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수수밭 대산세계문학총서 65
모옌 지음, 심혜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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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긴 마라톤을 달려온 기분이다. 고전의 분량은 원래 어마어마한 쓰나미를 마주하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데, 심지어 중국의 근현대사가 배경인 모옌의 작품이라 시작하는 마음을 잡는 것부터가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노벨문학상의 타이틀을 쥔 작가들의 작품은 항상 재미와는 거리가 멀었으니 힘든 마라톤을 모래주머니까지 쥐고 뛰는 일 아닌가.
몇몇 중국작가들에게 깊은 감명을 받고 도전해보는 소설이었지만 작가의 사관이 현시대의 정신에 부응하지 않는 듯한 평도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인권 감수성과 정치적 현실 사이의 괴리를 문학성이 얼마나 메워줄 수 있는 지도 궁금했다. 사실 붉은 수수밭에서 작가의 정치편향적인 작법은 보이지 않는 듯하다. 괴뢰군, 일본군, 공산당, 국민당 모든 특정 집단을 영웅적으로 묘사하지 않으며 화자는 주요 등장 인물들에게 애정은 담아 묘사하지만 정당한 정의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짧은 리뷰 하나 쓰기도 어려운데 장대하고 유려한 문장들을 길고 길게 서술해나가는 작가의 필력에 감동하며 보았다. 잔인하기도 하고 구역질나기도 하면서도 휴머니즘적이고 전체적으로 담담하다. 감정의 온도는 낮게 유지하면서 그 많은 역경과 풍파를 그려내는데 표지 뒤의 작가 사진이 푸근하면서도 차가운 이미지처럼 느껴지는 것과 동일한 선상에서 오는 기시감이랄까.

다시 한번 모옌의 소설을 찾아볼 이유가 있다면, 좀 더 다양한 작품을 섭렵하여 정치적인 지점을 구분할 수 있는지 알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 많은 중국의 의식있는 지식인들이 비난해야할 이유가 있었는지가 참으로 궁금했는데 뭔가 답을 찾지 못하고 싱겁게 끝나버린 것 같았으니....

할머니는 너무나 피로하다고 느꼈다. 그 미끌미끌한 현재의 손잡이가, 인간 세상의 손잡이가 그녀의 손을 막 빠져나가려 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인가? 내가 죽어가고 있는 건가? 이 하늘과 이 땅, 이 수수와 나의 아들을, 지금 사람들을 데리고 전투를 벌이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는 것인가? 총소리가 너무나 멀게 들렸고, 모든 것이 두꺼운 안개 뒤에 가려져 있는 것 같았다. 더우관! 더우관! 내아들아, 엄마를 도와주렴. 어미를 꼭 잡아라. 어미는 죽고 싶지 않다, 하늘이시여! 하늘…… 하늘이 내게 사랑하는 이를 주셨고, 하늘이 내게 아들을 주셨고, 하늘이 내게 재물을 주셨고, 하늘이 내게 붉은 수수 같은 30년의 충실한 인생을 주셨습니다. 하늘이시여, 당신이 이왕 나에게 준것이니, 도로 거두어가지 마소서. 나를 용서하소서, 나를 놓아주소서! 하늘이시여, 당신은 내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나요? 당신은 내가 문둥병자와 동침을 해서 살이 썩어 문드러지는 괴물을 낳아 이 아름다운 세상을형편없이 더럽혔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하늘이시여, 무엇이 정조고, 무엇이 정도(正道)입니까? 무엇이 선량한 것이고 무엇이 사악한 것입니까? 당신은 한 번도 말해준 적이 없고, 난 단지 나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왔습니다. 난 행복을 사랑했고, 힘을 사랑했고, 아름다움을 사랑했습니다. 내 몸은 나의 것이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난 죄도 벌도 두렵지 않고 당신의 열여덟 층 지옥에 들어가는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난 해야 할 일을 다 했으니 어떤 것도 겁날 게 없습니다. 하지만 난죽고 싶지 않습니다. 난 살아야겠습니다. 살아서 이 세상을 더 보아야겠습니다. 아 나의 하늘이시여…….…- P128

