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수가없다 스토리보드북
박찬욱 지음, 이윤호 그림 / 을유문화사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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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과 만나 근처 서점에 들렀다가 어쩔수가없다 스토리보드북이 매대에 놓여진 것를 보고 반가웠다. 솔직하자면 지인에게 자랑하고픈 마음이 들어 괜히 책을 들어 이리저리 들춰보고 있었는데 몇걸음 떨어진 서가에서 나타난 지인이 나보다도 먼저 반갑다는 듯 나도 방금 그거 보고 있었어 하고는 사실 헤어질 결심을 더 좋아하긴 하는데 어쩔수가없다 스토리보드북이 새로 나온 것을 보니 스크린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의 디테일을 다시 살펴보고 싶어 한번 쭉 넘겨보고 온 참이라고 한다. 그 기세에 눌려 나 이 책 있다고 자랑하려다 삼키고 그래 마침 나도 확인하고픈 요소들이 있었다고 대답했다. 

이상하지, 책상 위에 올려놓은 내 책보다 서점 매대 위에 올려진 책은 어째서 더 탐이 나는 것일까. 애착은 내 책에 가기는한데 매대 위의 책은 갑작스러운 욕망을 자극한다. 집에서 확인해보면 될 것을 당장이라도 들춰 방금 떠오른 궁금증을 해결해버리고 싶어진다. 얼마든지 시간을 들여 편안히 읽어볼 수도 있는데 그 자리에 선 채로 살짝 틈만 내어 궁금한 페이지의 내용을 재빠르게 확인하고 덮어두고 싶다. 지금 당장 읽고싶다. 그 순간 경험한 욕망의 자극, '어쩔수가없다'와 잘 어울렸다. 결국 이 영화는 사람의 욕망을 말하고 있으니까. 그때 확인하고 싶었던 장면은 치위생사로 일하던 미리와 환자로 온 지인이 만나는 부분이었다. 

스토리보드북으로 영화를 감상하는 것의 장점 중 하나는 영화적 기법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카메라가 어떻게 이동하는지, 그 순간 어떤 장면을 만들고 싶었는지, 그걸 무엇이라 지칭하는지. 이를테면 만수가 정원에서 새벽 동안 삽질을 하는 장면에 " 1) 매직아워. 만수, 쉼 없이 삽질하다가- 멈추고 하품. 카메라 전진- 만수 프레임아웃시키면서 틸트업- 별빛이 스러진 하늘, 희붐하다. 디졸브- (358)" 이 설명이 마치 화면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컷 그림과 함께 디테일을 잡아 준다. 무엇을 봐야하는지, 왜 찍었는지. 이 영화를 알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참고서처럼 친절하다. 

순서, 장소, 시간, 내용, 그림, 설명까지 스토리보드북 안의 구성은 영화의 모든 장면들과 다름없이 세세하다. 얼마나 세세한지 미처 기억하지 못했던 장면마저 영화 속 인물들의 모습과 목소리로 다시 재생되는 듯하다. 다 이해하지 못하고 넘겼던 장면들도 종이 위에서는 어느 하나 예사롭지 않다. 특히 손예진 배우가 분한 미리라는 인물을 볼수록 스스로가 무의식 중에 미리의 비중을 작게 축소했던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놓쳤던 부분이 많았다. '설마'하고 생각했던 지점들이 하나씩 충격을 주며 다시 끼워맞춰지는 과정을 겪고 나니 인물이 훨씬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스크린 위에서 찰나의 장면으로 흩어진 것을 종이 위에서 다시 더듬어본다. 이때 느꼈던 묘한 위화감, 의심, 질문이 의도되었던 것인지 혹은 그를 위해 안배된 것들을 놓쳤던 것인지, 지나친 억측인지 어떤 장면들은 몇번이고 돌아보았다. 그렇게 보고서도, 지인과 한참을 이야기하고서도 '아, 결국은 잘 모르겠다'고 털어내고만 부분들도 있지만 지난 2025년의 기대작이자 문제작이었던 '어쩔수가없다'를 덕분에 끝까지 곱씹어 볼 수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천천히 감상을 정리해보고 싶은 사람에게 이만한 즐거움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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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홈 ㅣ 미래인 청소년 걸작선 96
진저 지음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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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지, 따지고 보면 내 잘못이 아냐. 누가 알았겠어. 하필 그때 그게 폭발할 줄. 세상에 종말이 올 줄! 54" 

