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한가운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
루이제 린저 지음, 박찬일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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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시간 연락이 두절된 채 지내던 두 자매가 만나 동생을 사모했던 한 남자가 자살한 후 보낸 편지를 두고 벌어지는 며칠 간의 여정이다. 언니 마레그레트는 남편과 결혼하여 아이는 없지만 세상에 온건하게 대처하고 살아가는 신문사의 기자인 반면 동생 니나는 자유분방하게 표현하고 행동하는 성공한 작가이다. 니나를 사모했던 열 살이나 연상인 슈타인 박사는 니나를 알고난 뒤 18년을 짝사랑했지만 결국 니나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자살한 남자이다.
스웨덴으로 이민간 뒤 잠시 들렸던 호텔에서 마레그레트는 니나를 우연히 마주친다. 니나는 영국으로 이사가기 전, 마레그레트에게 할 말이 있다며 만나자고 연락을 했고, 마레그레트가 니나의 집으로 도착한 날 슈타인 박사의 소포가 배달되었다. 니나는 슈타인 박사의 사망 소식에 잠시 반응을 보였을 뿐 소포로 받은 슈타인 박사의 일기장과 편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마레그레트는 슈타인 박사의 일기를 읽기 시작하였고, 그 일기를 통해 니나의 과거를 알게된다. 슈타인 박사의 일기와 편지를 보며 놀라고, 같은 사건에 니나의 생각을 물으며 며칠동안 대화를 나누며 지낸다.
니나는 전 남편인 퍼시와 약혼 중에 다른 남자 알렉산더의 아이를 임신하고도 결국 약혼자인 퍼시와 결혼하였고, 퍼시의 아이를 임신한 중에 낙태를 결심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결국 아들을 낳았다. 퍼시와 이혼 후에는 퍼시의 새 아내인 클레레를 통해 퍼시가 비밀경찰에 붙잡혀 곧 사형에 처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그의 자살을 돕기 위해 치사량의 카페인을 감방으로 가져다 준다. 니나의 이런 굵직한 과거의 사건은 모두 슈타인 박사의 도움을 거쳐갔다. 퍼시의 아이를 지우고 싶을 때도 슈타인을 찾아가 임신 중절을 요청했으며, 퍼시의 자살을 돕는 무모한 행동을 할 때도 독약을 슈타인에게 요청하여 퍼시를 도울 수 있었다. 슈타인은 그때마다 니나를 도우며 언젠가는 니나와의 결합을 기대했지만, 변화와 모험이 필요한 니나에게 슈타인은 생각만 많고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강단이 부족한 ‘참아내기 힘든 사람’(225p.)일 뿐이었다. 슈타인의 니나에 대한 순애보는 그가 아네트 아주머니로부터 상속받고, 니나가 좋아해 언젠가 함께할 곳이라 꿈꾸던 집까지 처분할 정도로 큰 상처로 돌아온다.
니나가 가스 자살을 시도하고 위기를 넘겼을 때도 슈타인은 니나의 딸 루트를 집에서 보살피며 니나의 요양을 돕는다. 슈타인의 동생인 헬레네는 니나에게 집착하는 슈타인을 보며 니나를 경멸했고, 다른 주변의 지인들도 슈타인에게 니나를 멀리하라며 경고하지만, 그는 니나에 대한 미련의 끈을 놓지 못한다.
니나는 반나치주의자들의 망명에 협조하고 유대인들을 도와주다 내란방조죄로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슈타인은 그의 친구인 알렉산더가 니나의 딸인 루트의 친아버지임을 알게되면서 깊은 상심에 빠지기도 하다 결국 니나를 만난지 18년이 되는 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니나는 큰일이 생기면 슈타인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는 둥 그의 사랑을 불모로 사람을 착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약자에게 관대한 인물이기도 하다. 작가로 성공하기 전 신문사의 요청으로 한 과학자를 인터뷰하러 갔다 상처한 사실을 알고 연민을 느껴 동침을 하고, 반나치주의자로 위험을 감수해가며 동료들의 망명을 돕고, 학교에서는 인종 처분에 대해 반대하는 열띤 토론을 벌이다가 자퇴를 하기도 한다. 어쩌면 슈타인 박사는 의사이고 사회적 명망이 높은 사람이라는 점도 니나의 마음을 얻지 못한 이유였을 것이다.
슈타인 박사의 답답함이 소설에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니나라는 매력적인 인물 덕분에 지루하지 않고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다. 지금은 놀라울 정도는 아니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에 니나라는 캐릭터의 파급력이 상당했을 거라 짐작이 된다. 특히 슈타인과 마레그레트의 시각에서는 읽히지 않는 니나의 정의감이 인상적이었다.