할아버지는 나중에 다시 할머니의 품으로 돌아왔지만 할머니에 대한감정은 이미 색과 맛을 분별할 수 없을 정도로 혼탁해져 있었다.- P302

사랑이라는 게 뭔가? 저마다의 대답이 있겠지만, 이 요상한 일이 무수한 영웅호걸과 요조숙녀를 시달려 죽게 했다. 할아버지의 연애 역사와아버지의 애정의 광란, 그리고 사막처럼 창백했던 나 자신의 연애 경험에근거해서, 나는 우리 집안 3대의 사랑에 부합되는 철칙을 도출해냈다. 열광적인 사랑의 첫번째 요소는 가슴을 찌르는 고통이다. 찔린 심장에서는송진 같은 액체가 뚝뚝 떨어지고, 사랑의 고통으로 인해 흘려야 하는 붉은 피는 위장에서부터 흘러나와 소장과 대장을 지나면서 오동나무 기름같은 대변으로 바뀌어 체외로 배출된다. 잔혹한 사랑을 이루는 사랑의 두번째 요소는 가차 없는 비난이다. 사랑하는 쌍방 모두 산 채로 상대방의가죽을 벗기지 못해 안달한다. 생리적인 가죽과 심리적인 가죽, 정신적인가죽과 물질적인 가죽을 벗기고, 혈관과 근육과 퉁퉁 움직이는 내장과 검붉은 심장을 벗긴다. 그러고 난 뒤에 둘은 상대방을 향해 서로의 마음을던지고, 두 마음은 공중에서 부딪쳐 박살이 난다. 얼음처럼 싸늘한 사랑을 이루는 사랑의 세번째 요소는 지속적인 침묵이다. 싸늘한 감정은 사랑하는 사람을 얼려 얼음과자로 만들어버린다. 우선은 차가운 바람 속에서얼고 그다음에는 눈 속에서 얼다가 다시 꽁꽁 얼어붙은 강물 속으로 던져지고 마지막에는 현대 문명이 낳은 냉동고 안이나, 돼지고기나 조기를 보관하는 냉장실 속에 언 채로 걸려 있게 된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사랑을하는 사람은 얼굴이 서리처럼 하얘지고 체온은 25도로 내려가, 입만 움찔거릴 수 있을 뿐 절대로 말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미 말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인데 사람들은 그들이 짐짓 벙어리 노릇을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P464

할아버지가 롄얼과 몰래 정을 통했을때는 부끄럽고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게 호되게 욕을 먹고 얻어맞고 나니 그런 감정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원래 있었던 자기비판의 양심은 강렬한 복수심으로 대체되었다.- P491

난 가끔씩 인종의 퇴화가, 갈수록 더 부유하고 편리해지는 생활 조건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곤 한다. 부유하고 편안한 생활은 인류가 분투노력하는 목표이고 또한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목표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또한 불가피하게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심각한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인간은바로 자신의 노력으로 인간의 우수한 품성을 소멸시켜가고 있는 것이다.- P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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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남보다 더 불안한 사람들 - 왜 나는 항상 감정에 날이 서 있고 유난히 예민한가
대니얼 키팅 지음, 정지인 옮김 / 심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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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건강과 발달에 어려움을 겪으며 사는 삶은 어떻게 시작되며 그배후에는 어떤 생물학적 원리가 작동하고 있을까?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늘 스트레스에 지쳐 있다면 그 패턴은 어떻게인식해야 하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 스트레스의 여파에서 자녀 세대를 보호하려면 어떻게해야 할까?
어쩌면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인지도 모른다. 왜 이런 일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이를 해결하려면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미국을 비롯한 여러 선진국의 경우 그 핵심 원인은 불평등의 심화다.
이는 가장 가난한 사람과 가장 부유한 사람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이에게 영향을 미친다. 철저하게 현대의 산물인 이 스트레스 요인은 과거에 모두가 직면했던 포식동물, 폭력, 결핍이라는 생존의 위협만큼 가시적이지는 않지만그에 못지않게 치명적이다.

위협적인 상황이 닥치면 스트레스 시스템이 작동하지만 위협이 사라지면 스트레스 시스템은 작동을 멈춰야 한다. 이때 스트레스 시스템에 작동을 멈추라고 지시하는 역할을 맡은 핵심 유전자가 있는데, 이 유전자에 ‘메틸화 methylation‘ (이 과정을 담당하는 화합물 ‘메틸‘에서 따온명칭)라는 후성유전적 변화가 일어나면 그 유전자의 작동이 멈춰버린다. 그 결과 코르티솔cortisol이라는 스트레스 호르몬이 멈추지 않고 분비되어 스트레스 조절장애가 생기는 것이다.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이런 투쟁 또는 도피의 순간을 경험한다. 하지만 대개 그런 순간은 생명이나 존엄에 상당히 실질적인 위협이 가해질 때다. 가짜 위협과 진짜 위협을 구분하는 법을 배우고, 그 둘을 구분할 수 있을 만큼 침착함을 유지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성장 과정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트레스 조절장애라는 짐을 안고 있는 사람들은 다양한 양상의 실랑이와 성가심을 진짜 위협과 잘 구별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예상치 못한 일에는 거의 무조건 투쟁-도피 반응을 취한다. 게다가 이런 스트레스 상황 속에서는 한두 군데 찌릿하거나 통증만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땀이 비 오듯 흐르고 가슴은 긴장으로 굳어지며 맥박은 달음질치고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른다. 이런 상태가 견딜 수 없이 압도적으로 닥쳐오면 기절하기도 한다. 일단 이런 상태에 처하면 그들은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드는스트레스를 차단할 방법만 찾는다. 강렬한 불안과 긴장에서 벗어나려는 욕구는 다른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이때 다른사람을 맹렬히 비난하거나 신경질을 내는 사람도 많다.