'빅 홈'의 소개글을 보고 세상의 모든 인프피들을 위한 책이 아닐까 하는 운명을 느꼈다. 전에 '만약에 오늘 아침 전쟁이 나면 네 집 앞에 제일 먼저 뛰어 가서 나는 너랑 같이 도망갈래'* 하는 가사의 노래를 들었을 때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운석이 떨어지면, 빙하가 녹아버리면, 삶이 얼마 안남았다면 하는 만약을 노래가는 가사를 들으며 만약에 이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할까 생각하곤 했는데, 원전 폭발 이후 보호소 안에서의 생활에 대한 이야기라니! 게다가 잃어버린 동생을 찾아야하는 주인공, 비밀스러운 탈출까지 어떻게 '빅 홈'에 안 빠져들 수가 있을까. 

요즘 여기저기서 전쟁이 났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탓에 '빅 홈'을 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읽었다. 어느 누군가의 변덕으로 세상에 갑자기 핵폭발이 연쇄적으로 번져나갈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는가. 지나친 비약같지만 사실 지구촌을 표방하는 평화의 시대에 성장한 세대로써 지금의 배타적이고 삭막한 국제정세가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같은 별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모두가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적으로 살아가길 바라고 노력하는 줄 알았는데, 어른이 되고보니 세상이 갑자기 달라진 것만 같은 요즘이다. 

" 이해하려 애쓸수록 더 혼란스러워졌다. 자고 일어나 보니 지도 없이 낯선 땅에 던져진 느낌이랄까. 다만, 몇 가지는 분명했다. 당연한 듯 반복되던 일상이 잘못 떨어뜨린 유리잔처럼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는 것. 부서진 조각을 아무리 이어 붙인들 원래 모양으로는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라는 것도. 17" 

전쟁이 끝나고 나면 금방 다시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여기지만 그것은 전쟁과 한발자국 떨어진 사람들, 살아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전쟁이 훑고 지나간 흔적이 남은, 그리고 그 안에서 사라져버린 사람들에게는 '원래의 일상으로의 회복'이란 것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상실이다. 어느 도시의 초등학교에 폭격이 떨어졌다는 뉴스**를 보고 전쟁은 결국 그 이해관계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의 삶을 망가뜨리는 것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실감했다. 

부서진 조각은 원래 모양으로 돌아가지 않겠지만, '빅 홈'의 아이들은 제 모양을 조금씩 잃었을지 언정 강하고 선명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 안에서의 인물들은 어떻게 해서든 더 나은 상황으로 나아가겠다는 희망을 품고 있어서 좋았다. 심지어 다른 이들을 이용하고 위협하는 비뚤어진 인물인 필광이 마저 삶에 대한 의지와 희망으로 가득차 있음이 보였다. 아끼는 것을 꽁꽁 붙들고 다니고, 하고 싶은 것, 바라는 것을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은 안타까운 만큼 애틋해서 읽는 내내 그래도 조금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길 응원하게 된다. 

사실 영화를 볼 때 흔히 하는 말로 cj감성 같은 연출을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 이 장면에서 울어! 하고 판을 깔아놓는 것 같은 신파 요소가 들어가고 하는 그런 것들. '빅 홈'에서 기대한 것도 신파같이 눈물 빼는 내용이 아니라 세상의 종말과 숨겨진 음모, 이에 저항하는 아이들의 용기와 모험 같은 아포칼립스 모험 동화였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많은 눈물을 쏟아낼 줄은 몰랐다. 눈치가 빠른 사람은 아닌데 어느 순간 그렇구나, 싶어지니 읽는 내내 보이는 모든게 안타깝고 슬펐다. 그런데 막상 헤이보다 나의 슬픔이 더 오래가다니. 신파는 싫지만 슬픔은 또 저항없이 받아들이게 되어서 그 먹먹함도 좋았다. 

핸드폰에 좋은 기능들이 많이 생긴 뒤로 지갑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는데, '빅홈'을 읽고 문득 돈이나 카드 대신 소중한 사람들의 사진을 넣은 지갑을 꼭 가지고 다녀야 되겠단 생각을 했다. 지갑에 있던 유일한 가족사진을 바라보는 헤이를 보고, 어쩌면 이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세상에서 수많은 기능이, 그보다 더 많은 사진이 담긴 핸드폰보다 확실한 것을 언제고 가지고 있어야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싹텄다. 그리고 항상 소중한 사람들에게 아쉽지 않게 잘해야 한다는 당연하고 분명하지만 자주 잊어버리게 되는 일상의 진리도 다시금 되새겼다. 

