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그녀, 클로이
마르크 레비 지음, 이원희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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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하고 진부한 로맨스 소설에도 장애인, 인종차별에 관한 문제의식을 녹여내는 진보한 작가, 의식 있는 사회의 수준을 보여준다.

그 부부는 자기들이 할 일은 전혀 없다는 듯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 다른 사람들을 부려먹어요.

"그러니까 얼마간이라도 엘리베이터운전을 하기에는 네가 너무 중요한 사람이다. 그 말이니?"
"그런 뜻이 아니고요."
"아니, 너는 방금 그렇게 말했어."

사람들은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그녀와 달리 온전한 신체를 가졌다는 불공평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클로이는 워싱턴스퀘어 파크에 들어가서 한 체스장 앞에 자리를 잡았다. 노련한 체스 선수들이 쉽게 돈벌이를하려고 무모한 아마추어들을 등쳐 먹고 있었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요."
"하지만 그런 뜻이 함축되어 있었어요."

"참고로 말씀드리는데 나는 낮에도 일하잖아요."
"리베라도 낮에는 요양원에 있는 아내를 보살폈으니 당연히 휴식 없는 고단한 생활을 했어. 너보다 마흔살이나 많은 사람도 해냈는데 넌 잘해낼 수 있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면 될 텐데."
"때로는 침묵이 쓸데없는 말 몇 마디보다 낫다는 걸 알아야 할 텐데. 그럼 내일 보자, 부탁한다."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
"형사는그렇게 이해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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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시간 오늘의 젊은 작가 5
박솔뫼 지음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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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도 없고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판소리에 추임새를 넣는건지
돌림노래를 부르는건지
근데 장단도 없고 리듬도 없고
젊은작가의 실험정신은 높이 살만한 소설.

그래서 다른 책도 좀 봐야지.

내가 사는 동네는 대구의 끝으로 경상북도와 인접한 지역이었다. 신도시라고 하는데 이 동네 사람들만 그렇게 생각했고 보통은 변두리라고 불렀다.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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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의 사랑 오늘의 젊은 작가 21
김세희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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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문장과 배경과 관계도에 내용을 빠르게 훑어나갔다. 10대시절의 이반, 팬픽 문화라는 소개글을 봤지만 그래도 좀 부끄럽고 이 부끄러움을 들춰내고, 이런 부끄러움의 실체를 알고 있다는게 수치스러웠다. 그래도 잘 읽혔다. 너무나 잘 알고있어서 그랬을거다.
우리가 같이 공유했던 과거 중 언급해선 안되는 부끄러움들이 있었다. 작가의 표현대로 그 단어를 쓰는 순간 그것의 존재가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래서 더 작가에겐 이 소설은 큰 용기가 필요했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작가는 소설의 말미에서 이 부끄러움을 전복시켜버렸다. 너무 급격하게 슬퍼졌다. 내가 지우고 싶었어도 지워지지 않는 것들, 그런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그들 삶의 실체로 자리하고 있는 진실이라는 점이 말이다. 그동안 이 소재에 대해서 왜 아무도 나서서 문학이란 예술작품으로 만들어 주지 않았을까. 어느 시골에서 밭농사를 짓다가 생을 마감해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비극이 되지 않기 위해(97p)이 소재는 다시 우리 수면위로 끌어내야 할 것이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화자도, 화자가 좋아했던 선배도 아닌 인희라는 친구였고, 그래서 인희라는 존재감은 이 소설의 묵직한 중심축이 되고 있었다. 특히 화자와 인희가 학교 앞에서 만났을 때 화자가 그때 우리는 미쳐있었다는 말을 내뱉는 대목은 참 가슴이 아렸다. 그때부터 이 소설은 작가가 어딘가 있는 ‘인희’라는 대상들에게 바치는 진심 어린 사과문처럼 보이기도 했다.

조금 논점을 벗어나 우리가 쫓는 유행이라는 것, 실체를 가지지 않고 진정성을 보지도 않고 맹목적으로 편승하고자 하는 트렌드가 순수한 진실을 훼손하고 더럽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그렇게 따르던 유행들이 뒤돌아서면 후회스럽고 부끄러운 일이 되는게 아닌가. 유행이나 대세를 쫓지 않는 자신의 확고한 신념은 지나고 보면 더 자랑스러운 것일텐데.

