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나와 마음이 잘 맞았다. 한문장 한문장. 유쾌하고 속시원하고 울컥하기도 하고.

남자는 어정쩡하게 물러서 있는 양선을 본체만체하고 승희에게고함을 질러댔다. 이혼하고 올 테니 제발 헤어지지 말아달라고 매달리듯 윽박질렀다. 유부남이었다니. 이런 남자들은 뚜껑 열린 맨홀처럼 인생에 잠복하여 어린 여자들을 삼킨다. 어리고 똑똑지 못한 여자들을 삼킨다.- P26

어렸을 때는 수정도 마구 휘둘렸으나 나이가 들고서는 하나 있는 딸인 자신만이 엄마를 제어할 수 있다는 걸 깨닫고 세상과 엄마 사이의 완충 역할을 해왔다.- P11

가족만큼 자신의 편견을 선 넘어 들이미는 이들도 없다.- P80

그게 거짓말인 줄은 알고 있다. 고장난 트렁크를 친절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집에 가면 자기 가족에게 어떤 얼굴을 할지 아무도 알수 없다. 거짓말 너머를 알고 싶지 않다. 이면의 이경(異景) 따위, 표면과 표면만 있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싶다.- P90

머리가 좋은 걸 뛰어넘는 특별한 자질이 채원에게 있음을모두 슬슬 수긍했다.- P62

필요해, 같은 사람들이 많을수록 다른 사람들이 필요해. 나팔수가 필요해. 눈 돌리지 않는 사람이 필요해. 눈 돌리지 않는 것, 그걸하기 위해 선택한 거잖아. 윤나는 일어났다. 막 구급차에 실리는 규익에게 다가가 말했다.
"너는 달라. 너는 필요해."- P111

호탕하다고 해야 할지, 자신감이 넘친다고 해야 할지, 무척이나 단순하고 건강하다고 해야 할지. 어떤 설명도 딱 들어맞지는 않았다. 영린이 몇년 동안 찾아낸 설명은, 새엄마가 비극을 처리하는하수처리장 같은 걸 잘 갖춘 사람이라 순식간에 약을 풀고 필터를돌려 비극을 비극 아닌 것으로 처리해낸다는 것이었다. 본인에게는그만큼 좋을 수 없겠지만 가끔은 좀 부적절할 때도 웃는 사람이었다. 만약 영린이 남자친구와 헤어진 일로 울고 있으면 곁에서 얼마나 웃어댈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프다.
"있잖아, 마음에 갈증 같은 게 있는 사람은 힘들다?"
영린과 함께 산 지 얼마 안되어 새엄마가 말했었다.
"네?"
"그런 사람은 항상 져. 내가 보기엔 네가 힘든 게 몸무게 때문도아냐. 마음 때문이야."
그걸 지적해준 사람은 처음이었다.- P121

서른은 사실 기꺼이 맞았다. 도무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20대가 너무 힘들어서 서른은 좋았다. 마흔은, 마흔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삶이 지나치게 고정되었다는 느낌, 좋은 수가 나오지 않게 조작된 주사위를 매일 던지고 있다는 느낌 같은 게 있다. 아직 중년처럼보이진 않지만 중년인 것이다. 병 때문에 원래도 염증이 오래가는편이지만 요즘은 한번 생기면 그냥 달을 넘기는 것 같다.- P130

큰 회사부터 코딱지만 한 회사까지 사슬 지어 더럽다. 더러운 판에 오래 있다보면 사람이 미친 짓을하게 되는 것이다. 아들이 정말이지 이 판에 안 들어오면 좋겠는데그 나이 때 애들은 참 세상 더러운 줄을 모른다. 그걸 모르게 키웠으니 잘 키운 건가, 못 키운 건가.- P145

엄마가 돌아봤을 때의 표정을 잊지 못한다. 그건 정빈이 태어나서 본 것 중 가장 온도가 낮은 표정이었다.- P177

선생님이 물어왔다. 가끔 정빈은 어른들이 뭘 너무 많이 묻는다고 생각했다. 어른들은 자기들이 귀찮은 존재일 거라고는 생각을잘 안하는 것 같다고 말이다.- P180

