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개별적인 인격을 가진 존재라면 나는 아이들에게 술담배를 금지하는 것도 차별이자 성인 권력의 탄압이라고 생각한다.(사실 정확한 표현은 어른들에게도 좋지 않은 것을 무슨 논리로 아이들에게만 금지하고 있는 것인가이지만)

또 아이들은 절대적으로 순진무구한 선한 존재라는 전재가 좀 거북했다. 우리는 살면서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나 ‘케빈에 대하여’의 케빈과 같은 아이들을 마주한다. 어른들의 케이스는 극단적인 폭력성을 보여주는 사례를 모았고, 아이들은 나약한 피해자의 사례만 모아서 그런지 책의 요지가 설득력이 없다. 정도의 차이지 벤이나 케빈같은 성향을 누구나 다 타고 나는데…
온실 속의 화초같은 유토피아에서 자라게 하자는 논리에는 여러 허점이 숨어있다. 우리가 폭력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건 폭력을 경험했기 때문에 아는 것이다. 우리의 생존 본능은 상대적으로 약한 자를 밟아 살아 남는다는 것을 안다. 400만년 가까이 유전되어 온 기질이기 때문에 우리 성향은 폭력성을 기본적으로 내재하고 있다. 이런 폭력성을 억제시키는 것이 교육이 해야할 일인데 우리가 가진 언어나 표정은 폭력을 상대할 만큼 강력함을 발휘하지 못한다…

한국의 사람들은 공공의 지나친 책임을 운운하는데 이는 결국 더욱 더 강력한 간섭을 갈구하는 꼴이다. 정작 본인이 공공 질서 유지를 위해 통제를 받으면 권력으로부터 탄압을 받았다며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둥 진상을 부리면서... 공권력은 시민으로부터 나온다지만, 결국엔 누군가에겐 그냥 권력으로 다가올 뿐이다. 본인들이 주장하는 바가 어떤 사회적 낭비를 초래하는지는 계산도 해보지 않은 채, 좀 멋있어 보이고 싶으면 피해자를 내세워 공공을 비난하고 책임을 물어버리면 되는 게 좌파 대학생들 사이의 유행이라 그런지 이젠 집안일도 스스로 성찰할 생각은 안 하고 공공의 책임으로 돌리자고 난리다. 너무 편리한 사고방식에 넌더리가 난다.
규제의 실천은 공공이 강력한 권한을 행사함으로써 실현되는 것이고, 이런 부작용의 사례는 ‘아이 엠 샘’같은 영화를 통해 지탄을 받아왔는데도 공권력의 사적 영역으로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구하고 있다. 차별과 편견은 나 자신을 포함한 대중의 잘못이지 공공의 책임 부재로 빚어진 결과가 아니다.

작가의 맥락 때문에 몇 가지 좋은 이론들이 책에 인용되었음에도 아쉽다. 적당히 요구하고 스스로 성찰해야겠다.

버릇을 가르치느라 때렸다는 주장은 나중에 갈비뼈를 부러뜨릴 정도로까지 발전한 ‘의도적’ 학대를 위장하기위한 거짓말이었을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아동보호전문기관에서 일하는 상담원들의 말을 들어보면 처음부터 부모나 보호자가 아이를 죽이거나 해를 입힐 ‘의도’를 갖고 시작하는 학대는 없다. 서현이의 경우도 한두 번의 체벌이 점점 강도를 더해가면서 갈비뼈가 부러지고 뼈가 폐를 찔러 과다출혈로 사망하는 지경에 이르게 됐다.

미숙한 아이들을 때려서라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체벌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열등한 상대에 대한교정 목적의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다는 오래된 논리다. 그러나 수많은 경험적 연구는 체벌의 교육적 효과는 없고되레 폭력의 내면화를 통해 뒤틀린 인성을 만들어낼 뿐이라고 지적한다. 아이들에게도 반성보다 공포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체벌은 갖가지 이유로 행해질 수 있고, 거기 따라붙는 훈계도 그만큼 다양하다. 하지만 표면상의 다양성을 넘어서, 체벌은 언제나 단 하나의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전달한다. 바로 체벌이 언제라도 반복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너의 몸은 온전히 너의 것이 아니며, 나는 언제든 너에게 손댈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체벌에 동의한다는 것은 이가르침을 수용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모욕의 역설을 이해하게 된다. 모욕은 타인의 인격을 부정할 뿐아니라, 그러한 부정에 대해서 부정당하는 사람의 동의를 강요한다. 모욕당하는 자가 모욕에 동의하는 순간, 모욕은 더 이상 모욕이 아니다. 그것은 의례의 일부이며 질서의 일부가 된다. 결국 모욕은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는 폭력이다."

부모의 체벌은 용인하면서 어린이집에서 체벌이 발생할 경우 벌집 쑤시듯 요란해지는 언론보도를 볼 때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툭하면 불거져 나오는 어린이집 아동학대 사건 보도들을 볼 때마다 나는 똑같은 폭력을 대하는우리 사회의 태도가 뭔가 이중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린이집에선 어떠한 체벌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회의 태도는 매우 확고하다. CCTV를 달아서라도 아동학대를 감시해야 한다는 주장 앞에서 보육교사들의 인권에 대한 우려는 뒷전이었다. 보육을 맡고 있는 성인이 아이를 때리는 일에 그토록 민감하면서 왜 부모의 체벌은 괜찮다고 보는 것일까. 사실 어린이집은 부모의 자격을 위임받아 취학 전 아이를 양육, 교육하는 곳이다. 어린이집 교사의 체벌금지를 말하기 이전에 부모의 체벌금지부터 논의해야 하는 것 아닐까.

기성세대는 그 시대의 제한된 문화적 환경에서 자녀를 가르쳤다. 자신이 어떤 환경에서 자랐다고 해서 그 방법이 지금도 유효하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체벌의 유해성을 연구해온 발달심리학자 엘리자베스 거쇼프는 이를 자동차 안전벨트에 비유해서 설명했다. 성인의 상당수는 자동차 안전벨트가 없던 시절에 자랐다. 하지만 누구도안전벨트가 없었던 덕분에 내가 잘 자랄 수 있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안전벨트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무탈하게자랐다고 말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부모의 체벌 덕분에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부모의 체벌에도 불구하고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해야 한다.

아이들에게 폭력도 사랑이라고 가르치며 가해자의 논리를 내면화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상대가 나를 사랑하거나 깊이 의지한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는 상태에서 힘을 휘두른다면, 이는 신체적 상해에 더해 상대의 마음을 악랄하게 모욕하는, 질이 나쁜 폭력이다. 다수의 가정폭력이 그렇고 데이트 폭력도 그 한예다. 2015년 트위터를 달군 데이트 폭력에 대한 증언들을 보면 이랬다. 가해자는 폭행의 이유로 ‘네가 맞을 짓을했다‘며 피해자 탓을 한다. ‘맞는 것보다 상대를 잃는 게 더 두려운‘ 피해자는 맞을 짓을 계속하는 자신을 탓하며더 좋은 연인이 되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사회적 계층화, 정치적 의사결정의 비민주성, 폭력적 문화가 심한 사회일수록 체벌이 심한 경향성이 있다.

영화 〈스포트라이트>에서 가톨릭 사제들에 의한 아동성폭력을 밝혀내려 분투하던 인권변호사는 "한 아이를 키우는 데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한 아이를 학대하는 데에도 한 마을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남태평양 통가의 경우 체벌이 잦은데 그들은 어린이에겐 사회적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사회적 능력이란 지위에 따른 위계질서를 이해하고 그에 맞는 존경심과 복종의 태도를 갖추는 것이다. 이들에게 체벌은 위계질서를 어린이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방편이다.

<유엔아동권리협약>은 어린이를 훈육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던 기존 시각에서 어린이가 연약할지라도 어른과동등한 가치를 지닌 인간이고 권리의 주체라는 시각으로 인식의 전환을 이루어냈다. 협약이 체벌을 금지하는 취지도 만약 성인을 때리는 것이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면 마찬가지로 어린이를 때리는 것도 이유를 불문하고 허용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이유는 법안에 ‘체벌’이라는 표현이 없기 때문이다. 체벌에 관용적인 사회에서는 누구도 ‘신체적, 정신적 고통‘이나 ‘폭력’ ‘학대‘라는 표현에 체벌이 포함된다고 해석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설령 법원이 이 개정안을 가정 내 체벌금지로 해석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체벌금지는 해석이 아니라 법률 그 자체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 ‘글로벌 이니셔티브’의 입장이었다. ‘체벌‘이라는 두 글자가 법안에 금지의 대상으로 명백히 들어가야 한다는 거다.

체벌을 허용하는 사회는 아이들이 완전한 인간이 아니며 사회구성원의 자격을 얻기 위해 어느 정도는 고통을경험할 필요가 있다고 바라본다. 아이도 개별적 인간이고 권리를 지닌 사람이라기보다 부모의 뜻대로 처분 가능한소유물처럼 바라본다. 이 뿌리 깊은 부정적 태도를 바꾸자는 것이 체벌금지 입법의 취지다.

체벌과 학대는 두 그룹 모두에서 일어난다. 과보호와 방임 둘 다 아이를 독립적 존재로 바라보지 못하고 소유물로 바라보는 같은 뿌리에서 비롯됐다. 과보호의 상황에선 부모의 과잉교육열과 지나친 간섭이 정서적, 신체적학대의 양상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방임의 경우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않고 방치하다가 툭하면 스트레스와화풀이 대상으로 삼는다. 부모와 자녀 사이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하거나 적당한 거리와 존중을 유지하지 못해 과보호와 방임의 두 극단이 생겨난다.

엄마 꿈의 대리 실현자가 된 아이는 희망의 포로다.

한국 사회에서 부모가 자신의 뜻대로 자식을 처분‘ 하는 가장 극단적인 행위가 지금도 간간이 발생하는 부모의자녀 살해 후 자살이다. 언론은 이를 곧잘 ‘가족 동반자살‘이라 부른다. 행위 자체에도 그렇고 이를 ‘동반자살’이라고 부르는 표현 둘 다에 아이들을 부모와 분리된 존재로 바라보지 못하고 부모가 세상을 버릴 때 데리고 갈 정도로처분이 가능한 소유물처럼 여기는 관점이 배어 있다.

1. ‘동반자살‘이라는 표현은 명백한 살인과 아동인권 침해를 온정의 대상으로 만들고 부모가 자기 뜻대로 자녀의 죽음을 결정할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을 퍼뜨립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일가족 동반자살‘로 보도된 사건의 절반 이상은 부모가 미성년 자녀를 살해한 뒤 자살한사건입니다.
자녀는 부모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재산도, 소유물도 아닙니다. 부모의 처지가 아무리 절망스럽다고 해도 부모가 자녀를 죽일 권리는 없습니다. 한국 정부가 비준한 <유엔아동권리협약〉6조는 "모든 아동은 생명에 관한 고유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내가 없으면 내 아이가 제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회적 안전망에 대한 불신은, 실제로 그러한 안전망이 결여된 데다 자녀를 키우고 가르치는것이 순전히 부모의 능력과 자원에 의해 결정되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특징에서 기인한다.

즉, 어떤 ‘친엄마‘는 자녀의 생존을 자신과 분리시켜 생각하지 못하며, 어떤 아버지들에겐 자녀 양육을 전담해줄 ‘친엄마‘가 없는 것이 자녀 살해와 죽음을 선택할 만큼 고통스러운 상황인 거다. 개인이 자신뿐 아니라 자녀의생사를 선택하는 무서운 결정을 할 때조차 한국 사회에서 어머니의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은 이토록 짙게 배어 있다.

인류학자 이현정은 이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중국의 경우 부모와 자녀를 개별적 개인을 넘어 하나의 집단적 정체성으로 바라보는 사고가 매우 약하다. 이는 "49년 사회주의 혁명 이후 국가가 유교주의적 전통사상을 반혁명적인 것으로 비판하고 개인의 생산활동 및 사회정체성을 가족이나 종족이 아니라 집체를 중심으로재구성한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게다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관계에서는 자녀의 운명이 반드시 부모에 의해 결정되지도 않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국 사회에서는 부모와 자녀가 운명 공동체라는 시각이 한국보다 약하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로 이현정은 핵가족과 확대가족이라는 구조의 차이를 들었다. 1920~1950년대 통계자료로 한중일 3국을 비교한 결과에 따르면 일본과 한국은 이미 그 시절에 핵가족이 전체 가족 유형의 80%였지만 중국은60%가 안 된다고 한다. 핵가족 구조가 지배적인 일본과 한국에서는 부모의 위기는 곧 가족 전체의 존립 문제로 인식되기 쉽다. 반면 중국의 경우 확대가족의 성격이 강하고 핵가족 외부의 상호의존관계인 가족 밖 네트워크가 튼튼해 자신이 죽더라도 자녀를 다른 가까운 누군가가 돌봐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이 점은 한국이나 일본의 부모들이 자녀의 불확실한 미래를 염려하여 혼자 놔두기보다 차라리 함께 세상을 떠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과대비된다.
결국 같은 유교문화권 내에서도 부모의 자녀 살해 후 자살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는 부모가 자녀를 독립된 개인으로 바라보느냐, 그리고 위기 상황에서 가족 밖에 기댈 언덕이 있느냐 여부에 놓여 있다. 체제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한국 사회에서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은 부정적이다.