언니는 그 사람과……… 니나는 망설였다. 그러다가 재빨리 말을 마쳤다. 행복했어? 휴, 니나. 행복이 뭐니? 우리는 평화롭게사는 거야. - P36

니나, 나는 말했다. 알다시피 나는 이제 마흔아홉 살이야.
오십이 다 된 여자는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생각해야 해. 그러나 다 지나간 일이야. 대개 적어도 이 나이면 지나갔다는 것이기쁠 뿐이야. 나 같은 사람들은 지나간 것들을 눈물, 히스테리, 갈등,화해,끝없는 오해, 몇 번의 아름다운 밤, 오랜 기다림 등이 서로 막 뒤섞여 있는 것으로 추억하지. - P36

우울에 관해서 생각하고 있었어. 니나는 천천히 말했다. 온갖 아름다움이란 것이 일시적이고 다만 얼마 동안 빌려온 것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 그리고 우리가 인간들 틈이나 나무와 극장과 신문 사이에 있으면서도 마치 차가운 달 표면에 앉아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독하다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은 누구나다 우울하지.
니나!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니? 네가 삶을 기쁘게 사는 줄알았는데. 왜 삶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야? 너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잖아?
그랬지. 니나는 대답했다. 우울은 인식의 시초일 뿐이야.
갑자기 니나는 웃었다. 무슨 현명한 말이라도 하는 것 같군.
물론 나는 기쁘게 살아.
그런데 이 세상에는 거짓 우울도 있는 법이야. 니나는 계속했다. 언니는 사람들의 눈을 보아야만 해. 많은 사람들에게 우울은 겉으로만 그럴 뿐이고 어떤 의도 내지 센티멘털리즘의 표시일 뿐이야. 정말로 우울이 깃들인 눈에는 활기, 집중, 분주함 같은 것들이 있지. 그러나 이것은 무대의 막일 뿐이야. - P65

내 생각에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계속해서 생기에 차 있을 때야. 그리고 마치 미친자가 자기의 고정 관념에 몰두하듯이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을 때야. 나는 인생에서 정말 불행했어. - P68

웃지 마. 니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의욕이 없어지면 늙기 시작하는 거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매일 아침 무슨 특별한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어. 나는 마치 아침마다 문간에 서서 몸을 쭉 늘이고 바람 속에 코를 쳐든채 사냥에 대한 욕심으로 몸을 부르르 떠는 사냥개와도 같았어.
그런데 지금, 지금 나에게는 놀랄 일이 없어. 그리고 인생은 끝없이 펼쳐져 있는 풀밭이 아니라, 그 속에서 내가 있는 힘을 다짜내야 하는 네 개의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일 뿐이야. - P69

언니는 알아? 니나는 계속 말했다. 윤리가 아무 소용이 없고, 양심조차도 아무 소용없는 상황이있다는 것을. 갑자기 법도 안중에 없어져. 어디론가 내던져진 거야. 누구에게 내던져진거지? 모르겠어. - P70

자기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수백 개의 서로 다른 자아가 보여. 어느 것도 진정한 자아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수백 개의 자아를다 합친 것이 진정한 자아인 것 같기도 하고, 모든 게 미정이야.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어. 사실은 이 여러 자아 가운데 하나의 자아만을, 미리 정해져 있는 특정한 하나의자아만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지만. - P78

우리는 영웅이 아니야. 가끔 그럴 뿐이야. 우리 모두는 약간은 비겁하고 계산적이고 이기적이지. 위대함과는 거리가 멀어. 내가 그리고 싶은 게 바로 이거야. 우리는착하면서 동시에 악하고, 영웅적이면서 비겁하고, 인색하면서관대하다는 것, 이 모든 것은 밀접하게 서로 붙어 있다는 것, 그리고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한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행위를 하도록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아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걸 말야.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도 그것을 간단하게 만들려는게 나는 싫어. - P151

이런 노인들과 교제하다 보면 모든 인간에게 염증을 느끼게 돼요. 팔십 세가 돼서까지 악의를 품고 있고, 고집불통이며, 시기하고, 이기적이며, 끝없이 탐욕스럽다면 인생이란 뭐죠? 인생에 치인, 또 다른 사람들은 보람이 없었다고 말해요. 나는 나이가 들면 좋아지리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늙는 것에 대해 두려워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러나 내가 그렇게 된다면? 그러면 나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인가요? - P171

니나의 편이 되어서 싸운 두세 명의 학생들은 완치될 수 없는 정신병자가 아직 인간인지 이미 인간이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불치라는 개념이 매우 모호하며, 오진의 가능성도 있고, 치료 방법이 개발될 수도 있으며, 여태까지 불치로 간주되었던 질병도 고치게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또 니나가 정신병과 비정상을 구별할 수 없으며, 불치의 병자이면서도 사회에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경우도 있으나, 반면에 건강하지만 반사회적인 사람도 있다는 것을상기시켰다고 말했다. - P198

너는 많은 것을 지불하고 많은 것을 얻고, 나는 거의 아무것도 지불하지않고 거의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공평하지 않아? - P209

모든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 가치를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희생자들을 밟고 선 자들은 가치가 있는 자들인가요? 그들은 생물학적으로 건강할지 몰라요.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이 가치가 있는 사람이란 말인가요? 건강한 육체에……… 그래요. 나도 알아요. 그러나 나는 다르게 생각해요. 절대적인 확신을 갖고 가치와 무가치를 판별하려고 하는 자들은 대체 누구죠? 그들은 미쳤어요.
그들은 마치 병을 박멸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해요. 항상 병은존재하게 마련인데. 건강과 병은 항상 서로 균형을 유지하고있는데. 의학의 생물학적인 관점은 틀렸어요. 근본적으로 틀렸어요. - P213

나도 오래전부터 남녀간에는 정절이란 없으며 다만 습관적으로 함께 사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어떤 난간도 안전하지 않으며, 어떤 계단도 견고하지 못하고, 어떤 다리도 어떤 도로도 항구적이지 못하며, 모든 것이 안개나썩은 나무로 만들어져서 어디로 가든 추락할 뿐이라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좋지 않았다. - P234

