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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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보면 막장이라 할 수 있는 스토리가 작가의 필력덕에 무한감동의 문학작품으로 승격된 사례가 아닐까.

그리고 좀 알송달송..... 작가가 쓰지 않은 이야기는 나는 잘 모르겠다. 초반부터 그래서 아버지는 누구인가 흥미진진하게 읽어왔는데....대체 누구인가.

나는 그녀가 말하는 상식에 대해서 생각했다. 정상적인 사람들에게는 과거가 단일한 게 아니라 여러 개다. 가족이 기억하는 유년과 친구가 기억하는 유년과 자신이 기억하는 유년이 모두 다르리라. 그러므로 그들은 그중에서 가장 합당한 과거를 선택하면서 지금의 자신에 이르렀으리라. 이치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를 따지는건 그렇게 선택할 수 있는 과거가 여러 개인 사람에게나 가능하지 않을까? 돈이 없어서 며칠 동안 굶고 다닌 사람에게는 길에 굴러다니는 동전 한 닢도 너무나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단 하나의 과거도 없는 내게는 아무리 터무니없고 불합리하며 비이성적일지라도사소한 단서 하나하나가 소중했다. 하찮은 사실 하나를 지키기 위해 상식적 세계 전체와 맞서야만 하는 순간도 찾아오리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P44

나는 인생의 불행이 외로움을 타는 걸 본 적이 없어요. 불행은불량한 십대들처럼 언제나 여럿이 몰려다니죠.- P71

하지만 개인의 불행은 건기나 우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곳방글라데시에서 저는 수많은 개인사적인 불행을 만났습니다. 불행이란 태양과도 같아서 구름이나 달에 잠시 가려지는 일은 있을망정 이들의 삶에서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거기 늘 태양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거기 늘 태양이 있다는사실을 잊습니다. 이들도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불행을 온몸으로 껴안을 때, 그 불행은 사라질 것입니다. 신의위로가 아니라면, 우리에게는 그 길뿐입니다.- P130

내가 쓴 글을 읽어보면 우리들의 사랑 이야기‘는 전혀 아름답지도, 애틋하지도않았습니다. 우리 사랑이라는 게 겨우 그 정도였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게 아니라 제 글솜씨가 아름다운 집도 변소로 묘사하는 수준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그러고 나니까 알겠더군요. 아름다움이란 솜씨의 문제이고, 솜씨는 어떻게바라보느냐의 문제라는 걸. 그렇구나. 괴로웠다고 생각하면 괴로운 글을 쓰는 것이고, 행복했다고 생각하면 행복한 글을 쓰는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P138

"왜 검모래를 둘러보라고 하느냐면, 희재양이 내게 이루 말할수 없을 정도로 질 낮은 인간이라고 말했기 때문이에요. 내가 선생으로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그렇게 훌륭하지는 않을 수도 있어요. 물론 이런저런 결함이 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인간으로서 자격 미달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시대를 지금의 잣대로 재단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보수 세력들이 나의 당선을 막기 위해 어떤 터무니없는 인신공격을 퍼붓고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저열한 짓거리에 흔들릴만큼 엉망의 인생을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인간적인 연민이 들 뿐, 내 도덕성에는 어떤 흠집도 나지 않습니다."
......
"정지은과 관련해서 도의적으로는 모를까, 도덕적으로 내가 비난받을 만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너는 그 말이 혼란스럽다. 도의와 도덕의 경계는 과연 어딜까?- P175