교사들은 누워 있는 행위와 팬픽 읽는 행위‘를 금지했지만 사실 그들이 금지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지금은 그게 뭔지 알 수 있다. 그들은 ‘동성애를 금지한다고 쓰고 싶었을 것이다. 학교마다 동성애를 단속하는 대대적인 움직임이있었다. 하지만 차마 그 단어를 쓸 수는 없었다. 그 단어를 쓰는 순간 그것의 존재를, 그것이 우리 집단 안에 정말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어서였을까? 아니면 단지 그 단어 자체에 강렬한 거부감을 느껴서였을까? 손을 잡지말라고, 또는 껴안지 말라고까지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어디까지가 동성애이고, 어디서부터 아닌지 가려낼 능력이 없었다. 그 점 때문에 그들은 혼란을 겪었다. 우리는 모두 손을 잡고다녔다. 모두들 끌어안고 있었고, 서로의 품에 기대어 5분 또는 10분간 짧은 잠을 잤다. 사이좋은 원숭이들처럼 긴 머리를빗겼고, 둘씩 셋씩 넷씩 주렁주렁 허리를 껴안고 붙어 다녔다. - P26

이는 자유롭고 느긋한, 즉 이기적인 삶의 방식으로 보였다. 그래서 무척 유혹적이었다.
그들은 속삭였다. 뭔가가 되려고 너무 애쓸 필요 없어. 대의나 애국심, 위인전, 전부 다 지배계급이 만들어 낸 거짓말이야. 사람들을 세뇌시켜 자기들 이익을 지키도록 앞장서게 만드는 술수에 불과해. 그런 것들은 너에게서 오후에 느긋하게차 한 잔을 마시는 즐거움조차 빼앗아 갈 거야. 뭣 때문에 그렇게 살아? 너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 살아도 괜찮아. - P95

"내 생각에 김경열은 그냥 잘해 주는 거였던 것 같아. 경미가 자기를 좋아하니까. 경미가 착각한 거야."
어느 순간 내 얼굴이 굳었다.
"자기도 좀 심각해진다고 느꼈는지 최근에는 경미를 멀리했어."
‘착각‘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나는 온몸이 굳었다. 혜진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갑자기 다른 의미를 지녔다. 혜진의 말을 듣는 게 견딜 수가 없었다. 나의 치부가 드러나는것처럼 수치스러웠다. ‘착각‘이라는 단어처럼 한 사람을 우스꽝스럽고 비참하게 만드는 말이 있을까. - P127

그건 거짓말은 아니었다. 나는 남자들을 아주 좋아했다. 여자를 사랑한 적이 있다고 해서 나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한때 어찌어찌 일어난 일, 이제는 지나간 일로 여겨졌다. 나는 그때 일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몰랐다. 그 일들이 새로운 세상에맞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았다. "난 남자를 너무 좋아해서 안 될 거야." 라고 말하는 여자조차 한 여자에게 가장 커다란 사랑을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새로운 세상에 맞지않았다. 그래도 가끔 그때 일을 떠올리면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분명 존재했으나 오래전 까마득히 깊은 바다 아래로 가라앉아 버렸다는 대륙에 관해 생각해 볼 때처럼, 6년간 본 것들을 완전히 잊을 수는 없었다. 그 엄청났던, 소녀들의 사랑하려는 욕구. - P153

그때 나는 그것이 그 애 자신의 표현일 가능성에 대해서는생각지 못했다. 나는 그 사실을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아주최근에 들어서야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난 짧은 머리와 힙합 바지를 자동적으로 남성에 대한 모방이라고 여겼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건들거리며 걷는 인희의 걸음걸이를 보고 남자를 흉내 내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른바 남성적이라고말해지는 특성들이 당연히 남성들에게 속하는 거라고 여겼던것이다. 여자들도 짧은 머리를 원할 수 있고, 그것이 — 당연히 그녀 자신의 표현일 수 있음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걸렸다. ‘남자처럼 짧은 머리‘라는 표현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아차린 뒤로 세상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것이이 글을 쓰게 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 P159

