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요약 발췌본] 적당히 가까운 사이 - 외롭지도 피곤하지도 않은 너와 나의 거리
댄싱스네일 지음, 김은경 낭독 / 허밍버드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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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정체성과 독립성을 잃지 않기 위해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자율적인 공간이 필요하다. 이를독일말로 ‘슈필라움(Spielraum)‘이라고 부른다.

나 자신을 타인과 쉽게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어서 내 것과는 다른 누군가의 면면에는 너그러운 편이지만, 나의단점이라 여기는 부분을 마찬가지로 가진 사람과 잘 지내는 일은 훨씬 어렵다. 그렇다 보니 누군가에게 화를내고 있지만 실은 마음 깊은 곳에서 나 자신에게 화가 나 있는 경우가 있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집에 있고만 싶은 욕망에 지배당하는 사람들. 이들에게는 목이늘어진 티셔츠의 편안함과 극세사 수면 바지의 보드라움을 벗어던지고 꾸밈노동을 선택하는 일에 다른 사람의몇 갑절이 되는 열정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웬만해서는 귀찮음보다 외로움을 선택해 버리고 마니, 한번 설레보려 해도 영 쉽지가 않다.

돌아서면 후회하면서도, 습관으로 굳어진 배려 없는 행동은 서로에게 상처 주기를 되풀이한다. 마치 친밀함이하고 싶은 말이나 행동을 다 해도 되는 자유 이용권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러나 기분대로 표현할 자유로만마음이 가득 차서 상대를 향한 배려나 존중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면, 자유를 잃기 전에 사람부터 잃게 될지모른다. 하트의 뾰족한 밑면은 상대방을 찌르는 날카로운 창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 당신에게 ‘널사랑하니까‘라는 전제로 상처를 주고 있다면, 그건 사랑이라는 가면을 쓴 폭력일 뿐이다.

어른의 몫을 제대로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를 단속하며 안도감을 얻기 위해 달려오는 동안 나도 모르는새에 세상의 상대평가에 익숙해진 걸까. 누군가를 밀어내고 올라서야만 내 존재가 위태롭지 않을 거라는 불안에마음이 각박해진 걸까.

‘비교‘의 가장 무서운 점은 현재의 내가 무엇을 얼마나 이루고 가졌는지와 관계없이 시간이 지날수록 습관처럼배어든다는 것이다. 진정한 자존감은 비교를 통한 상대적 만족감이 아닌 절대적인 자기 인정으로 얻을 수 있다.
이를 잊지 않는다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비교 없는 위로와 불안 없는 축하를 건넬 수 있을 것이다.

감정에는 이유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사랑을 시작할 때 그 이유를 정의하려 하고, 이별할 때는 끝내야만하는 이유를 만든다. 감정적인 선택을 하는 자신이 서투르고 어른스럽지 못한 사람으로 여겨질 것 같은 공포때문일까. 나의 이성에게 내 감정과 그에 따른 선택이 타당했음을 납득시켜야만 마음이 편안해지는 듯하다.

사람의 마음이란 적당한 선에서 멈추기 어렵다는 것, 한번 자라게 놔두면 손쓸 수 없이 커진다는 것을 이제는경험으로 안다. 그래서일까. 내 마음을 감당할 자신이 없으니 겁이 나서 누구도 선뜻 믿기 어렵다.

새로운 관계를 시작할 용기를 내기에 설렘만으로는 충분치 않을 때, 삶의 무대 위에서 잠시 내려와 관객이 되어보는 것은 어떨까.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한번 지켜볼까 하는 마음으로 내가 놓인 관계를 한 발자국떨어져서 바라본다

주는 사랑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서로의 삶에 대한 존중이 전제되어야 한다. 건강한 사랑을 위한 가장기본적인 요소이자 첫걸음은 바로 존중임을 잊지 말자.