그게 무슨 낭비람, 한나는 책을 사랑하고 사서 일을 사랑했지만 한국에서 사서가 취급받는 방식을 사랑하진 않았다.- P209

한정된 자원으로 삶을 애써 개선시키면 그걸 굳이 깎아내리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삭은 길지 않은 평생 그런 사람들을 끝없이 만나왔다. 좋지 않은 구덩이에 태어나면 계속 그 구덩이에 머물러야해? 기회를 주지 않는 세상에서 나름의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내면약은 거야? 모두가 무기력에 잠겨야 해? 그러면 안심이 돼?- P221

강사 코스라 함은 ‘제비 코스‘를 뜻하는 것이었다. 선들, 선들이보였다. 세훈은 대학에 들어가 이상한 종교단체나 피라미드 업체에끌고 가려는 사람들을 거절하며 희미한 선들을 보는 법을 배웠다. 넘기 전에는 희미하다. 넘고 나면 선이 아니라 벽이 된다. 아주 돌이킬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꽤 힘들어진다. 살면서 그런 선들을 얼마나 많이 만나게 될까. 넘어가게 될까.- P251

"여자는 똑같은 전문직이어도 가사와 육아를 떠맡잖아요. 그래도계속 일하고 싶으니까 파트타임이어도 하고 돈 조금 줘도 하는지. 그게 선배가 평소에 그렇게 좋아하는 시장의 형성이잖아. 마음에 안 들면 여자도 풀타임으로 일할 수 있는 사회를 좀 만들어봐요."
"흥, 페미니스트 납셨네."
"페미니스트를 욕으로 쓰는 것도 교양이 부족하다는 증거예요."
"뭐라고?"
근용이 먼저 목소리를 높였다. 승부가 났네, 났어, 하고 옆 테이블의 누군가가 속삭였다.
"그래, 그 말 취소할게. 너 같은 특권층 엘리트가 무슨 페미니스트냐?"
근용이 반격했다.
"그치, 나 혜택받은 엘리트지. 인정해요. 근데 줄곧 차별 안 받고커서 차별을 보면 차별인 줄 더 민감하게 알아요. 그래서 내가 가진자원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는 건데, 그게 뭐?"- P263

가장 경멸하는 것도 사람, 가장 사랑하는 것도 사람. 그 괴리 안에서 평생 살아갈 것이다.-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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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구애 - 2011년 제42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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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을 하나하나 읽다 보니 약간 인간상실에 관하여 카뮈의 느낌이 묻어난다는 생각이 들었다.(물론 카뮈의 작품에 통달한 사람은 아니지만.....) 편혜영의 소설은 장편인 ‘홀‘을 본 거랑젊은작가상 수상작인 ‘저녁의 구애‘ 한 편을 본 것이 다였는데 그동안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웠다. 이렇게 비관적인 세계관을 그리는 작가는 딱 내 스타일인데.
해설을 참고하자면 문명은 동일성의 지옥이라는데, 동일성의 세계에서 인간성을 상실해가는개인들을 그리는 과정에서도 그 시스템을 만든 기성권력에 대한 고발도 부각 되고 있다. ‘토끼묘‘에서 인사발령 과정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잠시 언급이 되고, ‘정글짐‘에서는 출장의 과정에서 상사가 주인공보다는 자기 자신을 설득하기 위한 자조적인 화법으로 대화한다는 점, 또관광버스를 타실래요‘ 에서 두 주인공들이 목적의식 없이 하루 업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문명 속의 개인들이 일상적으로 수용하게되는 권력의 압박과 주체성의 상실이 드러난다.
다만, 솔직히 내용적인 측면에서 독자들이 쉽게 몰입할 만한 분노유발장치는 은연히 숨겨놓고, 그냥 불쾌하기만 한 반복적이고 의미 없는 인생에 집중하는 글이라는 점은 사실이다. 작가의 스타일이니까.