모든 것은 두 번 진행된다. 처음에는 서로 고립된 점의 우연으로, 그다음에는 그 우연들을 연결한 선의 이야기로, 우리는 점의인생을 살고 난 뒤에 그걸 선의 인생으로 회상한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과거의 점들이 모두 드러나 있기 때문에 현재의 삶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앞으로 어떤 점들을 밟고 나가느냐에 따라서그들의 인생은 지금보다 좋아질 수도 있고, 나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너 같은 경우는 완전히 다르다. 과거의 점들이 모두 발견되지않았다는 점에서 네 인생은 몇 번이고 달라지리라. 인생의 행로가 달라진다는 말이 아니라 너라는 존재 자체가 달라진다는 뜻이다.
예컨대 진남을 방문하고 미국으로 돌아간 뒤, 이따금 어린 시절의일들이 다른 의미를 띠면서 떠오를 때가 있었다. 입양 초기 걸음마를 겨우 배웠을 무렵부터 너는 바다를 무척이나 좋아해서 에릭이 일하러 나갈 때마다 늘 자기도 데려가달라고 조르곤 했었다는 말을 앤에게서 자주 들었다. 너는 자신이 산보다 바다를 더 좋아하는것은 바그너보다 브람스를 더 좋아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개인적 취향이라고.
개인적 취향에 불과했던 그 일은 진남을 방문한 뒤부터 중요한의미를 띠게 됐다. 너는 자신의 취향이 무의식, 즉 자신이 알지 못하는 과거의 어떤 우연한 점에 의해서 결정됐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진남이라는 항구도시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바다를 좋아한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렇게 이전에 보이지않던 점들이 발견될 때마다 그 점들을 잇는 새로운 선들이 그어졌고, 네 인생은 그때마다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선이 달라질 때마다 너라는 존재도 바뀌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카밀라라는 이름이 붙은 미국 소녀에서, 동백나무 아래에서 찍은 사진이 있었기 때문에 카밀라라는 이름을얻게 된 입양아를 거쳐, 아이를 낳으면 ‘희재‘라는 이름을 짓겠다.
던 열일곱 살 여고생의 딸까지. 새로운 점들은 너라는 존재를 그처럼 가변적으로 만들었다. 문제는 과거의 그 점들을 통제할 방법이 네게는 없었다는 점이다- P178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겠지만, 요즘 세상에는 값싸게 즐길 수있는 고독이란 게 없어. 돈을 지불하지 않은 고독은 사회 부적응의표시일 뿐이지. 심지어는 범죄의 징후이기도 하고, 예를 들어 선생들은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서 지내는 학생에게서 자살이나 학교폭력의 가능성을 읽고, 이웃들은 친구나 가족의 왕래가 없이 살아가는 1인 가구의 세대주가 잠재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사이코패스가 아닌지 늘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만 하잖아. 우리 시대의 고독이란 부유한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럭셔리한 여유가 된 거야. 고독의 재발견이란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자는 거지. 고독이란 단어에 어울리는 요가나 명상 같은 프로그램이나 오가닉 상품들이 뭐가 있는지 한번 알아봐."- P214

낮과 밤은 이토록 다른데 왜 이둘을 한데 묶어서 하루라고 말하는지. 마찬가지로 서른 이전과 서른이후는 너무나 다른데도 우리는 그걸 하나의 인생이라고 부른다.- P220

그런데 왜 인생은 이다지도 짧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건 모두에게 인생은 한 번뿐이기 때문이겠지. 처음부터 제대로 산다면 인생은 한 번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단번에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단 한 번뿐인 인생에서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는, 그게 제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돌이킬 수 없다는 점에서는 모두 결정적이다. 한번뿐인 인생에서 우리는 그런 결정적인 실수를 수없이 저지른다는걸 이제는 잘 알겠다. 그러니 한 번의 삶은 너무나 부족하다. 세 번쯤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 번의 삶은 살아보지 않은 삶이나 마찬가지다.- P251

주님은 내게 죄를 사해주는 분이 아니라 복수할 권한을 빼앗는 분이었다. 나는 갑자기 무력해졌다.- P261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심연이 존재합니다. 그 심연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타인의 본심에 가닿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날개가 필요한 것이죠. 중요한 건 우리가 결코 이 날개를 가질 수 없다는 점입니다. 날개는꿈과 같은 것입니다. 타인의 마음을 안다는 것 역시 그와 같아요. 꿈과 같은 일이라 네 마음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야 하나도 어렵지않지만, 결국에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방법은 없습니다. 그럼 날개는 왜 존재하는 것인가? 그 이유를 잘 알아야만 합니다. 날개는 우리가 하늘을 날 수 있는 길은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날개가 없었다면, 하늘을 난다는 생각조차못했을 테니까요.-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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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방문객 오늘의 젊은 작가 22
김희진 지음 / 민음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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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진부한 감정표현이 좀 아쉽다.
현실성 없는 인물관계도가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어 읽는 내내 실소를 터트리게 했지만, 결론적으로 모두 제정신을 차리고 ‘보통’의 단계로 가라앉은 것 같아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반부부터 드러난 반전요소는 초반에 오그라드는 인물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는 듯 하지만, 퀴어라는 요소가 동시대의 문학에 전혀 신선한 소재가 아니라 그런지 흥미를 돋우지는 않았나 보다. 결국 말미에 보이는 ‘손경애’의 ‘진실’을 받아들이는 태도나 감정은 클리셰도 아니고, 작가의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문제를 비약적으로 진행시키려는 그릇된 판타지가 아니었나 싶다.