사람은 자신이 성장하면서 결핍되었던 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괜찮아요. 부러지면 두 개가 되니까 더 좋잖아요! 둘이 같이 칠할 수도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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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다른 나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9
임현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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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잘 믿지 못하는 사람은 어쩌면 다른 무언가를 맹신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뭔가 어리석게 믿고 있는 건 ‘그게 아니라면 다른 건 순리에 어긋나고 정의에 반하는 것이야’라는 편협한 생각이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배울수록 사고의 폭이 좁아지는 걸 경계하라던데, 뭔가를 믿고 정의하는 것이 배타적인 독불장군처럼 되서는 안된다는 말이지....

소설이 긴장감과 느슨함을 적절히 잘 조율해 놓아서 재미있었다.

실제로 거기에무엇이 있었는 하나도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다만, 당시에는 우리가 그렇게 믿기로 했다는 거예요. 그럼에도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되었던 것만은 틀림이 없었습니다.-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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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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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변화하면서 과거의 사고방식이 선과 유리된다면 과거의 행적들이 더 이상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고 폐기되어야 할 일은 아닐 것이다. 최근 한 영화가 흑인에 대한 묘사가 문제가되어 스트리밍 서비스를 중단한다는 보도를 본 적 있는데, 과거의 작품이 존재의 가치를 부정한다면 우리는 흔히 ‘기억하고 싶은 과거만 기억한다‘는 자기편향과 모순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도 싶다. 그렇다고 구시대적인 세계관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대한 지향점을 잣대로 고전작품에 대한 해석을 다시 해야 하는 게 맞는 것 아닐까.

어느 설문조사에 50-60대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고전에 이 책이 올라와 있어 의무적으로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의무적인 독서는 책장을 덮는 마지막 순간까지, 작품해설을 읽는 순간까지 지난한 인내의 시간이라 할 만한 독서가 되었다.
우리의 386세대들은 민주화를 위해 투쟁을 벌여왔을지는 모르겠지만 소수자에 대한 차별엔무감하고 젠더감수성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권력의 부조리에 대한 저항과 분노는 자신들이권력을 쥐게 되면서 온건하게 가라앉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은 자신의 민주화 운동에대한 보상을 매개로 정당화 된 듯 하다. 권력에 대한 저항은 자신보다 상위의 계층에 집중하지 하위계층의 현실따위는 관심이 없다. 이들이 조르바의 즉흥적이고 윤리와 질서에 얽매이지않는 자유분방한 행동과 사고에 열광한 것은 히피적인 감성에 몰입할 수 있었던 당시 사회의기류에 편승한 결과이며, 억압에 대항하여 자유를 표출하고자 하는 욕망의 대리만족이었던 것이다. 그 이면에 조르바의 여성에 대한 봉건적이지만도 못한 그릇된 사고방식은 문제 제기 거리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사상에 감명깊게 절어잇는 순간에 여성의 그릇된 가치관을문제삼으라니 무슨 분위기 잡치는 막말이냐라고 격노할 것이다.
지금 시대에 필독서로 거론되지 않는 이유도 비슷한 선상에서 제기되는 문제때문일 것이다.

조르바를 디오니소스적이라고 신화와 결부시켜 해석하는 리뷰를 봤는데, 그런 비유가 요구되는 소설을 읽으라면 차라리 헤세의 ‘지와 사랑‘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인간의 영혼은 육체라는 별 속에 갇혀 있어서 무디고 둔한 것이다. 영혼의 지각 능력이란 조잡하고 불확실한법이다. 그래서 영혼은 아무것도 분명하고 확실하게는 예견할 수 없다. 짐작이라도 할 수 있었다면 우리 이별은얼마나 다른 것일 수 있었을까.

놔둬요. 그 사람들 눈뜨게 해주려고 하지 말아요! 그래, 눈을 띄워 놓았다고 칩시다. 뭘 보겠어요? 자기들 비참한처지밖에 더 봐요? 두목, 눈 감은 놈은 감은 대로 놔둬요! 꿈꾸게 내버려 두란 말이에요!

