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수가없다 스토리보드북
박찬욱 지음, 이윤호 그림 / 을유문화사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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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과 만나 근처 서점에 들렀다가 어쩔수가없다 스토리보드북이 매대에 놓여진 것를 보고 반가웠다. 솔직하자면 지인에게 자랑하고픈 마음이 들어 괜히 책을 들어 이리저리 들춰보고 있었는데 몇걸음 떨어진 서가에서 나타난 지인이 나보다도 먼저 반갑다는 듯 나도 방금 그거 보고 있었어 하고는 사실 헤어질 결심을 더 좋아하긴 하는데 어쩔수가없다 스토리보드북이 새로 나온 것을 보니 스크린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의 디테일을 다시 살펴보고 싶어 한번 쭉 넘겨보고 온 참이라고 한다. 그 기세에 눌려 나 이 책 있다고 자랑하려다 삼키고 그래 마침 나도 확인하고픈 요소들이 있었다고 대답했다. 

이상하지, 책상 위에 올려놓은 내 책보다 서점 매대 위에 올려진 책은 어째서 더 탐이 나는 것일까. 애착은 내 책에 가기는한데 매대 위의 책은 갑작스러운 욕망을 자극한다. 집에서 확인해보면 될 것을 당장이라도 들춰 방금 떠오른 궁금증을 해결해버리고 싶어진다. 얼마든지 시간을 들여 편안히 읽어볼 수도 있는데 그 자리에 선 채로 살짝 틈만 내어 궁금한 페이지의 내용을 재빠르게 확인하고 덮어두고 싶다. 지금 당장 읽고싶다. 그 순간 경험한 욕망의 자극, '어쩔수가없다'와 잘 어울렸다. 결국 이 영화는 사람의 욕망을 말하고 있으니까. 그때 확인하고 싶었던 장면은 치위생사로 일하던 미리와 환자로 온 지인이 만나는 부분이었다. 

스토리보드북으로 영화를 감상하는 것의 장점 중 하나는 영화적 기법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카메라가 어떻게 이동하는지, 그 순간 어떤 장면을 만들고 싶었는지, 그걸 무엇이라 지칭하는지. 이를테면 만수가 정원에서 새벽 동안 삽질을 하는 장면에 " 1) 매직아워. 만수, 쉼 없이 삽질하다가- 멈추고 하품. 카메라 전진- 만수 프레임아웃시키면서 틸트업- 별빛이 스러진 하늘, 희붐하다. 디졸브- (358)" 이 설명이 마치 화면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컷 그림과 함께 디테일을 잡아 준다. 무엇을 봐야하는지, 왜 찍었는지. 이 영화를 알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참고서처럼 친절하다. 

순서, 장소, 시간, 내용, 그림, 설명까지 스토리보드북 안의 구성은 영화의 모든 장면들과 다름없이 세세하다. 얼마나 세세한지 미처 기억하지 못했던 장면마저 영화 속 인물들의 모습과 목소리로 다시 재생되는 듯하다. 다 이해하지 못하고 넘겼던 장면들도 종이 위에서는 어느 하나 예사롭지 않다. 특히 손예진 배우가 분한 미리라는 인물을 볼수록 스스로가 무의식 중에 미리의 비중을 작게 축소했던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놓쳤던 부분이 많았다. '설마'하고 생각했던 지점들이 하나씩 충격을 주며 다시 끼워맞춰지는 과정을 겪고 나니 인물이 훨씬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스크린 위에서 찰나의 장면으로 흩어진 것을 종이 위에서 다시 더듬어본다. 이때 느꼈던 묘한 위화감, 의심, 질문이 의도되었던 것인지 혹은 그를 위해 안배된 것들을 놓쳤던 것인지, 지나친 억측인지 어떤 장면들은 몇번이고 돌아보았다. 그렇게 보고서도, 지인과 한참을 이야기하고서도 '아, 결국은 잘 모르겠다'고 털어내고만 부분들도 있지만 지난 2025년의 기대작이자 문제작이었던 '어쩔수가없다'를 덕분에 끝까지 곱씹어 볼 수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천천히 감상을 정리해보고 싶은 사람에게 이만한 즐거움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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