니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다시는 사랑할수 없다는 것, 그것이 중요해. - P239

이런 성격을 니나는 어디에서 획득한 것일까? 대신 그녀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나는 그것을 찾을 수 없었다. 니나는 차갑지 않았으며, 메마르지 않았다. 냉혹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열정이 있었으며 예민한 감각을 갖고있었다. 이런 여러 정신적 자세를 얻기까지 니나는 어떤 대가를치렀을까? 이제 나는 니나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토록 강력한힘과 용기를 요구한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녀 앞에 있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 P255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으며 아네트 아주머니가 말한 것처럼 <인생에 대한 희망>이었다고 고백해야만 했다. 니나를 잃은 고통은장난감을 잃은 고통과 다름없었다. - P277

아마 슈타인은 자기가 나를 구했다고 생각하고 있을걸. 그러나 누군가의 죽음을 막은 것이 곧 그를 살린 것이라고 볼 수는 없어. - P305

젊은이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군. 행동은 너무 조금하는 대신. - P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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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성이 답이다 - 진화 심리학자의 한국 사회 보고서
전중환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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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심리학은 재밌다. 특히 인간 본성을 연구하는 일이 본성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건 아니라는 구절이 기억에 남는다.

다만 저자가 586 대깨대깨해서 좀 짜증이 난다.
본인 책 첫문장에 굳이 박근혜를 언급할 필요까지 있었을까.
대깨 집단 사이에서 높은 위치에 올라서고 싶었을테니 진화심리학 관점에서 너그러이 이해해 본다.


많은 문화권에서 청결한 신체를 도덕적, 영적인 순결과 동일시하며, 불결한 육체를 도덕적 타락과 동일시한다. - P51

여기서 감정이 지휘하는 측면 중에는 표정, 심장 박동처럼생리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주의, 추론, 기억처럼 인지적인 측면도 있음을 주목하길 바란다. - P63

수백만 년 동안 아프리카 초원에서 수렵 채집 생활을 했던우리 인간의 마음은 당시 조상의 생존과 번식을 좌우했던 문제들만 쉽고 능숙하게 처리하게끔 진화하였다. - P67

놀랍게도, 초콜릿은 달지 않다! 우리가 경험하는 그 생생하고 풍부한 ‘달콤함‘의 감각은 모두 우리의 두뇌가 만들어 낸 허상이다. 초콜릿은 본질적으로 달지 않다.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과일이나 꿀처럼 높은 에너지원이 되는 음식물을 선호하는 편이 번식에 유리했기 때문에, 우리는 당도가 높은 음식을 ‘달콤하다‘고 느끼게끔 진화한 것뿐이다. - P71

초정상 자극은 동물들의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설명하는 데만 유용한 건 아니다. 수백만 년 동안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수렵 채집 생활을 하다 난데없이 현대 산업 사회에 내던져진 우리인간은 온통 초정상 자극에 둘러싸여 있다. 어떤 과일보다 더달콤한 초콜릿, 어떤 동네 청년보다 더 매력적인 연예인, 어떤 실화보다 더 극적인 영화는 종종 우리로 하여금 잘못된, 즉 생존과 번식에 해로운 선택을 하게 한다. - P76

왜 젊은 남성 중에서 테러 조직에 가담하는 자가 나오는가?
인류의 진화 역사에 그 해답이 있다. 어느 사회에서나, 자기가속한 동아리 내에서 인정을 받으려 애를 더 쓰는 쪽은 여성이아니라 남성이다. 아득한 조상 남성이 집단 내에서 차지한 지위는 그가 장차 얻게 될 자식 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자들은 위신을 높일 수만 있다면 무모하고 위험한 짓에 과감히 뛰어드는 경향이 있다. 친구와 누가 오줌을 더 멀리 싸는지 겨룬다. 길 가다가 눈이 마주쳤다며 칼부림을 한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각자의 연봉이나 지능을 놓고 허세를 부린다. - P92

여러 나라의 살인율이 왜 이토록 차이가 나는지 조사한 다른연구들도 국민 총생산이나 실업률, 근대화의 정도 등등의 다른변수들보다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변수가 살인율을 가장 잘 설명한다고 결론 내렸다. 요컨대, 나라가 얼마나 부유한지는 별로중요치 않다. 국민들 사이에 부가 얼마나 잘 분배되어 있는가가그 나라의 범죄 발생률, 기대수명, 신체 및 정신 건강, 행복 등에 큰 영향을 끼친다. - P98

청소년기는 짝짓기의 성패가 결정되는 일생일대의 갈림길임을 고려하면, 왜 십대들이 담배, 오토바이 폭주, 범죄 같은 무모하고 위험한 행동에 뛰어드는지 알 수 있다. 특히 십대 남성들사이에서 높은 위치에 올라서려면, 내가 정말로 힘과 대담함, 배짱을 지니고 있음을 친구들에게 알려야 한다. 덩치 큰 농구 선수에게 겁 없이 대드는 것처럼, 큰 비용을 치러야 해서 아무나따라 할 수 없는 ‘값비싼‘ 신호를 보내야만 비로소 친구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다. 최근의 연구들은 십대 남성들이 또래가 보는 앞에서는 더 난폭하게 운전하거나, 약물에 더 탐닉하는 경향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 P104

더 많은 사람이 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게 된 것이 공감과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책은 타인의 삶을 경험하게 해 주기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누군가 이렇게 느끼고 생각하는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일 때, 나는 그 사람이 서 있는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 P110