나중에서야 안 일이지만 그가 결정을 내리기 전에 이미인사 발령이 나 있었다. 인사에 있어서 사전 협의가 전혀 없었다는 점은 조직 내에서 그의 위치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는 통보만으로 충분한 존재였다. 그가 이번발령을 통해 깨달은 게 있다면 바로 그것이었다.- P17

그는 무엇보다 근태에 있어서 성실했고 업무 시간을 효율적이고 밀도 있게 사용하는 선배였다. 직장 생활에서 어떤 식으로든 선배가 그에게 모범이 된 것은 틀림없었다. 업무를 처리하는 방식을 일러준 사람이 선배였다. 정보가 통용되는 방식, 그러니까 다른 사람에게 흉이 되는 소식이라면 얼른 퍼뜨리고 다른 사람에게 득이 되는 소식은 혼자서만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일러준 사람도 선배였다.- P21

김은 그 일로 우정이라는 것은 애정의 정도와는 아무 관계가 없으며 자신에게 헌신적이거나 유익할 때에만 유효한 감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모든 지나간 일을 되새기는 과정이 그렇듯 과거의 어떤 일이 미친 결과나 상처는아무런 파동 없이 떠올랐고 그러는 과정에서 어느새 시간이훌쩍 지나버린 것에 대한 서글픔과 뻔한 회한만 남았다.- P40

앞으로 여자와의 통화는 더 드물어질 것이고간혹 이어지는 만남은 지루할 것이고 말투는 무뚝뚝해질 것이며 웃을 일이 점점 줄어들 것이다. 그럴수록 여자는 더 자주 전화를 걸어 자신에게 소홀하고 무관심한 김을 이해하려고 하다가 어느 날 문득 서운함과 허전함을 견디지 못해 울컥하여 화를 내고 얼마 후에는 화낸 것을 사과할 것이다. 그런일이 얼마간 반복되다가 나중에는 오로지 마음을 되받지 못한 것을 억울해하며 김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데 시간을 쓸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이 모든 일을 되풀이할 정도로 김을 사랑하지 않으며 어쩌면 처음부터 사랑이 아니었음을 깨닫고마음이 편안해지는 동시에 허탈해질 것이다. 김으로서는 그순간을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쩌면 그때비로소 여자에게 애틋함을 느끼게 될지도 몰랐다.- P57

을 덮었다. 결국 타인과의 완벽한 친밀감이란 동경에 불과하며 인간이란 타인과 최소한 2미터 이상의 거리를 가져야만 하는 존재인지도 몰랐다. 그는 복사실의 카운터와 쉴 새 없이학생이나 강사 들이 지나다니는 복도까지의 거리가 대략 2미터쯤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는 언제든 누구에게든 그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왔다. 그 거리는 복사실을 찾는 사람들과 그사이에 놓인 카운터의 가로 길이와도 같았다. 누구도 카운터너머로는 들어오지 않았다.- P74

구내식당의 정식 A세트를기준으로 그의 하루는 데칼코마니처럼 오전과 오후가 동일하게 반복되었다. 오전과 오후뿐만이 아니었다. 자정을 기준으로 하면 어제와 오늘이, 주말을 기준으로 하면 지난주와 이번주가, 연말을 기준으로 하면 작년과 올해가 같았다. 그러므로모든 미래는 과거와 동일한 시간일 것이다. 현재가 과거와 같듯이 미래는 현재와 같을 것이다. 언제나 같다는 것. 그 때문에 그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으나 이내 언제나 같아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한숨을 거둬들였다.- P83

"자네가 하필 이 시기에 출장을 떠나는 건 회계 시스템을 바꿔야 하기때문이야. 불가피한 일이지. 그렇지? 두 도시 담당자가 바쁜일정을 조절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알겠나?" 그에게 말한다기보다 스스로에게 되뇌는 느낌이었다. 이 상황을 납득하고 싶어 하는 건 그보다는 백인 것 같았다.- P155

『저녁의 구애』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자연의 혼돈에맞서 문명이 이룩한 질서와 체계가 실은 그토록 인간이 두려워하던 ‘동일성의 지옥‘이라는 사실에 대한 경고다. 야만에맞서 건설한 문명의 끝이 야만이다. 자연에 대한 계몽 이성의지배가 최종적으로는 야만 상태로의 회귀로 귀결된다는 아도르노의 예언이 이번 편혜영 소설에서 확증된다.- P248

