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 제15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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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를 찾아 나서지만 세상엔 가짜만 가득했다. 미련, 위선, 가난과 고통, 부조리로 가득한 밑바닥 인생을 겪으면서 남은 희망이라면 ‘진짜 엄마’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따듯한 인정이었을 테지만 누군가에겐 ‘진짜 엄마’인 사람도 별반 다를 것 없는 인간성을 보이면서 희망을 져버리게 한다. 세상의 모든 자들이 쥐떼로 보이는 순간, 세상의 모든 것이 역겨워 지는 순간.

어느 작가의 소설에 어른이라는 것은 싫어하는 사람과 잘 지내는 것이라는 문장이 있었나. 이미 어른이 되어 역겨운 쥐가 되었고 쥐 떼의 군상을 이루는 한 사람으로서 위선을 장착하고 고통에 체념하고 사는 삶에는 희망을 버려야 하는 필요조건이 전제되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금 곱씹어 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을 보면 지난 날의 순수함을 상기시키며 그 순수한 마음을 지키고 싶은 보호본능이 일게 되는 것인가.

시간은 멈출 수 없기에 사람은 결국 성장해버리고 만다. 쥐떼같은 우리를 복제한 어른이 되는 것을 막으려면 성장이라는 것을, 어른이 된다는 것을 너무 아름다운 미사어구로 포장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미련하고 위선적이고 부조리하고 희망 없는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만행은 멈춰야 하지 않을까.

소설을 읽는 동안 소녀와 나를 동일시하고 너무 슬프기만 했지만 책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고 나니 나와 다른 어른들을 비추어 부끄러움을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그를 볼 때마다 찬수의 책장에 꽂혀 있던 동화책을 떠올렸다. 사람이 되고 싶은 곰과 호랑이에 대한 동화인데, 동굴속에서 쑥과 마늘만 먹던 곰은 결국 사람이 되었고 호랑이는 사람이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그 동화를 읽으며 나는 사람이 된 곰을 등신이라 생각했다. 이왕에 곰 아닌 무언가가 될 거라면 사람보다는 호랑이가 낫지 않나? 도대체 뭣하러 사람 같은 게 되겠다고 백일 동안 쑥과 마늘만 처먹은 거지? 곰이 쑥과 마늘만 먹다가 사람이 돼버린 건 멍청한 곰에게 내려진 최고의 벌이 분명하다.- P42

그것도 사랑의 힘인가? 사랑은 다친 데를 치료해주는 연고 같은 건가? 정말 그런 거라면, 언니는 상처가 아닌 곳에 연고를 덕지덕지 바르고 있는 게 분명하다. 멀쩡한 곳에자꾸 연고를 바르니까 진짜 상처는 점점 썩어 들어가고 멀쩡한 곳의 연고는 미끄덩미끄덩, 언니와 백곰의 관계를 자꾸 엇나가게 하는 것이다.- P48

백곰의 눈엔 내가 열 살도 안된 어린애로 보이겠지만, 나는 이미 태어나기도 전에 보고 듣고 짐작하는 천 년의 세월을 살았다. 태어나서는 그보다 훨씬 지독한 세월을 단숨에 견뎌냈다. 맞고 때리고 지르고 울고, 부수고 찌르고 할퀴고 물고, 박살내고 집어던지고 다치고 도망가고, 닦고 짓이기고 삼키고 내혀부터 씹어대는 그런 것들.- P52

나에게 좋은 일이 아들에게도 좋은 일이라면좋겠지만, 누군가가 웃으려면 누군가는 반드시 울어야 한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으니까.- P99

내가 진짜엄마를 찾는 이유는 진짜엄마가 그리워서도, 진짜엄마가필요해서도 아니다. 가짜를 가짜라고 확신하기 위해서. 이유는 그 뿐이다. 진짜를 찾아내야 가짜를 가짜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 세상이 온통 가짜뿐이라면, 가짜가 가짜임을 증명할 수가 없지 않나.- P111