하지만 적어도 인권 유린이 일상사였던 고대나 중세에 비하면 18세기 후반에 들어서 커다란 진보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진전이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민을 느끼는 감성적인 측면, 그리고 나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일반적인 행동 원리를 남들에게만 강요하는 것은 모순임을 파악하는 이성적인 측면의 두갈래에서 이루어졌다는 핑커의 통찰은 우리 사회에도 적지 않은 울림을 준다. - P114

복수심이 상대의 선제공격을 미리 억제하기 위해 대단히 소모적으로, 때론 자신까지 파멸로 이끌게끔 진화했다는 이 설명은 진화 게임 이론가들이 행한 수많은 컴퓨터시뮬레이션 결과로 뒷받침되었다. - P123

학교 폭력은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한 적응이다. 다른 영장류의 새끼들처럼, 아이들은 또래 집단 내에서 자신의 힘, 지능, 운동 능력, 용감함 등을 친구들에게 과시함으로써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자 한다. 우열 순위의 사다리를 오르기 위해, 어떤 아이들은 자신보다 명백히 약한 친구를 골라서 매일 되풀이해서 괴롭히는 방안을 택한다. 학교 폭력은 가해 학생이 피해 학생을 끈덕지게 괴롭힐 만큼 강하고 억센 사람임을 널리 광고하여 결국 또래 집단내에서 가해 학생의 지위를 높여 주는 기능을 한다. - P128

실험 결과는 사뭇 놀라웠다. 객관적인 제삼자의 기억에 비하여, 가해자와 피해자의 시점에서 사건을 돌아본 사람들은 모두자신에게 유리한 부분은 상세히 나열하고 불리한 부분은 줄이거나 아예 생략하는 식으로 사건을 왜곡하여 기억했다. 악행이일어났을 때 가해자와 피해자는 모두 자신의 너그러움과 믿음직함을 다른 이들에게 열심히 광고하여 평판을 높이게끔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하였다. 진실은 가해자의 관점에도, 피해자의관점에도 없다. 진실은 두 관점 사이 어딘가에 있다. - P133

한마디로, 착한 일은 남들이 알아 줘야 제 맛이다. - P164

사람들은 자기가 손해를 보는 선택은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타적인소비를 할 만큼 자신이 착한 사람임을 주변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광고할 수 있다면, 기꺼이 나중에 남들로부터 도움 받을가능성을 높이고자 ‘착한‘ 제품을 구매할 것이다. - P175

인류학자리처드 슈베더(Richard Shweder)는 전 세계의 도덕 체계를 두루살핀 끝에 도덕은 세가지 빛깔로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도덕에는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중시하는 차원뿐만 아니라, 공동체의통합과 질서를 중시하는 차원, 그리고 영혼의 깨끗함과 신성을중시하는 차원도 있다는 것이다. 상사에게 꼬박꼬박 말대꾸하는 부하 직원이나 축구 한일전에서 일본 대표팀을 응원하는 한국 사람을 우리가 비도덕적이라 여기는 까닭은 그러한 행동이공동체의 통합을 흔들기 때문이다. - P183

우리의 조상 남성도 자신과 결혼한 여성이 낳은 친자식들에게는 아버지로서 상당히 많이 투자했다. 그러나 남성의 필수 투자량은 여성의 그것보다 매우 적었다. 그저 한 번의 성관계면 충분했다. 오늘 처음 만난 여성을 임신시킨 뒤 바로 헤어졌는데 그아이가 무사히 어른으로 자랐다면, 조상 남성으로선 극히 적은비용을 치르고서 번식에 성공한 셈이다. 이처럼 저비용으로 번식에 성공할 기회는 여성이 아니라 남성에게만 열려 있었기 때문에, 자연 선택은 되도록 많은 상대와 일시적 성관계를 맺으려는 심리를 남성에게 장착시켰을 것이다. - P219

이제 어떤 여성의 눈웃음이 그냥 친절인지 성적인 신호인지추론해야 하는 남성을 생각해 보자. 두 가지 오류가 가능하다.
성적 의도가 상대방에게 실제로는 없는데 있을 거라고 막무가내로 과대평가하는 오류, 그리고 성적 의도가 실제로 있는데도없을 거라고 소심하게 과소평가하는 오류이다. 소심하게 추론하는 바람에 외간 여성과의 성관계 기회를 놓치는 일은 우리의 조상 남성들에게 진화적으로 엄청난 재앙이었다. 따라서 남성은비교적 피해가 덜한 선택지인, 상대의 성적 의도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오류를 잘 저지르게끔 진화하였다. -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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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양형 이유 - 책망과 옹호, 유죄와 무죄 사이에 서 있는 한 판사의 기록
박주영 지음 / 김영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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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 최소한의 도덕이라는데 이건 좀 도덕을 숭상하는 느낌이고, 내가 느낀 법을 표현하자면 가장 ‘하급의 도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법이 약자를 보호하고 정의를 실현할 거라는 미신이 일반인들을 재판 결과에 분노하고 허탈하게 만드는 것 아닐까.