‘집단’을 도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위험하고 폭력적이라는 점이다.

친권은 부모가 자녀를 보호하고 가르칠 ‘의무‘지 자녀에 대한 처분 ‘권리‘가 아니다.

한국의 가족주의는 소위 ‘정상가족‘인 가부장적 가족만 인정하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다. 법적 혼인절차가 수반되지 않은 임신과 출산, 양육에 대한 사회적 보호와 인정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결혼=출산’의 등식이 지나치게확고한 탓에 제도의 바깥에서 출산함으로써 가족의 순수함을 훼손했다고 여겨지는 미혼모와 그 자녀들은 제도적,
사회적 차별에 시달린다.

사후 관리는 국내입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허술하다. 한국은 국내입양 활성화를 꾀한다는 명목으로 건강한영아를 입양할 때에도 계속 현금을 지원하는 특이한 나라다. 노혜련 교수는 "입양부모는 선하고 대단한 존재라는사회적 인식은 입양아동을 양육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어도 외부에 도움을 청할 수 없도록 만든다"라면서 "입양은 선한 일이라기보다 전문적 도움이 필요한 전 생애의 과정이라는 인식을 확대하고 현금 지원보다 전문적 사후서비스를 제공하는 공적 전달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더 많은 민주주의와 자유, 진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보수적인 사람들보다 타자에 대해 더 관용적 태도를 지녔으리라 생각했던 당시의 나로서는 그들의 이주아동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무슨 이유인지 알고싶어 온라인 게시판과 SNS에 올라온 ‘한국판 이민법‘ 비판을 일일이 찾아 읽어보았다. SNS 프로필에 권위주의적정부를 비판하고 민주주의를 바란다고 적어둔 이들이 딱 그 권위주의적 시각으로 이주민을 바라보며 ‘우리 권리를빼앗아간다‘고 비판과 혐오발언을 쏟아냈다.

이주민에 대한 증오는 이주가 일상화된 현대사회에서 위험 전가, 희생양 찾기, 타자 비난의 가장 흔한 형태다.
미등록 이주아동의 처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너무나 간단히 타자를 증오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그만큼 불안과위기감이 사람들의 일상과 마음 깊숙이 스며들었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자기가 살아가는 사회에 위기가 닥쳤을 때 위험을 타자와 관련짓는 반응은 근대 이전부터,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어온 현상이다. 사회심리학자 헬렌 조페Helene Joffe의『위험사회와 타자의 논리』에 따르면 매독이 유럽을 휩쓸던15세기에 매독은 영국에선 ‘프랑스 두창’으로, 프랑스에선 ‘독일병’으로, 플로렌스인들에겐 ‘나폴리병‘, 일본인에겐 ‘중국병’으로 불렸다. 매독뿐 아니라 콜레라, 흑사병, 나병에 이르기까지 집단적인 불치의 질병은 늘 ‘타자’와연관되어왔다.
흥미로운 것은 위험을 ‘타자‘와 관련짓는 반응이 서양사회 혹은 지배집단에서만 드러나는 특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타히티에서 매독은 ‘영국병’으로 불렸다. 아프리카 줄루족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에서도 질병의 발생을 ‘타자‘와 연관지어 이해하는 반응이 드러난다. 결국 위기에 처했을 때 ‘타자‘는 지배집단이든 아니든 누구나 비난할수 있는 잠재적 대상이 되는 것이다.

내 주변에는 우연찮게 자발적인 무자녀 가족이 여럿 있다. 자신의 삶에만 충실하기 위해 자녀를 갖지 않기로결정했으나 그렇다고 가족주의에서 자유롭지도 않다. 딩크DINK, Double Income No Kids족이라는 말의 경쾌한 어감처럼 ‘내 삶을 즐기기‘ 위한 선택이라기보다 한국의 가족현실과 자신의 상황, 부모의 책임과 자격을 고민하다 내린‘포기의 결단’에 더 가깝다.

사회학자 김혜영은 이를 가족을 통한 국가의 통치이데올로기와 관련이 있다고 분석한다. 경제발전과정에 노동력, 특히 값싼 저임금 노동력이 필요했던 국가는 핵가족을 찬양하면서 농촌 자녀의 도시 이주를 장려하고 여성의노동시장 유입, 산아제한을 골자로 한 가족계획을 장려했다. 그러다가 산업화의 진전으로 농촌의 공동화 및 노령화가 문제가 되고 노인 부양의 필요가 제기되자 이번에는 핵가족을 비판하고 전통적 가족 부양의 윤리를 찬양했던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금 모으기는 기묘한 운동이다. 국가와 재벌의 잘못으로 야기된 외환위기였고 국민의 혈세로부실기업과 부실금융기관에 공적 투입을 한 것도 모자라 국가가 국민에게 손을 벌린 것이니까 말이다.
사회학자 김덕영은 『환원근대』에서 금 모으기 운동을 "국가와 가족의 관계에서 쌍방성이 결여된 일방적 증여"
라고 묘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관계에서 가족은 장롱 깊숙이 간직한 할머니의 금가락지를 내놓을 정도로 헌신적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국가는 외환위기와 더불어 실직한 사람을 전적으로 가족에게 떠맡겼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노숙자로 전락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또한 소득보장, 교육, 돌봄의 양과 질 등이 가족에게 의존적일 경우 계층에 따라 받을 수 있는 서비스의 질이달라지므로 양극화가 심화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양질의 교육과 돌봄 서비스가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가족에게 주어진 자유선택이란 곧 개별경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제도적 가족주의의 진단과 함의>를 연구한 장경섭 등은 "이처럼 가장 기초적 부분에서 발생하는 격차는 가족을 통해 재생산되어 개인과 가족의 삶의 계층화, 양극화를 점점 더 심화시킨다"라고 지적했다.

이렇게 자녀를 소유물로 바라보는 관념은 압축적 근대화 과정을 거치며 중요성이 커진 가족이 이제 개인 삶에서도 중심을 차지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굳어진 상호의존성, 귀속성이 자녀 양육에도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 싶다.

내가 과장되게 느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가족의 호칭이 점점 더 사회 전반으로 깊숙이 퍼져나가는 것 같다.
사람들이 결혼을 기피하고 전통적 가족가치가 무너져간다고들 하는데 가족 호칭의 확산은 거꾸로 방향을 향한 듯하다.

급변하는 사회지만 가족적 문화에 대한 미화는 여전하다. 공동체 의식과 배려, 책임을 강조하고 싶을 때 아주자주 가족적 관계에 대한 비유가 호출되고, 친밀감을 전제로 한 집안의 인간관계가 사회관계로까지 확장된다. 우리는 왜 중립적 호칭을 놔두고 굳이 가족적 거리를 암시하는 표현들을 점점 더 많이 쓰게 되었을까?

그게 가장 두드러지는 영역은 아마 회사가 아닐까 싶다. 직장가족주의는 직장을 가정의 확장된 장소로 보고 가족 내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속성이 조직과 구성원들의 의식과 행태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기업에서는 흔히들주인의식을 고양시킨다는 명목으로 가족주의를 표방한다. "종업원을 가족처럼, 회사를 내 집처럼", "우리는 모두한 가족" 등과 같은 사훈社에서 나타나듯 직장가족주의에는 가족과 유사한 관계를 중심에 놓는 유교적 이념이 내포되어 있다.
직장가족주의를 통해 구성원의 충성, 헌신, 공동체, 집단성, 소속감을 강조하며 부모-자녀의 수직적 관계가 직장에서는 상사-부하의 서열구조로 나타난다. 구성원과 경영진의 관계에서도 가족 내에서 자녀의 부를 공경하는태도를 기대하고 요구하기도 한다.

‘정상가족‘의 안팎에서 시달리는 아이들의 문제들을 지켜보며 내가 한국 가족주의에 대해 가졌던 의문들, 즉가족 안에서는 개별성, 가족 밖에서는 다양성이 왜 존중받지 못하는가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해본 답은 이렇다. 첫째, 가족의 생활을 지원하는 공공의 역할 부재 때문이다. 사회적 안전망 없이 사적 안전망인 가족에게 모든 ‘보호’를 떠넘겼고 당장의 생존이 목표인 가족이 구성원의 개별성을 고려할 리는 만무하다. 둘째, 치열한 경쟁과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가족 단위로 경쟁에 뛰어들어야 하는 상황 때문이다. 이런 조건에서 개별성과 다양성의 설 자리는 없다. 셋째, 자기 집단만 중시하는 가족주의가 사회로 확대되면서 배타적인 태도가 굳어졌고 타인과 사회에 대한 신뢰가 사라졌다.

폭력 없이 아이를 키운다고 해서 우리가 영원한 평화의 상태 안에서 살아갈 새로운 인류를 만들 수 있을까요?
아마 어린이 책 작가들만이 그렇다고 대답할지도 모릅니다. 그건 유토피아겠지요. 이 가난하고 아픈 세상에서 평화를 원한다면 해야 할 다른 많은 일들이 있음을 압니다.

가족 내에서 양육을 할 때 폭력을 사용하는 행위를 국가가 금지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가족의 탈사생활화를 요구하는 조치라고 볼 수도 있다. 가족 내에서 이뤄지는 행위들이 전부 사생활은 아니게 된 것이다.

스웨덴인들은 정반대로 이를 지극히 개인주의적 삶의 방식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설명한다. 2011년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서 스웨덴 역사학자 라르스 트래가르드Lars Trägårdh가 발표한 ‘스웨덴식 사랑 이론swedish theory of love‘이그런 논리다.
이 이론은 진정한 인간관계는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고 불평등한 권력관계에 놓이지 않는 개인들 사이에서만가능하다고 말한다. 자율적이고 평등한 개개인 사이에서만 사랑과 우정 같은 인간적 교류가 이루어진다. 심지어부모와 자녀 관계에서도 서로 의존적이고 굴욕을 강요하는 권력관계가 존재하는 한 진정한 사랑은 불가능하다고바라본다. 국가는 이런 굴욕감에서 개인을 해방시킬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스웨덴의 경험이 보여주는 것은 삶은 개인주의적으로 살고, 해법은 집단주의적으로 찾을 때 저출산을 비롯하여 우리가 겪는 위기를 해소할 길이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스웨덴과 비교하면 한국은 거꾸로다. 삶은 집단주의적이고 해법은 개인주의적이다. 개인의 개별성을 별로 인정하지 않는 가족과 온갖 배타적 관계에 둘러싸여 집단주의적으로 살아가면서 육아, 교육, 주거 등은 다 각자 알아서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하니까 말이다.

반면 지금 우리 사회는 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각자 가족 밖에서 다른 일을 하는 것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또 권력을 가진 사람은 대체로 공감력이 낮다. 다른 사람 처지에 서보려고 애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사이코패스나 나르시시스트처럼 공감의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그들이 느끼기를 원하면 공감을 느낄 수 있다. 자기 집단내의 사람이라고 느낄 경우 사이코패스들도 공감력을 보인다. 공통의 경험도 꼭 공감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같은 일을 겪은 사람이 현재 그 일을 겪는 사람에게 가장 덜 공감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이런 공감의 한계 때문에 심리학자 폴 블룸Paul Bloom은 세상을 더 낫게 만들려면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는방식의 공감력 향상보다는 되레 한발 물러나 객관적이고 공정한 도덕에 근거해 판단하는 이성적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다.26 그는 미래의 위험을 예방하는 정책을 세우려면 공감을 제쳐놓고 생각해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기후변화, 고령화 사회 등에 대처하려면 미래의 추상적인 혜택을 위해 현재의 사람들에게 비용을 부과해야 하는데, 대체로 사람들은 막연한 대중의 고통, 미래의 큰 비극보다 특정한 개인, 눈앞의 아픔에 더 공감하기 때문이다.

