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합리한 지구인 - 인간 심리를 지배하는 행동경제학의 비밀
하워드 댄포드 지음, 김윤경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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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합리적인 선택, 비용대비 효과, 언뜻 보면 이익인 것 같지만 계산해 보면 손해인 경우가 훨씬 많다. 그럼에도 오류를 반복하는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일까? 시장경제의 내면을 알기 전까지 소비자는 생산자가 제시하는 가격에 그리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하지만 공급이 다양해지고 제품이 세분화되면서 ‘선택’이라는 고민을 안게 된다. 그런데 선택이 자신의 의지를 반영한 것일까? 단연코 아니다. 소비의 선택은 이미 짜인 틀에서 하나를 고르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소비자들은 굉장한 이익을 얻은 것처럼 좋은 기분을 느낀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사고의 틀이 빠르게 행동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휴리스틱이다.

휴리스틱은 합리성이나 논리적 사고를 따르기보다는 경험에서 터득한 만족할만한 선택을 통해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다. 즉, 자신이 충분히 생각하다고 생각하는 수준에서 생각을 멈추는 것을 의미한다. 휴리스틱이 얼마나 빠르게 우리의 결정을 지배하는지, 일상을 지배하는 문제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개인들에게 휴리스틱이나 판단편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거의 기계적으로 움직일 것이다. 즉 경제학에서 말하는 극히 합리적인 판단과 이성적인 선택이 세상의 중심이 될 것이다. 이러한 가설은 오랫동안 경제학을 이끌어온 명제가 되었는데 비이성적인 결과의 출현은 경제학의 효용성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에 대한 문제점을 해결하기위해 출발한 학문이 행동 경제학이다. 행동경제학은 합리적이란 가설 하에 돌출되는 인간의 비합리적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해 수많은 실험적 고찰을 진행해왔다. 논리적이란 말에 대한 의미를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인간은 대중적인 논리에 한없이 약하지만 이와는 정 반대로 행동하기도 한다. 행동 경제학을 이해하면 비합리적인 인간의 행동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린 왜 손실을 극도로 싫어하는 것일까? 인류가 사회적 불공정에 그토록 분개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이미 써버린 돈에 집착하는 이유는 왜일까? 우리들에겐 너무 많은 선택이 주어진다. 선택하는 것이 너무 괴롭다. 행동경제학은 오류에 빠진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올바로 볼 수 있게 해주는 것과 동시에 사회문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도움을 준다.

뷔페식당에 가면 왠지 많이 먹어야한다는 강박을 가진다. 그리고 실제로 평소보다 두세 배 많은 음식을 먹는다. 평소에는 보기 힘든 만난 음식의 유혹을 떨치기도 어렵지만 뷔페식당에서 음식을 많이 먹는 이유는 본전을 뽑으려는 생각 때문이다. 뷔페식당은 당연히 일반식당에 비해 두세 배 이상 비싸다. 누구든 많이 먹어야 본전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음식을 먹고 난 후, 그리 행복하지는 않다. 매몰원가는 개인뿐만이 아니라 기업에서도 자주 나타는데 이미 투자한 자본이 아까워 지속적으로 돈을 투자해 결국 파산하는 기업들도 있다. 매몰원가는 잊어버리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인간의 마음엔 심적 회계라는 돈을 분류하고 기장하는 프로그램이 존재한다. 심적 회계는 돈에 가치를 부여하는 방식을 달리하여 효용가치를 매기는 것을 말한다. 돈에 대한 각자의 생각이 행동을 지배한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사회과학으로 출발한 경제학은 인간의 심리적 상황을 경제적 관점으로 푸는데 탁월한 해결책을 제시해왔다. 하지만 위기에 직면한 경제학은 스스로 그 위치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경제학은 효용성만큼이나 시장을 이길 수도 없었고 시장을 뒷받침할 수도 없었다. 특히 시장은 예측이 불가능한 변수들로 가득하다. 그런데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가설을 벗어나지 못하고 맹목적인 믿음을 주지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최근의 위기를 볼 때 위기는 이미 곳곳에서 암시를 주었지만 누구도 이렇게까지 크게 확대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 같다는 뉘앙스를 받는다. 하지만 결과는 과거와 다르게 전 방위로 퍼지고 있다. 합리적이라는 가설은 더 이상 효용성이 없다. 단지 합리적이고 싶은 경제학자들의 바람이 그동안 세계경제를 지탱해온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람들은 왜 손해를 볼 줄 알면서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일까? 제한된 합리성과 비논리적인 인간의 함수가 가득한 불합리한 지구인, 새로운 행동경제학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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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자본주의 선언 - 자본주의의 운명을 바꿀 미래 기업의 5대 조건
우메어 하크 지음, 김현구 옮김 / 동아일보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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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의 선진편에 과유불급이란 표현이 있다. 넘치면 부족함만 못하다는 의미로 중용의 미덕을 높이 칭송하는 글이다. 중용, 수천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사회를 규정하는 잣대로 평가받고 있다. 대중들은 위기 때마다 부족함의 미덕을 재평가한다. 넘치면 과욕이라더니 한계를 벗어난 과욕이 탐욕이 되어 재앙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의 위기를 바라보는 시각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넘쳐나는 자본으로 신세계를 꿈꾸었던 아일랜드의 파산은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고 미국을 관통하는 전조였을지도 모른다. 왜 인간은 같은 과오를 반복하는 것일까? 영원한 성장을 바라는 인간의 끝없는 탐욕은 결국 자본주의마저 무너뜨리고 말 것인가?