보통 스트레스 반응 시스템은 직면한 위협의 크기에 비례해 반응을 높이거나 낮춘다. 당장 사자가 덮치려 하거나 총을든 남자가 다가온다면 스트레스 반응 시스템은 코르티솔을 방출해 높은 경계 태세를 갖추게 한다. 그러다가 위협이 지나가면 코르티솔 방출이 멈춘다. 그런데 미니의 연구에서 갓 태어난 새끼 쥐들이 엄마 쥐에게 보살핌을 충분히 또는 아예받지 못해서 스트레스를 경험하자 코르티솔 분비를 멈추지 못하게 하는, 즉 계속 방출하게 하는 어떤 일이 일어났다.
이런 과정이 바로 후성유전적 변화다. 다시 말해 유전자의 기능이 외부적 요인 때문에 스위치가 켜지거나 꺼지는 쪽으로 바뀐 것이다. 이 경우 외부적 요인은 어려서 보살핌을 받지 못해 극심한 스트레스를 경험한 것이며, 그 결과 ‘스트레스 메틸화 stress methylation‘ 라는 후성유전적 변화가 일어난다. 메틸화란 모든 유전자에 있는 켜고 끄는 스위치에 메틸기 methyl group(특정한 유형의 화학물질 분자)가 달라붙는 것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스트레스 메틸화란 시상하부 - 뇌하수체부신축에 진정하고 물러서라고, 즉 코르티솔 방출을 멈추라고 지시해야 할 유전자에 침묵화silencing‡‡가 일어난것이다. 인생 초기에 심한 강도의 스트레스를 경험하면 이 스트레스 시스템을 통제하는 핵심 유전자에 메틸화가 일어날수 있다. 그렇게 되면 항상 덮치려고 달려드는 사자나 총을 든 남자를 마주한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다.
‘바로 이거로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찾던 답이었다. 스트레스가 몸속에 들어가 유전자가 작동하는 방식 자체를 바꿔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생애 초기의 스트레스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완전히 바꿔버렸음을 깨달

스트레스 메틸화는 유전자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DNA는 원래 상태 그대로 남는다. 메틸화에 의해 변하는 것은 유전자가 발현되는 방식, 즉 유전자가 기능하는 방식이다. 이는 유전적 변화가 아니라 후성유전적 변화다.
다시 말해서 유전자에 작용하지만 유전자 바깥에 남아 있는 변화인 것이다. 다른 많은 유전자가 그렇지만 스트레스 유전자는 환경에따라 켜지거나 꺼지도록 고안되어 있다. 후성유전적 변화는 유전자를 켜고 끄는 스위치에 작용하고, 그리하여 유전자가 발현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아주 어린 신생아에게서 코르티솔이 매우 많이 분비될 경우 바로 그런 후성유전적 변화, 즉 스트레스 메틸화가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후성유전적 변화가 스트레스 유전자에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유전자에도 일어나 다양한 건강 문제를 일으킨다. 예를 들어 지금은 담배 같은 환경 독소가 세포의 성장을 통제하는 조절유전자 regulator gene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밝혀져 있다. 이스위치가 꺼지면 암을 일으키는 세포가 과다증식한다.
그렇지만 우리 몸에서 후성유전적 변화가 일어나는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고, 우리가 살아남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30여 년 전에 과학자들은 인간의 유전자 중 95퍼센트 정도가 아무런 쓸모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진화를 거치는 과정에서 없어도그만인 유전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유전자를 흔히 ‘암흑 DNA‘ 또는 ‘정크 DNA‘ 라고 한다. 수정이 이루어진 뒤 첫 2주 동안 태아는 주로 후성유전적 과정을 통해 일종의 청소를 단행해 암흑 DNA를 정지시키는데 이 과정 없이는 태아가 살아남지 못한다.
암혹 DNA의 존재가 밝혀진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발생학 관련 연구를 제외한 후성유전학 연구는 아직 초기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더군다나 사회적 환경이 유전자의 작동 방식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연구하는 ‘사회적 후성유전학‘은 더욱 최근에 생겨났다.

지금까지는 생애 초기 역경에서 긍정적인 효과를 얻은 경우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극도로 위험한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대비시켜준다는 점 정도를 꼽을 수 있을까? 우리는 진화학자들의 표현대로 ‘그냥 그렇다는 식의 이야기‘는 피하고 싶다. 구체적인 발견내용에 설명을 끼워 맞추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그래도 조심스럽게 추측해보자면 생애 초기의 스트레스 때문에 생기는 사회적인 후성유전적 변화는 위험한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한 구체적인 생존 전략을 지향하는 것 같다. 항상 삼엄하게 경계해야 해, 한 자녀에게만 너무 많은 걸 투자하지 마,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많이 투자하지 마 등, 이런 ‘후성유전적’ 충고가 생식이 가능한 나이까지생존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 치러야 할 건강과 안녕의 희생이 너무 크다.