나는 할머니에게 화만 내고 싶은데, 그것마저 못하게 하니까 할머니는 진짜 나쁘다.- P115

사람들이 목소리를 그렇게 칭찬할 때마다 (그게 칭찬인지뭔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목소리는 교과서에 나올 것 같은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올바르게 웃는 법을 가르치는 책이 있다면, 그가 웃는 모양을 사진으로 찍어 실어도 될 만큼. 문제는, 그가 그 이상으로 착하려고 애쓰다보니 착하지 않은 자기는 지나치게 경멸하는 것이었고, 더 큰 문제는 주위 사람들이 그에게 그런 착함을 강요한다는 데 있었다. (그런 면에서 제일 나쁜 건 사람들이다. 자기들은 하기도 싫고 할 마음도 없는 착한 행동을 목소리에게만 강요하는 거니까.) 목소리가 나를 보살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뒤 사람들은 그를 더 많이칭찬했다. 그래서 목소리는 나를 더 깨끗하게 입히고 얌전한 아이로 만들려고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좀 헷갈렸다. 목소리가 나를 보살피는 게 정말 나를 아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사람들이 보고 있기 때문인지, 혹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기 때문인지.- P133

그 순간 내가 왜 경적을 울렸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미남이 이모와 용이 삼촌이 그러고 있는 걸 대장이 보는 게 싫었다. 보면대장이 크게 상처를 받을 것 같았다. 이미 상처를 받은 사람은 제 상처가 깊어지는 것 따윈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남에게 상처 주기가 더 쉽다. 더 이상 보호해야 할 자기가 없으니까, 다칠 걱정따윈 하지 않고 맘껏 칼을 휘두를 수 있는 것이다. 진짜엄마는 가짜엄마든 찾으면 당장 죽여버리겠다는 대장의 말을 다른 사람들은 격한농담 정도로 받아들이지만, 나는 안다. 그건 대장의 진심이다. 자신의상처를 재료로 허풍을 떠는 사람은 없으니까.- P188

다들 뭔가를 예감하고 있으면서 그 예감이 사실로 드러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는 것 같아서. 지금까지의 내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불행에 대한 예감은 실현되고야 만다. 사람들이 불안해하면서 불행을 자꾸 떠올리면 불행이 옳거니, 여기가 내 자리구나 하면서 냉큼 달려드니까.- P189

용이 삼촌과 미남이 이모는 돈뿐만 아니라대장 가슴 속의 빛나는 부분까지 같이 훔쳐간 것이다.- P201

구걸은, 나는 너무 불쌍해요, 나는 너무 배고파요, 나는 너무 불행해요, 라는 얼굴로 돈을 요구하는거다. 자신의 불행을 대가로 돈을 받는 것. 불행을 좋아하는 사람은아무도 없다. 불행에 인자한 사람 역시 없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선상대를 즐겁게 해줘야 한다. 불행으로 살 수 있는 건 동정뿐이다. 동정은 아무 힘이 없다. 나는 그것을 잘 안다. 나는 동정받는다고 느낄때 가장 비참했다. 그건 내게서 즐거움의 싹을 아예 잘라버리는 거니까. 나를 동정할 때, 나를 동정하는 사람의 마음이 따뜻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차라리 불행할 것이다. 대장과 달수 삼촌은 내게 그이치를 가르쳐줬다. 불행을 주긴 쉽지만 웃음을 주긴 어렵다는 걸, 우리가 웃음을 주려고 하면 사람들은 팔짱을 낀 채 ‘어디 한번 해보시지‘ 라는 눈빛을 마구 뿜어냈다. 사랑하던 사람이 도망가고, 돈을 다잃고, 마음속에 활활 불이 타올라도 우린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웃어야 했다. 그럼 우리를 보는 사람도 웃었다. 웃다가도 어쩔 수 없이 울면, 우리를 보는 사람도 울었다. 그 눈물에, 표정에, 코를 훌쩍이는 소리에 위안을 받았다. 그건 동정이 아니다. 같은 마음이다. 그렇게울고 웃는 사이 불행은 평범해졌다. 평범해진 불행에 힘이 없다. 그냥 그까짓 것이 된다.- P230

나는 아무 말 없이 담배만 피웠다. 극한의 불행에 빠뜨리는 방법. 그가 가장 아끼는 것을 부숴버리면 된다. 하지만 나리의 새아빠는 그런 게 없다. 그래서 불행에 빠지지도 않을 것이다. 아, 하나 있긴 하다. 돈, 그가 가진 돈과 땅과 건물을 모두 없애버리면 되는데. 그건 불가능하다. 모두 그의 돈을 지키려고 안간힘이니까. 세상 사람 전부. 왜냐. 세상은 가진 자를 숭배하고 보호하는 곳이니까. 그리고 못 가진자를 경멸하고 없애는 곳이니까.- P260