"네 이웃과 적을 죽이지 마라. 설령 그들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그러나 젊은 세대의 강한 거부감의 이유가 단지 공동체와 공공성을 헷갈리는 기성세대의 사고방식에 대한 반감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다. 아마 각자 겪어본 공동체의 경험이 대체로 부정적이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사사건건통제하고 간섭하며 구성원을 존중해주지도 않는, 수긍할 만한 원칙도 없고 권위를 가진 사람 마음대로인 폐쇄적공동체들, 가족에서 학교, 회사에 이르기까지 겪은 부정적 경험이 공동체 일반에 대한 반감으로 드러나게 된 것은아닐까.
공동체의 억압적 측면을 주로 경험하며 성장한 사람들에게 개인과 공동체가 대립된 개념이 아니라는 말은 그저 공염불에 불과하다. 현실에서 개인과 공동체가 대립하고 양자택일의 대상처럼 경험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내생각엔 공동체가 작동하는 원리로 공공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공공성이 강화될수록 사생활의 자유는 오히려 커진다"

철학자 새뮤얼 셰플러 Samuel Scheffler가 『죽음과 사후생Death and the Afterlife (국내 미출간)에서 설명한 것처럼 나의사후에도 인간 세계가 지속될 것이라는 암묵적 믿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 나은 치료법을 찾고 더 나은 기술을연구하고 더 새로운 것을 창작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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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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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듣고 있으면 상대방에게도 마음이 열리고, 자신에게도 길이 열린다.
김혜진 작가의 책은 불행해서 좋았고 더욱 더 처절한 비극을 기대했는데, 예상과 달리 오랜만에 기분 좋은 해피엔딩 소설을 볼 수 있었다. 상담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난관에 부딪혀 절망의 한가운데 방황하면서 길고양이에게 자신의 비관을 대입해 보기도 하고, 자신의 자존심과 존엄을 지키기 위해 주변 사람들과 맞서려 하지만 쉽게 용기를 내지도 못한다. 원래 상담사라는 직업은 ‘들어주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주인공 해수의 경우는 ‘조언하는 사람’으로 상담을 했던 사람인 듯하다. 상담이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본다면 조금 현실감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겠지만, 원래 ‘자기 일’을 ‘남의 일’처럼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임해수 박사는 한 방송에서 대본에 주어진 대로 잘 알지도 못하는 연애인에 대해 발언하다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발언의 당사자 배우 박정기는 자살을 해버린다. 배우의 자살 원인은 모두 해수에게로 쏟아졌고, 해수는 자신이 다니던 상담센터에서 해고된다. 해고되는 과정에서 해수는 자신의 직장 후배인 조민영이 내부 회의 때 배우의 자살과 관련된 센터 운영의 어려움에 대해 임해수 박사의 사죄가 필요하다고 발언해 충격과 배신에 휩싸인다. 방송을 통해 유명세를 얻은 덕분에 주변의 시선도 그녀를 견딜 수 없게 하고, 사건 이후로 남편과의 잦은 갈등으로 이혼 절차를 밟고 있다.
해수는 해고 이후 매일 집에서 이성목 기자에게 자신의 발언이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갔다는 추측성 기사를 쓴 것을 사괴하라고, 상담센터 대표 이한성대표에게는 조민영씨의 발언이 대표와 사전에 논의된 계획이었는지를 밝혀달라고 요구하는 편지를 쓴다. 또 박정기의 아내 노은아 씨에게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결백함에 대해 변명하는 편지를 쓴다. 하지만 모든 편지는 결국 끝을 맺지 못하고, 고민만 하다가 버려진다.
황세이는 해수와 함께 순무라는 길고양이를 돌보는 학생이다. 해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상태가 좋아보이지 않는 길 고양이에게 연민을 느낌과 동시에 동질감을 느낀다. 세이는 같은 심정으로 고양이를 돌보다 만났다. 세이는 부모님이 이혼하고 학교에서 집단 따돌림을 당하지만 해수 앞에서 자신의 고통에 대한 내색을 하지 않는 아이다. 세이와 해수는 동네의 캣맘인 마루맘과 함께 순무를 구출하여 병원치료를 받게 해주려고 하지만 사람 손을 타지 않는 순무는 쉽게 잡히지 않는다. 세이와 가까워진 해수는 세이의 학교에 찾아가 세이가 피구대회 연습을 하는 것을 지켜보지만 피구 연습은 반 친구들이 세이를 집단 구타하는 것과 다름 없었고, 상담사였던 해수는 자신이 겪은 일로 대화하는 법을 잊어 그런 세이를 지켜보면서도 아무런 조언을 하지 못한다.

’아줌마, 근데요. 그럼 그냥 듣기만 할 수 있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요.‘(182p.)

어느 날 순무를 거의 잡을 뻔하다 놓친 해수는 자신이 순무를 잡다 생긴 상처에 그만 순무 구출을 포기해 버리지만 세이가 다시 찾아와 다시 구조하기로 마음 먹는다. 쉽게 잡히지 않던 순무는 결국 세이에 의해 구출되고, 병원에서는 순무의 기력이 회복될 때까지 수술을 미룬다.
해수는 박정기의 아내 노은아 씨를 어렵게 만나게 되고 죄송하다며 사과하는 해수에게 노은아 씨는 말한다.

‘전 가끔 그런 생각해요. 요즘 사람들은 다 반성에 미쳐 있는 게 아닌가. …… 이제 와서 어떤 말을 하는 게 무슨 소용일까요? 해수 씨도 감당해야 하는 것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잖아요.’(246p.)

세이의 준결승 대회가 열리는 날 세이를 응원하러 간 해수는 학부모 중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의 무례한 호기심을 버티고 있었고, 세이는 대회 도중 억누를 수 없는 감정에 복받쳐 싸움을 벌이고 만다.
세이의 아빠를 만난 해수는 세이 아빠의 하소연을 듣다가 배우의 자살 이후로 자신이 겪은 지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번 폭력 사건은 세이가 상대 학생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말을 하여 아빠를 당황시킨다. 동물 병원에서 기력을 회복한 순무는 수술을 받고, 세이 엄마와 함께 온 세이는 엄마의 허락을 얻어 순무를 입양한다. 그들은 병원에서 나와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세이는 피구는 연습해봤자 결국 시합에서 지고 나면 아무 의미없는 멍청한 스포츠리고 말하자 해수는 답한다.

‘시합은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 지는 쪽이 언제나 배우는 게 더 많은 거야.‘(292p.)

해수는 자신이 겪었던 일로 말로 하는 상담이라는 것에 환멸을 느끼고 대화의 의지도 잃는다. 그런 과정에서 세이를 가만히 지켜보고 세이기 말을 하고 싶어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 준다. 결국 세이가 피구는 아무리 연습해도 결국 공에 맞으면 죽는 허망한 것이라는 말에 삶이라는 것도 결국 무너지고 지는 경기이지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조언을 스스로에게 해주며 자신이 앞으로 계속 나아가야 할 의미를 찾게 된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상대방에게도 마음이 열리고, 자신에게도 길이 열리는 것이었다. 해수와 세이가 모두 자신의 처지를 이입했던 순무도 다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처럼, 해수도 모든 소송을 철회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한다.

전 그런 사람들이 아니에요. 전 그런 사람들과 달라요.
남들과 선을 긋는 말들. 다른 사람들을 멀리 내모는 말들. 결국 자신의 올바름과 정의로움을 도드라지게 하는 말들. 그러나 그녀에게 그 모든 말들은 차이가 없다. 사람들의 말은 그녀가 지나온 시간들을 상기시키니까. 여전히 모든 게 조금도 잊혀지지 않았다는 증거니까. 언제까지나 이런 식으로 끈질기게 자신의 이름이 회자될거라는 경고니까. 그건 그녀의 자격지심이고 피해 의식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녀는 휘말리고 싶지 않다. 그게무엇이든, 어떤 일이든, 더는 연루되고 싶지 않다. - P15

그녀는 가까운 편의점으로 가서 우유와 닭 가슴살 한팩을 사 온다. 그 작은 생명의 허기를 달래 주기 위해서. 담배꽁초와 비닐, 온갖 쓰레기로 뒤덮인 어둠으로부터구해 주기 위해서. 아니, 그녀는 그 불쌍한 고양이를 빌미로 다시금 자기연민에 빠진다. - P18

그녀는 환하고 넓은 길과 어둡고 좁은 길 사이에 위치한 자신의 집을 돌아본다.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지못한 상태로 상반된 두 세계의 경계가 된 집. 그녀는 정처없이 떠오르는 기억을 따라 걷는다. 그러면서 어떤 기억을, 어떤 감정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지난날의자신을 상기한다. 떨쳐 내려고 할수록 생각은 끈질기게달라붙고, 그녀는 이런 식으로 과오를 깨우치게 하는 시간의 무자비함을 실감하는 중이다. - P34

끝없는 의미 찾기.
그게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어요?
상담사였을 때 그녀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은 그것이었다. 그렇게 질문하면 정신없이 이야기를 쏟아내던 내담자들은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런 후엔 다급하게 찾아낸 의미들을 더듬거렸다. 그녀가 보기엔 확실하지도, 분명하지도 않은 이유들이었다. 그녀는 그것들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대신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 의미들이란 결국스스로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위해. 진짜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그러나 자신이 만들어 내지 않는 의미가 어디에 있을까. 진짜 의미와 가짜 의미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그녀는 허상을 좇는 것과 다름없는 의미 찾기 놀이를 그만둔 지 오래다.
결국 그녀는 순무를 돕겠다고 결심한다. 거기엔 어떤의미도, 이유도 없다. 그런 걸 찾고 싶은 생각도 없다. 마음을 정하고 나자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다. - P47

그러나 더 두려운 말은 따로 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이 내뱉는 말들이 아니라그녀가 기꺼이 삶을 공유한 이들이 간직한 말들. 그녀가표정과 눈빛을 단번에 읽어 낼 수 있는 가까운 사람들. 조심스러운 표정 뒤에 그들이 감추고 있는 의구심과 안타까움 같은 것들이 그녀를 괴롭힌다. - P47

차라리 자신에게 직접 해명을 요구한다면, 면전에서손가락질한다면, 드러내고 질책을 한다면, 오히려 그렇게 한다면 그녀는 흔해빠진 영화나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뻔한 변명이라도 늘어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자신이 얼마나 억울하고 괴로운지 항변이라도 할수 있었을 것이다.
N그러므로 사람들은 알고 있는 게 틀림없다. 예의와품위의 장막 뒤에 숨어 약속이나 한 듯 이처럼 간접적인제스처를 취하는 것이 실은 그녀를 가장 괴롭힌다는 것을. 그것이 자신들이 가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하고 강력한처벌의 방식이라는 것을.
그때 이미 그녀는 대화하는 법을 잊은 상태였다. 아니, 태주가 말한 것처럼 침묵을 무기 삼아 대화를 거부하기로 작정한 것인지도 모른다. 기억 속에서 그녀의 말문을 열기 위해 위로하고, 설득하고, 닦달하고, 다그치며안간힘을 쓰던 태주의 모습이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 P95

마루맘은 물러서지 않는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입장은 확고하고 나름대로의 명분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누가 옳고 그른지 단정하지 않는다.
판단을 유보하는 일. - P101

사람들은 못마땅한 표정을 거둬들이지는 않지만 말을 더 얹을 생각도 없어 보인다. 원하는 게 바로 그런 굽실거리는 모습이었다는 듯이. 이 문제에 관해서라면 자신들의 허락이 필수라는 것을 인지시키려는 듯이 아니, 그들이 보여 준 건 그녀에 대한 흔해 빠진 동정인지도 모른다. - P103

생명을 지니고 태어난 것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내야 할 숙명이 있다. 그건 선택의 문제가아니다.
그녀가 그것을 모르는 게 아니다. - P106

가슴이 아프다.
동정, 연민, 연약하고 가여운 동물에게 느끼는 흔해빠진 감정. 그녀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없다. 자신이 안타까워하는 것이 순무를 사로잡은 고통인지, 그런 고통에 노출된 삶인지, 고통을 견뎌 온 지금까지의 시간인지, 얼마가 될지 모르는 앞으로의 시간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것이 순무에 대한 것인지, 자신에 대한 것인지, 그둘이 뒤섞인 것인지도. - P109

그녀는 알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루맘이 이일을 계속하는 이유를. 나아지지도 않고, 달라지지도 않는 길고양이의 비통한 삶을 매일 마주하는 이유를. 그 안에서 마루맘이 발견하고 깨달은 것이 무엇인지를.
이유 같은 건 없어요.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고양이들도 뭐 이유가 있어서 사는 건 아니잖아요. 태어났으니까사는 거지. 저도 그래요.
마루맘은 끝없이 의미를 쫓아다니는 그녀를 꾸짖듯그런 대답을 하고는 돌아선다.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면언제든 연락 달라는 말을 남기는 것도 잊지 않는다. - P111