서브프라임 위기 후 자본주의는 해체위기까지 내몰렸다. 이는 극단주의자들의 생각뿐만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허상이 곧바로 만인에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1990년 이래로 자본주의는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왔다. 수정자본주의는 있어도 자본주의의 이념은 변함이 없었다. 문제는 빈번한 위기의 출현이다. 그리고 위기는 세계경제를 절벽으로 몰아세웠다. 한 두 번의 위기탈출이 양적완화로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위기의 원인은 항상 우리의 발아래를 벗어나지 않았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을 관망하는 자본권력가들의 행태다. 성장만 고집하는 정부, 소비를 부추기는 기업, 빚에 허덕이는 개인, 자본주의의 광명은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자본주의의 꽃은 단연코 기업이다. 법인이라는 특수한 인격까지 부여받은 기업은 자본주의 사회 최고의 종마다. 하지만 기업이 인간사회를 유지하는 최후의 보루는 아닐 것이다. 문제는 우리들이 체감하는 기업의 이미지가 급격하게 나빠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월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금융 기업들의 실태는 대중을 경악시킨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논란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여전히 기업은 이익추구라는 본연의 임무에 모든 상황을 결정짓는다. 거품론에서 모럴해저드까지 금융기업들의 논란은 상당기간 꺼지지 않는 불똥이 될 것이다.

새로운 자본주의는 무엇을 의미할까? 새롭다는 것은 과거를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기업의 가치관을 바꾼다는 것은 새로운 자본주의의 선언이라 할만하다. 기업이 이익추구를 버리고 인간의 복지를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한다면, 단기 수익보다는 장기적 가치 창출을 위해 보상한다면, 소비자를 이용하는 것보단 파트너로 생각하고 우위, 초점, 차별화, 우월화, 탁월함 같은 가치보단 명예, 아름다움, 즐거움, 정의 그리고 대화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면 기업은 새로운 자본주의로 발돋움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위의 선택은 이미 대부분의 기업들이 고객과의 대화나 소통을 통해 가치를 창조한다는 마케팅의 일환으로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전적으로 이윤추구라는 명제 하에 시행되고 있을 뿐이다.