남자애를 향한 여자애의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알 것도 같았다. 하지만 어떤 관계에서 싹튼 사랑이든, 사랑한 만큼 되돌려 받을 수 있는 사랑이라는 것은 없었다. 계산기로 두들겨 플러스 마이너스 ‘0‘이 되는 감정의 교환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숫자 놀음은 수학에서나 가능하다는 걸 여자애는 왜 모르는 걸까. 나는 상운이를 잃고 나서야 알았다. 일방적으로 사랑하고픈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살아 숨 쉬고 싶은 이유가 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 대상의 죽음이 곧 자기 자신의 죽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사랑은 사랑하는 것으로시작되는 것이지 사랑받는 것으로 시작되는 게 아니었다.- P68

그래, 스쉬턴하이트였다. 자기가 지금 읽고 있는 독일 소설이 있다면서, 그가 그 소설에 대해 잠깐 언급한 기억이 났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로 끌려간 두 독일 남자에관한 이야기라는 설명과 함께 그가 덧붙인 말은 이것이었다.
"인류가 생겨난 이래 우리들의 사랑은 항상 죄악시 돼 왔어..
아니, 죽음을 의미했지. 적어도 죽임을 당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보면 현재를 살아가는 지금의 나는 그나마 다행인 건가?" 그때 내 대답은 이랬다. "너나 나나 스스로를 감춘 채 살아가고 있는데 현재가 무슨 의미야." 그런데 현재를 살아가는지금의 자기를 다행으로 여겼던 그가 스스로 죽음 속으로 사라져 간 것이었다.-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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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봄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2
최은미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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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한 해 두 해 커갈 때마다 그맘때의 나를데려왔다. 아이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땐 일곱 살의내가, 아홉 살이 되었을 땐 아홉 살의 내가 살아났다. 오랫동안 잊고 살던 기억들이, 아이를 낳지않았으면 죽을 때까지 다시 살아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기억들이 지난 10년간 놀라울 정도로생생하게 살아났다. 나는 아이를 보며 내 엄마 아빠의 결혼 생활을 보았고 엄마가 나에게 했던 분풀이와 탄식을 다시 들었다. 아이는 때때로 내 지난 시간을 들추기 위해 보내진 심판관처럼 느껴졌다. 나는 내 안에서 들끓는 욕들을 아이가 알아챌까봐 겁이 났고 내가 묻어둔 기억들이 아이에게 이식될까봐 두려웠다. 나라는 인간을 형성해온 것들을 완전히 떼어두고 아이를 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달을 때마다 벌을 받는 것 같았다.- P56

나는 정신 놓고 웃는 여자가 상당한 위화감을 줄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으로 느꼈다.- P69

결혼을 하기 전에 나는 결혼을 하면 내 원가족한테서 조금이라도 멀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엄마를 안 보고 내 아빠의 형제들을 안 보기 위해선 결혼을 해선 안 된다는 걸 몰랐다. 나에게 남편과 아이가 생기는 순간 내 남편과 아이에겐 처갓집과 외갓집이 있는 게 정상이 되리라는 걸, 정상이 아니기 위해선 정상인 척하는 것보다 훨씬많은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나는 몰랐다. 결혼을하는 순간 내 원가족과 더 철저히 묶이리라는 걸몰랐다.- P90

나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두운 저녁이었고 집에는 나와 그 여자 둘뿐이었다. 여자는 엄마와 뭔가가 제대로 틀어졌고 지금 술을 먹었다. 여자는 엄마를 가장 고통스럽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고 내게 온 것이다. 나는 표정이 흔들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여자를정면으로 쳐다봤다. 딴 남자랑 그걸 섞은 내 엄마보다 엄마의 사생활을 그 딸한테 말하고 있는 당신이 더 후지다고, 그런 눈빛으로 봤다. 실제로도나는 한심해서 참을 수가 없는 기분이었다. 고작저런 여자와 십수 년 지기로 지낸 엄마의 인간관계가 한심했고 딸한테 이런 말을 듣게 하는 엄마의 처신머리가 한심했다.-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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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하게 책을 넘기다 ‘투어’가 강이에게 투영되는 순간부터 서글퍼졌다. 우리는, 사람은 ‘원래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살인미수 끝에도 무엇인가 하나라도 개선되는 건 없었다. 우리는 그냥 투어처럼 누군가와 혹은 자기 자신과 끝없이, 혹은 살인과 죽음이라는 비참한 최후에 가 닿는 순간까지 적의를 두고 살아야 하는가보다.