내가 이런 생각에 머물러서 그런지 저자는 좀 사랑이 넘치고 지나치게 감수성이 풍만한 판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 소중한 것은 그 자체로 숭고하고 고결하기때문이 아니다. 사랑은 실용적이어서 중요하다. 사랑은 무관심과 질시와 모욕과 폭력을 없애는 백신이나 해독제 같은 것이다. 증오가 왱왜거리며 삶을 위태롭게 할 때 무엇보다 사랑이 필요하지만, 그들 사랑은 이미 바닥나버렸다. 사랑은 폭력으로 대체되었다. 폭력만이 무너진 가장의 위신을 세우고 가정의 질서를 유지한다고 믿는 아버지는 밥상을 뒤엎다가 급기야 망치를 들어 아내와 딸을 때리고 칼로그들의 얼굴을 그었다. 장르는 극적으로 바뀌었다. 아름다운 동화는잔혹동화가 되고, 어느새 하드보일드가 되었다. - P22

상대가 아무리 숱한 악행을 저질러도 그 사람이 나의 삶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경우, 쉽게 포기하고 용서한다. 평온한 삶을 지속하고 싶은 관성은 이성이라는 브레이크를 마모시키고 무력화한다. 상처를 얼기설기 봉합하고 활시위처럼 재빨리 일상으로 되돌아오지만, 그 복귀의 탄성에날아간 화살은 각자의 가슴 깊숙이 박히기 마련이다. - P24

두 번째 사건은 죄질이나 B의 범행 전후 정황을 고려해보니 양형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소아마비에 가벼운 지적장애까지가진 채 가족과 세상에서 소외돼 힘겹게 살아온 피해자에게 유일하게 곁을 내어준 B를 무겁게 벌하는 것이 과연 피해자를 위한 최선의조치인지 고민됐다. B로부터 겪을지 알 수 없는 미래의 신체나 생명의 위협보다, B의 부재로 지금 당장 겪을 수밖에 없는 사회적 소외와외로움이 피해자에게는 더 감당하기 어려운 건 아닌지, 신산스러운삶을 근근이 이어가는 피해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를 가정폭력으로부터 구호하고, 사회의 구성원으로 품어줄 수 있을 만큼 사회가 성숙했는지에 대한 의구심 때문에 고민을 거듭했다. - P25

"나는 처음으로 이해했다. 재판은 진실을밝히는 곳이 아니다. 재판은 모아들인 증거를 갖고 피고인의 유무죄를 임의로 판단하는 장소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유죄가 되었다. 그것이 재판소의 판단이다. 그래도, 그래도 나는 하지 않았다"고 절규하는 스물여섯 가네코 텟페이(영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가 있을 수도있다. 한 사람의 무고한 범인을 만들면 안 된다는 법은 언제나유효하지만, 판사는 한 사람의 억울한 피해자를 내버려둬서도 안 된다. - P33

법정은 선악의 공론장이 아니다. 선악은 양형에 다소참고될 뿐이다. - P38

피해자들이 아프게 지적하듯, 형사재판절차는 기본적으로 피고인의 권리 보호를 위해 디자인된 것이다. 즉흥적이고 흉포한 절대권력으로부터 시민의 자유와 생명을 보장하기 위해 수많은 이가 피 흘려 쟁취한 투쟁의 결과물이다. 근대 형사재판절차의 목표와 지향점은 전혀 부당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지켜져야 할 가치다. 누구나 형사피고인이 될 수 있고, 형벌권을 발동한 국가에 맞선 한 개인의 인권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피고인의 절차적 권리가 무너진곳은 야만과 문명의 경계가 사라진 곳이다. - P40

오랜 시간 법정에서 각양각색의 탐욕을 관찰하다 보니 탐욕의속성을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 법정에서 바라본 탐욕은 버라이어티하고 전방위적이며, 디테일하고 치밀하다. 탐욕은 포기를 모르고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며, 대부분 눈매가 선하다. 탐욕은 위선적이고게걸스럽다. 백무산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놀이동산 대기줄을 길게 하고 급행 티켓을 팔아먹고, 포경을 금지하고 고래고기를팔아먹고, 유전무죄를 만들어놓고 전관예우를 팔아먹고, 전관예우를만들어놓고 현직을 팔아먹고, 법을 만들어놓고 탈법을 팔아먹는, 무한 탐욕의 시대에 살고 있다(<주인님이 다녀가셨다>, <그 모든 가장자리>, 창비,2012) - P54

그 영상에는 더 이상 남성도, 여성도, 성전환자도 없었다. 그저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밥벌이가 힘겨운 고단한인생들이 있을 뿐이었다. 혐오는 대부분 관념에 정주한다. 혐오의 대상을 관찰하고 그들의 삶 속으로 조금만 들어가보면 혐오가 얼마나터무니없는 편견에 근거한 것인지 금방 깨닫게 된다. - P72

강만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다. 산재사건에서는 형벌도낮은 곳으로만 흐른다. 기업이 크면 클수록 그 기업의 최고책임자에게까지 산재사고의 책임을 묻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정말로 고래는 빠져나가고 피라미만 걸리는 이상한 그물이다. 그 그물을 들고 있자니 피라미 보기가 참 민망했다. - P93

이 사건에서 보는 것처럼 편견은 진영을 만들고, 진영 속에서 강화되어 차별과 혐오를 낳는다. 집단 혐오는 사적 혐오를 정당화하고, 그 집단을 혐오하는 다른 집단을 만들어낸다. - P103