교문 앞에 이르러서야 그녀는 말로, 언어로, 아이를위로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있다. 상담사로서 자신이 가졌던 굳건한 믿음의 실체가 이처럼 허약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그녀는 어떤 말에도 확신을 가질수 없다. 자신이 한 말이 어떤 식으로 변형되고 왜곡되는지 짐작할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진작 깨달아야 했을 말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 P123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선택일 수 있고, 때로는 뭔가를 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말을그녀는 삼킨다. 그런 이유로 그녀가 이런 결정을 내린 건아니니까. 이것은 결정이라기보다는 보류에 가까운 선택이니까. - P155

이 남자는 자신이 뭘 안다고 생각하는 걸까. 자신이 하는 말은 뭐가 다르다고 여기는 걸까. - P169

남의 일에 입대는 게 무슨 도움 되는 이야기야. 다 저 좋자고 하는 이야기지.
뭐요? 나 좋자고 하는 이야기라니. 이게 어딜 봐서 나 좋자고 하는 이야깁니까? 그렇게 함부로 말씀하시면 안되죠.
함부로? 여기 함부로 말하는 사람이 누구야? 다 입다물고 잠자코 있는데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게 누구야? - P171

아줌마, 근데요. 그럼 그냥 듣기만 할 수 있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요. - P182

그러나 이 순간은 이 순간일 뿐이다. 그녀가 과거에 겪은 어떤 일의 결과도, 원인도, 이유도 아니다. 시간은곧게 나아가지 않는다. 삶의 모든 순간들이 인과의 직선을 따라가지 않는 것처럼. 그녀 자신이 단 하나의 얼굴로만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 P185

저 애가 소리라는 아이일까. 친구들의 인기를 등에업고 세이를 골탕 먹인다는 그 애일까. 하지만 진실이 그렇게 단순할 리 없다. 세이의 진실과 소리의 진실은 각자다른 방향에서 날을 벼리고 있을 것이다. - P233

이 일로 해수 씨도 타격을 입었겠죠.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테고 해명도 하고 싶겠죠. 자기 입장, 자기 처지. 사람들이 말하려는 건 결국 그런 거잖아요. 난 그런 거, 반성이라고 생각 안 해요.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게 반성에 더 가깝지 않나요? 이제와서 어떤 말을 하는 게 무슨 소용일까요? 해수 씨도 감당해야 하는 것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잖아요. - P245

생각해 보면 우습기 짝이 없는 질문들이다. 난생처음보는 사람에게 호구조사나 다를 바 없는 이런 무례한 질문을 퍼붓고 있는 꼴이라니. 게다가 그녀는 이런 질문을할 만큼 고양이의 삶과 습성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동물을 돌보는 것에 관해서라면 이들 가족이 그녀보다 훨씬 더 전문가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여자는 불쾌한 기색 없이 그 모든 질문들에 성실하게답한다.
따로 계약서 같은 건 안 쓰셔도 돼요? 쓰시는 게 안심되면 그렇게 하셔도 돼요. - P260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흔들림이 없다. 그건 그녀가 자신으로부터 한 걸음, 또 한 걸음 최선을 다해 물러서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연민과 자기비하 더는 그런것들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정말 가능할까. 남의 일을 말하듯 스스로에 대해냉정을 유지하는 게 가능할까.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할 수있을까. - P282

연습은 그냥 연습이잖아. 진짜 시합은 연습한 거랑은다르고, 진짜 시합이 어떻게 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거니까.
그녀가 답하고 아이가 되묻는다.
그럼 뭐 하러 연습해요? 아무 도움도 안 되는데요.
진짜 그렇게 생각해?
아줌마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아이가 묻는 건 정말 피구에 관한 것일까. 어쩌면 삶에 관한 것이 아닐까. 아이는 그녀에게 질문을 하는 것일까. 선문답 같은 대화를 통해 교훈을 주려는 것일까.
물론이지. 그렇게 생각 안 해. 시합은 다시 시작하면되니까. 지는 쪽이 언제나 배우는 게 더 많은 거야.
정말 그런가. 진짜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그녀는 생각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자신이 한 그 말에서 위로라고 할 만한 것을 얻는다. - P292

그래요. 뭐, 그렇게 마음을 정하셨다니 더 말하진 않겠습니다. 한 가지만 말씀드리죠. 박사님, 사람을 너무믿으시면 안 됩니다. 선의라는 건 좋을 때나 선의예요. 상황이 바뀌면 다들 선의를 가장 먼저 버립니다. 예외 없이요. 어떤 경우든 최악을 생각하셔야 해요. - P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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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94966 2023-01-18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회생활은 사람과 더불어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상대방과의 대화가 가장 중요하지요 상대방과의 대화의 기본은 말하기 보다 먼저 상대방의 말에 귀를 열고 들으면 상대방도 내가 듣고 있다는 것을 알고 마음을 열고 대화를 하게 되지요 듣기가 대화의 기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책입니다.
 
금테 안경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조 바사니 지음, 김희정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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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를 배경으로 사회적으로 차별과 박해를 받던 유대인과 동성애자 두 주인공의 쓸쓸한 내면의식을 보여준다. 같은 차별과 박해를 받지만 유대인과 동성애자의 연대에는 연결점을 찾을 수는 없기에 서로의 처지를 안쓰러워 하지도, 위로를 얻지도 못하고 침울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더욱 처량해지기만 한다.

페라라의 의사이자 동성애자인 파디가티는 강사 자격증 취득을 위해 볼로냐를 오가는 열차에서 대학생 화자의 무리들인 데릴리에로스, 니노, 비안카와 어울리게 되고, 중년의 나이를 뛰어넘어 친구가 된 그들 중 빼어난 외모를 가진 델릴리에르스와 동성관계를 가진다. 화자의 가족들이 리초네에서 휴가를 보내는 동안 파디가티와 델릴리에르스도 같은 장소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고, 그들의 ‘볼썽사나운 소문’이 점차 퍼져나가던 중, 델리리에로스가 파디가티와의 언쟁 중 폭력을 휘두르고 파디가티의 모든 짐을 훔쳐 달아나는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한다.
휴가를 마치고 페라라로 돌아온 화자의 가족들은 ‘인종법’시행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점차 붉어져 불안해진다. 그러던 중 화자는 니노를 만나 델릴리오스가 돈 많은 게이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닌다는 소문과 인종법에 대해 비난하는 자신의 견해를 밝히지만 결국 자신은 이탈리아의 유서 있는 문중이라며 문화담당관일을 제안받은 것을 자랑하며 화자의 처지를 비참하게 만든다.
화자와 우연히 만난 파디가티는 성정체성에 관한 소문으로 병원에서 해고되었고 불결한 유대인인 화자와 동성애자 파디가티는 주인을 잃은 개와 함께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는 동종의식을 공유한 채 페라라 거리를 걷는다. 파디가티와 화자는 점심약속을 잡지만 서로 당일에 연락을 하지 않았고, 얼마 뒤 화자는 신문에서 파디가티의 자살 단신을 본다.

중간에 작가 본인이 유대인 차별과 학살을 자행한 극단의 시대를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서 조금 더 소설의 심연에 빠져들 수 있었다. 화자는 아버지가 고위 공직자에게 들은 인종법이 실현되지 않을 것이라는 소식에도 오히려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던 고독감이 바로 그 순간 한층 더 심해졌다’(142p.)는 불안과 절망의 심리상태를 보인다. 그러던 중 발견한 파디가티의 자살 소식으로 소설은 끝나고, 파디가티 자살이라는 결말은 화자의 미래도 (역사적 사실대로) 어두워 보인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이탈리아를 배경이 적막하고 쓸쓿한 감성을 더 증폭시키는 것 같았다.

안다는 것은 이해하는 것, 더는 궁금해하지 않는 것, ‘내버려두는 것’과 같았다 - P20

그는 울화통을 터뜨리듯 기묘한 외침으로 말을 마쳤다. 마치 마지막에 델릴리에르스가 훔쳐간 물건의 목록을 열거하는것이 자신의 괴로운 심정을 더 강력한 자부심과 쾌감으로 바꿔놓기라도 하는 것처럼. - P98

그러고는 잠시 뒤에 입을 열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해. 최***...
근 너와 네 가족을 자주 떠올렸거든. 정말이야. 하지만 내가훈수를 좀 둬도 된다면, 만약 내가 네 입장이라면…
"뭘 해야 하지요?" 나는 맹렬하게 그의 말을 막았다. "내가나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순응하는 것?"
"나로서는 네가 왜 그러면 안 되는지 모르겠어."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이봐, 내 소중한 친구,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게 훨씬 더 인간다운 거야(그렇지 않았다면, 넌 여기 나와 같이 있지도 않았을 테지!). 왜 거부하고, 왜 맞서야 하지? 내 경우는 너랑 완전히 달라. 지난여름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난 스스로 견딜 수가 없었어. 더는 용납할 수 없었고, 해서도 안 되었지. 어떤 때는 거울 앞에서 수염을 깎는 것조차 견딜 수 없었다면 믿을 수 있겠니?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은 옷을 다르게 입는 것이었어! 하지만 이 모자.…… 이 외투..…… 내 분신이나 다름없는 이 안경이 없는 나를 상상할 수 있겠어? 그런데도 이렇게입는 것이 너무 우스꽝스럽고 기괴하고 터무니없게 여겨지는거야! 오, 그래, 온 곳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이 상황을 말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할 순 없어. 정말이지, 내가 할 수 있는거라곤 아무것도 없다고!" - P124

아버지의 기쁨은 부당하게 쫓겨났다가 선생님의 복귀 명령을 받고 교실로 돌아온 학생의 기쁨과 같았다. 삭막한 복도에영영 추방되어 있으리라는 예상과 달리 갑작스럽게 친구들이있는 교실로 돌아가는 것이 허락된 그 학생은, 벌칙을 면했을뿐 아니라 아무 잘못이 없음을 인정받고 완전히 명예를 회복했다고 기뻐한다. 결국 아버지가 그 아이처럼 기뻐하는 것이옳지 못한 걸까? 나에겐 그렇다. 지난 두 달 동안 내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던 고독감이 바로 그 순간 한층 더 심해졌다.
총체적이며 결정적이었다. 나는 나의 유배지에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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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기완을 만났다
조해진 지음 / 창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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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은 우리가 삶을 포기해야하는 사유일까, 계속 살아가야하는 이유일까.

윤주는 김작가와 류재이 피디가 함께 성금을 모금하는 연민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로 한 17세 소녀이다. 윤주의 아버지는 과거 공사장에서 떨어지는 벽돌에 맞아 허리를 쓰지 못하게 됐고, 그런 자신을 평생 스스로 학대하며 살았다. 엄마는 혼자 가족을 부양하다 어느 날 윤주와 동생에게 피자를 사주고는 말없이 집을 떠났다. 그날 이후로 윤주의 오른쪽 뺨이 부풀어 올랐고, 김작가와 피디는 윤주의 신경섬유종 치료를 위해 프로그램에 섭외했다. 다가오는 명절 기간에 편성을 맞추기 위해 김작가는 윤주의 수술을 예정보다 몇 달간 미루기로 했는데, 그 사이 조직 검사를 다시 한 결과 윤주의 혹은 심경섬유종이 아닌 악성 종양으로 판정이 났고, 김작가는 자신의 계획으로 윤주의 증세를 키웠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다 방송을 도피하듯 관두고 류재이 피디의 청혼도 거절한다 .

로기완은 북한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5살 때 죽고 엄마와 함께 탈북해 연길에 체류한다. 중국 공안을 피해 고단한 삶을 이어오던 엄마가 교통사고로 즉사하고, 로는 자신의 신분 때문에 죽은 엄마의 시신이 안치된 병원에도 가지 못하고 친척을 통해 죽은 엄마의 시신을 판 돈으로 벨기에로 향한다. 로는 호스텔에서 지내며 한국 대사관을 찾아가지만 자신이 북한 주민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해 아무런 구제를 받지 못하고, 노숙자가 되어 구걸을 하며 지내다 어느 날 경찰서에서 깨어난다. 경찰은 언어가 통하지 않고 어린 아이처럼 보이는 로를 고아원으로 보내고, 그곳에서 한국어 노래를 흥얼거리는 로가 한국사람이라는 것을 눈치챈 원장 엘렌은 로를 난민신청국으로 보내 준다. 심문실에서 로는 북한 출신 벨기에 의사 박을 만나고, 박은 통역과 로의 신분을 검사하는 과정에서 로가 북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적극적으로 그를 도와 북한 국적을 인정받게 하고 난민 지위를 얻어 준다. 정식으로 신분을 갖게 된 로는 중식당에서 일하며 동료 필리핀 여자 라이카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라이카는 불법체류 단속에 걸려 외국인 수용소에 감금이 되었다 도망쳐 나온다. 로는 불법체류자들에게 호의적인 영국으로 라이카를 도피시키고,자신도 자신의 난민 지위를 모두 포기한 채 라이카를 따라 영국으로 떠난다.

