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얼 의과학사 - 그림으로 읽는 의과학 혁명의 순간들
유임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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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is short, Art is long -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26)'
히포크라테스가 남긴 이 경구를 아시나요? 우리가 예술이라 이해했던 이 문구의 Art는 사실 전체적인 문맥을 파악해서 해석하면, 예술이 아닌 의술을 뜻한다고 한다. 예술의 위대함을 찬미하는 문구가 아니라 '인생은 짧고, 의술은 길다'로 시작하는 공부 열심히 하라는 잔소리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밝히며 '비주얼 의과학사'는 시작된다. 

'비주얼 의과학사' 라는 제목을 몇번이나 되새겨도 매번 비주얼의 과학사라고 읽게 되는 함정에 빠졌다. 의과학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익숙하지 않아도 괜찮은걸까. 의과학의 역사를 비주얼적으로 풀어낸다는 시도는 어떻게 하게 되었을까? 해부학자인 저자는 클림트의 <키스>를 감상하다 그림 속 무늬들이 정자와 난자 그리고 수정의 순간을 암시한 그림처럼 보이는 것을 발견한다. 가장 자리가 진한 도넛 모양을 한 적혈구의 전형적인 형태를 띈 무늬(101)를 통해, 당시 지식인 세계에 널리 알려진 의과학의 발전- 현미경을 통한 혈액의 구성 요소, 순환에 대한 발견이 작품에도 영향을 끼쳐 흔적을 남겼다고 본 것이다.
신기한 마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설명을 읽고서도 일반인의 눈으로 보기엔 그림 속 무늬들은 여전히 꽃이나 화려한 패턴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예술작품이 그 시대를 품고 있다는 점, 의과학이 가시적인 자료들을 통해 발전/기록 되어 왔다는 점엔 공감할 수 있었다. 책에 담긴 그림, 도표, 사진 등의 기록들을 통해 의학이 어떻게 시작되어 발전해나갔는지 파악해나간 저자의 시도는 자연스럽게 시각적 자료가 되어 의과학의 역사를 살펴보기 시작하는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하지만 과거의 인물들이 지금까지 쌓아온 의과학 지식의 층까지 멀쩡히 정답으로 가는 길만을 걸어온 것은 아니라,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시도를 했을까 싶은 일들도 있다. 가장 엉뚱한 시도는 체중계 의자를 만들어 그 위에 올라가 먹은 것의 무게와 배설한 것의 무게를 재고 실제 증감한 체중 사이의 손실을 발견한 17세기 초의 의사 산토리오 산토리오(65)가 등장한다. 하지만 우리 현대인들의 계산은 여기서 더 나아가 저울에 감자칩 하나를 올리고 그 무게가 여전히 0에서 변동이 없음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섭취하면 한봉지를 다 먹어도 살이 안 찐다는 이론을 만들어냈다. 
독특한 형태로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는 표지의 그림(97)은 라에네크가 만들어낸 최초의 청진기였다. 지금의 것과는 형태가 다르지만 더 잘 듣기위한 도구를 이용해 심장과 폐에서는 일정한 규칙음이 있고, 특정 소리가 특정 병리와 연관되어 있음을 밝혀낸 성취의 기록이다. 이밖에도 이걸 다 채울 수 있을까와 이걸 다 어디에 쓸 것인지 감도 오지 않는 중세 요검병(111) 크기에 놀라게 되기도 하고, 인슐린 치료 전후 환자의 변화(331)를 통해 현재와과 과거의 건강함과 보기 좋은 상태에 대한 관점 변화를 생각해보게 되기도 한다. 