연민으로 내민 손은 이처럼 작은 계기만 있어도 즉시 회수된다.
수전 손택의 말처럼,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까지 증명해주는 윤리적 알리바이에 불과하다(<타인의 고통>, 이후,2004). 밥차나 노숙인 쉼터나 매달 내는 후원금은 동정이든 연민이든어떤 이름으로도 시작할 수 있고, 즉흥적인 시도여도 소중하다. 그러나 법의 영역에서 동정이나 연민은 위험하다. 인권은 시혜가 아니기때문이다. 소수자에 대한 법적 보호를 시혜라고 보면, 그 시선은 언제 철회해도 무방한 것이 된다. - P107

법은 표적 항암제가 아니다. 법은 고전적 수술법이고, 판사는 메스를 든 외과의다. 아무리 숙련된 판사라도 핀포인트로 암세포만 골라서 잘라낼 수는 없다. 법은 개개인에게 맞출 수 없기 때문이다. 소수자가 밉다고, 흉하다고, 거슬린다고, 사회나 국가에 아무런 도움이안 된다고 도려내면 건강한 조직까지 뭉텅 잘려나간다. 우리는 모두어떤 기준에서건 소수자고, 어떤 이유에서건 사회의 암적인 존재일 수 있다. 법으로 소수자를 제거한다는 건 어떤 기준으로 잘라내느냐, 누가 집도하느냐에 따라 잘못하면 내가 잘려나갈 수도 있다는 걸 의미한다. - P113

당시 재판장은 "내 기억은 ‘내가 그것을 했다‘고 한다. 내 자존심은 ‘내가 그것을 했을 리가없다‘고 말하며 요지부동이다. 결국 기억이 자존심에 굴복한다"는니체의 말을 인용하며, 그의 심리상태를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로 설명했다. 피고인에 대한 일종의 배려였다. - P168

알베르 카뮈는 《이방인》(1980)에서 "생의 저녁에 이르면 얼마나가졌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놓고 심판받을 것이다"라고 했지만, 생의 어느 지점에 서 있든 사랑받고 사랑한 기억보다 더의미 있는 것이 또 있을까? - P173

과연 무엇이 바르고 곧은 것인가?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선한본성‘이라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에게 마땅히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을 주는 것‘이라 했고, 벤담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 했고, 존 스튜어트 밀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라 했다. 칸트는 ‘도덕적인 사람이행복해지는 것‘이라 했고, 존 롤스는 ‘모든 시민에게 기본적 자유를평등하게 주되, 사회적·경제적으로 불평등이 있을 때는 가장 어려운 사람에게 가장 많은 이익을 주는 것‘이라 했고, 마이클 샌델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라 했고, 로널드 드워킨은 ‘모든 사람이 잘 살 수 living well 있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정의론을 깊이 들여다본 바 없고, 주마간산으로 읽은 정의론이라 오독일가능성이 다분하지만, 이론도 대충 알았다 치고 사례로 바로 넘어가보자.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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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에센셜 버지니아 울프 (무선 보급판) 디 에센셜 에디션 2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 민음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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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유명하니까, 여성주의를 옹호하려면 버지니아 울프, 시몬 드 보부아르, 수전 손택 정도는 읽고 언급할 줄 알아야 하니까 반드시 읽어봐야 하겠지만 사실 지금에 와서는 큰 줄기,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과 매년 500파운드의 연금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는 것만 요약해서 들어도 될 것 같다. (사실 이런 조건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남성이 아니라 권력있는 남성이 세상을 지배했으니. 보편적 여성주의가 아닌, 소수의 권력을 가진 여성이 출현해야 하는 시대였으니, 지금 이 시점에선 좀 더 보편적인 여성주의가, 다양한 성 개념의 지평을 열어주는 책 추천이 우선 되어야 할 것같다.

그래도 이젠 읽어는 봤다… 자기만의 방.

의문들이 벌떼처럼 무수히 일어났으니까요. 왜 남자들은포도주를 마시고 여자들은 물을 마시는가? 무슨 이유로남성은 그렇게 부유하고 여성은 그다지도 가난한가?
가난은 픽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예술 작품을창조하는 데 어떤 조건들이 필요한가? 수많은 의문들이동시에 쏟아져 나왔지요. 하지만 필요한 것은 질문이아니라 답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들에 대한 답은, 논쟁과혼란스러운 육체를 초월하여 자신들의 추론과 연구의결과를 책으로 발간한 박학하고 공평무사한 사람들의견해를 참조함으로써 얻을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은 바로대영 박물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대영박물관의 서가에서 진실을 찾을 수 없다면 진실은 과연어디 있겠느냐고 나는 공책과 연필을 집으며 자문했지요. - P118

나는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책들을 살펴보며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이 책들은 모두 내 목적에무가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책들이 인간적으로는교훈과 흥미와 권태와 피지 섬 주민들의 관습에 대한 이유기이한 사실들로 가득 차 있을지 모르지만 과학적으로는무가치했습니다. 그것들은 진실의 흰빛이 아니라 감정의붉은빛으로 쓰였으니까요. 그러므로 그것들은 중앙탁자로 되돌아가서 거대한 벌집 속 각각의 방으로반송되어야 합니다. 내가 오전 내내 일하면서 얻어 낸것은 분노라는 하나의 사실이었지요. 그 교수님들(나는그들을 총괄하여 이렇게 말합니다.)은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책을 돌려주고 나서 왜냐고 자문했지요. 주랑 아래비둘기들과 선사 시대의 카누 사이에 서서 무엇때문일까 반복해 물었습니다. 왜 그들은 화가 났을까? - P130