조르바는 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했고 그 머리는 지식의 세례를 받은 일이 없다. 하지만 그는 만고풍상을 다겪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 마음은 열려 있고 가슴은 원시적인 배짱을 고스란히 품은 채 잔뜩 부풀어 있다. 우리가복잡하고 난해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조르바는 칼로 자르듯,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고르디아스의 매듭을자르듯이 풀어낸다. 온몸의 체중을 실어 두 발로 대지에 단단히 뿌리 박고 선 이 조르바의 겨냥이 빗나갈 리없다. 아프리카인들이 왜 뱀을 섬기는가? 온몸으로 땅을 쓰다듬는 뱀은 대지의 모든 비밀을 알 수밖에 없기때문이다. 그렇다. 뱀은 배로, 꼬리로, 그리고 머리로 대지의 비밀을 안다. 뱀은 늘 어머니 대지와 접촉하고동거한다. 조르바의 경우도 이와 같다. 우리들 교육받은 자들이 오히려 공중을 나는 새들처럼 골이 빈 것들일뿐.

나는 행복했고, 그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행복을 체험하는 동안에 그것을 의식하기란 쉽지 않다. 오직 행복한순간이 과거로 지나가고 그것을 되돌아볼 때에만 우리는 갑자기 - 이따금 놀라면서 - 그 순간이 얼마나행복했던가를 깨닫는다. 그러나 이 크레타 해안에서 나는 행복을 경험하면서, 내가 행복하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나는 아무래도 인생의 길을 잘못 든 것 같았다. 타인과의 접촉은 이제 나만의 덧없는 독백이 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타락해 있었다.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과 사랑에 대한 책을 읽는 것 중에서 택일해야 한다면 책을 선택할정도로 타락해 있었다.

물질을 정신으로 바꾸는 놀라운 힘은 신적인 힘이다. 모든 인간의 내부에 신성의 회오리바람이 있고,
바로 그래서 빵과 물과 고기를 사상과 행동으로 변환할 수 있는 것이다. 조르바의 말이 옳았다. 먹는 걸로무얼 하는지 가르쳐 줘봐요. 그럼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가르쳐 줄 테니! ]

나 혼자만 발기 불능의, 이성을 갖춘 인간이었다. 내 피는 끓어오르지도, 정열적으로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못했다. 나는 비겁하게 모든 것을 운명의 탓으로 돌리고서 할 일을 다했다고 믿고 싶어 했다.

[ 무슨 음식을 특히 좋아하십니까, 영감님?」
[ 아무거나 다 좋아하지요. 이건 좋고, 저건 나쁘다고 하는 건 큰 죄악입지요. 」
[왜요? 골라서 먹을 수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
[ 안 되지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
[왜 안 됩니까?」
[굶주리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렇지요. 」

[ 모든 문제가 일을 어정쩡하게 하기 때문이에요. 말도 어정쩡하게 하고 선행도 어정쩡하게 하는 것, 세상이 이모양 이 꼴이 된 건 다 그 어정쩡한 것 때문입니다. 할 때는 화끈하게 하는 겁니다. 못을 박을 때도 한 번에제대로 때려 박는 식으로 해나가면 우리는 결국 승리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악마 대장보다 반거들충이 악마를더 미워하십니다!]

나는 침대에 누워 등불을 껐다. 그리고 내 졸렬하고도 비인간적인 습관에 따라 다시 한 번 현실을 왜곡하기시작했다. 현실에서 피와 살과 뼈를 제거하여 추상적 관념으로 환원시키고, 그것을 일반적 법칙들과 연결시켜지금 일어난 일은 결국 필연적이었다는 끔찍한 결론에 도달했다. 더 나아가, 오늘의 비극은 우주적인 조화(調和)에 기여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난 거라는 최종의 가증스러운 위안에 이르렀던것이다.

외적으로는 참패했을지라도 내적으로는 승리자일 때 우리 인간은 말할 수 없는 긍지와 환희를 느낀다. 외적인재앙이 지고의 행복으로 바뀌는 것이다.