'비주얼 의과학사'의 시도는 생소하고 독특하게 여겨지면서도 어찌보면 당연하게 수긍된다. 우리가 저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41)를 생각하면 떠올릴 수 있는 스케치인 <인체 비례도> 역시 그림으로 생물학의 영역을 표현해 낸 작품인 것이다. 그 외에도 다빈치가 남긴 인체 해부 스케치들은 예술가적 관점에서 시작되었으나 생물학과 해부학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치는 공헌을 했다. 그러니 이 두 분야의 연결을 낯설다고 착각하는 것일뿐, 오랫동안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보아왔던 예술이자 기록물, 발전의 과정인 것이다. 
클림트의 <키스>를 통해 그 사실을 깨닫게 된 저자는 본격적으로 비주얼적 자료에 담긴 시대의 기록, 의학 발전의 흔적을 찾는다. '비주얼 의과학사'에는 <인체의 구조에 대하여>라는 책의 권두화(44)가 실려있다. 과학과 예술이 만난 르네상스 해부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책으로, 16세기 해부학자 베살리우스가 예술가인 제자 얀 반 칼카르와 협업해 완성한 것이다. 한 시대 안에서 모든 분야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것, 그럼으로써 더 나아간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자극이 된다는 것이 잘 담긴 인상적인 예시였다. 
'비주얼 의과학사'는 저자가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발견해 낸 결정적인 의학사적 순간들이 '봄/보는 것'으로서 어떻게 정립, 반박, 증명되어 왔는지를 독자에게 전달하고, 앞으로도 이어질 의학사의 여정을 함께 가도록 이끈다. 생각보다 재미있고, 기대 이상으로 유용한 내용으로 채워져있어 다양한 연령층의 독자들이 부담은 덜고 호기심과 관심을 가지고 읽어봐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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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충 사육 준수 사항 ㅣ 안전가옥 오리지널 48
김혜영 지음 / 안전가옥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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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발..."
입안에서 무언가 터졌다. 혀에서, 식도에서, 폐에서, 간에서, 온갖 내장과 창자가 뒤꼬이듯이 울부짖는 감정이었다. 도망칠 수 없다. 나는 여기서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그 말만이 몸속의 피처럼 맴돌았다. 241" 

최근 개봉한 영화 <호프>에 너무나 많은 씨발이 나온 것마저 화제였다. 대체 그 욕설에는 무엇이 담겨있길래 한국인들은 모든 상황에 '씨발'을 쓰는 것일까. '빵충 사육 준수 사항'에서도 터져나오는 진실된 그 '씨발'이 있다. 갓 뜯은 루꼴라의 신선함 뒤로 담백 고소함이 가득한데다 깔끔한 뒷맛을 자랑하는 부드럽고 폭식한 빵충이야기에 대체 왠 씨발의 등장인가. 숫자 이야기로 환산하고 싶지는 않지만, 지난 26년 국제도서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으로 꼽히는 '빵충 사육 준수 사항'의 비밀과 인기비결이 궁금해서 기대를 안고 읽어보았다. 아니 근데 진짜 이 책 꼭 한 번 읽어봐야만 해! 빵충 맛을 봐야만 해! 그래서 반드시 영화로 나와야만 해! 

창업은 들어봤는데 창농은 생소하다. 