박은 평양 출신으로 월남 후 서울에서 의대를 다니다 정치사건에 연루되어 도피성 유학을 떠난 후 벨기에에 자리잡은 의사이다. 박은 김작가가 벨기에에서 로기완의 인터뷰를 맡았던 잡지의 기자를 통해 알게 되었고, 박은 로에 관한 글을 쓰고 싶다는 김작가에게 자신의 아파트를 빌려주며 로가 남긴 일기장을 건네주어 김작가가 로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게 해준다. 김작가는 로기완의 일기를 보며 그가 머물렀던 장소들을 찾아다닌다. 박은 김에게 자신이 진료했던 환자 중 하반신 마비가 된 환자가 원하던 안락사를 해주지 않아 3년 뒤 그 환자가 자살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자신이 어쩌면 그 환자에게 3년간의 고통의 시간을 준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말기 간암 환자에게 결국 안락사를 시켜주고 의사생활을 접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김은 그 말기 간암 환자가 박의 아내라는 것을 눈치챈다. 김도 윤주에 대한 자신의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는 상황에서 박이 짊어지고 있는 아내에 대한 죄책감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저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살아야 했습니다.’(124p.)

김이 로를 찾아 벨기에로 떠날 결심을 한 로의 문장은 로가 가지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김은 벨기에에서 로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로가 처절하게 살아남아야만 했던 과정을 따라가며 자신의 죄책감을 지고서라도 살아가야하는 이유를 찾는다. 그런 과정에서 박이 자신의 과거로부터 비롯된 죄책감이 로에게 공감하며 헌신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타인에게 진심으로 호의를 다하는 모습이 자신이 살아가야 할 이유라고 생각한 듯하다.

박은 뒤늦게 로의 자취를 따라갈 시간을 준 뒤 김에게 현재 로의 영국 주소를 알려주었고, 윤주는 종양 제거 수술을 하고 귀까지 절단했다는 소식을 전해준다. 김은 윤주의 잘린 귀를 평생 자기가 짊어질 죄책감으로 받으들이고, 영국으로 향해 로와 라이카를 만난다.

얼마 전 이기호 작가의 책을 읽으면서 진정한 환대라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같은 공감대를 가진 사람들이,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진정 서로를 환대하고 타인을 위해 희생할 수 있다는 답을 얻게 된 것 같다.

우리의 삶과 정체성을 증명할 수 있는 단서들이란 어쩌면 생각보다 지나치게 허술하거나 혹은 실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의도와 관계없이 맺어지는 사회적 관계들, 관습 혹은 단순한 호감에 의해 만들어지는 수많은 커뮤니티, 실체도 없이 우리 삶의 테두리를제한하고 경계짓는 국적이나 호적 같은 것들은 혼자가 아니라는위로는 줄 수 있겠지만 그 위로는 영원하지도 않고 진실하지도 않다. 회사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프린트된 명함이나 우리의 출생과죽음, 결혼과 건강을 기록하는 관공서의 수많은 서류들도 개인의절대적인 존재감을 증명해주지는 않는다. 지갑 속의 기념사진, 일주일 단위로 약속과 일과를 적어내려간 수첩, 이국의 어느 공항 출입국심사대에서 경쾌한 소리와 함께 찍힌 여권 속의 스탬프들, 어딘가로 들어갈 수 있는 녹슨 열쇠나 읽고 있던 책의 접힌 페이지같은 것들 역시 우리 삶의 부분적인 단서는 될 수 있을지언정 생애전체를 관통하지는 못한다. 심지어 아침 7시면 눈이 떠지고 저녁 6시가 되면 온몸이 피로해지는, 씨스템에 길들여진 몸의 리듬마저변하지 않는 소속감을 약속해주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는 그저 나무둥치에 주저앉은 날개가 젖은 새처럼하늘로 날아갈 수도 땅으로 떨어질 수도 없는 순간순간을 살고 있는 것이라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 P10

육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는 기품과 자존심을 지키며 고집스럽게 늙어왔다는 인상을 주었다. 쓸데없는 감정적인 소모나 의도하지 않은 상처로부터 아주 오래전에 해방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검은 테의 두꺼운 안경 너머 눈동자는 고독해 보였다. 그는내게, 안타깝게도 그 탈북인은 1년여 전 브뤼쎌을 떠났고 현재는영국 런던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안타깝게도,라고 그는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에서 안타까움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괜찮다고, 지금 당장 그 탈북인을 만나지 않아도 상관은없다고 대답했다. 그를 무어라 불러야 할지 판단할 수 없어 호칭은생략한 채였다. 기자는 그를 박사님이라고 불렀으나 어쩐지 그에겐 어울리지 않는 호칭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 P20

이토록 풍요로운 세계 저편에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난하고 기근에 허덕이는 거대한 공동체가분명 하나의 국가로 존재한다는 것이 로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 그 세계로부터 왔다는 사실은 더더욱 믿을 수 없었다.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머나먼 연회장을 초대장도 없이 찾아온 이상한 방문객이 된 것처럼, 고향을 떠올린 그 순간 로는 스스로가 이유없이 부끄러워졌다. - P40

유럽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집시다. 집시들은 갓난아기를 안고 구걸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언젠가여행책자에서 읽은 적이 있다. 사람들의 동정심을 유발하는 데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아기만큼 효과적인 유인책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거리를 걷는 대부분의 브뤼셀 사람들은 아기가 유발하는 동정심 따위엔 이미 면역이 되어 있는 듯 좀처럼 집시여인의 때 묻은종이컵에 동전을 던져주지 않는다. - P44

자식들을 위해 부엌을 드나들 수도 없었던 윤주의 아버지는 자신이 아무쓸모없는 존재라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 자기학대적인 혼잣말을 반복했다. 무려 2년 가까이 윤주의 아버지는 형체도 없는 자기 앞의거대한 괴물과 싸워야 했던 것이다. - P45

마음이 아픈 사람은 어디든 떠날 곳이라도 있지만 몸이 아픈 사람은 병원 외에는 갈 곳이 없다는 걸그때 처음 알았다. 누구나 아는 당연한 사실인데도 솔직히 가슴으로는 깨닫지 못했다. - P49

출연자의 고통을 어떻게든 전달해보려는 진심이 느껴졌다고, 재이는 그날 그런 말도 했었다. 드디어 써브 작가에서 벗어나 메인작가가 되었다는 들뜬 마음뿐이었으므로 나는 그가 채워준 소주잔을 든 채 열심히 고개만 끄덕였을 뿐, 나의 진심 같은 건 나 역시 모르는 일이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진심인지 아닌지를 헤아리고 진심이 아니라면 왜 그리되었는지 곰곰이 성찰하면서 진심이 아님에도 기계적으로 대본을 써대는 자세를 반성하는 시간은 빡빡한 방송 스케줄 속에선 향유할 수 없는 우아함이었다. 눈 뜨면 촬영날이었고 밤새도록 쓰고 좀 쉬려고 하면 편집 스케줄이 잡혀 있었다. 출연자들은 수시로 연락을 해왔고 현장에서는 늘 돌발상황이 생겼으며 피디들은 내가 쓴 대본을 흔들며 "좀더 극적으로!"를 외쳐댔다.
방송국에서 4년여 동안 스크립터와 써브 작가로 일하며 나는 대체 무엇을 한 것일까.
무엇을 했는지는 나도 잘 알고 있다. 나는 쉴새없이 방송용 대본을 썼다. 한번 전파를 타고 난 후에는 누구도 다시는 들춰보지 않는 종이뭉치 속에서 내 이십대가 소모됐다. 일은 더없이 단순했지만, 일 이외의 것들은 늘 피곤했다. 어쩌면 나는 그 4년여 동안 일자체에 몰두했다기보다는 일 이외의 것들을 견디기 위해 일을 이용한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견디고 또 견뎠다. 하루종일 책상만 지킨 채 출연자 섭외뿐 아니라 장소 헌팅까지 작가들에게 일임하던나태한 피디와 새벽에도 수십통씩 전화를 해오던 히스테릭한 메인 작가, 택시비 대기엔 빠듯한 월급 받는 거 뻔히 알면서도 굳이막차시간 지날 때까지 붙잡아놓고는 같은 말만 반복하던 상사들을 나는 견뎌야 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생리대 심부름을 시키던 선배 작가와 프로그램 종방 때쯤 되면 여기저기 눈치 보며 줄대기에 바빴던 동료 작가들도 내가 견뎌내야 하는 목록에 포함됐다. 다른 사람의 기획안을 거의 그대로 베껴서 제출하던 사람,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노골적으로 옆사람을 깎아내리던 사람, 사실 확인도 안된 소문을 가공하고 부풀리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던 사람……… 그 모든 사람들을 견디고 지나오면서 나는 제법 성공적으로 사회화되었다. 적당히 타성에 젖어 있고, 열정은 근거없는악의나 질투에 쏟아붓고, 책임을 두려워하고, 그 누구도 절실하게필요로 하지 않는, 충분히 자족적인 사람. 그러면서 늘 결여되어 있는, 잘 웃지도 울지도 않는 메마른 사람. 몇개의 프로그램을 거치는동안 내게 진심이란 단어는 자연스럽게 망각의 목록에 포함되어갔다. 그래서 5년 전의 나는 진심 운운하는 피디의 말에 부끄러움도느끼지 않았다. 그가 내게 하고 싶었던 말은 출연자의 고통은 어떻게 해도 전달되지 않는 것 아니냐는, 일종의 부정문 같은 것이었다는 사실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 P51

언젠가 재이는 신이란 자신과 세계를 속이면서 살아 있음을 영속시키려는 나약한 자들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소아암에 걸린 딸을 위해 기도밖에 할 줄 모르는 이십대 초반의 어린 엄마를 촬영하던 때였다. 그때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원한 삶이 아니라 순간적인위로가 필요해서 신을 믿는 것이라고 반박했었다. 만약 그렇게라도 위로받을 수 있다면 신은 그것만으로도 존재가치가 있는 것 아니냐며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하지만 알 수 없었다. 의사로부터감히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그 뜻밖의 소식을 전해들은 후로 내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이었고, 내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이란 애초에 이토록 불운한 삶을 하필이면 윤주에게 배당해놓은 신에 대한야속함, 분노, 그뿐이었다. - P56

그때 내 안에서 뭔가 쾅, 하고 무너졌지. 나는 그환자에게서 약물로 편히 죽을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 대신 3년 동안의 엄청난 스트레스와 죽음 직전까지 이어졌을 극한의 고통을제공한 셈이오. 그때 처음으로 의사라는 직업에 대해 회의를 느꼈던 것 같아. - P78

윤주에게 내가 걸었던 희망은 윤주의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는 것, 그래서 나 역시 그애의 그 미워하는 마음만큼 서운해하며동시에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는 그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그 진실마저 외면하는 순간, 내 남은 생애는 이가 갈릴 만큼, 지극히 인간적으로 영원히, 언제까지고 영원히, 스스로를 미워하고 또 미워해야 하는 나날뿐일 테니까. - P97

이게 다 무슨 말인지 알겠소? 한 사람의 영혼이, 그 사람이 살아온 숭고했던 시간들이 잔인하게 병든 육체에 갇혀서 서서히 증발된다는 말이오. 그것도 끔찍한 고통 속에서. - P119

저는 귀하께 로기완의 글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보냅니다. 그는 비록 북한 신분증을 갖고 있지 않지만, 저는 그가 북한 사람임을 확신합니다. 저는 우리가 그를 돕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사명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외면해서는 안되는 진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무적이고 정치적인 방식이 아니라 정서적이고 인간적인 방식으로 그를 도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정치적인 문제에몰두하고 있는 동안 놓치게 되는 것은 개개인의 고통이며, 이것이 우리의 비극임을 부디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 P149

로와 박의 유대는 로가 푸아예 쎌라를 나와 중국 식당에서 일하며 중국인, 베트남인, 파키스탄인과 함께 아파트를 빌려 생활하는동안에도 이어졌다. 더이상 보고서 같은 건 쓰지 않아도 되던 때였지만 언제나 박이 먼저 연락해 로의 아파트를 찾아갔다. 로에 대한박의 관심과 애정은 박 역시 모친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뼈저린 회한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그리고 또하나, 어머니의 죽음이 자신 탓이라고 여겼던 로의 죄의식은 아내의 죽음을 도울 수밖에 없었던 박에게는 절대적으로 공감하는 영역이었을 터이다. 바로 그죄의식이 박과 로를 이어주는 공통의 상처였다. 박은 로를 외면할수 없었다. - P156

