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친한 친구들 스토리콜렉터 4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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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날 수 있는 비결, 에어컨 바람보다 뒷목을 서늘하게 하면 된다. 상상의 동물인 인간은 특별하게도 뇌의 작용만으로도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낸다. 소설은 상상을 이끌어내는 최적의 장소다. 그런데 왜 우린 비현실적인 세계를 탐닉하는 것일까? 혹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대리만족이나 카타르시스에 빠져들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일상적이지 않은 사건을 평범하게 만들어버리는 소설의 매력, 누가 거부할 수 있을 것인가?

‘타우누스 시리즈’로 일약 세계적 문학가가 된 넬레 노이하우스, 그녀의 네 번째 소설 ‘백설 공주에게 죽음을’ 이 베스트셀러로 등극한 이유는 흔하게 볼 수 없는 플롯과 범죄를 만들어가는 군중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한 덕분일 것이다. 그녀의 소설에서 군중은 절대적인 역할을 작용한다. 군중은 기득권을 위해 완전범죄를 가장하지만 진실을 수렴하지 못한다는 진리를 알지 못한다. 그녀가 선택한 등장인물들은 모두 범죄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을 가지고 있다. 즉, 누구든 범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동기만으로 범인으로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긴박한 사건진행과 인간이 지닌 본연의 욕구에 충실한 넬레의 타우누스 시리즈, 그녀가 선택한 스릴러의 한계는 어디일까?

동물원에서 절단된 손과 발이 발견된다.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는 지점, 부패를 시작한 시체가 발견되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보덴슈타인과 직관력이 뛰어난 여형사 피아가 사건현장에 도착한다. 일상적인 탐문이 이루어지는 순간, 살해된 시신이 정치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지녔던 인물인 파울리임이 밝혀진다. 비록 지역교사였지만 자연보호, 환경연합, 동물보호등 다수의 단체를 이끌고 있었던 파울리는 그 영향력만큼이나 정적이 많았다. 보덴슈타인은 사건이 광범위하게 퍼질 것이란 예상을 한다. 파울리와 크고 작은 영향력을 맺은 어떠한 사람이든 세상에 비판적인 그를 죽일만한 충분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넬레 노이하우스는 시작과 더불어 사건을 오리무중으로 빠뜨린다. 그녀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인 범죄에 대한 구성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동물원장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사건은 꼬리를 물고 퍼져가며 의심스러운 인물들이 한 둘 등장한다. 하지만 사건의 중심인물이 되는 루카스의 등장은 다소 의아스러울 정도로 조용하다. 노엘의 소설은 빼어난 사건구성 못지않게 러브라인을 형성한다. 이는 살인사건과 교묘한 교차를 이루며 색다른 흥분을 유발시킨다. 사랑에 실패한 피아, 그녀는 용의대상자인 동물원장과 루카스에게 애정공세를 받고 자신이 처한 현실에 혼란을 느낀다. 그런데 간혹 보덴슈타인의 집안배경이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사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 같은데 작가는 보덴슈타인과 아내와의 갈등관계를 부각시킨다. 사건을 풀어나가는 형사지만 그들 역시 내면적인 갈등 앞에선 사건의 대상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하지만 보덴슈타인은 특유의 감각으로 복잡한 사건을 능수능란하게 풀어나간다.

범인은 뜻밖의 인물이다. 헌데 한 가지 미심쩍은 것은 루카스에 대한 오해(?)를 전혀 풀지 않았다는 점이다. 왜 보덴슈타인의 직감이 지속적으로 빗나가는 것일까? 이에 반해 피아의 직감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다. 루카스를 바라보는 둘의 차이는 본 소설이 지닌 극적인 반전을 예상한다. 대부분의 살인이 그렇듯이 동기 또한 무척 빈약하다. 살인사건으로 이해득실을 따지는 사람, 그 이면에 가려진 추악한 사회의 내면, 탐욕에 찌들어가는 기득권 세력, 무엇보다도 질투 때문에 ‘너무 친한 친구들’을 배신한 그들에게서 우린 어떤 모습을 투영할 수 있을까?