신속하게 획득할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들이 자신보다열등하다고 생각함으로써 가능하겠지요. 자기 자신에게다른 사람보다 천성적으로 우월한 점(재산이거나 신분, 곧은 콧날이거나 롬니가 그린 조부의 초상화일 수도 있겠지요. 인간의 상상력이 빚어낸 애처로운 책략에는 끝이 없으니까요.)이있다고 느낌으로써 가능할 겁니다. 그러므로 통치해야 하고 정복해야 할 가장에게 있어서 다수의 사람들, 사실인류의 절반이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느끼는 것은 막대한 중요성을 가질 겁니다. 그것이 실상 그의 권력의 중요한 원천 중 하나겠지요. - P134

그 당시의 쓰라림을기억하건대, 고정된 수입이 사람의 기질을 엄청나게변화시킨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고요. 이세상의 어떤 무력도 나에게서 500파운드를 빼앗을 수없습니다. 음식과 집, 의복은 이제 영원히 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력과 노동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증오심과쓰라림도 끝나게 됩니다. 나는 누구도 미워할 필요가없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해를 끼칠 수 없으니까요.
또 누구에게도 아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나에게줄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하여 나는 스스로인류의 다른 절반에 대해 아주 미세하나마 새로운태도를 취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계급이나성을 뭉뚱그려서 비난하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었지요. - P139

그들, 가장들과 교수님들 역시 극복해야할 끝없는 어려움과 끔찍한 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교육은 어떤 점에서는 내가 받은 교육만큼이나잘못된 것이었지요. 그것은 그들에게서 그만큼 큰 결함을낳았습니다. 그들이 돈과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끊임없이 간을 찢어 내고허파를 잡아채려는 독수리와 매를 가슴속에 담아 두는희생을 치르고서야 가능했지요. 소유에 대한 충동과획득에 대한 격정은 그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의 땅과재산을 끝없이 탐내고, 개척지를 만들어 깃발을 세우며,
전함과 독가스를 만들고, 그들 자신의 생명과 자녀들의생명을 바치도록 몰아갔습니다. - P140

진정 숙모님의 유산은내게 하늘의 베일을 벗겨 주었고, 밀턴이 우리에게 영원히숭배하라고 천거한 신사의 크고 위압적인 모습 대신 훤히트인 하늘을 보여 주었습니다. - P141

여성이 보호받는 성이었을 때 관찰된 사실에근거를 둔 모든 가설들은 사라질 것입니다. - P143

여기서 다시 한 번 우리는여성 운동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온 아주 흥미롭고도불명료한 남성의 복합적인 심리에 근접하게 됩니다. 그것은여성이 열등하기보다는 남성이 우월하기를 바라는 뿌리깊은 욕망으로서, 남성을 예술의 전면뿐 아니라 도처에 서있게 함으로써 여성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가로막도록합니다. 심지어 자신에게 위험 부담이 극히 적고, 청원자가겸손하며 헌신적일 때라도 그렇지요. - P172

소설가에게 있어서 성실성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은 작가가 독자에게부여하는, 이것이 진실이라는 확신입니다. - P205

세계의 광대함과 다양함을 고려해 볼 때 두 가지 성으로도너무나 불충분할진대, 하나의 성만 가지고 어떻게 해나갈 수 있겠습니까? 교육은 유사성보다는 차이점을이끌어 내고 강화해야 하지 않을까요? 현 상태에서 우리는너무나 유사합니다. - P234

서투르게 영혼의 윤곽을 그려 보았지요. 두 종류의 힘,
즉 남성적인 힘과 여성적인 힘이 우리 인간의 내면세계를관장하고 있습니다. 남성의 두뇌에서는 남성적인 것이여성적인 것보다 우세하고, 여성의 두뇌에서는 여성적인것이 남성적인 것보다 우세합니다. 그 두 가지가 함께조화를 이루고 정신적으로 협력할 때 우리는 정상적이고편안한 상태가 됩니다. 남성이라 하더라도 자기 두뇌의여성적인 부분을 사용해야 합니다. 여성도 또한 자기내면의 남성적인 부분과 교섭을 가져야 하지요. 콜리지가위대한 마음이란 양성적이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의 의미는아마 이런 것이었을 겁니다. 이러한 융화가 일어날 때라야마음은 온전히 풍부해지고 제 기능을 모두 사용하게됩니다. 아마도 순전히 남성적인 마음은 순전히 여성적인마음과 마찬가지로 창조력을 잃을 것입니다. - P254

희극은 인간의 결점을 표현하고 비극은 인간을실제보다 위대하게 그린다는 오랜 관념이 있다. 인간을진실하게 그려 내려면 그 둘의 중간을 취해야 할 것 같다.
그러면 희극이 되기에는 진지하고 비극이 되기에는불완전한 인간을 그려 내게 되는데 이것을 우리는해학이라 부를 수 있다. - P339

우선 학식을 사랑하는 사람과 독서를 사랑하는사람을 혼동하는 오랜 착각을 정리하고 그 둘은 전혀관련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기로 하자. 학식 있는 사람은주로 앉아서 홀로 집중하는 열성가이고, 책을 통해 자신이갈망하는 특정한 진실의 알갱이를 발견하고자 한다.
만일 그가 독서에 대한 열정에 압도된다면, 그가 거둘수확은 줄어들고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것이다. 반면에독서가는 처음부터 학식에 대한 열망을 억제해야 한다.
지식이 어쩔 수 없이 달라붙더라도, 지식을 추구하고체계적으로 독서하며 전문가나 권위자가 되려 한다면사심 없는 순수한 독서에 대한 인간적 열정이라고 여겨도좋은 것이 파괴되기 십상이다. - P350