성장소설을 바라보는 ‘어른’의 입장은 ‘나는 이제 이런 시기는 지났다’인가.
중학생이 화자로 등장하지만 ‘어른’들도 성장을 완성하지 못하고 소설속 인물들 처럼 어리숙함을 유지하며 산다는 생각만 들었다.
불신과 음모와 배신의 도가니. 약점을 쥐어 잡은 강자의 거침없는 폭력. 대세에 편승하기 위해 약자의 상처를 정당하게 외면하는 야비함.

어느 평론가의 성장소설이라는 푱은 너무나 자신들의 민낯과 다를 바 없는 어른들의 모습을 성장소설이라눈 범주로 구분지어 놓고 자신들에게 면죄부를 주며 안주하려는 비겁한 일인 것 같다.
하다못해 최진영작가의 ‘당신 곁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의 소녀는 더이상 성장이 필요없을 정도로 성장을 완성하지 않았나.

우리의 부끄러움에 관한 소설이다.

아이들은 아이들을 구분할 줄 알았지만 구분짓지는 않았다. 전민동 외부인과, 외부인처럼 보이는 내부인과, 내부인, 내부인은 실은 내부인 행세를 할 뿐 가장 먼 곳에서 온 외부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람과 아람의 친구들은 학교 안에서 또다른 외부인 취급을 받았다. 혼자 외부인이었던 나는 이 아이들을 만나면서부터 함께 외부인이 될 수 있었다.- P24

어떤 질문도 우리가 궁금해서 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를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P31

‘고양이가 사나워지는 건, 화가 났을 때가 아니야. 겁을 먹었을때야’- P78

"아람이하고 소영이하고 싸우면 누구를 선택할 거야?"
나는 대답을 회피했다.
"엄마가 좋아, 노는 게 좋아?"
엄마가 던지는 질문에 대답을 해본 적이 없었다. 선택을 요구하는 질문은 대부분 유치했고, 지혜로운 대답은 대부분 비겁했다.- P87

아이들과의 싸움은 물론이고 어른들이나 선생과의 문제에도, 소영이 개입하면 최선의 결과를 낳았다. 주먹질은 정당방위가 되었고 이 주일의 징계는 일주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최선의 결과만을 원하는 아이는 우리 중 소영뿐이었다. 우리는 다만 최악의 결과가 두려울 뿐이었다.- P88

우리는 저마다의 불행을 한자리에모아놓고서는 어이없는 교집합을 발견하고 즐거워했다.- P90

싸움을 좋아하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싸울 수밖에 없는 순간들이 있을 뿐이었다. 소영도 마찬가지였다. 자기 보호는 치열한 공격이 될 때가 많았다. 치열한 보호가 비열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P92