정한. 정한은 익숙하지만 거리를 두고 싶어지는 인물이다. 서른쯤 됐으면 뭐라도 됐어야지 하기엔 요즘은 서른도 어리다 생각하기에, 그저 뭐가 안됐다는 것 만으로 정한에게서 거리를 두고 싶어지는게 아니다. 정한과 타바콬 사이에 쌓아온 서사를 보면 뭐가 되기 위해 끝까지 가려고 해본 적 없다는 것, 지지부진한 관계들을 유지한채 끌고만 갔다는 것, 그 와중에 대마는 열심히도 키우고 피웠다는 것, 아직 서른이면서도 내가 옛날엔 잘 나갔는데 한다는 것이 초면부터 질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대마 재배도 재능의 영역이었을까, 전여친이 남긴 마지막 배려인 취업지원센터를 통해 청년 농부가 되길 권유 받는 순간 역시 사람은 뭐든지 해봐야 경험이 되고 계기가 되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정한아, 진짜 너 계속 이럴거니, 싶어질 때 쯤 드디어 창농의 꿈을 안은 정한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얼레벌레 땅을 사고 기적같이 대출이 나오고 그래, 뭐라도 하니까 일이 되긴 되는구나 싶어지는데 그냥 일이 잘 풀리면 니가 정한이가 아니지. 마을발전기금이니, 길을 막고 버티는 트랙터니, 응애는 없애고 꿀벌은 살려야하는, 밭을 침범하는 멧돼지 뿐 아니라 동네사람들도 쫓아내야 할 판인 실전 귀농의 현실감도 지나치게 생생한데, 기껏 키운 딸기의 판로조차 미리 마련해두지 않은 정한의 어설픔에 머리가 다 어질어질했다. 답없던 정한마저 "남자 혼자 귀농하면 3년도 못 가 빤스런한다는 말이 있던데 내가 딱 그 꼴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도망갈 곳이 하늘에 있다는 점이랄까. 63" 내가 진짜 망했구나 깨달았을때, 문득 의문이 든다. 그런데 대체 딸기가 어떻게 빵충이 되는거지? 
대출 받은 3억이 고스란히 갚을 길 없는 빚으로 남아 정한의 눈 앞에 절망이 들이밀어졌을때, 드디어 이장님의 품 안에서 '청년스마트팜 신개발유용곤충육성 분양지원사업(64)', 줄여서 빵충*이 등장한다. 갓구운 소금빵맛이 나는 빵충 설명을 읽다보면 벌레라고는 해도 먹어볼까? 솔깃해진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메뚜기도 튀겨 먹고, 번데기도 삶아먹는데다가 밀가루, 초콜릿 등 식품을 가공할 때 어쩔 수 없이 포함되는 경우를 고려하면 모르는 채로 먹게되는 벌레의 양도 상당하다고 하지 않나. 빵순이라서가 아니라, 그동안도 맛있어서 혹은 모르고도 곤충을 먹어왔다면 맛있어서 빵맛이 나는 곤충이라는 사실을 알고 먹는 것에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 맛있겠다.
정한이는 빵충 덕분에 평화롭고 행복하고, 처음으로 인생을 만끽하게 됐다(91)고 하고, 읽는 독자는 그저 빵충 맛이 궁금해서 침을 삼키며 책을 읽다가도 문득 아, 정한이 인생이 이렇게 잘만 풀릴리가 없는데 싶어진다. 서른 중반에 이르러 월 천을 벌게 된 정한의 성공이 배아파서가 아니라 빵충을 절대, 절대 변태시켜 성충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강력한 의지가 담긴 "13. 빵충 사육 준수 사항(74)"이 자꾸만 레드 레드 경고를 날리는 기분이 드는 탓이다. 나폴리탄 괴담과도 같은 빵충 사육 준수 사항은 대체 무엇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일까? 정한이의 빵충 농사 성공시대 이대로 쭉 이어지는 게 맞을까? 두둥-

어른이 되어서 일을 시작하고 난 뒤로 가끔, 생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사람의 민낯을 볼 때마다 실망하고 충격받고 더불어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게 될 때가 있었다. '빵충 사육 준수 사항'에서도 항목을 어기게 되는 것은 부주의와 불운 때문일 것이라 예상했지, 욕망 때문에 고의적으로 어기고 이용하는 사람들이 나올 줄은 몰랐다. 암튼 사람이 문제고, 만악의 근원이다. 
소율 나는 이걸 견딜 수 없다. 293
경혜 저것만이 내 존재를 알아봐주었다고. 264
주원 성공이 눈앞에 있는데 여기서 도망치는 바보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298
언주 "나는 사냥꾼이여." 305
정수 애초에 남을 믿은 게 잘못이었다. 337
영돈 감히 세상이 자신에게 배신을 안겨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357
미주 "날 꺼내줘요." 167
정한 "나 정말 최악이네..." 308
인물들이 돈 앞에서 성공과 실패를 오가고, 욕망이 들끓게 되는 때에 이야기의 흐름도 한번의 변태를 겪게 된다. 그것이 완전하든 불완전하든, 의도적이든 자연스럽든, 어찌되었든 이 이야기는 재밌다. 김혜영 작가가 만들어낸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반드시 만나보길 바란다. 나중에 '원작 소설' 찾아 읽으려면 바쁠테니 올 여름 미리 읽어두자.