"학교 다닐 때는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후배들의숭배를 받고. 하지만 대학에 가면 완전히 세상이 뒤집히죠. 저도 처음에는 말하고 싶어서 온몸에 좀이 쑤셨어요. 나 좀다른 애야, 그런 거요. 갑자기 평범해지는 걸 견딜 수가 없더라고요. 새로 알게 된 사람과 술을 마시거나 깊은 대화를 나눌 기회만 되면 입이 근질거렸어요. 그러다 몇 번 쓴맛을 보면서 서서히 입을 다물게 되는 거죠."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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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코닉 건축 - 마음을 사로잡는 영국의 공간 브랜딩 북저널리즘 (Book Journalism) 38
양지윤.김주연 지음 / 스리체어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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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적인 건축물이 탄생하는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요소들의 상호작용과 맥락을 정리해 놓은 저술이다. 건축, 디자인적인 관점에서 도시의 상징이 되는 랜드마크에 대하여 사람들이 이러한 상징물을 받아들이고 활용하며 하나의 상징으로 심연에 자리잡는 것을 다뤘다. 그래서 그런지 건축에 편파적인 관점이 두드러지지 않았나 싶다.
아이콘은 권력의 욕망으로 탄생한다. 과거 피라미드부터 고딕 성당, 의사당까지 권력의 확장된 표현형의 결과물 중 하나가 건축이 되었고, 이러한 상징물의 역사는 권력의 이동과정(절대권력-종교-국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현대에는 그러한 권력이 자본으로 옮겨와 기업의 상징물인 랜드마크가 조성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맥락에서 벗어나 상징적인 건축물이나 장소가 사람과 자본을 모으는 몇 가지 사례가 늘어나고 있는데, 이러한 사례들은 저자가 말하는 아이코닉한 건축의 외형적 특징과는 결부되지 않는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을 과거의 권력과 자본이 표출된 랜드마크와 뒤섞여 구별하지는 못한 듯하고, 책에 소개된 사례는 조금 과거의 철 지난 트렌드의 한 목록에 지나지 않나 싶다.
과거의 아이코닉한 상징물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정리해보는 기회로서는 적절하다.

도시 재생의 키워드로서 지역 경제의 부흥에 일조하고, 지역의 미래를 상징하는 아이코닉 건축은 이제 어디에나 있다. 아이코닉 건축이 세계의 도시에 전략적으로 건립되고, 우리의일상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데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아이코닉 건축에서 파생되는 갖가지 문화 자본과 이에 대한수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예를 현대인의 여가 생활인 쇼핑에서 찾을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쇼핑은 단순히 필요한 물건을 구매하는 것 이상의 다양한 가치를 지닌다. 먼저 이성적 판단을 기초로 가격 비교, 구매 편리성, 서비스에 따라 만족을 느끼는 ‘실용적 쇼핑 가치utilitarian shopping values‘가 있다. 그리고 감정적 동기에 기반한 ‘유희적 쇼핑 가치hedonic shopping values‘가 있다. 유회적 쇼핑은 쇼핑 자체가 주는 기쁨에 대한 감정적인 필요에 초점을 맞춘다. 같은 물건이라도 깔끔하고 우아하게 디자인된 상점을 선호하는 것, 쇼윈도의 감각적인 디스플레이를 보고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 윈도쇼핑을 하는 것 등이 포함된다.
이때 가격보다는 쇼핑의 경험이 주는 심미성이나 기분 전환,
즐거움 등이 중요한 요소가 된다.

고급 숙박과 서비스, 음식과 교통수단, 방문지를 선택해 우월적인 경험 소비를 보여 주려는 것이 그 예다. 자랑할 만한 이을 한다. 훌륭한 관광 자원인 동시에 여행지에서 빠질 수 없야깃거리를 만드는 것이다.
아이코닉 건축은 그 지역의 상징이 되어 간판sign 역할는 ‘인증샷‘의 배경이 되는 필수 방문지이며, 그 지역을 관광하고 왔다는 증표가 된다. 사람들은 에펠탑을 소개하는 이미지를 볼 때마다 프랑스 여행을 떠올린다. 만약 에펠탑 모양의액세서리를 기념품으로 구입했다면, 그 액세서리는 마치 섬네일thumbnail처럼 여행의 추억을 압축적으로 재생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아이코닉 건축은 장소와 문화를 떠올리게 하는추억의 아이콘이자, 소비자의 경험을 전시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사람들이 문화를 경험하는 통로이자, 문화 쇼핑의 이정표 역할을 한다.

디자인 경영학의 선구자인 브리짓 보르자드 모조타BrigitteBorja de Mozota는 공간 아이덴티티spatial identity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기업의 빌딩과 공간 디자인은 브랜드 이미지를 확립하기 위한 영속적인 매개체가 된다는 의미다. 사무실과 공장같은 업무 공간이나 부티크 같은 상업 공간이 공간 아이덴티티를 커뮤니케이션하는 매개로서 기능한다.
건축의 내부와 외부는 기업의 메시지를 담은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다. 내부와 외부 관계자들에게 일관성 있는 커뮤니케이션 기능을 수행한다.

지역과 단절된 기호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 모든 기호의 의미는 문장의 맥락에서 발생한다는 맥락주의는 건축의내외부적 요소에서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가령문은 기능적으로 공간을 구분하지만, 전체적인 환경 차원에서는 장식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건축에서는 절대적인 맥락과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 주변 환경에 대한 고려 없이 건물의 완전한 의미만을 고집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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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보다 낯선 오늘의 젊은 작가 4
이장욱 지음 / 민음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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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숨 쉬고 사고하는 모든 것들의 수 만큼 서사가 존재하기에, 가끔 세상을 바라보면 그 거대한 세계의 질량이 주는 압박감으로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같은 공간에 같은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마저도 각자 다르게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을 읽다 보니 그런 압박의 감정들이 몰려왔다. 인물들의 감정이 교차하는 복잡다단한 분위기에 끌려오다 소설의 말미에 뒤집어지는 반전과 이야기의 장치들이 나를 교란시켜 다시금 복잡한 기분에 휩쓸리게 하는 소설이었다.
이장욱의 소설처럼 세상을 이해해야겠다. 그의 소설처럼 세상을 바라봐야 겠다.