본 책 새로운 자본주의의 선언은 지속가능한 자본주의를 위한 기업의 존재의미를 밝히고 있다. 저자는 최근의 위기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와 함께 자본주의 역시 새로운 가치관을 지녀야한다고 역설한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사슬이 아니라 사이클이고 일방적인 제안이 아니라 가치를 창출하는 대화다. 그는 최근의 위기를 돌파하기위한 글로벌 기업들의 사례를 예로 들며 변화하는 기업의 가치관을 설명한다. 현대기업들은 무임승차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정부와 대중들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있다. 그들은 이익추구에 앞서 누구도 먼저 환경이나 생태등 철학적 가치를 고찰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러한 변수들이 기업의 존망을 좌우하게 되었으니 새로운 가치관이 출연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불씨는 아직 꺼지지 않았다. 시장지상주의를 외치는 자본주의자들이 여전히 의회의 강력한 중추세력으로 입지해있다. 위기를 보는 시각은 각각 다르지만 위기를 새로운 변혁의 기회로 만든다는 것은 과거를 철저히 부정해야만 한다. 기업이 존재하는 진정한 목적은 무엇일까? 과도한 소비가 인간에게 주는 만족은 무엇이었는가? 혹자는 부정할지모르지만 빈과 부의 차이는 자본주의 이념은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자본주의는 마치 자가 증식하는 세포와 같다. 숙주가 있으면 뛰어난 자생력을 발휘해 거품을 일으키지만 숙주가 죽으면 곧바로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누구도 알지 못했던 자본주의의 허상, 이젠 새로운 가치관과 이념을 필요로 하고 있다.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파도가 당신을 휩쓸 것이다.’


[네이버 북카페를 통해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서평입니다.  

본 서평은 작성자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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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절반은 부자로 살자 - 돈 걱정 없이 행복하게
오종윤 지음 / 끌리는책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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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테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최근의 위기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법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환율급등을 예상했다면 달러에 관심을 가질 것이며 유럽 위기의 본질을 연구해보았다면 미국채나 중국주식을 눈여겨보고 있을 것이다. 자본 세력의 놀이터로 평가를 받고 있는 한국 자본시장 역시 재테크 달인들의 눈을 비켜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천문학적인 가계 빚과 공기업의 부채, 고무줄 같은 환율, 고삐가 풀린 물가를 눈여겨보고 있을 것이다. 특히 최근 가파르게 오르고 있는 금, 은의 향방에 촉각을 세우고 있을 것이다.

재테크, 언제부턴가 자산증식을 위한 재테크의 개념이 갑작스럽게 우리의 삶에 들어오고 있다. 금융회사에서 판매하는 대부분의 상품엔 재테크란 단어가 들어간다. 은행 예금이나 적금도 물론 재테크의 한 방법이다. 하지만 물가 수준도 따라가지 못하는 은행금리로 재테크를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저금리, 그렇다. 재테크는 저금리가 낳은 새로운 풍속도다. 부동산에 푹 빠진 한국인들에게 경고의 목소리를 높이고 선진 금융시장을 배우라는 재테크는 그 광고만큼이나 허실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현대 금융시장을 이해하기 위해선, 아니 최소한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재테크는 필요조건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우린 재테크의 기본 본질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재테크는 옵션이나 선물과 같은 극단적인 투자방법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 일반인들이 재테크에 대해 간과하고 있는 부분이 단기투자와 이익률에 대한 허상이다. 인간은 이익에 대해선 둔감하지만 손해는 피하고 보려는 독특한 심리를 가지고 있다. 재테크는 이익으로 보상되기도 하지만 손해를 볼 수도 있다. 자본시장에서 손실을 보지 않으려는 재테크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손해에 민감하다면 차라리 4%대의 은행이자가 가장 효율적일 것이다. 재테크는 시간에 대한 함수와 이율 그리고 올바른 투자 철학이 선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재테크의 실상은 부자가 되는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우선적으로 현대사회를 관통하는 금융시장의 패턴을 보게 되면 이와 같은 현상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지금 당장 TV를 켜보라, 브레이크 타임마다 보험, 카드, 대부업 광고가 당신의 눈길을 사로잡을 것이다. 또한 매초마다 접하는 포탈이나 미디어의 자극적인 기사들은 당신의 소비를 자극할 것이며 정부는 소비촉진을 위해 다양한 정책을 쏟아낼 것이다. 솔직히 이러한 전 방위적인 압박 하에 당신이 재테크에 성공할 확률은 거의 제로다. 재테크는 소비에 대한 계획이 필요하다. 이는 소득에 대한 관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자신의 인생설계와도 같은 맥락을 지닌다. 다른 하나는 과도한 부채의 증가다. 한국인들에게 부동산은 활화산과 같다. 걱정과 기대가 뒤섞인 부동산 문제를 쉽게 접할 수 없는 것이 한국의 부가 부동산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부동산에 묶인 부채문제는 두고두고 재테크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재테크는 단순히 금융자산을 늘리기 위한 포트폴리오를 정하는 것보단 개인의 인생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계획적인 플랜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만족스러운 삶은 누구나 원하는 것이지만 과거와 같이 무계획적으로 소비를 하거나 부채를 양산한다면 나머지 인생도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인생의 절반은 부자로 살자’ 현직 재무 설계가로 투자포트폴리오의 정석을 보여주는 오종윤님의 재테크 포트폴리오에 관한 책이다. 그가 주장하는 재테크 이론은 ‘돈을 사랑하자’로부터 시작한다. 돈에 대한 개념이 돈의 철학을 만들고 재테크에 대한 생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론의 중심은 ‘황금 알을 낳는 거위를 만드는 것’ 이다. 그런데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다루는 방법이 다소 특이하다. 거위의 배를 가를 것인가(단기투자), 아니면 황금알을 지속적으로 낳도록 거위를 키울 것인가(장기투자)? 저자의 선택은 당연히 후자다. 재테크의 기본은 돈의 철학을 이해하고 인생의 계획을 세우면서부터 시작한다.