*빵충이 metamorphoptera목 panisformidae과 라길래 찾아보려 노력해보니 변태목 빵개미과를 만들어낸 듯하다. 변태목 찾다 19금 제한 자꾸 걸려서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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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 노동은 누가 하는가 - 보이지 않아도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인지노동'의 불평등
앨리슨 데이밍거 지음, 전경훈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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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본능적이거나 자연스럽다고 느끼는 방식으로, 또는 '나다운' 방식으로 행동할 때조차도, 우리는 또한 성별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29" 

언젠가 결혼 생활의 현실 혹은 남편에게 심부름 시키면 벌어지는 상황이라는 제목으로 본 이야기다. 
아내가 남편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아내 : 우유 하나 사 와. 계란 있으면 6개 사 와.
남편은 우유를 6개 사왔다. 아내가 물었다.
아내 : 왜 우유를 6개나 사왔어?
남편 : 계란이 있길래 6개 사왔지.
웃으라는 의도도 있겠지만 차마 웃음이 나오지도 않는다. '남편, 심부름' 키워드를 넣어 검색하기만 하면 이와 비슷한 사례들이 쏟아진다. 냉장고에 있는 감자 반만 까서 삶아놓으라는 말에 총 양의 절반이 아니라 각 감자알의 절반씩만 껍질을 깎아서 삶아놓은 것 같은 이상한 일들이 국가와 인종을 불문하고 일어난다. 이들에게 '제대로 된 명령어'를 입력하는 법 마저 공유되고 있다. 
문제는 이들이 멀쩡히 정상적으로 사회생활을 하고 연애와 결혼까지 한 성인이라는 것이다. 가사노동을 나눠야하는 아내와 남편이 되기 전까지 아마 이들의 취약함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이들 대부분은 사회에서 자신들이 다른 여성노동자들보다 더 일을 잘하고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고 단단히 믿고 있다. 이들이 우월하다고 믿는 사고와 능력은 왜 가사노동의 범위에서만 이토록 퇴화되는 것일까?
저런 상황들은 유머일 뿐이고 일부의 극단적인 예시이며, 요즘은 반반결혼, 노동과 경제 관리를 반씩 나눠 부담하는 방식이 유행하면서 가사노동의 불평등에 대한 인지와 개선,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머릿속 노동은 누가 하는가'에서는 항목과 시간으로 다 계산되지 않은 '인지노동'의 존재와 불평등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 여러 세대에 걸친 페미니즘 활동가들과 사회과학자들이 가치 있는 사회적 기여와 여성이 짊어진 과도한 부담으로서의 집안일에 대한 사회적 인정을 얻기 위해 운동을 벌였고 지금도 계속 벌이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싸움에서 비롯한 한 가지 유감스러운 부작용은 가사노동이 시간 계랑으로 드러나는 육체적 요소로 단일하게 축소되었다는 사실이다. 52" 