넬레의 작품엔 다수의 주변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모두 이웃들이며 친척들이다. 같이 웃고 같이 슬퍼하지만 어느 한 순간 누군가를 살인자로 지목한다. 그들에겐 저마다의 충분한 동기가 있다. 팍팍한 삶속에 가려진 인간의 비관적인 내면을 꺼내려는 것일까? 일순간 우린 넬레의 움직임에 모든 것을 사로잡히고 만다. 각박한 사회, 하나를 더 가지고 있어야만 안심이 되는 사회, 그들은 입으로는 공존을 외치지만 마음엔 탐욕이 가득하다. 파울리의 이상도 루카스의 열정도 지배권을 확보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결국 소유로 인한 불행이라는 마지막 결론은 넬레가 전해주고자 하는 극렬한 메시지다.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는 누구인가? 더위를 한방에 식혀줄 ‘너무 친한 친구들’ 무척 매력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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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본성
제프리 잉햄 지음, 홍기빈 옮김 / 삼천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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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가치를 아는 순간이 있다. 조그만 동전하나로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때다. 이제 돈은 소비의 기준이 되고 원하는 물건을 얻기 위한 생산의 수단이 된다. 돈을 주고 행복을 살 수 없다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돈이 많으면 충분한 보상이 이뤄질 거라 믿는다. 물론 현재보다 훨씬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할 수도 있다. 우린 삶을 위해 돈을 번다. 그리고 보다 나은 미래를 가정하기에 저축과 투자를 한다. 마치 인생의 모든 부분이 돈과 결부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돈의 본성을 한번이라도 의심 해본 적이 있는가?

권력과 돈의 함수는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복잡하다. 어떠한 역사적 사건도 돈이 배경이 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돈은 어느덧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도대체 우리들이 추구하고자하는 돈의 가치는 무엇일까? 어찌 보면 허망하기 이를 데 없는데 왜 목숨을 걸면서까지 돈에 집착을 하는 것일까? 사회적 관계를 벗어날 수 없는 개인은 그렇다 쳐도 기업이나 국가 역시 돈이 차지하는 비중이 거의 절대적이다. 탐욕을 불러일으키는 돈, 지위를 상승시키기 위한 돈, 돈은 물물교환으로서의 가치가 아니라 무형의 상품까지 사고팔 수 있는 극한 지위를 획득한 것이다.

돈은 개인은 물론, 기업이나 국가의 지위를 이동시킨다. 달러에 연동되어있는 환율은 국가가 지닌 경제적 힘을 상징하기도 한다. 신용평기기관에 의해 최저등급으로 하락한 그리스는 돈을 빌리기 위해 엄청난 프리미엄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 반면에 인위적으로 환율을 조작하여 실질적인 경제를 부양하는 국가도 있다. 돈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돈의 역할을 가장 극적으로 볼 수 있는 곳이 월가다. 그들은 돈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데 탁월한 재주를 갖추고 있다. ‘파생상품’으로 대변되는 돈의 자가 증식과 갬블을 연상시키는 옵션거래는 돈이 지닌 무한한(?) 매력이다.

저자 제프리 잉햄은 케임브리지 대학 사회과학자로 화폐가 정치와 사회문제에 미치는 영향력을 역사적 배경을 통해 서술한다. 그의 이론은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 따른 화폐경제학이 과연 얼마만한 효용성을 주고 있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는 중립적 이미지를 벗어던진 화폐의 상품화와 무분별한 부채를 양산하는 통화주의자들에 깊은 반감을 표시한다. 또한 신용사회에서 화폐의 역할과 이를 역이용하는 허구적 사회구조를 반성해야한다고 말한다. ‘돈의 본성’은 돈에 관한 역사적 고찰로 출발해 신용화폐가 어떻게 사회구조를 장악하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굳이 세밀하게 보지 않더라도 우리의 일상은 돈에 좌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수점 이하의 작은 금리만 올려도 서민경제엔 눈살이 찌푸려지고 과도한 인플레이션은 실질금리를 하락시켜 주머닛돈을 감소시켜버린다. 인간의 일생동안 필요한 돈은 얼마일까? 만약 정확한 통계나 수치가 있다면 실질적인 구매력을 계산하여 돈의 필요량을 산출한다면 돈이 추구하고자 하는 중립성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돈은 시간에 대한 이자와 물가상승에 대한 가치하락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또한 매일 바뀌는 환율은 어떻게 붙잡으라는 말인가? 분명한 것은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돈은 절대적인 힘을 지닌 상품으로 변해버렸다는 것이다.