실질적으로 저자는 직접적인 투자사례를 통해 자신의 재테크 방법이 유효함을 입증하고 있다. 흔히 말하는 적립식 펀드의 장점을 이용하는 것이다. 수수료가 적은 ETF의 장점도 있지만 주식이란 게 묘해서 자주 보면 마음이 흔들리는지라 펀드를 선택한 그의 방법이 무척 효율적이란 생각이 든다. 그의 재테크 이론은 꾸준한 소득관리와 투자의 리밸런싱이다. 덧붙여 위험 헤지 수단으로서 보험의 기능을 활용하고 자산의 효율적인 배분과 활용이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도 펀드투자에 대한 포괄적인 패턴을 읽을 수 있다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10년 전을 회고해보면 지금의 모습에서 무엇이 달라져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자산관리를 보면 10년 후의 모습도 충분히 예측이 가능하다. 재테크는 단순히 자산 증식 관한 문제를 다루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인생을 통괄하는 주요한 과제인 자본의 흐름을 계획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결국 선택의 몫은 스스로의 책임이다. 재테크에 관한 다양한 포트폴리오와 이론이 가득한 오종윤님의 부자인생, 재테크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누구에게든 추천하고픈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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퀀트 - 세계 금융시장을 장악한 수학천재들 이야기
스캇 패터슨 지음, 구본혁 옮김 / 다산북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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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인 믿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욕망이 믿음을 지탱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고대 역사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으며 최근의 경제위기를 통해서도 그 전모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신탁은 불확실한 미래를 통제하기 위한 인간의 소망을 대표적으로 볼 수 있는 자료다. 당시 사제나 지도자의 입을 통해 나온 신탁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특별한 상징이었다. 하지만 법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신탁의 효용성을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21세기, 신탁의 효율성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곳이 경제 분야다. 경제는 이미 인간의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 특히 과거의 신탁과 마찬가지로 미래를 예측하는 새로운 수단으로 믿음을 대체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대중하고는 전혀 거리가 먼 ‘퀀츠’들이란 새로운 사제가 떠오르고 있다.