"나는 늙었어요, 김작가 늙었다는 말의 의미를 아오? 감정이 다사치가 된다는 뜻이에요. 남은 시간이 빤하니 저절로 그리되어가는 거요. 관용이라면 관용이고 체념이라면 체념이겠지." - P171

네? 묻는 윤주에게 나는 런던에서 그 사람을 만나고 나면 곧바로서울로 돌아가겠다고, 이번엔 늦지 않겠다고, 너무 늦어버려서 네가 나를 가장 필요로 할 때 또 그렇게 외면하며 지나가버리는 일은없도록 하겠노라고 빠르게 말한다. 윤주는 풋, 하고 웃는다. 그러고는 자신이 찍은 재이의 사진을, 개중 멋지게 나온 것들만 골라서내 이메일 주소로 보내겠다고 일러준다. - P182

커피를 마시는 동안 나는 박에게 윤주 이야기를 한다. 살아 있는한 계속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고, 살아야 하는 이유를 부정하는 고통 역시 살아가는 과정에 포함되는 이상한 아이러니를 이미 알아버린 그 열일곱살 소녀에 대해서. 박은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긴 하지만 서울에서 방송국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과정에 나의 책임은 없다는 식의 부질없는 위로는 해주지 않는다. 자세한 것을 묻지도 않고 섣부른 판단도 하지 않는다. 박은 그저 묵묵히 들어준다. 내 이야기가 다 끝난 후에야 박은 조심스럽게 말할 뿐이다.
"때로는 미안한 마음만으로도 한 생애는 잘 마무리됩니다." - P183

살아 있는 나를 긍정하게 된 과정을 적은 이야기, 한 달 동안의 여정을.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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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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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 큰 관심이 없어서 그런지 신영복이라는 사람을 모르고 있다 이번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작가는 국가보안법으로 몇가지 논란이 있었고, 개인적으로 정치적 색을 입은 책은 꺼려는 편이지만, 읽을 기회가 생겨 탐독하게 되었다. 하지만 첫 장부터 나와는 결이 맞지 않는 사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과 진실이라는 부분에서 시적사상이라며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고, 상징을 주입하고, 해석을 시도하라는 피곤한 조언을 보자 장장 400페이지나 되는 이 책이 나를 피곤하게 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도 완독을 해야하는 의무가 있기에, 잠시나마 인식의 틀을 신영복의 규격에 맞게 변형하여 독서를 이어나갔다.
1부는 고전에 대한 강의이다. 맹자의 이양역지로 자신의 얕은 배려심을 반성해야한다는 점이나 노자의 비움과 채움이 조화된 무위사상, 장자의 탈정(우물에서 벗어나야 한다)이나 기계로 말미암는 잉여가치의 그릇된 해석, 묵자의 비폭력 사상은 현시대에도 잊지 말아야 할 가치라는 점 등을 강의에서 소개하고 있다. 특히 노자의 무위사상은 마음에 와 닿았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작가가 인상적이었다는 학생 때의 일화( 흘러가는 시간일 뿐인데 새해에 왜 굳이 각오나 다짐을 해야하냐는 친구의 말)가 요즘 내가 지향하는 수양의 자세인데(사실 이 부분은 사실과 진실이라는 챕터와는 모순된다), 나에겐 노자의 무위가 나의 신념과 비슷한 맥락으로 와 닿았다. 노자의 사상을 처음 접한 것은 아닐텐데, 지금 나의 생각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보니 관심이 가고 새롭게 다가왔을 것이다. 노자의 사상을 조금 더 자세하게 읽어볼 기회를 만들어야겠다.
2부는 조금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수감생활 중의 사색에 대한 강의였다. 1부와는 다르게 심금을 울리는 문장들이 많아 너무 많은 부분을 발췌한 것 같다. ‘동정’에 대한 사려깊은 해석과, 위선과 위악을 비교하며 약자들이 강자에게 억압받는 구조적인 문제를 해체하여 신랄하게 분석해 둔 부분은 두고두고 잊지 말아야 할 내용이었다.(개인적으로 위선보다는 위악이 도덕적으로 낫고 정당하다는 생각이다)

무기징역수라는 낮은 위치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존경받는 사상가로 거듭나 명성을 휘날리며 살았지만 약자들을 대변하고 그들의 위신을 지켜주려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문제는 나에게 과제로 남은 실천의 문제인 듯하다. 실천이 되지 않으면 책을 소화한 것이 아니라 그냥 읽고 암기하고 멋있는 척 떠들어 대는 허세에 지나지 않은가(386 좌파 대학생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그런가) 물론 실천에 자신은 없다. 모순적이고 기만적인 자기 자신과 화해하고 무심을 무위라고 여기며 노자사상을 실천한다고 착각하는 결말도 있을 수 있다. 어떤 삶의 자세든 그 결과가 격차를 벌리거나 약자의 생산을 초래해서는 안된다. 작가가 책에서도 지적했듯이 현대인들이 숭배하는 자본주의 사상의 방향이 결코 올바르지 않으니 미래의 전망은 어둡지만…

그 만남에서 깨달은 것이 바로 그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이 걸어온 인생의 결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대단히 완고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설득하거나 주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 P14

그리고 강의라는 프레임도 허물어야 합니다. 학부 강의에서 가장 불편한 것이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강의라는 틀입니다. 문제 중심이어야 하고 정답이 있어야합니다. 개념과 논리 중심의 선형적型的지식은 지식이라기보다 지실의 파편입니다. - P15

우리가 일생 동안 하는 여행 중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 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낡은 생각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오래된 인식틀을 바꾸는 탈문맥입니다. - P19

이처럼 문사철은 세계의 정직한 인식틀이 못 됩니다. 언어와개념 논리라는 지극히 추상화된 그릇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를 담을 수 없음은 물론이고 방금 일별한 것처럼 문학, 역사, 철학 역시 세계를 온당하게 서술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문사철이라는 완고한 인식틀에 갇혀 있습니다. 이러한 인식틀을 깨뜨리는 것이 공부의 시작임은 물론입니다. - P25

이 이야기는 우리가 사람을 이해하는 방식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관한 고민이기도 하지만 진실이 사실보다 더 정직한 세계 인식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보는 것은 그때 그곳의 조각에 불과합니다. 시적인 관점이라는 것은 사실성과 사회미에 충실하되 사실 자체에 갇히지 않는 것입니다. - P32

시 이야기가 기승전결과 정반합까지 이어진 까닭은 시가 본질적으로 세계 인식의 틀이기 때문입니다. 시란 문학서사 양식을 뛰어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시서화는 보다 높은 차원의 인식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와 숫자로서 세계를 인식하고 있는 것이 현 수준의 우리들의 세계 인식입니다. 혹시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릴 때 부르던 노래입니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면 기차. 기차는 빨라. 빠르면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은 것은 백두산." 여기까지 읊고 나서 노래를 시작합니다. "백두산뻗어내려 반도 삼천리 우리들이 구축하고 있는 논리의 실상을보여줍니다. 원숭이에서 백두산까지의 연결에는 최소한의 인과관계도 없습니다. 시를 읽는 오늘의 현실은 매우 안이합니다. 시뿐만니라 시서화악 모두 교양 또는 예술이라는 장식적 그릇에 담아 두고있습니다. 시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란 것만은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시적 정서와 시적 사유가 돋보이는 사람이있을 것입니다. 유연한 시적 사유는 비단 세계 인식에 있어서뿐만이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를 대단히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 P37

현실을 현실로서만 보는 경우는 없습니다. 산에 나무 한그루를 심고 내려올 때에도 ‘저 나무가 10년 후에는 이만큼 자라겠지‘하는 상상을 안고 하산합니다. 현실과 이상은 반드시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이상‘은 ‘현실의 존재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은 우리의 인식 속에서 끊임없이 이상화되고 반대로 이상은 끊임없이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엄마와 딸‘, ‘현실과 이상‘ 만이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물이나 상황이 그렇습니다. - P42

기 위해서입니다. 공자가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고 했습니다. 서술만하고 창작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다 있습니다. 사실 나도 교도소에서 생전 안 보던 고전들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이미 다 서술되어 있었습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이 실감났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자체가 브로델이 이야기하는 장기 지속의 구조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 P58

자리와 관련해서 특히 주의해야하는 것은 권력의 자리에 앉아서 그 자리의 권능을 자기 개인의 능력으로 착각하는 경우입니다. 그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알튀세르LouisAlthusser의 비유가 신랄합니다. "히말라야 높은 설산에 사는 토끼가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동상이 아니었습니다. "평지에 사는 코끼리보다 자기가 크다고 착각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부려서 하는 일이 자기의 능력이라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사람과 자리를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
득위와 실위의 이야기로 이해하기 바랍니다. - P64

니다. 배울 것이 없는 상대란 없습니다. 문제는 배울 것이 없다는 폐쇄된 사고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열린 사고입니다. 남과 북의 통일과 화화에 대한 열린 사고입니다. - P85

물건으로 가득 찬 방은 방으로서의 쓰임이 없습니다. 이 장의 결론은 "유有가 이로움이 되는 것은 무無가 쓰임이 되기 때문이다"입니다. 무無란그냥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근본‘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할 뿐입니다. 세상은 무와 유가 절묘하게 조화되어 있는 것이 노자의 생각입니다. - P123

강의 첫 시간에도 이야기했습니다만, 나는 자주 사람을 두 종류로 대별합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보다 강한 사람에게 당당하고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관대한 사람과 반대로 자기보다 강한 사람에게 비굴하고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오만한 사람입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밖에 없다고 합니다. 주변 사람들을 잘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조합(combination)은 없습니다. 강한 사람한테 비굴하지만 약한 사람한테 관용적인 사람은 없습니다. 원칙 없이 좌충우돌하는 사람은 있을지 모르지만, 연대는 위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추종이고 영합일 뿐입니다. 연대는 물처럼 낮은 곳과 하는 것입니다. 잠들지 않는 강물이 되어 바다에 이르는 것입니다. 바다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 P135

노동시간을 연장하여 얻는 잉여가치를 절대적 잉여가치라고 하고 필요노동시간을 단축하여 얻는 잉여가치를 상대적 잉여가치라고 합니다. 너무 간략하게 설명 드렸습니다만 기계의 본령은 바로 이 상대적 가치를 생산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기계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기계가 도입되면 6시간 걸리던 필요노동시간이 3시간으로 줄어듭니다. 기계가 갖는 효율로 말미암아 6시간 걸리던 것이 이제 3시간밖에 걸리지 않게 된다는 것은 그 생산물의 가치가 6에서 3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치량이란그 속에 담긴 노동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효율성이 높은 기계를 사용해서 만들었거나 효율성이 낮은 기계를 사용해서 만들었거나시장에서 동일한 가격으로 거래되기 때문에 가치와 가격을 같은 뜻으로 이해합니다만 기계는 가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줄이는 역할을 합니다. 더 효율적인 기계가 광범하게 도입되면 우리가 살아가는데에 필요한 물건들을 생산하는 데에 필요한 노동시간이 훨씬 더 줄어듭니다. 1일 8시간 노동이 4시간으로 단축될 수 있습니다. 주 5일근무가 주 3일 근무로 단축될 수 있습니다. 노동시간이 단축되지 않는 이유를 여러분이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쨌든 기계는 가치를 줄여 주는 역할을 합니다. 늘려 주는 역할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기계란 무엇인가? 기계란 한마디로 과거 노동입니다. - P142

모신 하미드Mohsin Hamid의 『주저하는 근본주의자』에서 주인공인 파키스탄 출신의 찬게즈Changez가 WTC빌딩 9·11테러를 일컬어 ‘이슬람이 미국을 무릎 꿇린‘ 통쾌한 사건이라고 당당히 주장합니다.
소설에서는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상대가 미국의 CIA비밀요원이란암시가 없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미드는 ‘미국 사람들도이슬람 국가들에 대한 무자비한 포격과 파괴를 게임 즐기듯 보지 않았는가!‘라고 반론합니다. 미국의 일방적 이데올로기 지배하에 있는우리들로서는 좀처럼 듣지 못하는 놀라운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 P166

간디가 열거하는 ‘나라를 망치는 7가지 사회악‘이 있습니다.