카잔차키스의 삶은, 보이는 존재와 보이지 않는 존재,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 내재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사색과 행동 등등의, 영원히 모순되는 반대 개념에서 하나의 조화를 창출하려는 끊임없는 투쟁으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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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밖의 모든 말들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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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김금희 작가의 책은 어렵게 쓴 책은 아니지만 쉽게 물 흘러가듯 읽히는, 가독성 좋은글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흡이 짧지도 않고, 김금희 작가가 표현하는 단어의 선택과배열, 부사의 위치선정 등이 내가 쓰는 표현과는 결이 달라 마냥 술술 넘어가지는 않았던 것다. 그렇게 김금희 작가의 책은 호흡을 길게 가져가고 서두르지 않으면서 장단을 늦추다 보면 서서히 작가만의 세계에 도달해 가는 재미가 있었다.

산문집을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무래도 최근에 가장 큰 이슈를 몰고 왔던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기사를 통해 보았던 작가의 목소리가 인상이 깊었고, 그 권위에도전하는 정신이 너무 중았다. 이왕 사는 김에 동네서점 에디션으로 소장하고 싶은 욕구가 생져 평소 동선과 벗어나 있는 동네서점까지 가서 책을 구입해 왔다. (물론 책을 읽기까지는 꽤오번 시간이 걸렸나 보다.)

에세이는 공격적이지도, 비관적이지도, 냉소적이지도 않은 따듯한 미온수 정도의 느낌이라고할까. 이런 온도로 자기만의 색을 드러내는 작가라니, 이런 편안함이 필요한 순간보다는 요구되는 순간이 있다면 김금희 작가의 책이 적절할 것 같다.

냉담하고 이기적인 부모와 함께 살아가는 아이에게는 매순간이 마음이 베이는 순간이었고 그 원천적인 상실의 경험은 엘튼 존을 특별한 감각‘을 지닌 예술가로 만든다. 생각해보라, 가정이 세계의 전부인 아이에게 그 공간에서 일어나는모든 일들은 어른보다 더 섬세한 감정의 파동을 남긴다. 부모가 함부로 내려놓는 물컵마저도 때론 아이들에게 문제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P43

그런 사랑의 어려움은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아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매번 우리의 한계를 넘는 일이다.- P81

론 믿은 것은 아니었다. 그 무렵 출판계의 흔한 386이었던그는 나머지 강의 시간을 1인 출판으로 시작한 자신이 어떻게 돈키호테식의 저돌적 도전으로 그 당시 유명했던 베스트셀러 뭔지는 밝힐 수 없다 - 를 만들었는가를 설명하는 데할애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책에 자료 사진이 필요하면 편집자가 나가서 직접 찍어라, 필요하면 자기 자신이 사진 모델이 되어라, 하는 식으로 다분히 비용 절감 차원에서 편집자의 업무를 하염없이 늘리는, 늘리고 늘려서 대체 내가 이런일까지 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던질 틈도 없이 부연 안개처럼 야근과 격무가 노상 깔려 있는 출판사의 노동조건에 한껏 힘을 실어주는 말을 강조했다.
당시 그가 터뜨린 베스트셀러는 자기계발서였고 그것은평소 습관이 당신 인생을 좌우한다는 식의, 아무리 깊은 밤이 되어도 막무가내로 또렷이 빛나는 신호등처럼 선명하고단순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책이었는데, 그것을 전달받는 독자나 그것을 만드는 편집자의 노동에 대해서만은 경계 없음, 모호함, 낭만성 따위를 믿는다는 것이 씁쓸했다. 어느 날은그의 말이 기만적으로 생각되었고 어느 날은 책이 지닌 물성을 간파한 선견지명으로도 여겨졌다.- P121

어제는 눈이 온다고 하더니 비가 내렸다. 사실 오후에 일기예보를 들었을 때는 눈이 오지 않기를, 무언가가 낙하-하여야 한다면 차라리 비이기를 바랐다. 눈은 비보다 더 부피를 가져서 도시를 채울 때면 그것이 있다‘는 사실을 강하게 인식하게 되고 그래서 마음이 흩날린다. 눈이 도시를 채우고 채우는데 왜 마음은 흩날릴까. 그것이 강하게 도시를 덮어 전혀 다른 풍경으로 만드는 동안 도리어 내 마음이 풀풀흩어진다는 건, 그렇게 어떤 부피를 상실해간다는 건 이상한일이다. 그렇게 잃어버리는 나라는 것은 대체 어떤 것일까, 나는 누구일까, 내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P129