날마다 새로운 날이 아니라, 날마다 같은 날. 아주 사소한 것들만 변할 뿐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틀과 원리는 어디든 비슷해서, 맞는 사람은 늘 맞고 으스대는 사람은 늘 으스대며 때리는 자는 늘 때리는 자다. 그것을 움직이는 힘이 무엇인지 알 순 없었지만, 짐작은할 수 있었다. 그것을, 그런 이치를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세상은 그들의 뜻대로 굴러간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반쯤 헐린 나의 공간에서 지켜보았다.- P269

불길은 그것들을 닥치는 대로 먹어 삼켰다. 나는 내가 불태운 숱한 가짜들을 떠올렸다. 그땐 그것들이 모두 가짜인 줄 알았지만, 그것들이 가짜라면 세상에 가짜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온통 가짜투성이고 진짜는 하늘에만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아니, 진짜 따윈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이제 와 내가 무언가를 불태워야 한다면, 이세상을 통째로 태워서 까만 재로 만들 것이다. 진짜 따윈 없다. 진짜인 척하는 가짜로 세상은 이미 가득 찼다.
나라고 다르진 않을 것이다.
불타는 집을 보고 사람들은 미친 듯 울며 용역에게 매달렸다. 용역은 그들을 멀뚱히 쳐다보기만 했다. 용역에게 주먹질을 하는 사람도있었다. 그 옆엔 친절한 경찰이 있어서, 주먹이 용역에게 닿기도 전에그 사람을 잡아갔다. 돈 없고 빽 없고 힘없는 것이 죄라면 죄였다. 모든 것은 주님의 뜻대로 될 거라고, 목소리가 말했었지. 이런 것이 정말 주님의 뜻이라면 천국은 지옥보다 더 지독한 곳일 거다.- P271

아침이 되어 일을 마친 상호를 따라 그가 사는 방으로 갔다. 출근하는 사람들로 거리는 북새통이었다. 무가지를 집어 지하철역으로내려가는 사람들의 얼굴에 어떤 표정도 없었다. 쥐 떼…… 같았다. 쥐에겐 표정 같은 게 없으니까. 그저 맛있고 배부르고 위험한 것에만반응하니까. 지하철과 버스마다 가득찬 쥐 떼를 상상하니 구역질이났다. 거리 한가운데서 허리를 굽힌 채 구역질을 했다.- P286

나이 들수록 아는 게 많아질 줄 알았는데, 점점 멍청해진다. 알 수없는 세계에 대해 구체적 짐작을 시도할 때, 그리고 그것을 물질로 풀어낼 때면 당연하다 믿던 것들이 기이한 세상으로 이동한다. 소녀가진짜인 척하는 가짜를 수집하듯, 나는 당연한 척하는 부조리를 모으는 중이다. 이러다 더 멍청해질 수도 있다. 상관없다. 밑져야 본전이다.-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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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그녀, 클로이
마르크 레비 지음, 이원희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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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하고 진부한 로맨스 소설에도 장애인, 인종차별에 관한 문제의식을 녹여내는 진보한 작가, 의식 있는 사회의 수준을 보여준다.

그 부부는 자기들이 할 일은 전혀 없다는 듯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 다른 사람들을 부려먹어요.

"그러니까 얼마간이라도 엘리베이터운전을 하기에는 네가 너무 중요한 사람이다. 그 말이니?"
"그런 뜻이 아니고요."
"아니, 너는 방금 그렇게 말했어."

사람들은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그녀와 달리 온전한 신체를 가졌다는 불공평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클로이는 워싱턴스퀘어 파크에 들어가서 한 체스장 앞에 자리를 잡았다. 노련한 체스 선수들이 쉽게 돈벌이를하려고 무모한 아마추어들을 등쳐 먹고 있었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요."
"하지만 그런 뜻이 함축되어 있었어요."