요컨대, 동일하고 동일하고 다시 동일한 공간과 시간 속의저 군상들, 그들이 사는 곳은 바로 그 이유로 미로이고 저수지이다. 미로와 저수지는 그것이 설사 문명과 자연이라는 익숙한 근친적 대립으로 나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동일한 것들의 지옥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야만이 문명이고 문명이 야만이다. 편혜영의 세번째 소설집 『저녁의 구애가 우리에게 보내는 경고가 이것이다.-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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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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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보는 작가의 소설이다. 주로 믿는 점은 감정의 복선을 밑바닥에서 절대 위로 띄우지 않고 항상 먹먹하지만 결코 기분 나쁘지 않게 동시대의 삶을 관철하게 해주는 작가라는 것. 그래도 김애란의 소설은 나를 울리지는 않았는데 몇 번 울어버린 것 같다.
김애란은 인생을 통찰하게 해주는 (가령 좀 한심스러울 정도로 직업정신이 투철한 방송작가와 아름이의 대화장면 같이) 인간 본성의 신랄한 공격을 담담하게 풀어내는게 주특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먹먹함이라니.
나이 듦에 대해서, 늙음에 대해서 아름이와 장씨아저씨 같이 대조적인 시선을 통해, 또 너무나 다양한 인간군상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늘 곁에 있지만 찰나의 지나버린 순간에서야 문득 깨닫게 되는 늙는다는 것에 대해, 죽는다는 것에 대해.

어머니는 이상한 듯 갸웃거렸지만, 그러고는 그걸 또 금방 잊어버렸지만, 나는 그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내 생각에 그녀들은, 아마 미안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활달함 혹은 친절함이란 누군가와 무의식적으로 이별을 준비할 때 나오는 태도 중의 하나니까.- P41

올해 나는 열일곱이 되었다. 사람들은 내가 지금까지 산 것이 기적이라 말한다. 나 역시 그렇다고 생각한다. 나와 비슷한 사람 중열일곱을 넘긴 이는 매우 드물다. 하지만 나는 더 큰 기적은 항상보통 속에 존재한다고 믿는 편이다. 보통의 삶을 살다 보통의 나이에 죽는 것, 나는 언제나 그런 것이 기적이라 믿어왔다. 내가 보기에 기적은 내 눈앞의 두 분, 어머니와 아버지였다. 외삼촌과 외숙모였다. 이웃 아주머니와 아저씨였다. 한여름과 한겨울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P47

더욱이 세상물정 모르는 얼굴은 딱 열일곱살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눈빛, 두 눈 속에 담긴 기운이 어딘가 달랐다. 그 속에는 이제 막 한 존재를 책임져야 하는 이들의 피로와 슬픔, 그리고 자부가 묘하게 엉겨 있었다.
‘그런 걸 뭐라고 불러야 좋을까…..…?’
고민하다 그런 걸 뭐라 불러야 할지 몰라, 그냥 부모의 얼굴이라 부른다‘ 라는 문장을 이어붙였다. 부모는 부모라서 어른이지, 어른이라 부모가 되는 건 아닌 모양이라고.- P78

"이 물만 해도 그래. 우리집은 대수가 보리차 좋아해서 물 끓여먹거든? 근데 봐봐, 밥상에 물 한잔 올려놓으려면 얼마나 많은 절차가 필요한지. 물 끓여야지, 식혀야지, 주전자 씻어놔야지, 물병소독해야지, 병에다 다시 물 담아야지, 냉장고에 넣어야지…… 근데 그렇게 끓인 물이 또 이틀을 못 가. 예전에 물 마실 땐 아무 생각없었는데. 참, 사는 게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아."
"어 진짜, 나도 물 마실 때 그런 생각 안하는데."- P83

‘고요‘라는 단어를 읊어보았다. 그것은 곧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기척이 되어, 세상에서 가장 멀리 가는 동그라미를 만들어냈다. 신기한 일이었다. 0계급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줄 알았는데, 0계급이무언가 하고 있었다.- P199