투어는 아람을 대신해 나와 살았다. 나는 투어를 강이라고 불렀다. 강이는 평소에는 잘 헤엄치지 않았다. 플라스틱 물풀 뒤에보라색 몸을 숨기고 있었다. 아침을 먹을 때에도 점심을 먹을 때에도 강이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강이는 혼자서 살았다. 다른 물고기와 함께 있게 된다면,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온전치 못할것이다. 상대방이 사라지거나, 자신이 사라지거나, 그것이 투어의 운명이었다. 살기 위해서 강이는 혼자서 살았다.
손거울 하나를 어항 옆에 두었다. 손거울을 강이에게 보여주었다. 물풀 뒤에 숨어 있던 강이는 거울을 향해 달려들었다. 굵은 핏줄이 팔뚝 위로 튀어나오는 것처럼 붉은 지느러미가 강이의 몸에서 튀어나왔다. 강이는 지느러미를 흔들어대며 유리에 머리를 박았다. 다시 뒤로 물러나 입을 크게 벌렸다. 강이는 거울 속의 자신과 남인 것처럼 싸웠다. 싸울 때면 지느러미가 부채처럼 활짝 펼쳐졌다.
강이가 들어 있는 어항에 다른 물고기를 넣는 상상을 했다. 강이는 운명처럼 싸우고야 말 것이다. 강이가 죽거나, 다른 물고기가 죽거나, 둘 중 하나는 없어져야 할 것이다. 강이에게 거울을 보여주지 않는 상상도 했다. 자신을 볼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강이는 높아갈 것이다. 곪아가고 곪아가다가 어느 날 물위로 떠오를 것이다. 강이가 원하는 것이 그것일지도 몰랐다. 어항 속에서 혼자 살도록, 평생 거울과 함께 살도록,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정해진것은 아니다. 투어로 태어난 강이는 원래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야 했던 걸까.
강이는 물풀 뒤에 숨은 채로 나를 밤새도록 보았다. 꿈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던 소영이나 아무 말 없이 사라져버린 아람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이불에 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텅 빈 방으로부터 나를 숨기려 했다. 그러다 이불을 박차고 화장실에 들어가 찬물로 세수를 하기도 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내 얼굴을 거울 속에서 발견할 때마다, 이마에 핏대가 서고 숨이 거칠어졌다. 나는강이에게 다가가 손거울을 보여주었다.
살아야만 한다.-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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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농담이다 오늘의 젊은 작가 12
김중혁 지음 / 민음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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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철학을 겉으로 맴도는 주변부적인 소설인 줄 알았는데 결말에 신파적인 요소가 적절히 가미된 감동적인 서사의 드라마였다.
배경은 웅장하지만 연출과 감정선, 스토리가 잔잔한 아름다운 영화랄까.
마지막 세미의 스탠딩 코미디는 참 적절한 결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영우의 무대였다면 다소 진부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뇨, 이건 일상적인 자학 같은 겁니다."- P62

그건 사고였어요. 어머니가 그런 게 아니라고요. 당신은 핑계를 대고 싶겠죠. 당신 같은 인간들은 늘 핑계를 만들기 좋아하니까.- P64

강차연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나 아버지나 캡틴 모두 새로운 일을 찾아떠난 것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을 버리기 위해서, 서로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서 떠난 것이다. 남겨진 사람인 게 싫어서, 서로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자신이 남겨진 사람인 게 분명해지니까, 일부러 떠난 것이다. 이일영의 실종은 폭탄이 되었고,
세 사람은 파편처럼 흩어졌다.- P156

평범한 날에는 자주 이일영을 잊었다. 죽지 않았고,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편안했다. 이일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거짓말인 걸 알았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일상을 유지할 수 있었다.- P166

"전에 저한테 그러셨어요. ‘네가 지금 여기서 살고 있는 게얼마나 엄청난 우연인 줄 아니? 얼마나 희귀한 존재인 줄 아니? 너를 함부로 대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러셨죠. 그런 우연이 여기에서만 일어나란 법은 없잖아요. 저기에서도 일어날수 있는 거잖아요."
"네 말이 맞아. 하지만 말이다. 우리는 우연 속에 있는 거고, 일영이는 우연의 바깥에서 다시 그만큼의 확률로 우연이일어나야만 살 수 있는 거란다."- P182

"보여 주는 게 무조건 맞아. 걱정하지 마. 누군가 슬퍼할 거라는 이유 때문에 그걸 얘기하지 않으면 슬픔이 사라질 거같아? 절대 아냐. 세상에 슬픔은 늘 같은 양으로 존재해, 슬픔을 뚫고 지나가야 오히려 덜 슬플 수 있다고."- P190

"당연하지, 바보야. 당연한 거야. 그걸 이해할 수 있다고 떠드는 놈들이 사기꾼이야. 감정은 절대 전달 못 해. ‘누군가가 슬프다‘라고 얘기해도, 그게 전달되겠어? 각자 자기 방식대로 그걸 받아들이는 거야. 진짜 아픈 사람은 자신이 아픈 걸10퍼센트도 말 못 해. 우린 그냥……, 뭐라고 해야 하나, 그냥각자 알아서들 버티는 거야. 이해 못해 준다고 섭섭할 일도없어. 어차피 우린 그래. 어차피 우린 이해 못하니까 속이지는말아야지. 위한답시고 거짓말하는 것도 안 되고, 상처받을까봐 숨기는 것도 안 돼. 그건 다 위선이야."-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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