그 존재를 다시 드러내니 말이다.- P23

매춘이 자신을 망가뜨리는 일인가? 그녀는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거기서 자랐으니까. 그래서 매춘이 나쁘다고 말하면 마음 한구석에 걸리는 게 있었다. 하지만 그걸 두고 선택이라고 하는 사람들 앞에서 고개를끄덕이는 건, 불가능했다. 캬바쿠라는 궁지에 내몰린 여성들이 혼자 힘으로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찾아온곳이었다. 무엇보다 강간당한 경험이 있는 여성들은 결심하듯 말했다.
"내가 이겨낼 수 있다는 걸, 내게 일어난 일이 아무것도아니라는 걸 나는 보고 싶어."
그들 대부분은 더이상 갈 곳이 없었다. ‘난 이곳이 좋아‘ 하고 말하지만 사실은 좋아해야만 하는 것. 그녀는고 그름에 대해 판단해야 할 때면 늘 혼란스러워졌다.- P92

줄리아나 도쿄의 화장실엔 별의별 것들이 다 버려져있었다. 한쪽엔 값비싼 것들로 치장한 사람들이 오르는화려한 무대가 있고, 또다른 한쪽엔 상상도 할 수 없는 쓰레기들이 모인 더러운 무대가 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것들이 밟고 선 게 무엇인지 그녀는 그때 똑똑히 보았다.- P98

"한주 씨,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삶은 얼마나 행복한삶입니까."
눈은 쌓여가면서 녹고 있었다. 반짝이는 결정체들이나타났다 사라졌다.
"분명하게 고르거나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삶에는 훨씬 많습니다. 받아들여야만 하는 일이 인생에는 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걸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P103

‘이 사람, 스스로를 벌줬구나.‘- P122

사람들은 유키노에게 혐오를 격렬하게 드러내진 않았다. 대신 소란 없이 쥐를 죽이기 위해 아주 조금씩 비소를 뿌리는 것처럼 진심 어린 걱정이라는 표현으로, 좋은 의도라는 명목으로 유키노를 재단하고 판단했다.- P131

어머니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떨어져 있던 칼의 손잡이를 감싸쥐었다. 유키노는 그 모습을 보며 어머니가 이미 셀 수 없이 많은 불행을 감당하며 살아왔다는 걸 실감했다. 누구든 경험이 많은 일에는 당황하지 않고 능숙하기까지 한 법이니 말이다.- P160

유키노의 이야기를 들으며 의사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떠올리고 있었다.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반에 꼭 한 명쯤은 있었던 미혼모의 아이들, 함께 어울려 지내다가도 미혼모의 아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어김없이 따돌림을 당했다. 그저 지우개를 숨기고 연필심을 부러뜨린 정도라고 누군가는 회상할지도 모른다. 가해자들에게 그런 것은 그저 지나간 유년의 추억거리일 뿐이니까.- P161

유키노는 그녀가 자신에게 지긋지긋하다고 말한 것이아닌데도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그때까지불평을 달고 사는 것이 크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때리거나 욕하는 게 아니니까. 불만을 중얼거리는 걸 누군가 듣는다 해도, 자기 자신만 저급한 인간이라고 여겨지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한주가 자신의 눈을 바라보며 지겹다고 말하는 순간, 이제껏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겁이 났다.- P164

그는 볼에 바람을 집어넣었다가 후 하고 길게 뱉었다. 긴장에 아쉬움까지 섞여 어떤 것에도 차분하게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사실 추는 불가항력이라고 생각되는 일에는우울함을 잘 느끼지 않는 타입이었다. 눈이 오는 걸 막을 수도 없었고, 폭설을 예견하고 매해 이 시기에 진행되는학회 일정을 옮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P195

어머니는 추가 알지 못하는 부분에서까지 따가운 시선을 견뎌야 했던 것이다. 누구의 아이인지, 남편은 어떤 사람인지, 왜 낳지도 않은 아이를 혼자서 키우는지와 같은쓸데없는 호기심들, 사람들은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도 아니면서, 다정한 음성을 가장해 자신의 궁금증만을 채우려고 한다. 채워지면 금방 잊고 그 자리를 떠난다. 채워지지 않으면, 어두운 욕망으로 지어낸 이야기를 여기저기 옮기고 다닌다. 학교에 들어가면서 추는 그런 인간의 속성을일찌감치 파악할 수 있었다.
......
누군가 그랬다.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는것이라고.- P206

"나 그때 무작정 선생님 앞에 서서 울기만 했지. 아무것도 고를 수 없는데 뭐든 고르라고 하는 선생님 앞에서. 이제 그건 유키노가 고른 거예요, 하는 선생님 앞에서."- P247

"아버지와 오빠는 결국 제 의사를 존중하겠다고 하셨어요, 네 ‘선택‘ 이니까, 하면서요. 물론 책임도 제 몫이라고 하셨죠."
......
"그럼 이건 제 선택일까요, 아니면 그들의 오해일까요?"- P285

내내 슬픔에만 젖어 있고 싶지는 않았다. 슬프지 않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 다만 원래 흘러가던 대로 내버려두고 싶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유품도 한꺼번에 정리하지 않기로 했다. 어머니는 자신의 삶을 살다가 떠난 것이지 이 세상에애초부터 없었던 사람이 된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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