돈은 확고한 지불수단이다. 만약 돈이 지급불능이 된다면 돈을 발행하는 국가는 파산할 것이다. 돈이 지켜야할 것은 신용이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 같지만 결국 국가들 간의 외교 전략도 신용등급에 의해 이루어질 뿐이다. 비싼 이자는 돈이 지닌 힘을 보여준다. 결국 화폐를 통제하는 국가가 패권국이 되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일 것이다. 우린 매 순간 돈을 벌기위해 고민을 하고 연구를 하지만 결국 돈이 지닌 본성에 대한 의문을 가진 적이 없다. 화폐의 역사는 우리들에게 의미심장한 교훈을 가르쳐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에 관한한 어떤 욕망도 거부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너무 밝혀서도 안 되고 너무 가려서도 안 되는 돈, 당신이 선택한 돈의 본성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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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DP는 틀렸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GDP는 틀렸다 - '국민총행복'을 높이는 새로운 지수를 찾아서
조지프 스티글리츠 외 지음, 박형준 옮김 / 동녘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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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DP 4만 불이면 모두 부자가 될까? 대학 등록금, 사교육비, 주거문제, 의료비, 사회적 만족도등 모든 것이 지금보다 2배 더 좋아질까? 왜 기업은 현금을 쌓아놓고 배부른 콧노래를 부르는데 가계 빚은 1000조에 육박하는 것일까? 초인플레이션이 눈앞에 가다왔는데도 정책적 논리 때문에 금리를 올리지 못하는 관료들을 동정해야할까? 도대체, 그들은 누구인가? 왜 그들은 사회적 우위를 점하면서 모든 것을 함부로 통제하려하는가? 우린 그들의 실체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실체를 알기 위해선 대중을 통제하는 ‘통계’를 과감히 버려야 한다.

‘GDP’는 한국의 대표적인 ‘행복지수’(?)다. 정부 관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GDP를 정책의 기준으로 삼는다. 도대체 GDP가 무엇 이길래 모두들 GDP 만을 바라보는 것일까? GDP에 대한 오류는 이미 사회 곳곳에서 불만과 불안요소로 표출되고 있다. 실절적인 생산수단인 노동자들에 대한 만족도가 GDP와는 전혀 다르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GDP는 편익을 추구하려는 기득권자들에게 엄청난 통제력을 가져다주었다. 특히 NDP(국내 순생산)에 대한 활용도가 훨씬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감가상각’ 이라는 국민계정요소를 포함시키지 않음으로 경제학자들에게 머리 아픈 과제를 덜어주었다.

하지만 변화하는 경제적 욕구를 GDP만으로 설득하기에 한계에 봉착한 것인가?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을 필두로 세계 경제학자들이 진보적인 보고서를 내놓기에 이른다. ‘경제 실적과 사회 진보계측을 위한 위원회’ 라 불리는 CMEPSP는 GDP의 한계를 파악하고, GDP가 지닌 문제점을 파악하며 삶의 질을 측정하기 위한 새로운 접근법을 시도하고 있다. 주목할 만한 부분은 환경문제를 중심으로 한 ‘지속가능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새로운 지표들을 선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GDP 는 늘어나는데 삶은 팍팍해진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말 같지만 GDP 만을 놓고 봤을 땐 위와 아래가 분명한 논리적인 말일 수밖에 없다. GDP에 대한 기준은 ‘생산’ 이지 ‘행복’ 이나 ‘삶의 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동안 통계시스템은 우리의 삶을 ‘평균’으로 측정해왔다. 평균이란 말이 참으로 묘해 빈부의 격차도 쉽게 해결하곤 한다. GDP의 함정은 우리들이 요구하는 시대적 변수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물질적 행복을 평가할 때조차 생산보다는 소득이나 소비에 주목하라’. 인간이 지닌 모든 가치를 ‘화폐’로 평가 할 수 있을까? 생산에 대한 개념보다 소득과 소비에 집중하는 시대에, GDP의 그릇된 판단은 사회를 리드하는 정책의 오류로 이어질 것이다.

‘기업 프렌들리’ 참 많이 듣는 말이다. 그런데 기업이 생존하기 위해선 ‘가계’가 존재해야 하는데 앞으로 가계 부채 문제가 어떻게 풀어질지 모두들 불안하기만 하다. GDP의 중심은 기업이다. 하지만 사회적 구성원 일인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커지고 다변적인 상황에서 GDP는 ‘가계’ 에 더욱 집중해야한다. 왜 가계는 대차대조표에 목을 매는데, 국가는 고려하지 않는 것일까? 혹 물밀듯이 터져 나오는 비자금이나 부정부패의 탐욕자금이 이곳으로부터 나오지 않았을까? 재산 지표를 올바르게 작성하는 것은 공신력을 회복하는 동시에 정부와 관료에 대한 믿음을 주는 행위다. 숫자에 빠져들어 사회를 잃어버리는 모순이 반복된다면 통계는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할 것이다.