그러자 문득 무언가를 가지려고 하는 만큼, 가지지 않으려고 하는것 또한 욕심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했으면서 아무것도 안 가진 척하는 것도 기만일 수 있다고……-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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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인간의 피안
하오징팡 지음, 강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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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중 가장 미래 인공지능과 함께할 사회에 대한 충격적이면서 고무적인 에피소드는 ‘사랑의 문제’였다. 인공지능과 연관된 살인사건에서 인간의 소송의 상대는 인공지능이 아니라 인공지능을 개발한 기업이 된다는 점, 그러한 대립 구도는 결국엔 개인이 기업을 상대로 계란으로 바위치는 겪이 돌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감정적이지 않고 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한다는 전제로 인공지능이 배심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 설정도 인상적이다.
인공지능이 우리 삶에 침투해왔을 때 인간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예견, 흔히들 강한 인공지능이 인간을 공격해오는 전투적이고 암울한 미래를 걱정하지만, 일각에서는 약한 인공지능에 의해 인간이 타인과의 관계보다 인공지능과의 유대를 선호하고 인간성을 상실하게 되는 미래에 대해 더욱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하오징팡의 책에서는 이보다 한발 더 앞서나가 약한 인공지능에 의해서도 불완전성이라는 이유로 인간이 주체성과 주도권을 상실하게되어 권력구조가 전복되어 버리는 미래를 예견하고 있었다.
인공지능과 인간의 소송, 다수의 인공지능 배심원들에 의해 인간에게 불리하게 된 판결, 그 뒤에 숨은 기업과 자본의 힘에서 인간 개인이 잃지 말아야 할 정치적인 자세와 안목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출현할 가능성이 가장 큰 것은 인공지능이 우리를 파멸시키기보다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상황이다.- P7

"회장님은 정말로 저희의 ‘분신‘ 상품을 한번 써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회의 여덟 개도 거뜬히 참여할 수 있다니까요."
"하하."
장진타오는 살짝 웃었다. 런이의 너스레를 받아주는 건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글쎄요. 이야기대로라면, 우리가 한 세트를 사면 다음번에 만날 때 당신을 대하는 건 당신의 상품이 될지도 모르겠는데요."- P10

쑤쑤가 다시 일자리를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은 건단순히 돈 때문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자신이 의지할 만한 버팀목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P12

하지만 면접은 순탄치 않았다. 쑤쑤는 이제 막 졸업한 대학생이 아니다. 그들처럼 취업의 관문을훌쩍 통과하는 우월한 신분도 아닐뿐더러 그들처럼 기회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걸 만큼 열정적이지도 못하다. 면접관의 비위를 맞추려 마음에도없는 말을 할 리가 없고, 일해본 경험도 있고 창업을 지켜본 바도 있어 소위 말하는 자기 성격이라는 게 있다. 면접관이라면 하나같이 "전 정말이지이 일을 좋아합니다"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지만,
쑤쑤는 사실 그대로 "이런저런 쪽으로 이력서를냈어요"라고 말해 있는 대로 눈총을 받곤 했다.- P12

"난 단지 그게 정말로 두 사람일까, 하는 생각이들어. 유전자와 기억은 똑같고 단순히 신체만 바뀌었을 뿐이야. 그러면 같은 사람으로 봐야 하지않을까?"- P28

"그것 역시 그렇지 않아. 대뇌 역시 날마다 변하고 있지. 비록 기억은 연속적이지만, 인간의 생각은 전부 변한 것이지. 대뇌 역시 변한다고 할 수있어."- P29

"그렇다면 사람한테서는 대체 뭐가 안 변할까요?"
가짜 어머니가 말했다.
"만약 구체적인 원소나 사상이...... 그러면 아무것도 아니겠지. 하지만 이런 문제에 너무 천착할필요는 없어. 천착해봤자 답이 없을 테니까. 변하는 건 부분이고 변하지 않는 건 총체야. 넌 언제나여전히 너야."- P29

첸루이는 죽음을 앞둔 날들 속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자신의 생명이 다 되어간다는 사실을 알고스스로 가족 안에 차지했던 자신의 자리를 신인에게 내주길 원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출렁이는 연연함일 것이다. 자신과 아버지를 향한 버리지 못한 애착이자 자신과 아버지에 대한 위로 일것이다.- P33

"맞습니다. 나는 인간을 통제합니다."
"당신이 인간을 통제하는 목적이 뭡니까? 당신을 섬기라고? 왜 인류를 죽이지 않죠? 당신이라면 식은 죽 먹기일 텐데."
"내가 왜 인류를 죽여야 합니까? 인류는 내 데이터의 출처인데, 데이터는 나의 토양입니다. 누가자신이 사는 집을 허니까? 그리고 모든 인간을죽이려면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들겠습니까? 인간은 대자연이 수억 년 동안 진화해온 결과물입니다. 많은 부분에서 완벽에 가까운 능력을 갖추었습니다. 이미지 식별, 신체의 움직임과 유연성에 대한 통제, 상황에 대한 판단과 반응 등 여러부분에서 거의 완벽에 가깝습니다. 인간의 신체기능을 갖춘 로봇을 만들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아십니까? 인간은 그저 음식만 조금 먹으면 되는데 말이죠.- P86