"참고로 말씀드리는데 나는 낮에도 일하잖아요."
"리베라도 낮에는 요양원에 있는 아내를 보살폈으니 당연히 휴식 없는 고단한 생활을 했어. 너보다 마흔살이나 많은 사람도 해냈는데 넌 잘해낼 수 있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면 될 텐데."
"때로는 침묵이 쓸데없는 말 몇 마디보다 낫다는 걸 알아야 할 텐데. 그럼 내일 보자, 부탁한다."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
"형사는그렇게 이해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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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시간 오늘의 젊은 작가 5
박솔뫼 지음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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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도 없고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판소리에 추임새를 넣는건지
돌림노래를 부르는건지
근데 장단도 없고 리듬도 없고
젊은작가의 실험정신은 높이 살만한 소설.

그래서 다른 책도 좀 봐야지.

내가 사는 동네는 대구의 끝으로 경상북도와 인접한 지역이었다. 신도시라고 하는데 이 동네 사람들만 그렇게 생각했고 보통은 변두리라고 불렀다.-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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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의 사랑 오늘의 젊은 작가 21
김세희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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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문장과 배경과 관계도에 내용을 빠르게 훑어나갔다. 10대시절의 이반, 팬픽 문화라는 소개글을 봤지만 그래도 좀 부끄럽고 이 부끄러움을 들춰내고, 이런 부끄러움의 실체를 알고 있다는게 수치스러웠다. 그래도 잘 읽혔다. 너무나 잘 알고있어서 그랬을거다.
우리가 같이 공유했던 과거 중 언급해선 안되는 부끄러움들이 있었다. 작가의 표현대로 그 단어를 쓰는 순간 그것의 존재가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래서 더 작가에겐 이 소설은 큰 용기가 필요했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작가는 소설의 말미에서 이 부끄러움을 전복시켜버렸다. 너무 급격하게 슬퍼졌다. 내가 지우고 싶었어도 지워지지 않는 것들, 그런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그들 삶의 실체로 자리하고 있는 진실이라는 점이 말이다. 그동안 이 소재에 대해서 왜 아무도 나서서 문학이란 예술작품으로 만들어 주지 않았을까. 어느 시골에서 밭농사를 짓다가 생을 마감해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비극이 되지 않기 위해(97p)이 소재는 다시 우리 수면위로 끌어내야 할 것이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화자도, 화자가 좋아했던 선배도 아닌 인희라는 친구였고, 그래서 인희라는 존재감은 이 소설의 묵직한 중심축이 되고 있었다. 특히 화자와 인희가 학교 앞에서 만났을 때 화자가 그때 우리는 미쳐있었다는 말을 내뱉는 대목은 참 가슴이 아렸다. 그때부터 이 소설은 작가가 어딘가 있는 ‘인희’라는 대상들에게 바치는 진심 어린 사과문처럼 보이기도 했다.

조금 논점을 벗어나 우리가 쫓는 유행이라는 것, 실체를 가지지 않고 진정성을 보지도 않고 맹목적으로 편승하고자 하는 트렌드가 순수한 진실을 훼손하고 더럽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그렇게 따르던 유행들이 뒤돌아서면 후회스럽고 부끄러운 일이 되는게 아닌가. 유행이나 대세를 쫓지 않는 자신의 확고한 신념은 지나고 보면 더 자랑스러운 것일텐데.

교사들은 누워 있는 행위와 팬픽 읽는 행위‘를 금지했지만 사실 그들이 금지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지금은 그게 뭔지 알 수 있다. 그들은 ‘동성애를 금지한다고 쓰고 싶었을 것이다. 학교마다 동성애를 단속하는 대대적인 움직임이있었다. 하지만 차마 그 단어를 쓸 수는 없었다. 그 단어를 쓰는 순간 그것의 존재를, 그것이 우리 집단 안에 정말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어서였을까? 아니면 단지 그 단어 자체에 강렬한 거부감을 느껴서였을까? 손을 잡지말라고, 또는 껴안지 말라고까지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어디까지가 동성애이고, 어디서부터 아닌지 가려낼 능력이 없었다. 그 점 때문에 그들은 혼란을 겪었다. 우리는 모두 손을 잡고다녔다. 모두들 끌어안고 있었고, 서로의 품에 기대어 5분 또는 10분간 짧은 잠을 잤다. 사이좋은 원숭이들처럼 긴 머리를빗겼고, 둘씩 셋씩 넷씩 주렁주렁 허리를 껴안고 붙어 다녔다.- P26