차갑지만 잘 보호하는 육아가 있고, 따뜻하지만 조심스럽지 않은 육아도 있다.

애정과 주의를 기울이는 행동이 이처럼 결정적인 이유는 이 두 가지가 가장 주된 스트레스 방어막 역할을 하는 뇌 화학물질을 생성하는 데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그중 첫째는 ‘사랑의 호르몬‘ 또는 ‘신뢰의 호르몬‘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옥시토신이다. 아기를 품에안은 엄마가 아기와 눈 맞추고 있는 사진을 볼 때 사람들은 대부분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러나 그 순간에 엄마와 아기가 하는 경험은더욱 각별하다.

자기 위로self-soothing는 스트레스 시스템 이상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항상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수 있게 되면 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축이 흥분하는 빈도가 줄어들고, 그러면 스트레스 반응이 통제를 벗어나더라도 지속되는 시간이 단축된다. 또한 자기 위로는 스트레스 조절장애가 있는 아이나 어른이 습득하기 가장 어려운 기술이다. 스트레스 반응은 자동적으로 투쟁-도피 본능을 일깨우는데 이는 자기 위로와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본능을 예리하게 의식하는 능력과 정말로 두려워할 만한 일인지 평가하려는 성향은 의식적으로 기를 수 있다. 결국이런 것이 바로 전전두피질계의 기능이다. 그리고 정확히 이것이 마음챙김 수련이 목표하는 바다. 마음챙김을 훈련하고 연습하면 어느 순간이든 자신이 경험하는 것을 온전히 인식하게 된다. 자동적인 반응에 휘둘리는 대신 스스로 반응의 방향을 이끌어갈 줄 알게 된다는 것이 바로 마음챙김의 핵심 원리인 것이다.

그 신경화학물질 중 하나가 ‘쾌락 탐지자‘ 라고 알려진 도파민이다. 이런 별명을 갖게 된 이유는 쾌감을 주는 활동을 발견하면 또 해야 할 일이라고 표시하고 기억해두기 때문이다. 따라서 10대가 이 시기에 소설 읽기에서 즐거움을 느꼈다면 더 많은 수용체가 소설 읽는 행동에 반응해 ‘발화하고, 그에 따라 그 수용체들과 소설을 읽는다는 구체적 행동이 더욱 튼튼하게 연결된다.
그러면 다시 이 신경 경로는 10대의 정신 속에 골이 잘 파인 홈처럼 자리 잡게 되고, 독서는 그 아이가 시간이 날 때마다 더욱더 하고싶어 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미엘린화는 삶의 다른 어느 시기보다 청소년기에 가속화되는 또 하나의 과정이다. 이는 미엘린 myelin이라는 얇은 지방조직층이 여러 뇌 회로 사이의 연결을 가속화하는 것을 말한다. 미엘린이 회로를 감싸면 회로 사이에 메시지가 이동하는 속도가 더 빨라진다. 시냅스생성과 시냅스 가지치기가 뇌의 길을 닦는 것이라면 미엘린화는 그 길을 고속도로처럼 만든다. 청소년기에 새로운 기술이나 습관(피아노든 스키든 음주든)을 시도하면 인생의 다른 어느 시점에서보다 더 빠른 속도로 습득할 수 있다. 미엘린화는 행동이 습관으로 자리 잡는 과정에도 기여한다. 미엘린에 감싸인 경로를 통해 신호가 더 빠르게 더 효율적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든 이내 제2의 본성처럼 느껴지고 의식적인 사고를 하지 않아도 행동할 수 있게 된다.

실제로 불안과 분노는 동일한 뇌 회로와 생리적 기반의 상당 부분, 구체적으로는 하뇌에서 스트레스 반응 시스템으로 이어지는 연결부를 공유하고 있다.

폭주 기관차처럼 치닫는 분노가 가장 눈에 띄는 때는 그 화를 끝내줄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다.

상대적으로 쉽게 변화할 수 있는 결정적 시기, 그러니까 생후 1년까지의 영아기와 청소년기에는 새롭게 생성되는 뇌세포 수가 급격히 증가한다. 시냅스 생성이라고 하는 이 과정은 뇌가 외부 환경에 적응하는 동안 새로운 회로들을 만들게 한다. 그렇지만 시냅스생성이 청소년기와 함께 끝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속도는 떨어지지만 노년기까지 평생 계속된다.