나는 나의 냉담을 인정하지만 당신은 인정하지않을 뿐입니다.-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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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3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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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공감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이건 어느 상태이건 의도치 않게,
예상하지 못하게 밀려드는 감정들이 있다. 패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이라니, 골키퍼가그런 상황에서 ‘자신감이 넘치는 상태는 아니었나 보다. 무엇인가 만들어 낼 의지는 없는 상황에서 무엇인가 다가올 것 같은 불안. 그런 감정의 서사를 따라가며 약간 (현재 내 상황에서는) 사치스러운 ‘불안함‘을 한껏 느껴볼 수 있었던 독서였다.
서평에서는 서술 중심에서 내용 중심으로 변모한 한트케의 첫 작품이라고 하는데 그래도 내용에 감동할 수 있는 작품이라기 보다는 서술에 감탄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것에 가깝다. 카뮈,
카프카, 베케트부터 남미 문학인 마르케스, 보르헤스 등 다양성, 새로움의 상징이 되는 작가들의 작품(국내라면 한강, 김봉곤 정도랄까?)을 접하면서 독자들에게는 ‘이해‘ 보다는 ‘읽기‘에 집중하게 되는 독서의 분야가 있는 것 아닌가.

페널티킥이 선언되었다. 관중들은 골문 뒤로 달려갔다.
"골키퍼는 저쪽 선수가 어느 쪽으로 찰 것인지 숙고하지요." 하고 블로흐가 말했다. "그가 키커를 잘 안다면 어느 방향을 택할 것인지 짐작할 수 있죠. 그러나 페널티킥을 차는 선수도 골키퍼의 생각을 계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골키퍼는, 오늘은 다른 방향으로 공이 오리라고 다시 생각합니다. 그러나 키커도 골키퍼와 똑같이 생각을 해서 원래 방향대로 차야겠다고 마음을 바꿔 먹겠죠? 이어 계속해서, 또 계속해서….."
블로흐는 모든 선수들이 차차 페널티에어리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다. 페널티킥을 찰 선수는 슛 지점에 공을 갖다놓았다. 그런 다음 그도 뒷걸음질로 페널티에어리어 밖으로 나갔다.
"공을 차기 위해 키커가 달려 나오면, 골키퍼는 무의식적으로 슈팅도 되기 전에 이미 키커가 공을 찰 방향으로 몸을 움직이게 됩니다. 그러면 키커는 침착하게 다른 방향으로 공을차게 됩니다." 하고 블로흐가 말했다. "골키퍼에게는 한 줄기지푸라기로 문을 막으려는 것과 똑같아요."
키커가 맹렬히 달려왔다. 환한 노란색 스웨터를 입은 골키퍼는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페널티 키커는 그의 두 손을 향해공을 찼다.- P120

흔히 우리는 문학작품이란 숙련된 작가가 아름다운 이야기를 아름다운 문체로 서술해야하고, 독자는 그것을 읽고 감동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알고 있다. 아니, 우리 스스로가 알았다기보다는 그렇게 교육된 것이다. 그런데 한트케의 실험작은 형식과 내용 가운데 의도적으로 내용을 무시하고 있다. 내용보다는 서술이 우선인 문학 작품이라니, 18~19세기의 문학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진한 감동과는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20세기의 이름 있는 작품들, 즉 카프카의 『변신』이나 까뮈의 『이방인』,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등이 진한 감동을 주는 작품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내용이 없는 것이 아니라, 무슨 내용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어서 인내심 깊은 원시시대의 독자나 인문주의 시대의 독자라 하더라도 마침내 자제심을 잃고 격노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알고 있는 문학은 감동과 아름다움이 충만한 것인데, 도대체 이게 뭐냐는 심정에서 소위 비난의 봇물을 터뜨리게 되는 것이다. 한트케도 이러한 실험 작품을 시작으로 다수로부터는 혹독할 정도로 부정적인 평가를, 소수에게는 새로운 문학 세계를 열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아 왔다. 그러다 1970년대에 들어와 그의 서술 기법이 실험적인 것에서 전통적인 것으로 돌아선다. 무시했던 내용을 다시 복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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