나는 지금 당신과 내가 같은 마음이리라 생각하면서 적는거야. 그러니까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정성을 다했던 내 일, 내 작업, 내 직장, 내 노동이 더이상 즐겁지 않을 수 있다고말하기 위해서. 그 느낌은 무엇보다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겠지? 주변 사람들이 하는 말과 태도에 날카로워지고 상처받았어. 화가 나고 슬프고 억울해하다가 더 시간이 지나면서무력해졌을 거야. 더이상 상처조차 패지 않는 단단한 체념.- P129

하기는 타인에게 선의가 있음을 선뜻 믿기에는 세상이 나쁜 게 사실이다. 갱년기 여성에게 좋다고 어머니에게 선물하라고 꾀더니 허가도 나지 않은 재료로 약을 만들어 팔지 않나, 당신이 돈을 잃게 될까봐 그런다며 접근해서는 은행 직원, 경찰 등을 사칭해 돈을 털어가지를 않나. 그렇게 함량 미달의 제품을 속여 팔거나 보이스 피싱을 하는 건 이제 흔하디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러다보니 빤한 속임수에 왜 넘어가느냐고 오히려 피해자를 탓하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이런 세상에서는 사회 구성원들이 암묵적으로 공유하고있는 어떤 윤리나 합의보다는 음모론적 시각이 현실 판단의기준이 된다. 네가 지금 보고 있는 것, 그 이면에 숨은 악의가 있고, 그런 악의를 간파하지 않으면 심각한 피해를 입는다는 상식이 통용되는 사회, 그렇다면 불신과 불의가 모든 행동의 우선순위가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의 선의를 믿는 일이란 좀 과장하면 일종의 모험이 아닐까. 믿음으로써 입게 될 손해를 감수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현실이이러니 우리의 불신을 그저 탓할 수만도 없을 듯하다. 하지만 탓할 수 없다고 해서 옳거나 정당하다는 뜻은 아니다.-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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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과거
은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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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작가의 책을 마지막으로 읽은 것이 벌써 10년도 지난 때의 일이니, 그동안 왜 이 작가의 책을 꾸준히 챙겨보지 않았나 후회스럽다.
우리가 나쁘다고만 할 수 없는, 본능적으로 우리 내면에 심어진 방어기제를 통찰하여 비꼬는 작가의 냉철한 시각이 얼마나 유쾌햇는지 모른다. 그 풍자가 가득한 조소를 통해 얻는 건 냉소라기 보다는 유대감과 공존이라는 점이 더 매력적이다.
그동안 출간했던 작가의 다른 작품도 천천히 찾아서 읽어보아야 겠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사람을 대할 때 미묘한 권력관계를 만드는 습성이 있었다. 끊임없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관계의 자장磁場을 만들어내고 우월감과 피해 의식을 번갈아 써가며 그것을 정당화했다. 거기에는 증인이 필요했다. 결국 나로 하여금 위성처럼 그녀의 궤도를 따라 돌며 그녀라는 일방적이고 변덕스러운 광원을 반사하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나는 나대로 소심함과 자기 합리화의 조합인 어정쩡한 온건함 뒤에 숨어 그녀의 그런 태도를 순순히 받아들이곤 했다. 열정은 단호한 구석이 있어서 금세 꺾이지만 친근함은 어느 정도 안이한 감정이라서 사소한 기억의 공유만으로도 쉽게 환기되었다. 그리고 내가 동의하지 않는 채로도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는, 스스로의 유연함에 대한 자기만족이 어느 정도 그것을 도왔을지도 모른다.- P12