나중에 일상 속에서 서로 협조해야 하는 번거로운 상황이 오면 스트레스 반응 시스템이 신속하게 작동할 수 있다. 특히 두 사람이각자 일 처리 방식에 분명한 기준을 갖고 있을 경우 더 그렇다. 그리고 대개 관계를 악화시키는 것은 커다란 트라우마보다는 일상적인다툼이다. 상대방이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통제하려 한다는 느낌이 들면 본인의 통제력이 훼손당했다고 느끼기 쉬운데, 이는 가장 기본적인 스트레스 유발 요인 중 하나다.

스트레스 반응 시스템 연구에서 최근 밝혀진 놀라운 점 하나는 스트레스가 실제 생리학적으로 전염성이있다는 것이다.

직장에서 직급이 낮은 사람들에게 큰 부담을 지우는 또 한 가지는 ‘요구 통제 곡선demand-control curve‘ 이라 일컫는 것이다. 이는 중간 관리자와 하급 직원이 상부로부터 점점 무리한 요구를 받지만 그 요구를 달성하는 일에 관한 통제력이 계속 줄어드는 상황을 나타내는 용어다. 예를 들어 기업에서 경영진들이 비용 절감 결정을 내리면 정해진 비율에맞춰 비용을 절감하라는 메시지가 부서장들에게 하달된다. 그러면 그들은 전략을 세워 각 부서의 중간 관리자들에게 이를 전달한다. 부서장 정도의 서열까지는 요구가 높은 동시에 통제력도 꽤 높은 편인데 이는 주로 업무를 아래로 위임할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간 관리자들부터는 생산성 요구가 여전히 높지만 그것을 실현할 자원이 줄어들기 때문에 부담을 느낀다. 이들에게 이르러서 요구 통제 곡선이 치솟는다. 함께 일하던 동료의 수가 줄어든 상태로 또는 보상도없이 추가 근무를 해서라도 동일한 생산성을 유지해야 하는 직원들은 요구 통제 곡선에서 가장 스트레스가 심한 끝자락에 위치한다. 이런 상황은 개인 생활에서도 벌어진다. 가정을 꾸려가는 데 실제적으로 요구받는 것 또는 요구받는다고스스로 인지하는 바가 자신이 행사하는 통제력보다 훨씬 크다면 스트레스 반응 시스템은 일정과 금전 문제, 자녀 양육등 아주 다양한 문제로 너무 자주 혹사당할 수 있다.

소득이든 직업에서 이루는 성취는 어느한 요소를 개별적으로 떼어 살펴보아도 언제나 똑같은 사다리가 나타났다. 여기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어떤 사람이 부모보다 더 좋은 교육을 받거나 직업에서 더 큰 성공을 거두거나 더 높은 소득을 올려 가족이 원래 차지했던 사회·경제적 지위를 뛰어넘었다고 해도 소용없다는 점이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가족이 처한 사회적 지위와 연관된 일련의 건강 문제로 힘들어할 가능성이 컸다. 단순하게말해서 부유하게 태어나면 더 건강하다는 것이다. 사회과학계에서 나온 이런 연구 결과는 너무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서 심지어 근본적인 사실로 보일 정도다.