나는 그 방의 공기를 조금씩 호흡하며 주어진 시간을 통과할 것이다. 주인이 아니라 과묵한 손님이 되어서 하루하루를 묵어 갈 것이다. 그것이 내가 가진 희망의 전부라고 해도 좋았다. 희망은 사소하면 사소할수록 좋았다. 그런 희망은 사람을 좌절시키지 않고, 배신감에 치를 떨게 하지않고, 죽게 만들지 않으니까. - P17

나는 내 안에서 발생하는 감정들에 이름을 붙이는데 익숙하지 않다. 그것들은 언제나 형태를 갖추지 않고 흘러가니까. 사건이나 현상에 즉시 반응하는 것이 내겐 매우 어려운 일이다. - P21

상대에 대해 예의 바른 거리를 만들어 내는 미소 말이다. 염의 입에서 나온 게 욕설뿐이었다면아마도 끝까지 평정을 유지했을 것이다. 평정을 잃는다는은 곧 실패를 의미하니까. 실패한다는 것은 이 세계의 주변부로 밀려난다는 걸 의미하니까. - P36

애도란 산 자들의 것이라고 말한 이가. 죽음이 뚫어놓은 구멍을 메우기 위한 산 자들의 의식이라고 말한 이가. 그렇다. 그것은 삶을 지속하기 위해 수행하는 인간의 제도에 불과하다. 나는 애도하는 인간이 되고 싶지 않다. 나는 그 구멍속으로 나 자신을 들이밀고 싶은 인간이다. 그 구멍이 나를 잡아먹을 때까지. 그 구멍이 나를 완전히 수긍할 때까지.
A가 죽었다. A가 시신으로 변했다. 삶이 제거된 하나의 물질로 바뀐 것이다. 혈관의 피와 뇌의 운동이 정지한 것이다.
그 물질을 애도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죽음을 완성하고 승인해서, 죽은 자의 삶을 이 세상에서 완전히 떼어 내겠다는 뜻 아닌가. 시신의 세계에서 보면 추모라는 형식 자체가이미 모욕이 아닌가. 이미 나 자신이 그 모욕의 일부가 아닌가. - P53

보수 언론이 제작한 녹음 테이프를 튼 기분이었다. 노동 착취로 성장한 국가가 여전히 그 착취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논리. 일하는 자들의 고통을 끝없이 요구하는 성장의 논리, 철저하게 동물화된 약육강식의 세계. 수긍할 수 없는 지배와 피지배의 세계……… 자본주의라는 제도에 미칠 듯한 적의를 느끼던 시절의 감정이 나를 엄습했다. - P54

터널은 약간 흰 채 뻗어 있었다.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긴 터널이 있었나…… 나는 중얼거렸다. 길고, 어둡고, 정지할 수 없는 터널이었다. 터널이란 참으로 알맞은 인생의 비유가 아닌가, 나는 생각했다. 입구가 있고, 출구가 있다. 입구와 출구의 사이는 일직선이다. 샛길이나 갓길 같은 것은 없다. 말하자면 출생이 있고, 죽음이 있을 뿐이다. 샛길이나 갓길 같은 것은 없다. 인생은……… 터널이다.
상투적인 비유다.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상투적인 비유만큼 위대한 것이 있을까? 예술적인 척, 독창적인 척하는 것들의 허세보다는, 차라리 상투적인 것들의 몰취미가 아름답지 않은가? - P103

그 유명 감독들의 영화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독들을 좋아한다고 말함으로써 취향을 과시하는 것뿐이라고 나는 단정했다. 꼬일 대로 꼬인 상징들로 가득한 영화들, 롱 테이크를 쓰면 예술이 되는 줄로 착각하는 영화들, 인생의 지루함을 닮는 게 리얼리즘인 줄 아는 영화들….. 일뿐이라고 생각했다. - P109

이런 이야기를 A에게 하고 있다니. 내 웃음 끝에서 쓴맛이 배어 나왔다. A는 학점이니 연수니 토익이니……… 그런 것들과무관한 친구였다. 짐짓 그런 척하는 게 아니라는 건 그녀의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이 세계의 논리 바깥에있었다. 그런 A가 나를 따라 웃었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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