오랜만의 낮술이었다. 나는 페일 에일을 주문했고 그녀는 그동안 수많은 맥주를 순례한 끝에 다시 라거로 돌아왔다며 필스너를 골랐다. 한 모금 마시더니 자신의 취향은 역시 클래식한 쪽이 맞다며 흡족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향이 강한술은 초심자들이나 좋아할 뿐 금방 질리게 돼 있다는 논평을 덧붙인 뒤 턱 끝으로 내 잔을 가리키는 그녀에게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자기를 드러내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남과 비교해서 우위를 차지해야 하는 패턴에는 이미 익숙했다.
한때 그녀는 헤이즐넛 커피만 마시다가 그것이 오래된 원두의 산패를 감추기 위해 향을 첨가한 데에서 시작된 걸 알고 그때부터 향 커피 애호가를 깔보기 시작했다. 스스로의 입맛이 아니라 정보와 평판에 따라 선택을 바꾸었다. 자신은 클래식한 취향이라고 말하지만 실은 취향 있게 보이기위해서 트렌드에 민감한 것뿐이었다. 말투도 ‘이거 좋아‘가 아니라 늘 나 이거 좋아하잖아‘ 처럼 주어를 강조했다.- P17

나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다지 상상력이 없던 시기였다. 주어진 대로 수긍해야 하는 미성년으로서 ‘다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도 없었으며, 세상은 정답의 문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그것을 알아낸 사람이 주도한다고만 알고 있었다.- P25

그리고 그 개별적인 ‘다름‘은 필연적으로 ‘섞임‘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거기에는 비극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서투름과 욕망의 서사가 개입될 수밖에 없었다. 다름은 개인성의 독립이지만 섞임이 그 종합은 아니기 때문이다.- P28

내 분위기를 알아차렸다. ‘노력‘은 고등학교 교훈에나 있는것이었다. 이제 성인이 되어 수도 서울에 살기 시작한 사람에게는 시급히 벗어야 할 촌티이자 제도 교육에 훈련된 미성년자의 ‘타율신경’ 이었다.- P35

며칠 사이 깨친 사실이지만 공동생활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고립이었다. 정보를 얻지 못하면 뒤처지고 다수에 끼지못하면 손해를 봤다. 이곳은 숨을 곳이 없는 공동 공간이었다. 그런 점에서 고립은 차별보다 더 눈에 띄었다.- P47

고등학교 때의 가방 검사가 떠올랐다. 대피 훈련이라며불시에 학생들을 모두 운동장에 집합시킨 뒤 교사들이 빈교실을 돌면서 여고생들의 가방을 뒤지곤 했었다. 소지품검사라는 명목으로 학생들을 학교의 감시 체제 아래 굴복시키려는 폭력적 이벤트였다.- P71

그날 이후 그녀는 볼품없고 말 많은 골초 남학생과 특별히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평소에 남자의 외모와 조건을 유난히 따지던 그녀로서는 뜻밖의 일이었는데 그녀는 그런 비논리적인 일에 갖다 붙이는 ‘운명‘이라는 말을 기꺼이 사용했다.- P80

결국 여자의 지성은 남자를 보필할 때에만 인정받을수 있고 여자가 남자를 능가할 만큼 눈치가 없으면 진정으로 똑똑한 게 아니라는 뜻 아닌가. 똑똑한 걸 드러내지 않고, 그 똑똑함으로 남자에게 헌신하는 태도를 제멋대로 현명함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경혜는 수업 시간에 발표한 대로사랑에 대해서뿐 아니라 남자친구와 관련된 모든 일에 논리를 적용하지 않기로 한 것 같았다.- P82

혼자라는 건 어떤 공간을 혼자 차지하는게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익명으로 존재하는 시간을 뜻하는 거였다.- P84

그렇다고 멀리 떠나온 것 같지도 않았다. 여전히 나는 무력하고 방어적인 회색 지대에 갇혀 있었다. 나 자신이 실망스럽고 그러다 보니 의욕이 없어 방치하게 되고, 결국 해야할 것을 제대로 못 해 무력감에 빠지고, 무력감은 쫓김과 불안을 낳고 그래서 자신감을 잃은 끝에 제풀에 외로워지고, 그 외로움 위에 생존 의지인 자존심이 더해지니 남들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하고, 그러자 곧바로 소외감이 찾아오고, 그것이 또 부당하게 느껴지고, 이 모든 감정이 시간 낭비인것 같아 회의와 비관에 빠지는 것, 그 궤도를 통과하지 않을수는 없었다. 이른바 청춘의 방황만이 아니었다.
지난 두 달 동안 나는 내 앞의 문을 열지 못하고 번번이 과거의 나로 굴러떨어지곤 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세계의 부당한 규율에 복종했던 미성년 그대로였다.- P86