마지막으로 질병이 문학 소재로부적합한 이유 가운데 언어의 결핍이 있다. 햄릿의 생각과리어 왕의 비극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는 영어가 나무랄데 없지만 오한이나 두통을 묘사할 단어는 부족하다.
영어는 한쪽으로 발달해 왔다. 한낱 여학생이라도사랑에 빠지면 셰익스피어나 존 던, 키츠를 이용해서자기 마음을 표현한다. 그러나 병에 걸린 사람이 머릿속통증을 의사에게 설명하려면 당장 언어가 고갈되어버린다. 그가 사용할 수 있도록 마련된 표현이 없다. 그는스스로 새로운 말을 만들어야 한다. - P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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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김병운 지음 / 민음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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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책을 보면서 작가의, 아니 어느 누군가의 일기를 훔쳐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보안책방에서 했던 ‘아아공필‘ 북토크에 참석했는데, 당시의 경험까지 책에 나와 있는 것을 보니 이 사람의 진솔한 편지를 받은 기분이랄까.

독특한 경험을 서술하는데 느껴지는 보편성은 결국 세상에 다를 게 없다는, 차별이 차이를 만들 뿐이라는 것을 다시 새겨본다.

나는 성소수자를 연민하고동정하는 감독의 시혜적인 시선과 선민의식이 거북했고, 내가 끝내 지켜야 하는 것이 퀴어로서의 자존심인지 아니면 배우로서의 성장 기회인지 알 수가 없어 갈팡질팡했다. - P11

어째서 당신이 우리의 스피커가 되어야 하는가. 잘알지도 못하고 잘 알 수도 없으면서 당신이 게이에 대해 말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설마 다음에는 트랜스젠더인가. 다다음에는 퀘스처닝에 인터섹스, 무성애자이고?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기만 하면, 선의와 정치적 신념을 담보하기만 하면 당신의 발언은 정당해지는가. 당신이 성소수자를 도구화해서 재생산한 편견에 대해서는 누가 책임지는가. - P19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으나 그게 그렇게 간단한게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분은 유일신 같은 감독님이시고 나는 발에 채는 일개 배우일 뿐이라고, 그런 하극상은 나 같은 무명에게는 허락되지 않으며이건 예의나 도의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 P21

남들과는 다른 욕망을 지녔다는 이유로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신체에수치심과 모멸감을 적립해 온 사람이라면, 반복되는혼란과 부정 속에서도 기어코 규범을 거스르는 쾌락쪽으로 향하는 자신에게 진저리쳐 본 사람이라면, 제아무리 벽장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한들 이 소설에서 자신의 어떤 시절을 겹쳐 보지 않을 수는 없을 테니까. - P114

그리고 지금 내게 주어진 이지면이 어떤 성소수자들의 희생으로 비로소 가능해진 미래라고 생각하는 게 결코 무리는 아니리라 확신하면서. - P123

함부로 판단하지 말자고 결심했으면서, 섣불리 연민하거나 동정하지 말자고 다짐했으면서, 나는 어느새 그걸 또 잊고 있었다. - P209

그러니까 상황은 뻔했다. 이쪽은 저쪽에 끌리나 저쪽은 이쪽에 끌리지 않는 것. 이쪽은 갈급하나 저쪽은 아쉬울 게 없는 것. 나는 여러 번에 걸친 곁눈질로두 사람을 유심히 살폈고, 물감이 번진 듯한 요란한무늬의 남방을 입고 있는 내 쪽의 남자보다는 집에서잘 때나 주워 입을 것 같은 흰색 티셔츠에 밤톨 같은머리를 하고 있는 건너편의 남자가 훨씬 더 일틱해 보인다는 것을 확인했다. 건너편의 남자는 시종일관 느긋하고 편안해 보였는데, 아무래도 자신의 남성성을부풀리거나 연출할 필요가 없어 보이는 외형적 조건이 남자를 이따금 미소 지으며 대답만 해도 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듯했다. 그래 봤자 게이이므로그건 정말이지 같잖은 기득권이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 역시 그런 사람에 끌렸고 그런 사람으로 비치길 원했으며 그게 잘 안 돼서 힘들었다.
생각해 보면 그 당시 나는 누군가의 마음에 들고자 나를 가장하는 일에 완전히 지쳐있었다. 남자다운 분 선호합니다, 여성스러운 분 죄송합니다, 운동하는 분이 좋습니다, 끼순이는 사양합니다라고 적혀있는 데이팅앱 프로필 문구를 볼 때마다 다들 참 양심도 없다고 혀를 차면서도 자꾸만 내 모습을 점검하게 됐고, 어쩌다 연이 닿아 누군가를 만날 때도 진짜내 모습을 들켰다가는 사랑받지 못할 거라는 불안에시달렸다. 게이들이 선호하는 매력 자본이 부족한 사람. 선섹스 후연애라는 이쪽 세계의 작동방식에 부적합한 사람. 너무 많은 거절과 너무 잦은 낙담에 어느덧 자존감이 바닥나 버린 사람. 그게 나였다.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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