넷플릭스 대신으로 성인들에게 '혼모노'가 추천되었다면, 청소년들에게는 '빅 홈'이 권해져야 마땅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둘 다 읽어보았는데 어른 입장에서도 '빅 홈'을 더 짜르르하게 읽어냈다. 이런 재난물에서는 극한 상황이나 죽음이 빈번한 것을 당연히 생각하고 봤었는데 '빅 홈' 안의 너무 많은 상실은 어쩐지 조금씩 안타깝고 투명한 우울을 담고 있어 마음을 건드린다. 매번 만약을 상상하길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재난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넷플릭스 만큼이나 재밌는 책을 찾고 있는 사람이라면, 가족 사진을 지갑이나 다이어리에 넣어둔 사람이라면, 마음 속에 우울과 희망이 뒤섞인 초록을 남길 '빅 홈'을 읽어보자. 



* 전쟁이 나면 - 장범준 (2024 싱글/EP)
** 2026년 2월 28일 이란 미나브 여자 초등학교 폭격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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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도 너머 - 불확실한 세계를 돌파하는 과학의 태도
카밀라 팡 지음, 조은영 옮김 / 푸른숲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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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도 너머'를 앞에 두고 사실은 그 시선을 따르기보다는 엿보고 싶었던 호기심이 컸다. 과학의 태도로 삶에 접근해보기를 권하는 저자의 추천에 익숙한 어색함이 일깨워졌다. 먼 옛날 안 풀리던 수학문제를 공부 잘하는 친구에게 물어봤을때 예사롭게 그냥 이 공식 적용하면 되던데 하고 답하던 모습이 떠오르는 듯 했다. 문제를 보면 어떤 공식을 적용해서 풀어야할지 아는 것이 당연하다던 그 무구한 눈빛, 지극히 당연한 것에 대한 믿음과 재미까지 담겨있는듯 하던 그 모습이 보였다. 큰일났다. 내가 이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까. 

저자는 '만약'을 떠올리며 머릿속으로 과학적인 관찰과 결과 도출을 따져보는 게임을 한다고 했다. 나 역시도 만약을 떠올리는 일을 '재미로도 하고, 습관적으로도 하(51)'는데 나의 만약은 조금 다르다. 만약 회사에 있는데 갑자기 전쟁이 나면 집으로 가야할까 피난처로 가야할까 나 어느날 갑자기 비둘기가 된다면 나=비둘기는 나는 법을 알까 모를까 같은 만약의 세상을 상상하는 것이다. 저자의 만약이 '가설'이 되고 나의 만약은 인프피가 되는 다름이 재밌으면서 민망하고 씁쓸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다름만을 느꼈던 것은 아니다. 과학적 사실도 가끔은 난해하고 대체로 흥미로웠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세상의 보편을 설명하는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책의 곳곳에서 저자가 얼마나 열심히 자신의 상황을 긍정하고 노력해서 세상을 바라보려고 했는지 느껴졌다. 더불어 암세포 연구나 암흑 물질, 코로나 백신, 중력파, 양자역학 같은 전문적인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아졌다. 이 내용들을 흥미롭게 읽고 다 이해한다면 더욱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이 이야기를 통해 저자가 말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공감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 지나치게 개방적인 자세 때문에 갈피를 잃어버리지 않을 것. 반대로 마음을 완전히 닫은 채 선입견에 휘둘리지도 않을 것. 34" 

과학을 향한 자세를 말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인간관계 보편의 기조나 다름없다. 자신의 중심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 다른 사람을 함부로 재단하지 말 것. 이렇게 생각하니 염려되었던 마음이 조금씩 풀어졌다. 과학의 시선이라고 해서 나에게 전혀 없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또 내가 알던 것과는 다른 세상에 대해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 수학의 정석을 보고 놀랐던 마음이 과학이라는 말에도 겁을 먹었었다. 이제 어른이니 더이상 과거의 트라우마에 갇혀 있어선 안된다고 생각하며 조금 더 친근한 마음으로 접근해나갔다. 