‘퀀츠’들은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아내는 사람들이다.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은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이자 도전의 시작이다. 흔히 주식을 게임으로 치부하는 이들이 많다. 기업의 가치에 투자한다는 주식의 본질에 대한 이해는 교과서적인 풀이일 뿐이다. 이미 시장은 투기판 혹은 투전판으로 전락한지 오래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점은 개미라 불리는 개인들의 위치다. 그들 역시 주식이 게임이란 논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게임의 특성에 대해선 거의 관심을 주지 않는다. 게임의 승자는 항상 게임을 만든 이들이고 끝없이 판돈을 키우는 이들이다. 게임시장에서 양보와 대화는 자신의 자본을 내놓는 결과를 만들 뿐이다. 이와 같은 해석은 비단 주식뿐만이 아니라 대규모의 자본이 이동하는 곳에선 흔히 볼 수 있는 구조다. 퀀츠들이 주목하고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게임이론을 만들 수 있고 얼마든지 판돈을 키울 수 있는 곳, 1990년대 월가를 중심으로 급격하게 증가하는 헤지펀드들은 퀀츠들의 가장 중요한 시장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퀀츠들의 세상을 알아야만 하는 것일까? 수천억 달러의 연봉과 자가용비행기를 몰고 다니며 세계 곳곳의 투자처를 파악하러 다니는 그들에겐 실패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들에게 금융시장은 끝없는 자금이 창출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렸다. 게임이론을 만들고 고도의 수학계산과 통계기법을 통해 수익모델을 만들었지만 인간의 광기를 이길 수는 없었다. 그들 역시 피해자였지만 광기의 모델이 된 중심인물들이기도 했다. 본 책 퀀츠는 시장이론에 관한 다양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시장은 합리적이란 경제학의 절대적 명제는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 시장 자본주의의 맥락 역시 마찬가지다. 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간, 결국 광기어린 인간의 치기는 불특정 다수에게 너무 많은 피해를 끼치고 있다.

왜 우린 시장을 이기려는 것일까? 맹목적인 성장에 대한 환상은 인간의 삶에 풍요로움을 주었지만 동시에 불안과 걱정이라는 예측 불가능한 변수를 심어주었다. 그런데 만약 혼돈 속에서 규칙을 찾아낼 수 있다면 성장은 당연한 이치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를 이해하는데 무척 어려운 시기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기회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인류는 새로운 시험대위에 서있다. 예측불변의 위기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믿었던 수학적 계산의 오류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편견이 획일적이고 직선적인 자본주의의 허상을 말하는 것 같다. 돈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고통스러운 돈 보다는 소소한 일상이 더욱 큰 만족을 준다는 것을 모르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위기는 예측한다고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로 전환되고 있다. 엄청난 부와 권력을 지닌 퀀츠들의 세상을 이해하는 것은 고대 로마의 치기어린 황제들을 바라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로마 황제들의 결과는 멸망이었다. 혹, 로마와 같은 위대한 문화라도 남겨놓는다면 후대에 인정이나 받으려나, 하지만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이익뿐이란 걸, 위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서브프라임 위기의 전조 퀀츠, 이젠 돈에도 철학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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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중혜 手中慧 - 내 손안의 지식은장도, 개정신판
SERICEO 콘텐츠팀 엮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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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권의 책을 읽어도 한마디의 문장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책을 읽는 이유는 작가의 삶을 투영해 자신의 그릇에 담기위한 노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도 자신의 그릇의 크기를 알지 못한다. 인간의 매력이라면 오직 자신이 아는 것이 최고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라고 해야 할까? 우스운 소리 같지만 우린 자신에 의한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마치 세상은 나를 위해 존재하거나, 아니면 나하고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간혹 자신이 사회의 깨알 같은 일원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런 감정은 솔직히 무척 불편하다. 항상 비교의 대상이 되어야하며 자신의 통제권을 벗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우린 나와 사회라는 틈바구니를 교묘하게 메우며 하루를 살아간다.