복잡하다고, 불편하다고 손대지 않는다면 기득권자들에겐 더할 나위없는 환경을 제공한다. 우린 부지불식간에 혹은 어쩔 수 없이 국가의 정책을 따라야하는 국민이 아니다. 사회는 구성원 개개인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소통과 토론의 문화가 정착될 때 보다 나은 대안을 만들 수 있다. GDP에 대한 논의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세계적 대안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듯하다. ‘행복은 성적 순’ 이라는 모 기사의 글을 보면서 그 행복이 지속가능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해보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은 결코 통계적 수치가 아니다. 조지프 스티글리츠와 아마르티아 센, 그리고 장 폴 피투시의 ‘GDP는 틀렸다’. 통계적 선택에 대한 준비는 여전히 자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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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비판]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독식 비판 - 지식 경제 시대의 부와 분배
가 알페로비츠 & 루 데일리 지음, 원용찬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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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에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는가? 지금 당신이 가진 모든 것들이 순수한 당신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들인가? 너무도 당연시 인식되었던 사유재산에 대한 의미를 곱씹어 본다면 조금은 다르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소유에 대한 의문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면 당신은 공짜로 사회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가 미치는 영향력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우린 대가에 대한 지불수단이 삶에 미치는 영향을 거의 간과하지 않고 있다.

대가란 다름 아닌 ‘지식’이다. 지식은 누구나 사용가능한 자원이지만 누구에게나 보편적이지는 않다. 미국과 아프리카를 비교한다면 이러한 상황은 더욱 두드러진다. 미국인들에게 지식은 공짜점심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지식기반경제을 근간으로 세계최고의 삶의 질을 구가하고 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아프리카인들이 지식경제를 구축하고 있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왜 한편에선 공짜로 지식을 사용하는데 한편은 지식의 유무조차 알 수 없는 것일까? 문제는 편중된 지식이 빠르게 부의 편차를 늘리고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불로소득을 누려왔던 미국도 점차 지식을 사용하는 빈도의 수에 따라 심각한 부의 편중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를 자유시장이 추구하는 이상으로만 바라보기에 뭔가 풀리지 않는 문제점들이 우리 앞을 가로막는다. 왜 세상은 불로소득에 관용을 베푸는 것일까? 이에 대한 소위 상위1%의 해답은 거의 묵묵부답이다. 지배력이 우선권임을 자부하지 않기에 누구도 먼저 불로소득에 대한 해법을 내놓지 않는다. 오히려 시장지상주의를 설파하며 불로소득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는데 더욱 심혈을 기울인다. 그들은 과거와 다름없이 왕정이 추구해왔던 ‘지식의 독식’을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워린버핏과 빌 게이츠가 추구하는 공익재단은 그 내용이 어떻든 상위 1%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면죄부란 생각이 든다.

본 책 ‘독식 비판’은 너무도 당연시 되었던 사회현상에 이의를 제기한다. 아무리 뛰어난 개인도 결국 공적인 사업을 통해 이루어진 결과물로 사업의 성공이나 부의 팽창을 이루었지 어느 것 하나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했을 것이란 이야기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지식경제의 힘’ 이다. 그는 경제성장의 원천을 지식으로 보았으며 이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공짜음식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에 부의 분배 또한 공정한 보상이 이루어져야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그가 바라보는 세상에 공정한 계산이란 들어있지 않았다.

1인시대가 산업화 시대로 넘어오면서 초기발명가들로부터 탈출한 문화적 혁명은 곧 지식경제의 기반이 되었다. 하지만 지식은 일부인 들의 전유물이 되고 말았다.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그리고 최근의 금융자본주의까지, 지식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수단에서 이젠 자체적으로 재산권을 형성하고 있다. 문제는 지식의 편중이 가져다주는 극한 사회불안이다. 부의 편중에 관한 논의가 해묵은 논쟁일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불안한 사회구조는 심각한 혼란을 잉태한다. 부의 편중이 주는 역사적 교훈을 지식의 독식하는 자들은 더욱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당신이 아프리카에 태어났다면 운명을 받아들여야 할까? 다소 엉뚱한 질문이지만 진보니 복지니 하는 문제의 근원을 기회와 균등으로 확장한다면 얼마든지 부에 관한 상대의 입장을 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난해한 지식경제를 풀어나갈수 있는 해법으로 저자는 ‘철학적 고찰’을 논의 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도 해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것도 정당성을 확보하진 못한다. 만약 지식에 대한 근원적인 고찰이 보편화 되는 시대가 도래한다면 저자가 말하는 공정한 보상이 이루어질까? 이에 대한 의문도 역시 미지수다. 하지만 독식비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다. ‘내가 멀리 볼 수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인들의 어깨위에 서있었기 때문이다.’ 라는 지식경제를 이룬 현대인들에 주는 뉴턴의 명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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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버스, 숫자가 당신을 지배한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넘버스, 숫자가 당신을 지배한다 - 모르면 당하는 확률과 통계의 놀라운 실체
카이저 펑 지음, 황덕창 옮김 / 타임북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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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우린 ‘평균적인 삶’을 갈망하고 있다. 평균은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기에 더할 나위없는 조건을 제시해 준다. 몇 평의 아파트, 몇 cc의 자동차, 얼마의 봉급, 심지어는 아이의 수까지, 모든 것에 평균이 있다. 평균은 우리 삶의 기준이 되어버렸다. 혹, 우리의 삶이 평균이라는 숫자에 종속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가? 우린 모든 것을 평균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기업은 평균을 알아야만 목표를 정할 수 있다. 만약 예측이 불가능하다면 처음부터 사업을 시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평균은 불특정한 상황을 측정 가능한 변수로 만드는 특징이 있다. 평균을 가장 잘 활용하는 곳이 금융권이다. 은행은 엄청난 정보를 바탕으로 예측이 가능한 금리를 결정한다. 요즘엔 정치적인 압박이나 외부변수가 편차를 만들기도 하지만 여전히 그들이 믿는 것은 고객의 데이터뿐이다. 그런데 보험이라면 어떨까? 가장 안전하다는 자산 보험, 보험은 위험을 헤지하기 위한 최적의 상품이다. 하지만 문제는 예측할 수 없는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할 경우다.