각 국가를 비교했을 때 소득 불평등은 사회적 불평등과 상관관계가 있었지만 이 상관관계는 사회 · 경제적 지위에 따른 건강과 발달의 차이를 절반도 설명하지 못했다. 소득 불평등과 관련된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은 사회적 불평등의 사다리와 연관된 사회·경제적지위의 다른 부분들은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소득은 한 가족이 소득과 임금으로 벌어오는 돈의 액수는 포착하지만 물려받은 돈,
어려운 시기에 안전망이 되어줄 부모, 보유 부동산 같은 전체적인 부는 전혀 포착하지 못한다. 바로 이런 소득 아닌 부의 차이가 세대간 사회 이동성을 떨어뜨리는 큰 원인이다. 그것은 충격을 완화해줄 완충제나 안전망의 유무에 기인한다. 부유한 사람들은 직장을 잃거나 예기치 못한 의료비가 발생하는 것과 같은 경제적 충격이 닥쳐도 거뜬히 버텨낸다. 반면 특정 시기에 넉넉한 급여를 받고 있다.
하더라도 경제적으로 주변부에 가까운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안전망도 없는데 안 좋은 시기에 충격이 닥치면 순식간에 모든 것이 곤두박질친다. 높은 급여를 받던 직장을 잃으면 대출금을 갚지 못하고 그 때문에 집을 잃거나 우울증에 빠져 아무것도 못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 처한 가정에서 태어나 생후 1년이 안 된 아기는 스트레스 조절장애가 생길 수도 있다. 그리고 심한 스트레스는 임신 기간이나 생후 1년 같은 결정적인 시기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형편이 얼마나 어려워질지 걱정하는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위험한 수준까지 치솟을 수 있다. 이런 걱정은 사회적 불평등이 심한 사회에 살수록 더 심하다. 여차하면 사다리에서 여러 단 아래로 미끄러질지도 모를 때 추락에 대한 공포가 더 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불평등을 측정할 때 다른 요인들도 포함시켰다. 그중 중요한 것으로 부모의 교육 수준과 직업적 지위가 있다. 이 두요인은 생애 초기의 역경 또는 위험에서 아이를 얼마나 보호할 수 있는지 가늠하기 적합한 대리 기준이기도 하고 측정하기도 비교적쉽다. 그 밖에도 사회적 불평등에 원인을 제공하는 중요한 다른 요인들이 있다. 예컨대 지리나 거주 환경이 그러하다. 도심 지역의 납페인트 또는 납에 오염된 토양이 미친 영향을 생각해보라. 우리는 다른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이러한 주거와 지역 요인이 건강과 발달의 결과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며, 사회·경제적 지위의 사다리와도 서로 연관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예컨대 연수입이 30만 달러, 심지어 75만 달러나 되는 가족에게서 자녀의 발달 건강을 악화시킬 수 있는 스트레스 신호가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세운 이론은 이렇다. 그들은 생존을 염려하진 않지만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는 일, 자녀의 미래, 무언가 잘못될 경우 자신들이 어떤 처지가 될 것인지를 걱정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고 자녀의 미래를 보장하려고 노력하는것 자체가 걱정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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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시간은 재생될 수 없습니다. 어떤 연극에서도시간은 반복될 수 없습니다. 시간은 만회될 수 없습니다. 시간은 불가항력적입니다. 시간은 상연될 수 없습니다. 시간은 현실입니다. 현실인 시간은 연기될 수 없습니다. 시간은 연기될수 없기 때문에 현실 역시 연기될 수 없습니다. 시간을 제거한 연극만이 연극입니다. 시간이 함께 상연되는 연극은 연극이 아닙니다. 시간과 무관한 연극만이 의미를 지니지 않습니다. 시간과 무관한 연극만이 스스로 만족할 만한 연극입니다.- P51

우리는 어느 누구를 가리켜욕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청각적 이미지를 만들 뿐입니다. 여러분은 당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P58

전쟁 중에 태어나긴 했지만 자라면서 독일과는 다른 적대국의 문학과 새로운 사조의 영향을 받고 문학의 꿈을 키운 첫세대로서 47그룹보다 이십 년 늦게 문단에 등장한 한트케는
"문학이란 언어로 만들어진 것이지 그 언어로 서술된 사물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라는 주장으로 47그룹 작가들의 문학적 가치와 서술 방법들을 강력하게 거부하고 이들을 "서술불능자"로 비난하면서 주목을 끌었던 것이다. 화해될 수 없는논쟁이 아닐 수 없다. 결과적으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쓰자."
라는 47그룹의 주장은, "컴퓨터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라면 47그룹 작가보다 백과사전이 훨씬 뛰어나다."라는 한트케의 냉소적인 공격을 발단으로 1967년에 사라진다.- P72

문학 작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독자 대부분은 내용에대해 인문학적 사유를 펼치면서 감동을 주는 요인(상징)들을찾느라 깊은 상념에 잠긴다. 용케 그런 장면을 찾으면 감탄사를 외치며 칭찬을 주체하지 못하지만,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없으면, 멀뚱해져서 뭐 이런 것을 작품이라고 하냐며 혀를 차게 된다. 그러나 빌려 쓰는 언어로 문학이 만들어진다는 말에동의한다면, 낱말(기호)들에서 내용을 보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이전 시대의 수많은 작가들이 같은 낱말들로 같은 이야기들을 이미 수없이 서술해 놓았기 때문에 또다시 그것을 반복한다는 것은 로브그리예나 한트케말대로 "낡아 버렸고" "서술 불능"이며 "무미건조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P75