'서로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 다른 학력과 사회적 배경을 지닌 사람, 대조되는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모이면 문제 해결과 수평적 사고에 도움이 된다. 그뿐만 아니라 연구 결과와 실제 세계에서의 응용에서 형평성을 보장하는데도 대단히 중요하다. 182' 이 다양성에 대한 내용을 읽으면서 이제는 일일이 관심을 기울이기에도 너무나 보편적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어지는 남성 중심의 연구, 인종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연구 결과의 내용을 보고 다양성을 고려한다는 것이 어떤 범위까지 영향을 미치는지 새삼 깨달았다. 유연과 확장의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통해 이해와 존중의 고정된 방향으로 보고 있었던 시선을 바꿔주는 내용이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을 가지고 읽었던 부분은 8장 편향에 대한 내용이었다. 의식 또는 무의식으로 운영되는(228) 편향이라는 것에 대해서 전부터 의심하고 있었다. MBTI라는 것이 유행하며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테스트를 해보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 결과가 자신과 꼭 맞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가끔 결과값이 달라진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보이는 것과 실제 자기의 모습이 다르게 나오기도 한다고 했다. 그중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난 이런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확언하는 사람 중에 진실로 그런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적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있지 않은가.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이 본인이 맞을까,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 자신은 이런 사람일 것이라고 바라는 대로 스스로조차 속이고 있는 것인지 항상 궁금했다. 외부로 뻗어나가기보다 내부로 검열부터 들어가는 이 비생산적인 편향에 대한 강박적인 균형과 저항 욕구는 "어차피 개개인은 모두 셀 수도 없이 많은 인지 편향을 지니며, 전혀 편향되지 않는 방식으로 행동하거나 중립에 가까운 세상에서 살 가능성은 없다. 247"는 말에 조금 위안을 받았다. 

이렇게 이해를 위한 확장을 하며 책을 읽는 동안 자신에 대해서는 축소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게도 되었다. 과학이 자신에게 낯선 언어일 것이라는 생각, 저자는 나와는 다른 능력, 세상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구분 같은 것들을 바꿔나갔다. 처음엔 보편의 궤도를 넘는 생각과 시선을 말하는 것이라 여겼는데, 각자의 궤도를 가진 사람들이 그 너머에 있는 외부와 타인과 닿아 연결되고 영향을 주고받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과학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말하고 느끼는 모든 방법을 열성적인 전달자를 통해 만나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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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스러운 돌봄 - 잘 키우려 할수록 나빠지는 불행에 대하여
신성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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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지만 '이 세상에 부모 마음 다 같은 마음'이라 해도 모든 부모는 부모이기 전에 시민이고 개인이다. 자식 또한 부모의 분신이 아니라 고유한 타인이다. 우리는 아이와 좋은 이별을 맞기 위해 사랑한다. 사랑을 줄 수 있지만 생각을 심을 수는 없다. 부모이기 전에 각자의 '나'들이 먼저 자신을 들여다보고, 타인을 돌보는 그 마음을 돌이키기를 제안하고 싶었다. 7"

 책을 읽기 전에 자극적인 기사들을 보고 가지고 있던 요즘 아이와, 부모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다. 혹시 모를 사고나 다툼으로 항의가 들어오는 일이 많아 더이상 소풍같은 야외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 운동회 때 생기는 소음 때문에 민원이 들어온다는 것, 틀렸다 졌다는 것에 자존감에 영향을 주고 아이들이 상처를 받기 때문에 시험을 없애고 등수를 지우고 잘한 것도 따로 불러 칭찬해준다는 것 등 고리타분 하지만 전과는 다른, 요즘의 교육 현장에 대한 낯섦과 의문이 있었다. 가정에서의 돌봄과 교육은 점차 방만해지고, 상처와 실패 하나 없(어야 할)는 무균 상태의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자존심에 사사로운 상처가 나면 그 벽 앞에서 스스로를 포기해버리거나 타인과 외부를 향해 과도한 분노를 표출한다. 세상이 이렇게 변화하기까지 우리가 무엇을 놓쳤고 무엇을 오독하였는가 '탐욕스러운 돌봄'을 통해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읽었다.  