원칙 없는 정치 Politics without principle
노동 없는 부Wealth without work
양심 없는 쾌락Pleasure without conscience
인격 없는 교육 Knowledge without character
도덕 없는 경제 Commerce without morality
인간성 없는 과학Science without humanity
희생 없는 신앙 Worship without sacrifice

1930년대의 인도가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가 성찰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 P191

이러한 대비가 그렇게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대비 개념은 보완관계로 읽어야 합니다. 대립관계로 읽는 것은 결정론적 사고입니다. - P195

나는 같은 추억이라고 하더라도 당사자들의 마음에 남아 있는 크기가 서로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힘겨운 삶을 이어 왔을 그들에게청구회에 대한 추억이 나의 것과 같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 P209

내가 전기고문을 당하다 쓰러진 적이 있습니다. 간신히 정신이들었을 때입니다. 취조관이 의무실에 전화를 걸었습니다.‘의료 처치를 요청하려나 보다‘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게아니었습니다. 아침에 우리 집 애 감기약 부탁했는데 그걸 퇴근하기전에 내 책상에 갖다 놓으라는 전화였어요. ‘남의 아들에 대한 전기고문과 자기 딸의 감기약‘, 그 극적 대비는 차라리 슬픈 것이었습니다. ‘나는 절대 결혼하지 않아야지. 저 지독한 가족 이기주의를 난들어떻게 할 거야.‘ 인간에 대한 실망이었습니다. 권력의 오만함과 잔혹함에 이어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마저 포기해 갔던 절망의 나날이었습니다.
그러나 남한산성에서 남산 취조 현장의 경험을 서로 이야기하다가 놀랍게도 ‘감기약‘ 이 연출된 수사 기법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다른 사람 역시 비슷한 경험을 토로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더 큰 충격이었습니다. 스스로를 냉혹한 인간으로 연출함으로써 피의자를 몸서리치게 하는 수사 기법은 한 인간에 대한 절망을 넘어서정치권력 그 자체에 대한 소름끼치는 공포였습니다. 남한산성은 이러한 절망의 끝 부분에 놓여 있습니다. - P217

그러나 차이와 다양성은 그것을 존중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어야 합니다. 나는 그 집 그림 앞에 앉아서나 자신의 변화를 결심합니다. 창백한 관념성을 청산하고 건강한 노동 품성을 키워 가리라는 결심을 합니다. 차이는 자기 변화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출발이어야 합니다. 차이는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감사의 대상이어야 하고, 학습의 교본이어야 하고, 변화의 시작이어야 합니다. - P232

인간적 신뢰나 인간관계를 만들어 나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고용 관계가 인간관계의 보편적 형식입니다. 고용 관계란 금전적 보상 체계입니다. 그것이 만들어 내는 인간관계에 신뢰나 애정이 담기기는 쉽지 않습니다. - P237

자기 변화는 최종적으로 인간관계로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기술을 익히고 언어와 사고를 바꾼다고 해서 변화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최종적으로는 자기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바뀜으로써 변화가 완성됩니다. 이것은 개인의 변화가 개인을 단위로 완성될 수는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자기 변화는 옆 사람만큼의 변화밖에 이룰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 P239

예술은 사물이나 인간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합니다. 그특징의 하나가 클로즈업하는 것입니다. 야생화 한 송이를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는 것과 같습니다. 유심히 주목하면 하찮은 삶도 멋진예술이 됩니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수많은 사연을 담고 있습니다.
훌륭한 회화는 우리가 무심히 지나친 것을 액자에 넣어 사람들에게들어 보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술의 본령은 우리의 무심함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 P252

‘아름다움‘이란 뜻은 ‘알다‘ ‘깨닫다‘입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세계와 자기를 대면하게 함으로써 자기와 세계를함께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불우한 처지의 생명을 위로하기보다는그것을 냉정하게 직시하게 함으로써 생명의 위상을 새롭게 바꾸어가도록 합니다. 그런 뜻에서 ‘아름다움‘은 우리가 줄곧 이야기하고있는 ‘성찰‘’, ‘세계 인식‘과 직결됩니다. <죽은 아들을 안은 어머니>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그림이지만 우리가 처한 세계의 실상을 대면하게 한다는 점에서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 P253

나는 사람을 볼 때그 사람의 신분보다는 그 사람의 얼굴을 주목합니다. 얼굴을 주목하는 경우에도 이목구비보다는 얼굴에 담겨 있는 분위기를 주목합니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달관이 있는 경우를 최고로 칩니다. 좋은 피부와 아픔이 없는 얼굴은 높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얼굴‘의 옛말은얼골입니다. 얼골은 얼꼴에서 왔습니다. ‘얼의 꼴‘ 다시 말하자면 ‘영혼의 모습입니다. 그 사람의 영혼의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위가 바로 얼굴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붙였습니다. 얼굴에는 자연히그 사람의 ‘얼‘이 배어 나오게 마련입니다. 나는 검찰청에 출두하는사람들의 얼굴을 유심히 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사진 기자들이 포진하고 있는 포토라인에 서는 저명인사들도 많습니다. 여러 가지 표정을 만나게 됩니다. 태연하게 이야기하기도 하고, 아무 말 안 하기도하고, 가볍게 웃기도 하고, 여러 가지 얼굴 표정을 만납니다. 나는 그러한 겉 표정과는 다른 표정이 숨어 있는 것을 잘 간파합니다.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은 많은 얼굴들 중에 가장 인상적인 얼굴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사회 명사가 아니라 죄수였습니다. 쏟아지는 카메라 플래시 속에서 단 한순간도 평정한 표정을 잃지 않았습니다. 애써 꾸미려는 위선이 없었음은 물론 침통한 표정도 아니었습니다. 한마디로 대단히 철학적이고 자기 성찰적인 표정이었습니다.
왜 그 자리에 자기가 서 있는가를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습니다. 나는 막심 고리키Maxim Gorky의 『어머니』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파벨이 재판정에서 최후진술을 합니다. "이 자리에는 죄수와 심판자가 있는것이 아니라, 승리자와 패배자가 있을 뿐이다" 어머니는 처음으로 아들의 참된 모습을 깨닫습니다. - P254

창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성직자가 이 노랑머리에게 여성다운 품행을 설교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그 사람의 처지에 대해서는 무심하면서 그 사람의 품행에 대해서 관여하는 것을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지요. 그것은 그 여자의 삶을 파괴하는 폭력입니다. 그 여자를 돌로 치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의 오만함과 천박함을 동시에 드러내는 무지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을인간답게 하는 순수한 어떤 것을 상정한다는 것은 참으로 왜소한 인간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 P260

위악이 약자의 의상이라고 한다면, 위선은 강자의 의상입니다. 의상은 의상이되 위장僞裝입니다. 겉으로 드러내는 것일 뿐 그 본질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주 보는 시위 현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있습니다. 붉은 머리띠, 문신입니다. 단결과 전의를 과시하는 약자들의 위악적 표현입니다. 강자들의 현장은 법정입니다. 검은 법의의 엄숙성과 정숙성이 압도합니다. 시위 현장의 소란과 대조적입니다.
닛타 지로알래스카 이야기』에서 읽은 눈썰매 이야기의
입니다. 알래스카에서는 눈썰매를 끄는 여러 마리의 개중에서 가장병약한 개의 줄을 짧게 맨다고 합니다. 개들이 빨리 달리게 할 때에는 짧게 매여 있는 개를 채찍으로 때립니다. 그 병약한 개의 비명이다른 개들을 더욱 빨리 달리게 합니다. 그 병약한 개가 죽고 나면 나머지 개 중에서 가장 병약한 개가 그 자리에 묶입니다. 혹시라도 자기가 썰매를 끄는 위치에 있다면 엄벌을 주장하면 안 됩니다. 엄벌을 주장하는 사람은 썰매를 끄는 사람이 아니라 썰매를 모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엄벌이란 병약한 개를 채찍질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충분히 연구되어 있습니다. 엄벌과 공포는 사회를 경직시킵니다. 반대로 참여와 소통은 많은 사람들의 잠재력을 고양하고 사회역량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참여와 소통 구조는 자칫 썰매 위의 자리가 침범될 수 있다는 불안 때문에, 그리고 사회란 원래 썰매의 위아래가 엄연히 구분되어 있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약한 개를 채찍으로 때려 왔습니다. 법과 정의 그리고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어 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강자의 위선입니다. - P268

그 험악한 범죄자들 속에서 어떻게 20년을 살았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험악함의상당 부분은 강자들이 약자들에게 입힌 옷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절도범과 강도범 중에서 어느 쪽이 더 간이 크다고 생각합니까? 여러분의 생각이 틀렸습니다. 절도범이 간이 더 큽니다. 겪어 보면 압니다. 자기들끼리도 그런 논쟁을 합니다. 절도범이 강도범더러 얼마나 간이 크면 칼로 일을 보느냐고 합니다. 그러면 강도범이 절도범더러 사람들이 자고 있는데 조용히 일을 보는 놈들이 간이 더 크다고합니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약한 동물들은 비명을 지릅니다. 약한 동물을 먹이로 삼는 맹수는 소리 없이 움직입니다. 문제는 위선이 미덕으로, 위악이 범죄로 재단되는 것입니다. 그것 역시 강자의 논리입니다. 테러는 파괴와 살인이고 전쟁은 평화와 정의라는 논리가 바로강자의 위선입니다. 테러가 약자의 전쟁이라면, 전쟁은 강자의 테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은 ‘테러와의 전쟁‘ 이란 모순된 조어가 버젓이 통용되고 있습니다. - P270

폭력투쟁은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지 못하고 폭력으로 승패가 납니다. 누가 옳고 그른가는 가려지지 않고 힘센 놈이 이깁니다.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본질이 억압될 뿐입니다. 다행히 정당한 쪽이 이기는 경우라도 그 정당성이 논의되는 과정은 부재합니다. 지겹지만 서로 욕지거리 섞어 가며 주장에 주장을 거듭하는 이른바 이론 투쟁(?)은 우여곡절을 겪어가지만 그래도 쟁점에 근접한다는 것이었습니다. - P272

함께 뒤섞여 있습니다. 감옥은 물론 범법자들을 물리적으로 격리 구금하는 시설입니다. 그러나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감옥을 다르게정의합니다. ‘감옥은 감옥 바깥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다는 착각을 주기 위한 정치적 공간입니다. 역설적진리입니다.
폴 윌리스Paul Willis의 『학교와 계급재생산』(Learning to Labor)에는 날라리와 범생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영국에서는 범생이를 ‘earole‘이라고 부릅니다. 귀(ear)와 구멍(hole)을 합성한 단어입니다. ‘귓구멍‘은 경멸적 표현입니다. 귀는 신체 기관 중에서 자기 표현이 없는 가장 수동적인 부위입니다. 듣기만 하는 녀석들이란 뜻입니다. 날라리들은 스스로 사내(lads)라고 자부합니다. 날라리들은 학교 교육을 간파(penetration)하고 있습니다.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하면계층 상승이 가능하다는 것이 허구임을 꿰뚫어 보고 있습니다. 칠판에 적는 것, 책에 쓰인 것, 선생의 가르침을 오로지 듣기만 하는 귓구멍들과는 판이합니다. 날라리들은 비공식적인 또래 집단을 만들어 자기들의 정체성을 집단적으로 확보하고 자기들의 비판적 세계관을 공유합니다. 공부, 실력, 자격, 성실 등이 부질없음을 간파하고그것들을 거부합니다. 반항을 통해서 다져지는 결속, 거기서 확인되는 우정과 의리에 가치를 부여합니다. 날라리들을 위악적이라고 할수는 없지만 적어도 사회의 위선은 간파하고 있는 집단입니다. 그러나 윌리스는 결론 부분에서 이야기합니다. 귓구멍들을 경멸하고 공부와 정신노동보다는 육체노동의 가치를 평가 절상하는 그들의 계급의식이 결국은 사회의 제약(limitation)이라는 일련의 시스템 속에서좌절됩니다. 결국은 그들이 저항의 대상으로 삼았던 그 사회의 노동력을 충원하는 집단으로 전락됩니다. 기존 체제의 위선에 대한 저항이 그 사회를 개혁하는 동력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다시 그 체제의 효과적인 작동에 봉사하게 되는 설에 마음 아파합니다. 위선과 위악에 대한 통찰이 비록 뛰어난 것이고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하나의 조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통찰을 차폐하는 사회적장치는 치밀하게 짜여 있습니다. 통찰 그 자체로서는 사회적 역량이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찰에서 시작되어야 함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교도소의 반문화와 민중적 감성은 내게매우 중요한 성찰의 원천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범생이로 살아온 나로서는 감옥은 ‘대학‘이었습니다. - P275

아우슈비츠에 대한 최고의 증언자로 평가받는 프리모 레비PrimoLevi는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서 이야기합니다. 아우슈비츠를운영하고 범죄에 가담한 사람들이 보통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절망합니다. 그것이 일부 괴물들에 의해서 자행된 것이었다면 얼마나 다행한 것일까 하는 것이지요.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의 요점은위선과 위악의 베일을 걷어내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그 점에서 우리들은 실패하고 있습니다. 화려한 무대와 의상, 오디오와 비디오의 현란한 조명, 그리고 수많은 언설이 만들어 내는 환상 속에서 우리가 그 실체를 직시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실패의 더 큰 원인은 이러한 장치가 아니라 우리들의 인간 이해의천박함에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애증을 고르게 키워 가는 그야말로 인간적인 노력이 부족함을 탓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공부는 우리의 동공을 외부로 향하여 여는 세계화가 아니라 우리의 내면을 향하여 심화하는 인간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곤히 잠들어 있는 가슴에서 눈 부릅뜨고 있는 문신들은 가난한사람들의 슬픈 그림입니다. - P276