"내 희곡은 단어와 문장으로만 구성되었고, 중요한 것은 의미가 아니라 그 단어의 다양한 사용"-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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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 전 이미 대략적인 내용을 알고 있었다. 왠지 요즘 시대에 작가들이 앞다투어 너도 나도 퀴어문학을 한편씩 발표하는 분위기 인 듯 한데 또 대세에 편승한 장르문학같은 소설이 출간되었나 싶기도 했다. 과연 유행처럼 범람하는 퀴어 문학들 사이에서 신선함을 느낄 수 있는 지점을 찾을 수 있을까 싶은 걱정도 있었다. 동성애자와 그들의 가족이 겪는 진부한 갈등관계, 기승전결이 뻔한 커밍아웃과정의 고군분투를 다루는 소설 등등을 예상했다. 또, 김봉곤과 박상영작가(물론 이들도 신예작가이지만)에 비해 새로 접하는 김병운이라는 작가의 필력은 어떨지, 80년대 초중반의 비슷한 시기를 겪고 자라나 활동하는 작가들 사이에서 남다른 면모를 보여줄 수 있을지 기대반 걱정(??)반의 마음으로 구입을 하고 독서를 시작했다.
결과는 예상을 크게 벗어나 버렸고 다른 작가들의 퀴어소설에서는 쉽게 접근하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져버린 젊은 작가의 패기에 감동하게 되었다. 새롭게 봐달라는 동성연애의 서사도 아니었고, 역경을 파해치며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성장해 나가는 동성애자 인간승리 드라마도 아니었다. 일반 독자들이 상상 가능한 퀴어스토리가 아닌, 이미 성숙해서 앞서 나아가버린 성소수자들의 다음 이야기, 자신의 확고한 정체성을 외부로 드러내는 용기를 얻어가는 과정을 쓴 소설이었다. 간혹 몇몇 책 소개에 지난 애인이 혐오범죄인 이태원 방화사건으로 희생되어 복수심에 불타올라 커밍아웃을 결정한 것처럼 묘사되어 있지만 내가 본 소설의 주인공 공상표에게는 타인을 향한 원망과 복수심이 커밍아웃 과정에서 결정적 동기부여가 되기는 했지만 주목해야할 부분은 다른 곳에 있었다.
이 소설의 주목해야할 부분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거짓된 자신의 모습에 집착하고 보호하려는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에 염증을 느끼는 성소수자의 자기반성이다. 위장된 현실에서 자기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부정하고 서로 상처입히는 일이 반복되면서, 현실에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유약함에 대해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느껴 커밍아웃을 감행한다. 공상표의 커밍아웃은 전 애인에대한 죄책감에 보답이라도 하기 위한 커밍아웃도 아니고, 게이라는 것이 부끄럽고 수치스럽지 않다는 걸 증명하기 위함도 아닌 자기 스스로 ‘탈출구를 찾고’, ‘자신을 증오하지 않’으며, ‘떠밀린 게 아니라 딛고 일어서’기 위한, 자기 완성을 위한 것이다.

마지막 최은영작가의 추천사를 보며 눈물이 핑 돌았다. ‘한 번뿐인 삶을 살면서 우리는 왜 진짜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려는 시도만으로도 상처받아야 하는’ 것인지. 있는 대로 모습을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이 험난한 시련을 이겨내야 하는 완성의 과정이라는 것이 참 서글프다.

한때 양병진은 남들의 인정 같은 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의 사랑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자신하며 이 세상에 단둘이 고립된 것만 같은 애틋한 상황을 즐기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비밀 연애에서 비롯된 불안과 불신을 애써 못본 척하는 사이 그는 마흔이 되었다. 마흔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어딘가에 간신히 균형을 잡고 있던 저울이 돌연 현실 쪽으로 급격히 기울어지는 나이였다. 그냥 마흔이 되었을 뿐인데, 달라진 건 고작 그것 하나뿐인데, 그는 마치 주술에 걸린것처럼 안정과 확신을 원하게 됐다. 그녀의 아이들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 모두에게 관계를 인정받고 싶었고, 남들처럼보란듯이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려서 자신들에게도 미래가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P73

당신은 은성이한태 줘야 할 사랑이 너무 많잖아. 그건 주고 또 줘도 바닥나지를 않잖아. 가진 게 너무 많은 사람은 원래쉽게 떠날 수가 없거든.- P129

그냥 네 친구들만 알면 안 돼? 네가 믿을 수 있는 사람들, 너를 아껴 주는 사람들, 너를 응원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한테만 진실하면 되잖아. 그래도 되는 거잖아. 다들 그렇게 살아. 너보다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 부자인 사람들, 배우들, 가수들, 모델들, 운동선수들, 정치인들…… 다들 쉬쉬하면서 산다고, 누가 봐도 게이 같은 애들도, 게이가 아니라면 말이 안 되는 애들도 절대로 인정은 안 하잖아. 그러든지 말든지 하면서, 좋을 대로 생각하라지 하면서 그렇게 살잖아. 정 못 참겠으면 너도 티 내면서 살아.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 대신 인정만 하지 마. 공표만 하지 말라고, 그게 그렇게 힘든 일이야? 세상에 거짓말 안 하고 사는 사람이 어딨어? 가면 안 쓰고 사는 사람이 어딨어?- P136

아니, 강은성이 왜? 그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너를? 새로운 종류의 사회 환원인가? 아니면 신개념 불우 이웃 돕기?- P156

서른 해 가까이 살면서 그가 분명히 알게 된 것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아무리 밝고 긍정적인 것처럼 보이는사람도 제 몫의 어둠과 그늘이 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오랫동안 꼭꼭 숨겨 두어서 자신조차도 그 모양과 깊이를가늠할 수 없는 마음의 우물을 누군가에게 열어 보인다는 건정말이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이었다.- P170