 '탐욕스러운 돌봄'에서 만나게 된 돌봄의 범위는 예상보다 넓었다. 단순히 양육의 관점에서 봤던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로 우리 사회 전반적인 돌봄을 마주하고 있었다. 특히 2부에서는 이주노동자, 의료돌봄, 다문화, 난민, 장애인, 성소수자, 재해 생존자, 노동자 등 사회의 틀 안에서 연대와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들에 대한 돌아봄과 돌봄을 함께 이야기 하고 있다. 더 나아가 서울과 비서울이라는 우리나라의 중앙집권현상에 대해서도 꼬집는다. 우리가 바꾸고자 하는 세상이 이렇게도 작고 넓고 내밀하면서도 전체적인 모든 것이었다니, 아이양육에서 개인, 집단, 사회, 환경 까지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탐욕의 부작용을 말하고 있는 그 확장이 달가우면서 탐욕스럽게도 느껴졌다.

 책의 곳곳에서 저자는 자신도 역시 아이를 남 부럽지 않게 잘 키우려 애쓰는 보통의 양육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입시 컨설턴트에게 조언을 구해 학습 로드맵을 얻기도 하고, 맘카페를 통해 학습 정보를 얻으려 등급올리기에 노력한다. 직접 학원이나 센터에 아이를 '라이딩'해주고, 다른 양육자들의 입성을 통해 수준을 가늠하고, 다른애의 성취를 은근히 살피며 위치를 짐작한다. 아이가 아직 글을 모를 때(44)는 문구를 바꿔 알려주어 자연스럽게 관심을 돌리도록 어르기도 한다. 이 평범함에 마음을 붙이고 이해를 도모하다가도, 평범을 의심하기도 하며 천천히 책을 읽었다. 그 의심이 저자와의 거리감을 만들었는데, '평범'으로 인식할만큼 비슷하면서도 어느 순간의 다름이 큰 간극을 만들기도 해 읽는 동안 좋은 자극이 되었다. 특히 "불행히도 한국의 아이들에게는 박물관으로 소풍 갈 권리가 없다(133)"는 박물관과 아이에 대한 일화에서는 저자가 과잉된 반응을 하는지, 스스로가 차별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 여러번 되새겨보게 되었다.  

 " 사유가 필요하다. 어른이 먼저 사유하고, 아이들에게도 사유하는 법을 알려주어야 한다. 과거를 돌아보고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하며 다음 세대의 삶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소통할 때, 갈등을 해결하고 올바른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다. 70"

 대체로 강하고 분명한 어조로 현상을 짚어내고 가감없는 비판을 해 자연스럽게 공감과 이해를 이끌어냈지만, 한편으로는 실망스럽기도 했다. 캠핑장에서 열린 체육대회 때 공정하지 못한 방법으로 1등을 한 아이에 대해 불만을 품었음에도 그 집 부모와 운영진이 친해보여서 항의도 하지 못하고 의욕을 잃고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32)는 시작이었다. 코끼리코를 열번 돌아야 하는데 여덟번 돌았으니 잘못됐다, 재대결을 하자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는 용기라니. 부모를 등에 업고 남의 자리를 빼앗는지도 모르고 만들어진 영광을 얻어가는 아이들에 대해 지적하는 한 편, 잘못을 보고도 잘못이라 말하지 않고 침묵과 외면으로 상황을 피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앎을 실천으로 옮기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높은 것인가 이해하지만 아쉽기도 했다. 

 " 사실 사춘기를 향해 가는 요새 딸아이의 가장 큰 특징은 '동시대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대의 사회, 문화, 예술, 풍습 등을 아우르는 전반적 경향에 조응하는 태도를 동시대성이라 한다면, 지금 아이는 매우 수행적으로 동시대성을 체현하고 있다. 164"

 읽기 전에 예상했던 양육의 돌봄은 3부, 특히 4부에서 깊게 다루고 있는데 문득 예전에 어떤 드라마를 보다 아역배우가 학교에서 두부한모라고 자신을 놀리는 친구와 싸운 일을 말하는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 일이 떠올랐다. 이와 비슷한 충격을 '탐욕스러운 돌봄'에서도 만났는데, 기생수(기초생활수급자, 75)라는 줄임말과 다문화가정의 아이를 두고 NPC(Non Player Caracter,72)라고 표현한 것이었다. '동시대성'을 체현하고 있는 예비 사춘기 아이를 통해서 요즘의 흐름을 파악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언뜻 세대가 함께 어우러짐을 말하는 것 같지만, 이러한 표현들이 어른도 아니고 아이들의 세계에서까지 등장하게 된 것에 대한 바탕 또한 드러낸다. 가정환경을 두고 비꼬는 표현, 다른 사람을 동등한 인격체로 보지 않는 자기중심적이고 비인간적인 시선이 타인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를 따져보던 어른의 셈법에서 나왔음이 분명했다.   