여기서 우리는 ‘관계의 최고 형태는 입장의 동일함‘이라는 명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입장의 동일함을 계급의 의미로 좁게 읽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계급은 생산에서 차지하는지위와 역할을 의미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과 노동의 관계는 결정적입니다. 경제적 계급은 그 위력이 경제적 범주에 국한되지않고 문화와 인간을 규정할 정도로 위력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우리는 우리를 지배하는 경제주의 관념 때문에 그 위력이 지나치게 과장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계급과 경제적 조건은 삶의 전부가 아닙니다. 삶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에 불과합니다. 빵 없이 살 수 없지만, 빵만으로 살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경제적 동물이 아닙니다. 삶은 광범위한 관계망 속에서 영위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강의도 관계와 인식의 문제에서 인간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이 모든 과정의 시작이고 끝입니다. - P283

그의 말처럼 자부심은 고난을 견디게 합니다. 물질적 도움보다는 자부심을 갖게 하는 것이 더 큰 힘이 됩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 P290

그 처지가 같지 않고, 그 정이 같지 않은 사람의 동정은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물질적으로는 도움이 되기도 하겠지만 동정 받는사람에게는 상심이 됩니다. 동정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동정 받는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한 번 더 확인하게 합니다. - P291

우리가 처한 힘든 상황이 그런 표적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당사자인 그에게 그만한 결함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우리가 처한 혹독한 상황이 그런 공공의 적을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여러 사람을 보내고 나서 뒤늦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 P301

‘자기가 익숙한 공간과 사고를 결별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가?‘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것을만나는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 P323

여행은 떠나고 만나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종착지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 변화된자기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조는 비단 여행에서만 확인되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하면 여행만 여행이 아니라 우리의 삶 하루하루가 여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소통과 변화는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의 존재 형식입니다. 부단히 만나고, 부단히 소통하고, 부단히 변화하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여행도 그렇고, 우리의 삶도 그렇고, 우리가 함께 만들고 있는 인문학 교실도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P324

니다. "없이 사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사정을 구구절절 다 얘기하면서 살아요? 그냥 욕먹으면서 사는 거지요."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대개 먹물들은 자기의 사정을 자상하게 설명하고 변명까지 합니다. 못배운 사람들은 변명할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짧은 것이라 하더라도자기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줄 사람이 아예 없습니다. 그냥 단념하고욕먹으면서 살 각오를 합니다. - P325

원테쥔溫鐵軍은『백년의 급진에서 자본주의는 유럽 국가들이국내의 빈민층과 범죄인들을 식민지로 유출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가능했다고 주장합니다. 금은의 유입과 노동력의 유출이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자본의 유입은 자본의 상대적 과잉이 되고 노동력의 유출은 노동력의 부족으로 이어져 자본과 노동의 계급 타협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 계급 타협이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중산층 중심의 다이아몬드형 사회 구성이 가능한 것이 바로 콜럼버스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모든 후발 자본주의 국가들이 바로 이러한 근대의 발전 경로를 모델로 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중국은 근대사회의 이러한 발전 경로를 모델(Path-dependency)로 하지 않고 내발적內發的 경로를 만들어 간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유럽의근대화 모델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인도,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인구의 50% 정도에 달하는 빈민층을껴안고 가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저렴한 자본의 공급과 빈민층의이출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습니다. - P331

콜럼버스 이후 지금까지의 세계 질서는 본질에 있어서 조금도변함이 없습니다. 유럽의 근대사는 한마디로 나의 존재가 타인의 존재보다 강한 것이어야 하는 강철의 논리로 일관된 역사였습니다. 이러한 논리를 모든 나라들이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조선을 흡수 합병한 메이지明治 일본의 탈아론脫亞論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논리의 희생이 된 나라들마저도 그러한 논리를 모방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심지어는 그러한 논리와 싸워야 할 해방운동마저 그러한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개인이든, 회사든, 국가든 언제나 ‘나의 존재성을 앞세우고 다른 것들을 지배하고 흡수하려는 존재론의 논리에 한없이 충실합니다. 더러는 자신을 낮추거나 뒤에 세우는 경우가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철저하게 계산된 프로그램의 일환일 뿐입니다. ‘마키아벨리의 지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단기적으로는 다소의 손해를감수하더라도 장기적인 이득을 염두에 둔 계산된 희생이 어쩌면 우리가 도달한 지성의 현 수준인지도 모릅니다. 진정한 의미의 연대와공유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세계화는 콜럼버스의 세계화입니다. 오늘날도 콜럼버스는 살아있습니다. 콜럼버스 개인에게는 야박하게 들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개인이 아닙니다. 콜럼버스는 험한 파도와 사투를 벌인 한 사람의 바다 사나이일 뿐이라 할 수 있지만 그는 근대사회의아이콘입니다. 콜럼버스는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오늘날도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고 이 발상의 전환을 강조하는 예로서 반드시 콜럼버스가 등장합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계란 이야기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계란을 책상 위에 세우지 못하는데 콜럼버스만이 계란을 세웠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단지 발상의 전환에 관한 일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계란의 모양은 어미 닭이 체온을 골고루 줄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모든 알이 그렇습니다. 어미 품을 빠져나가 굴러가더라도 다시 돌아오게끔 만들어진 타원형의 구적입니다. 바로 생명의 모양입니다. 이것을 깨트려 세운다는 것은 발상의 전환이기에 앞서 생명에 대한 잔혹한 폭력입니다. 잔혹한 폭력을 발상의 전환이라고 예찬하는 우리의 무심함은 무심함이 아니라 비정함에 다름 아닙니다.
사람의 판단력에 끝까지 집요하게 끼어드는 것이 콤플렉스입니다. 콤플렉스는 합리적인 판단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본인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우리들의 의식 속에는 상당한 콤플렉스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멕시코대학에서 꼬박 하루를 보냈습니다.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오히려 내가충격을 받습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그렇게 많은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오는 이유에 대하여 은근히 시비를 걸었습니다. 칠레의 네루다Pablo Neruda부터 콜롬비아의 마르케스Gabriel García Márquez, 멕시코의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 Lozano, 페루의 바르가스 요사MarioVargas Llosa에 이르기까지 노벨문학 수상자가 즐비합니다. 우리나라는 단 한 개의 노벨문학상에 목매달고 있습니다. 라틴아메리카의 노벨문학상은 유럽이 라틴아메리카를 그들의 중하위에 견인해 두려는 정치적 배려가 아닌가 하고 질문했다가 호되게 야단맞았습니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 주경기장이 멕시코대학이었습니다. 대학 운동장과 건물마다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의 벽화가 화려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학생들이 리베라를 이야기했습니다. 그가 바로 피카소를 결별하고 벽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림은 궁정과 귀족들의 거실을 장식하는 것이 아니라 광장에서 민중들과 공유하는 정치학이라는 것이 리베라의 정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리베라의 불행한 부인 프리다 칼로Frida Kahlo의 이야기도충격이었습니다. 자기의 그림을 유럽의 어떠한 개념으로도 부르지말 것을 요구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에 이르면 라틴아메리카의 정신세계가 얼마나 창조적인가를 실감합니다.
한마디로 라틴아메리카는 ‘아버지 죽이기‘로 불리고 있을 만큼 유럽정전에서 자유롭습니다. 우리의 경우 피카소를 결별할 수 있는 미술인은 없습니다. 더구나 고전의반열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유럽의 문학과 음악에 이르면우리는 한없이 왜소해집니다. - P338

상품이 나타나기 전에는 ‘가치‘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물론 ‘가치 있는 삶‘이라고 하듯이 일반적 의미로 쓰이기는 합니다. 그러나경제학에서 가치라고 하는 것은 교환가치입니다. 사용가치가 아닙니다. 쌀의 가치는 일용하는 곡식이 아닙니다. 그것이 다른 것과 교환될 때의 비율이 가치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가치는 쌀을 팔지 않을 경우에는 생각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상품이 출현하기 전에는가치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로빈슨 크루소가 큰 진주조개를 주웠다 하더라도 그것은 가치가 없습니다. 팔 수 없기 때문입니다. - P347

부부 관계 역시 등가관계로 인식하는 우리의 사고방식을 보여주는사례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상품문맥에 갇혀 있다는 증거입니다. - P350

여기서 우리가 짚어 봐야 합니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벌써 여러 차례 이야기했습니다. 아름다움은 ‘앎‘입니다. 숙지성熟知性이 그 본질입니다. 오래되고 친숙한 것이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상품미학의 경우 더구나 패션은 ‘모름다움‘에 탐닉하는 것입니다. 미적정서의 역전입니다. 한자로 ‘美‘는 ‘羊+大‘ 입니다. 양이 큰 것을 아름답다고 합니다. 그 고기는 먹고, 그 털은 입고, 기름은 등유로 사용하고, 뼈는 화살촉을 만듭니다. 물질적 삶의 실체입니다. 그런 양이풀밭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것을 보고 있을 때의 흐뭇함, 그것이 미적정서의 근본입니다. 생명 그 자체를 뒷받침하는 안정감, 그것이 미의 본질이고 아름다움의 내용입니다. 상품미학은 ‘모름다움‘ 입니다. 오래되고 친숙한 것보다는 낯설고 새로운 것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합니다. 회사의 상표도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은 부채표 ‘활명수‘뿐이라고 합니다. 회사명과 로고도 빠르게 외국어로 바뀌었습니다. 모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것이 됩니다. 이것은 단지 미적 정서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미적 정서가 이처럼 역전되고 있는 까닭은 상품미학 때문만은 아닙니다. 문화적 자부심이나 주체성이 없는 사회의 일반적 특성이기도 합니다. 주변부의 문화적 콤플렉스입니다. 모든 권력은 바깥에 있습니다. 식민 모국에 있고 패권 국가가 행사합니다.
새로운 물건은 항상 배를 타고 해외에서 왔습니다. 최종적인 결정은바깥에서 이루어집니다. 모름다움의 권력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패션이라는 이미지의 변화가 사회변화를 대체한다는 사실입니다. 사회 변화의 실천적 열정을 희석시킵니다. 상품미학에 민감한 젊은 층의 사회의식이 현실로부터 이미지 쪽으로 급속하게 이동해 버린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상품사회는 이처럼 상품-화폐 구조 속에 우리를 가둠으로써 인간적정체성을 소멸시킬 뿐 아니라 우리들의 미적 정서 그 자체를 역전시칩니다. 그리고 변화 그 자체를 이미지화함으로써 현실의 개혁과 진정한 변화의 열정을 소멸시키고 있습니다. - P355

에피쿠로스의 도표에 의하면 행복과 소비는 비례하지 않습니다. 소비가 아무리 증가하더라도 행복은 증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경제원칙은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 것"입니다. 참으로 비인간적인 생각입니다. ‘최대의 희생으로 최소의 효과를 얻는 것‘이 훨씬 더 인간적입니다. 고뇌와 방황과 좌절이 인간을 얼마나 성숙하게 하는지에 대하여 경제원칙은 무지합니다. 소비가 미덕이라는 구호도 비인간의 극치입니다. 단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최대의 소비는 전쟁입니다. 전쟁이야말로 미덕이 된다는 역설입니다. 지금 그것이 현실이기는 합니다. - P359

생산물로부터의 소외입니다. 나는 의자를 머리 위로 치켜들고 벌 받고 있는 그림을 자주 보여줍니다. 소외의 전형적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의자를 만들 때는 그 위에 편히 앉으려고 만듭니다. 그런데 그것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서 있다는 것은역설의 극치입니다. 자기가 만든 생산물로부터의 소외입니다. - P365

세월이란 강물처럼 흘러가면 그만인 것, 굳이 1월 1일이라고 무엇을 각오하라는 것이 잘 이해가 안 된다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어렸던 우리들도 충격이었습니다. 어린이들이었지만 우리 교실은 그 말이 갖는 철학(?)적 깊이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릅니다. ‘저 이야기를 내가 할걸.‘ 그 친구의 이름은 끝끝내 기억해 내지 못했습니다. 공부도 운동도 전혀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친구였습니다. 신나게 리듬을 타고
‘숙제‘ 아니면 ‘심부름‘을 댔던 나로서는 뼈아픈 후회로 남았습니다. - P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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