이는 자유롭고 느긋한, 즉 이기적인 삶의 방식으로 보였다. 그래서 무척 유혹적이었다.
그들은 속삭였다. 뭔가가 되려고 너무 애쓸 필요 없어. 대의나 애국심, 위인전, 전부 다 지배계급이 만들어 낸 거짓말이야. 사람들을 세뇌시켜 자기들 이익을 지키도록 앞장서게 만드는 술수에 불과해. 그런 것들은 너에게서 오후에 느긋하게차 한 잔을 마시는 즐거움조차 빼앗아 갈 거야. 뭣 때문에 그렇게 살아? 너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 살아도 괜찮아.- P95

"내 생각에 김경열은 그냥 잘해 주는 거였던 것 같아. 경미가 자기를 좋아하니까. 경미가 착각한 거야."
어느 순간 내 얼굴이 굳었다.
"자기도 좀 심각해진다고 느꼈는지 최근에는 경미를 멀리했어."
‘착각‘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나는 온몸이 굳었다. 혜진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갑자기 다른 의미를 지녔다. 혜진의 말을 듣는 게 견딜 수가 없었다. 나의 치부가 드러나는것처럼 수치스러웠다. ‘착각‘이라는 단어처럼 한 사람을 우스꽝스럽고 비참하게 만드는 말이 있을까.- P127

그건 거짓말은 아니었다. 나는 남자들을 아주 좋아했다. 여자를 사랑한 적이 있다고 해서 나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한때 어찌어찌 일어난 일, 이제는 지나간 일로 여겨졌다. 나는 그때 일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몰랐다. 그 일들이 새로운 세상에맞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았다. "난 남자를 너무 좋아해서 안 될 거야." 라고 말하는 여자조차 한 여자에게 가장 커다란 사랑을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새로운 세상에 맞지않았다. 그래도 가끔 그때 일을 떠올리면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분명 존재했으나 오래전 까마득히 깊은 바다 아래로 가라앉아 버렸다는 대륙에 관해 생각해 볼 때처럼, 6년간 본 것들을 완전히 잊을 수는 없었다. 그 엄청났던, 소녀들의 사랑하려는 욕구.- P153

그때 나는 그것이 그 애 자신의 표현일 가능성에 대해서는생각지 못했다. 나는 그 사실을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아주최근에 들어서야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난 짧은 머리와 힙합 바지를 자동적으로 남성에 대한 모방이라고 여겼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건들거리며 걷는 인희의 걸음걸이를 보고 남자를 흉내 내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른바 남성적이라고말해지는 특성들이 당연히 남성들에게 속하는 거라고 여겼던것이다. 여자들도 짧은 머리를 원할 수 있고, 그것이 — 당연히 그녀 자신의 표현일 수 있음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걸렸다. ‘남자처럼 짧은 머리‘라는 표현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아차린 뒤로 세상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것이이 글을 쓰게 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P159

"학교 다닐 때는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후배들의숭배를 받고. 하지만 대학에 가면 완전히 세상이 뒤집히죠. 저도 처음에는 말하고 싶어서 온몸에 좀이 쑤셨어요. 나 좀다른 애야, 그런 거요. 갑자기 평범해지는 걸 견딜 수가 없더라고요. 새로 알게 된 사람과 술을 마시거나 깊은 대화를 나눌 기회만 되면 입이 근질거렸어요. 그러다 몇 번 쓴맛을 보면서 서서히 입을 다물게 되는 거죠."-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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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코닉 건축 - 마음을 사로잡는 영국의 공간 브랜딩 북저널리즘 (Book Journalism) 38
양지윤.김주연 지음 / 스리체어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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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적인 건축물이 탄생하는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요소들의 상호작용과 맥락을 정리해 놓은 저술이다. 건축, 디자인적인 관점에서 도시의 상징이 되는 랜드마크에 대하여 사람들이 이러한 상징물을 받아들이고 활용하며 하나의 상징으로 심연에 자리잡는 것을 다뤘다. 그래서 그런지 건축에 편파적인 관점이 두드러지지 않았나 싶다.
아이콘은 권력의 욕망으로 탄생한다. 과거 피라미드부터 고딕 성당, 의사당까지 권력의 확장된 표현형의 결과물 중 하나가 건축이 되었고, 이러한 상징물의 역사는 권력의 이동과정(절대권력-종교-국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현대에는 그러한 권력이 자본으로 옮겨와 기업의 상징물인 랜드마크가 조성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맥락에서 벗어나 상징적인 건축물이나 장소가 사람과 자본을 모으는 몇 가지 사례가 늘어나고 있는데, 이러한 사례들은 저자가 말하는 아이코닉한 건축의 외형적 특징과는 결부되지 않는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을 과거의 권력과 자본이 표출된 랜드마크와 뒤섞여 구별하지는 못한 듯하고, 책에 소개된 사례는 조금 과거의 철 지난 트렌드의 한 목록에 지나지 않나 싶다.
과거의 아이코닉한 상징물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정리해보는 기회로서는 적절하다.