파트너와 정장과 티켓은 인기와 경제력을 의미했고 축제는 그것을 과시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다수에 끼지 않는것이 열등함을 의미하는 단체 생활 분위기에서, 소수의 개인은 일방적인 평가와 그것의 부산물인 오해의 대상이었다.- P108

약점이 있는 사람은 세상을 감지하는 더듬이 하나를 더가진다. 약점은 연약한 부분이라 당연히 상처 입기 쉽다. 상처받는 부위가 예민해지고 거기에서 방어를 위한 촉수가 뻗어 나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약점이 어떻게 취급당하는가를 통해 세상을 읽는 영역이 있다. 약점이 세상을 정찰하기 위한 레이더가 되는 셈이다.
그들은 자주 위축되고 두려움과 자괴감에 빠지지만 그런 태도를 되도록 감춰야 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약점이 있다는 걸 공유하면 편해지긴 하지만 무시당하는 걸 감수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약점을 숨기고 방어하고 또 상처받았을 때 태연하게 보이는 법을 연구하면서 타인을 알아간다.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약점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나를 조종하고 휘두를 힘을 가진다. 우리는 장점의 도움으로 성취를 얻지만 약점의 만류로 인해 진정 원하던 것을 포기하거나 빼앗긴다. 어쩔 수 없이 약점은 삶의 결핍과 박탈을 관장한다.- P112

절름발이라고 놀림을 받는 설정이 말더듬이였던 작가 자신의 처지를 반영하고 있다는 해설을 어쩌다 먼저 읽고는 전혀흥미가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같은 처지끼리 공감을 느끼고 거기에서 위로와 격려를 얻는다는 건 허튼소리다.
약자는 위로받기보다 차별이 없는 존중을 원한다. 결점이있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특별한 배려를 받는 게 아니라, 다수와는 다른 조건을 가졌을 뿐 동등한 존재로서의 권리를 누리기를 원하는 것이다. 맞은편 대열에서 응원을 보내기보다는 내 곁으로 와서 서는 것. 하지만 내가 자란 시절은 약점을 개인이 가진 하나의 조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분위기가 결코 아니었다.- P115

모범생들은 눈치를 본다. 문제를 낸 사람과 점수를 매기는 사람의 기준, 즉 자기를 어디에 맞춰야 할지 알아야 하기때문이다. 정답을 맞히려는 것은 문제를 내고 점수를 매기는 권력에 따르는 일인 것이다. 그렇게 그저 권력에 순종했을 뿐이면서 스스로의 의지로 올바른 길을 선택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모범생의 착각이다. 그 착각 속에서 스스로를 점점 더 완강한 틀에 맞춰가는 것이다. 다행히 나는 진짜모범생은 아니었다.- P117

문제는 곽주아의 참견이었다. 곽주아는 만만한 상대에게 사사건건 자기 방식의 기준을 들이대며 잔소리를 했다. 상대를 불쌍한 사람으로 만들어 동정하고 잘못한 사람으로 만든 다음 용서해주는 식이었다. 진심으로 상대를 위해서라기보다 남을 교정하면서 우월감을 느끼는 태도가 몸에 밴 것같았다.- P127

오지은이 왜 음악 얘기를 꺼내는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남자가 나랑 잘 맞는다고 생각하기 위해 그냥 갖다붙이는 말 같았다. 그때에도 나는 그녀가 상냥한 성품이라고 생각했을 뿐 그것이 타인을 몇 개의 묶음으로 분류해놓고 천편일률적 교양으로 응대하는 무례한 태도라는 건 깨닫지 못했다.- P141

원하는 게 새로 생겼을 때는 그 변심을 정당화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이미 갖고 있는 것의 흠을 찾아내는 데에 적극적이 되기 마련이었다.- P146