 "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아이들은 전부 다르다. 누군가의 자식이기 이전에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세계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자신만의 역동을 만들어낸다. 155" 

 '탐욕스러운 돌봄'에는 나의 아이를, 또다른 개인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키워나가야 할까, 어떻게 교육하고 돌보고 존중하고 성장시켜 결국 나라는 세계와 분리하여 전혀 다른 우주를 가진 존재로 인정하고 사회구성원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내밀하고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이고 사회적인 이야기라 읽는 내내 함께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초반 무기화 되어버린 자존감과 페미니즘(25)의 유사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만 해도 좀 더 거칠게 부딛히는 면들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돌봄 문제에 대해 오래도록 고심해온 흔적들이 느껴질 때마다 거친 면들이 조금씩 다듬어지고 좁았던 시선을 넓게 확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좁은 돌봄의 의미를 넓혔을때, 그리고 결국 그 넓힌 세계가 다시 처음의 돌봄을 위한 밑바탕이 되는 것임을 다시 깨달았을 때 책을 덮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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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무시하는 사람을 무시하는 법
유상우 지음 / 넥서스BOOKS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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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겉으로 보면 거절은 단순한 선택처럼 보인다. '할 수 있다' 혹은 '어렵다'를 말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실제 상황에서 거절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마음속에서는 여러 감정과 생각이 동시에 밀려오고, 그 사이에서 우리는 자주 자기 뜻과 다른 선택을 하게 된다. 15" 

길을 걸으면 무슨 판넬에 스티커를 붙여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눈을 빛내며 따라오거나, 멀리서부터 짝을 이룬 사람들이 마스크를 쓴 얼굴에도 복이 많다며 말을 걸어오는 이른바 만만한 인상이라 세상을 살아오면서 피곤한 일들이 없지 않았다. 자신의 기분이나 성별이 태도가 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언제는 정말 간절히 내가 마동석같은 체격의 남자였다면 얼마나 세상 편했을까 바랐던 적도 있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만만해보이는 외면에 내면까지 갖춘 물렁한 사람이었고 이따금 마주하게 되는 '덜 교육된 사람들' 앞에서 정신적 고통을 받을 때면 그 고통이 신체적 고통으로까지 번지지 않도록 피하는 방법을 골몰하는 쪽이 더 익숙하고 필요했다. 

'아, 저 잠깐 올리브영 좀 들렀다가 가려구요.' 라는 말을 해본 적 있을까, 혹은 이 말의 의미를 알고 있을까. 요즘은 제의, 부탁에 대한 거절을 자신에 대한 거절로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많아 거절이 무섭다. 아주 사소한 거절이나 거부의 표현에도 불같이 화를 내고 폭력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이 종종 뉴스에 나오기 때문이다. 안그래도 어려운 거절, 저 사람이 이 거절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어 발전된 돌려말하는 기술을 두고 쿠션어라는 표현도 생겼다. 그냥 솔직히 말하면 되지 왜 싫다는 말을 못해서 답답하게 하냐는 사람도 분명 있을테지만 거절을 말하기 힘든 사람도 최선을 다해 당신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방식을 '올리브영' 같은 쿠션어로 만들어낸 것이다.  

" 거절은 누군가를 밀어내는 행동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관계를 오래, 그리고 건강하게 지켜 내기 위한 중요한 기술이다. 19" 

하지만 언제까지 에둘러 말하는 방법만으로 답답해지는 속을 풀지도 못하고 쌓아가면서 살 수는 없다. 그렇기때문에 '나를 무시하는 사람을 무시하는 법'이 좀 더 성숙하게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방법이 궁금하고, 필요한 사람을 위한 도움이 되어 줄 것 같아서 읽어보게 되었다. 