2004년 플로리다 주에서 가장 큰 손해보험회사로 부상한 포우 파이낸셜은 8년 연속 40%성장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달성하고 있었다. 설립 이후 1억 달러의 순이익을 내고 있었기에 누구도 포우의 가능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한 번의 허리케인은 포우의 모든 결과를 앗아가 버렸다. 포우는 이제 가능성보다는 파산을 걱정해야만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일까? 보험사는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을 과거의 빈도를 중심으로 계산해 보험료를 결정하게 된다. 승승장구하던 포우는 누구보다 업계를 잘 알고 있었고 보험숫자에 능했지만 단 한 번의 허리케인에 녹다운 된 것이다. 이에 못지않게 보험사들이 골머리를 안고 있는 것이 가변성이다.

미국 수학능력 시험(SAT)에 관한 놀라운 진실이 있다. SAT를 시행하는 ETS는 1975년 골든 롤 보험사의CEO였던 루니에게 소송을 당한다. 루니는 보험업계의 전설적인 인물로 보험판매원 시험을 주관하는 ETS가 흑인들의 취업을 방해하고 있다는 명목으로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그는 시험내용이 철저하게 백인에게 유리하게 되어있어 취업을 희망하는 흑인들에겐 치명적인 결과라고 사회정의(?)를 주장한다. 치밀한 계산이 깔려있었지만 이 소송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고 많은 이들이 시험의 공정성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SAT 시험은 치밀한 공정성 아래 시험문제를 출제하고 있다. 시험출제자들은 인종, 성별, 종교등을 예상하며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를 삭제한다. 그들은 통제가 가능한 평균적인 문제를 출제하고 있다.

하지만 SAT 역시 보험회사와 마찬가지로 가변성이라는 변수를 간과한 부분이 있다. 즉, 집단적 비교는 ‘비슷한 능력을 가진 집단’에 한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흑인과 백인은 환경적 요인부터 다르다는 것인데 이는 허리케인의 피해를 보상하는 사람은 내륙지방 사람이라는 것과 일치한다. 그들은 위험요소가 훨씬 적음에도 불구하고 위험이 높은 지역의 사람들과 같은 보험료를 지출하고 있다. 시험문제 역시 환경적 혹은 생태적 요인이라는 가변성을 충분히 고려해야만 논란의 소지가 없어질 것이다.

숫자를 중심으로 한 통계는 우리사회의 모든 부분을 종속하고 있다. 우리를 판단하는 것은 내면의 가치가 아니라 결과를 나타내는 숫자뿐이다. 숫자는 우리의 기억을 흐리게 만들고 판단을 부정확하게 한다. 간혹 필요치 않는 용기를 주는 것도 숫자다. 그런데 과연 우리들이 믿는 숫자는 오류가 없는 것일까? 숫자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은 사회에 대한 불신이 큰 이유일 것이다. 모든 것을 통계화시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 우리들 역시 그 한 부분이라 생각하니 씁쓸함이 그지없지만 역시 또 하나의 숫자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에서 결코 숫자를 벗어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자회를 해본다. ‘넘버스, 숫자가 당신을 지배한다.’ 카이저 펑의 놀라운 통계학적 접근법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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