이따금 나는 책을 내려놓고 이층침대의 사다리에 걸쳐놓았던 눅눅한 수건을 눈으로 가져갔다. 몇 번인가는 두 손으로 수건을 움켜쥔 채 흑흑 소리 내서 흐느끼고 말았는데 물론 책에 감동해서는 아니었다. 낭만적 사랑‘ 이라든가 ‘정서적 조작‘ 이란 말들이 미묘하게 나를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눈물은 그 말들에 대한 수긍과 부인 사이의 혼란스러움을잠재우는 격한 세리머니 같은 것이었다.- P163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세번째 공주였다. 모종의 숨겨진 진실을 밝혀내는 아니면 오해를 풀든 간에 그녀는 그 자리에서 설명을 요구해야 했다. 그 상황에서 왜 비련의 여주인공월감을 확인하는 것이다. 공주 중에서도 내가 제일 싫어하을 흉내 내며 제풀에 도망을 치는 것일까. 피해자임을 과장하는 제스처가 동정심을 유발해서 남자를 뒤따라오게 만들거라고 기대한 것일까. 아니면 현장에서 멀어지는 것이 그나마 남은 자존심을 수습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마음에 없는 교양 연기를 피할 수 있는 탈출구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어쨌든 피해자인 주제에 제 쪽에서 자리를 피해주는 것만봐도 그녀가 얼마나 자기도취적이며 위선에 익숙한지 알 수있다. 회피야말로 가장 비겁한 악이다. 애매함과 유보와 방관은 전 세계의 소통에 폐를 끼친다. 게다가 그녀는 적에게조차 좋은 점수를 받으려고 한다. 모두에게 맞춰주면서 우는 세번째 공주 타입이다.- P171

나는 아직 심각한 연애는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목표를이루려면 일단은 학교 공부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아르바이트가 우선이었다. 데이트는 틈틈이 가볍게 즐기면 되었다. 언니 친구들만 봐도 남자를 일찍 만나 잘된 경우를 보지못했다. 때 이른 임신도 문제였지만 그보다 여자들은, 게으르고 무능하고 겉멋과 헛바람이 든 남자들을 먹여 살릴 값싸고 힘들고 모욕적인 일자리를 손쉽게 구할 수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P174

그 시절 우리에게는 수많은 벽이 있었다. 그 벽에 드리워지는 빛과 그림자의 명암도 뚜렷했다. 하지만 각기 다른 바시간은 여울을 이루며 함께 흘러갔다. 어딘가에 도달하기위에 부딪쳐 다른 지점에서 구부러지는 계곡물처럼 모두의위해서 말이다. 그때 우리 모두는 막연하나마 앞으로 다가올 시대는 지금과 다를 거라고 믿었다.- P193

나는 그 시간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난 것일까. 오로지 내게 주어진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 것과 성적을 올리는 것, 두가지에만 의미를 두던 고등학교 시절 훈육의 틀과 그리고내가 동의할 수 없었던 세상의 모범생이라는 모순된 자리.
거기에서 시스템의 눈치를 보며 적응한 척했던 것이 단지임시방편이었을까. 혹시 그대로 내 삶의 태도가 되어버린것은 아닐까.
훈육과 세뇌에는 탈출구가 없다.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뀔 수도 없으며, 끝없이 반복되는 그 틀의 궤적에 부딪히고 상처입고 위축되며 계속해서 눈치껏 나를 속이며 살아야 하는걸까.- P245

편지의 어느 대목에서 내가 울었는지는 정말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김희진이 소설에 쓴 대로 그때의 나는 허위의식과 자기방어의 성채에 갇혀 있었고 둘 중 어떤 것을 건드리든 비관적으로 변하게 돼 있었다.
비관은 가장 손쉬운 선택이다. 나쁘게 돌아가는 세상을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적게 소모되므로 심신이 약한 사람일수록 쉽게 빠져든다. 신체의운동이 중력을 거스르는 일인 것처럼, 낙관적이고 능동적인생각에도 힘이 필요하다. 힘내라고 할 때 그 말은 낙관적이되라는 뜻인 것이다.-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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