나는 왜 거절이 어려운가를 생각했을때 떠올랐던 이유들을 책에서도 세가지로 나눠 제시하고 있었다. '첫째, 관계가 끊어질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둘째, 나쁜 사람으로 보일까 봐 걱정하기 때문이다. 셋째, 갈등을 피하려는 성향 때문이다. 16' 두서없이 생각했던 이유들이 차례로 정리된 것을 보고 내면에 가라앉아 있던 약한 면과 욕망이 드러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 "나는 나를 존중하는가?" 43" 책을 읽다 찌르듯이 다가온 질문과 함께 사실은 그리 필요하지도 않은 상대의 호감을 얻고 싶다는 생각이 나를 압박하고 괴롭게 만들었던 적은 없었을까 되짚어보았다.  

" 자존감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기록으로 남지 않아도, 나 자신에게는 분명히 축적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나를 존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존감은 멀리 있는 목표가 아니다. 이미 오늘 아침, 내가 나를 대하는 방식에서 조용히 시작된다. 226" 

이 자신에 대한 질문은 4장에서 답으로 돌아온다. '나를 무시하는 사람을 무시하는 법'에서는 남을 똑같이 무시해주는 방법을 말하기 전에 나를 존중하는 것에 대해 몇번이나 강조하고 있다. 스스로가 단단하지 않으면 그만큼 타인에 의해 영향을 받고 휘둘리기 쉽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그러니 나를 무시하는 남에게 대응하기 전에 나를 무시하는 나부터 개선하도록 조언한다. 나를 위한 시간을 가져보기, 나를 칭찬하기, 피곤해도 밥을 잘 챙겨먹기, 환기를 해보기 같은 일상 속의 작은 실천을 통해 쌓이는 변화를 어렵지 않게 제안해준다.   

사실 책을 펼치면 이렇게 못된 사람한테는 저렇게 쏴주고, 이렇게 나쁜 사람한테는 저렇게 들이대버려라 하는 맞춤형 사이다식 대응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남에게 어떻게 하기 이전에 자신부터 바라보라는 조언이 먼저 나와 이제부터 세상과 싸우는거야, 하고 화부터 장전했던 마음이 한풀 가라앉았다. 물론 일단 나보다는 저 사람 왜 저러나가 궁금한 사람들은 2장부터 읽는 것을 추천한다. 솔직히 대부분 나 자신에 대한 반성과 땅굴을 충분히 파봤던 사람들이 이 책을 집어들었을테니 일단 2장부터 읽기(2-3-1-4)를 추천한다. 심지어 집착형(93)의 내용을 읽으며 혹시 내가 집착과 통제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점검해보기도 했으니 이런 성향에게 1장에서 마주하는 자신에 대한 점검은 투지를 살짝 꺾는 일이 되니 나중에 읽어도 좋을 듯 하다.  

가장 중요한 실전 활용편은 3장에 있는데, 그래서 3장의 내용이 가장 흥미진진했다. 대응하기보다 질문하는 편(137)이 더 강력한 전략이 된다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똑같이 무례해지거나 불쾌한 기분을 드러내지 않고도 상대방이 생각없이 가볍게 한 말을 되돌아보도록 만들면서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이라 현명하고 성숙한 태도로 여겨졌다. 또하나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도 관계에서 피로를 가져온다고 짚어준 점(친밀성 피로 151)도 의미있었다. 가족과 떨어져 살게 되면서 함께 살때보다 더 사이가 좋아졌다는 얘기를 가끔 본 적이 있었다. 오랜시간 함께 살아온 가족 사이에서도 이 거리 두기가 필요할 때가 있는데,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더더욱 이 거리감을 잘 유지해야 함을 느꼈다.  

남탓을 해보려고 기세등등하게 책을 들었다가 사실은 남보다 내탓을 더 많이 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나는 왜 거절이 어려운가, 왜 나에게 무례한 사람에게 단호하게 대처하기 어려웠나를 먼저 생각하고 건강한 관계맺기를 할 수 있는 기반을 다져주는 도움이 되었다. 책의 곳곳에 동영상 자료를 볼 수 있는 큐알코드가 있어 좀 더 궁금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었다. 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올리브영에 들러야 했던 사람이라면, 누워서 잠들기 전 그날 들은 누군가의 배려없는 말에 이렇게 대답해줄걸 이불을 걷어차 본 사람이라면, 거절을 하기 어려워 빠져나오고 싶은 단톡방에 영원히 갇혀있는 사람이라면, 타인의 실수에는 위로를 하면서 자신의 실수에는 자책을 하는 사람이라면 '나를 무시하는 사람을 무시하는 법'을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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