강은성이 엄마에게 꼼짝 못 하거나 휘둘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싫은 티를 냈고, 너는 도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냐면서 경멸의 시선을 던졌다. 강은성은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는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고 한 번도 그렇지않은 적이 없었는데 그는 강은성이 갑자기 그렇게 변하기라도한 것처럼 새삼스레 실망했다.- P188

아, 맞다. 너는 내가 부끄러운 게 아니라 너 자신이 부끄러운 거지. 내가 깜빡할 뻔했네, 네가 게이라는 걸 끔찍하게도 수치스러워한다는 걸, 밤에는 나랑 할 짓 못 할 짓 다 하면서 낮에는 나는 남자를 좋아한다기보다 사람을 좋아하는 거라는개소리나 지껄여 대는 비겁한 새끼라는 걸 내가 잊고 있었네.- P236

그들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어쩜 이렇게 다들 그대로일 수 있는 건지 의아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머리 모양도 옷차림도 그때와 비슷해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명제를 온몸으로 표현한 것만 같았다. 그들은 예상대로 그날의 아웃팅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했는데, 그건 게이인 너를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영영 안보고 살 수는 없으니 그냥 묻지도 말하지도 말자는 암묵적인강요였다.- P247

용진 씨가 이 프로젝트의 의의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단순히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싶은 게 아니라고, 추모를넘어 우리에 대해 쓰고 말하고 싶은 거라고. 자꾸 쓰고 말해서 우리가 우리를 수치스러워하는 일을 그만두고 싶은 거라고, 결국 내가 문제고 내가 잘못됐고 나만 사라지면 된다고결론짓는 일을 끝내고 싶은 거라고, 그 말이 저에게 절실히 와닿았던 것 같아요. 간절히 필요했던 거 같아요. 저 또한 용진 씨처럼 그 모든 것들을 멈추고 싶었으니까요. 나를 가두고 가로막는 그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으니까요. 다행히 저는 기적적으로 그 방의 탈출구를 찾은 거예요. 그 남자는 끝내 찾지 못했지만, 저는 찾은 거예요.-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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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과 기분
김봉곤 지음 / 창비 / 2020년 5월
평점 :
품절


사랑이 색다르게 쓰여질 수 있다는 점에서 사랑의 개인적인 서사가 새로운 문학작품이 될 수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 같다. 막상 동성애자들에게는 새로울 것 없는 감정의 묘사일지도 모르지만, 소수의 느낌이 다수의 사람에게 생소할 수 있기 때문에, 다수에게 신선함을 준다면아무리 소수에겐 평범한 감정과 문장이라도 가치가 달라질 수 있으리라. 어딘가 당연하게 숨겨져 있던 것들을 수면 위로 끄집어 내는 일도 대단한 업적이다.
김봉곤은 수면 위로 끌어 올리는 자신의 모습을 ‘그런 생활’에서 솔직하고 담담하게 그려냈다.
같은 소재를 주로 다루는 박상영작가와는 다른 결을 느낄 수 있는게 박상영작가는 ‘다른 삶’을 주로 다룬다면 김봉곤작가는 ‘다른 사랑‘을 주로 다루는 느낌이다. 사랑에 초점이 맞춰 감정을 드러내기 때문에, 다른 삶보다는 색다른 사랑 이야기라 내밀하고 예민한 부분을 보여주는 것이라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고, 독자도 문학계도 더욱 더 김봉곤에게 열광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이번 소설집 이전에도 몇몇 단편이나 수상작품집에서 김봉곤 소설을 보면서 전작인 ‘여름 스피드‘에 비해 서사나 내용이 많아졌다는 느낌은 누구나 받았을 것이다. 소설을 읽는 건지 문자를 보는 건지 구분할 수 없었던 ‘여름 스피드’에 비하면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소설이 된 것 같아 대중들에게 좀 더 좋은 평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여름 스피드‘나 ‘나의 여름 사람에게‘ 등 김봉곤에게는 여름이 사랑을 체감하는 계절로 다가오는 듯 하다. 찌는 듯한 더위와 숨막히는 온도는 젊고 열정적인 사랑을 대변할 수 있는 계절이다. 타는 듯한 날씨를 연상하는 글은 아니지만 김봉곤의 표현대로 상대를 실감한다는 사랑의 미칠듯한 애정이라면 김봉곤의 소설을 여름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와 함께 늙어갈 동년배의 독자로서 김봉곤이 써내려가는 사랑의 감정들을 같이 실감해 나갈수 있어 좋은 일이다.

고요한 밤 풍경 속, 나는 오다 카즈마사의 베스트 앨범을 재생하고 눈을 감았다. 또 한번 내가 될 시간이었고, 나의 농도를 회복하기에 음악은 제법 효과적일 것이었다.- P48

나는 이제 답을 구하는 사람의 마음이 되어 그를 만나길 간절히 원했다. 그는 내게 사랑을주진 않았지만 그걸 가르쳐준 사람이기는 했으니까.-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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