세상은 온통 정보로 도배되어있으며 매초마다 새로운 지식이 탄생한다. 하지만 앎의 깊이는 더욱 얕아지고 있다. 흔히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지 않았는가? 지식의 깊이 또한 얕음을 더해가지만 사람의 속마음은 더욱 오리무중이다. 속고 속이는 세상, 단지 앞만 보고 달리는 세상, 어떤 방향으로 가든 잘만 가면 된다는 사고가 우리사회를 지배한다. 답답한 이는 현실적인 이들이다. 그들에겐 하루하루가 피 말리는 일상이다. 우린 지식은 많아졌지만 지혜는 사라지고 있는 이상한 사회를 경험하고 있다. 어른도 없고 애도 없다. 명분은 실리로 바뀌었고 정도보단 비정도가 더욱 이상적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우리의 속마음을 태우는 것은 상대에 대한 자괴감이다.

왜 그토록 많은 이들이 지식을 탐구하는 것일까? 지식은 실천적인 행동이 뒷받침되어야 의미를 지닌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들이 새롭게 우리의 일상을 바꾸거나 변화한 적이 있는가? 우리의 지식은 앎으로만 끝나버린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다면 문제의 근원을 추적하다보면 쉽게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누구를 위한 정책인가? 정책에 사심이 들어가는 순간 정책은 개인 소유물로 전락한다. 우리사회는 책임을 요구한다. 정부의 책임, 기업의 사회적 책임, 그런데 정작 모든 책임은 개인들이 짊어지고 있다. 지식은 많이 안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를 알더라도 쓰임새가 좋아야 진정한 지식이 아닐까?

경외의 대상이 되는 SERI CEO의 만찬, 그들을 위해 준비한 SERI CEO의 책이 수중혜다. 내손안의 지식은장도란 이름으로 출시된 수중혜는 말 그대로 지식의 날을 벼린다란 목적아래 촌철살인과 같은 명언들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CEO를 위한 책엔 어떤 내용이 기록되어있을까? 다수의 삶을 책임져야만 하는 그들의 어깨를 가볍게 해줄 주옥같은 명언들이 지혜, 마음, 여유를 중심으로 폭넓게 펼쳐져있다. 특히 자연을 통해 배우는 지혜는 우리들에게도 좋은 교훈이 된다. ‘처음부터 힘든 산은 없다. 바위에 걸려 넘어진 사람은 없다. 메아리는 결국 자신의 목소리다. 정상에 올라야 진정 멀리까지 볼 수 있다. 내려올 때를 조심하라.’ 산을 통해 배우는 역경극복은 우리의 인생과도 다르지 않다.

百年樹人(백년수인)은 100년을 내다보며 사람을 심는다 한 뜻이다. 이는 한번 심어 한번 거두는 것은 곡식이고, 한번 심어 열 번 거두는 것이 나무며. 한번 심어 백번 거둘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라는 제자백가의 논문에 수록된 관자의 인재육성 계획이다. 쉽게 떠나는 자도 들어올 때는 모든 것을 걸고 들어왔을 것이다. 문뜩 우리사회에 만연한 인재경시 풍조가 사회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예나 지금이나 CEO는 유아독존으로 살아갈 수 없다. 리더의 역할은 조직원이 리더가 되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 실패한 기업들이 어떻게 결과를 맞이했는지 CEO들이 더 잘 알것이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CEO들을 위한 상식이 무척 풍부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고대의 명언들은 물론, 고사성어와 읽어볼만한 책들이 수록되어있다. 또한 지친 CEO들을 위한 혹은 사교를 위해 최소한의 클래식 추천 곡들이 눈에 띈다. 한국사회는 급변하는 사회다. 외부적인 변수에 무척 취약해 CEO들은 그야말로 매일 외줄타기를 성공해야한다. 하지만 그들이 있기에 한국경제는 성장의 길을 벗어나지 않았다. 지식은 지혜로 승화될 때 진정한 가치를 찾는다. 성리학의 이념에 파묻혀 세상을 잃어버린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을 기억할 때 우린 지식의 효용성이 어떻게 세상을 바꾸어나가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네이버 북카페를 통해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서평입니다.

본 서평은 작성자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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