도시 재생의 키워드로서 지역 경제의 부흥에 일조하고, 지역의 미래를 상징하는 아이코닉 건축은 이제 어디에나 있다. 아이코닉 건축이 세계의 도시에 전략적으로 건립되고, 우리의일상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데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아이코닉 건축에서 파생되는 갖가지 문화 자본과 이에 대한수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예를 현대인의 여가 생활인 쇼핑에서 찾을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쇼핑은 단순히 필요한 물건을 구매하는 것 이상의 다양한 가치를 지닌다. 먼저 이성적 판단을 기초로 가격 비교, 구매 편리성, 서비스에 따라 만족을 느끼는 ‘실용적 쇼핑 가치utilitarian shopping values‘가 있다. 그리고 감정적 동기에 기반한 ‘유희적 쇼핑 가치hedonic shopping values‘가 있다. 유회적 쇼핑은 쇼핑 자체가 주는 기쁨에 대한 감정적인 필요에 초점을 맞춘다. 같은 물건이라도 깔끔하고 우아하게 디자인된 상점을 선호하는 것, 쇼윈도의 감각적인 디스플레이를 보고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 윈도쇼핑을 하는 것 등이 포함된다.
이때 가격보다는 쇼핑의 경험이 주는 심미성이나 기분 전환,
즐거움 등이 중요한 요소가 된다.

고급 숙박과 서비스, 음식과 교통수단, 방문지를 선택해 우월적인 경험 소비를 보여 주려는 것이 그 예다. 자랑할 만한 이을 한다. 훌륭한 관광 자원인 동시에 여행지에서 빠질 수 없야깃거리를 만드는 것이다.
아이코닉 건축은 그 지역의 상징이 되어 간판sign 역할는 ‘인증샷‘의 배경이 되는 필수 방문지이며, 그 지역을 관광하고 왔다는 증표가 된다. 사람들은 에펠탑을 소개하는 이미지를 볼 때마다 프랑스 여행을 떠올린다. 만약 에펠탑 모양의액세서리를 기념품으로 구입했다면, 그 액세서리는 마치 섬네일thumbnail처럼 여행의 추억을 압축적으로 재생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아이코닉 건축은 장소와 문화를 떠올리게 하는추억의 아이콘이자, 소비자의 경험을 전시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사람들이 문화를 경험하는 통로이자, 문화 쇼핑의 이정표 역할을 한다.

디자인 경영학의 선구자인 브리짓 보르자드 모조타BrigitteBorja de Mozota는 공간 아이덴티티spatial identity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기업의 빌딩과 공간 디자인은 브랜드 이미지를 확립하기 위한 영속적인 매개체가 된다는 의미다. 사무실과 공장같은 업무 공간이나 부티크 같은 상업 공간이 공간 아이덴티티를 커뮤니케이션하는 매개로서 기능한다.
건축의 내부와 외부는 기업의 메시지를 담은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다. 내부와 외부 관계자들에게 일관성 있는 커뮤니케이션 기능을 수행한다.

지역과 단절된 기호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 모든 기호의 의미는 문장의 맥락에서 발생한다는 맥락주의는 건축의내외부적 요소에서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가령문은 기능적으로 공간을 구분하지만, 전체적인 환경 차원에서는 장식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건축에서는 절대적인 맥락과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 주변 환경에 대한 고려 없이 건물의 완전한 의미만을 고집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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