머리 속에서 끊임없이 진행되는 인지노동은 생필품이 얼마나 남았는지, 어떤 제품을 얼마에 구매해야 하는지, 가족모임, 병원 예약을 관리하거나, 저녁 메뉴와 냉장고 안의 식재료를 가늠하는 것처럼 사소하고 빈번하며 반복적인 가사노동부터 육아, 돌봄처럼 책임이 크고 장기간에 걸친 의사결정과 노동을 아우른다. 가정에서 이 인지노동을 주로 하게 되는 것은 누구일까? 왜 '여성'들이 인지노동의 대부분을 맡게 되는 것일까?
'엄마가 우리집 대장'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것처럼, 가사노동/인지노동은 확고하게 여성들의 몫이 크다. 가정의 대소사를 여성 파트너가 주관하면서 여성들은 초인/관리자로 묘사되고, 남성들은 허당/서투른 보조자로 묘사되곤 한다. 표면적으로는 여성을 치켜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별 차이의 관념을 강화하고 인지노동을 불균형하게 부담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리고 이 차이를 성별 불균형이 아닌, 개인 성격 차이로 계획적이고 꼼꼼하고 더 잘 챙기는 사람이 맡아서 분담하는 것이란 인식 때문에 "커플 다수가 인지노동 배분 방식이 최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깨부술 수 있는 힘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293)"해 변화의 가능성을 축소(283)해왔음을 '머릿속 노동은 누가 하는가'를 통해 밝힌다.
 때문에 이 책을 권하는 것은, 이를 통해 그저 남성 파트너들이 여성에게 가사노동의 대부분을 전가하려는 행태를 보인다고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노동의 범위로 채 인식하지 못했던 '인지적 가사노동'이란 무엇인지 파악하고, 가정 내에서 어떻게 부담되고 있는지,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서 어떻게 접근하고 시도해야 하는지 알아보기 위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반'으로 정해진 가사노동의 분배에도 불구하고 불균형과 부담을 느끼고 있는 여성 파트너들에게도 이 책을 추천하지만, '일부러 제대로 가사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일부 남성 파트너들과 '균형적이고 공평하게 가사노동을 분담하고 있'다고 자신하는 일부 남성 파트너들에게 이 책이 어떻게 느껴질지 의견이 궁금해진다.
 책을 통해 어떤 '실전(노동, 불평등, 불만요소)'들이 가정 내에 존재하고 있는지 책을 통해 새롭게 깨닫고, 그동안 의식하지 못한 채로 수행했던 인지노동이 어떤 배경을 통해 이루어져 왔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완벽한 평등점을 찾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머릿속 노동은 누가 하는가'는 가시적인 목록과 시간으로 반영되지 않았던 회색지대를 발견하고 이를 더 나은 방식으로 풀어가기 위한 받침이 되어주는 좋은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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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끝
김성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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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과들, 내가 이럴 줄 알았다. 

" 꺾이고 굽으며 되돌아가는 2차 시간의 수많은 변곡점들을, 인간은 결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마치 짐승들이 해와 달이 뜨고 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 주기에 따라 사는 것처럼, 수영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는 있다. 295" 

영화 <호프>를 봤을까? 수많은 '시발'이 나온 그 영화에는 하나의 '시발'이 더 덧붙여지는데, 그건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 관객이 흘리는 '뭐야, 시발'일 것이다. 반대로 '시간의 끝'은 독자의 '시발'과 함께 시작된다. '시발, 수학 좀 공부할 걸' 단순히 욕 때문에 둘을 엮은 것은 아니고, '시간의 끝'을 읽으면서 어딘지 분위기가 <호프>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틀 위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사건을 올려놓는, 그래서 그 틀마저 균열이 가고 이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따라가기에도 벅찬 그래서 두려운 기분을 느끼도록 만드는, 대체 뭘까, 왜 일까, 그래서 어떻게 될까 궁금하도록 자극하는, 방식이 닮았다. 

세상에 불가사의한 일들이 생기기 시작한다. 달이 파괴되고 그 파편이 춘천에 추락해 소양강 댐이 무너지고, 괴물들이 나타나서 대구가 봉쇄되고, 바다에 솟아 오른 무언가로 인해 부산에 큰 해일이 일어나는 사건들이 생기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고 세상이 혼란에 빠진다. 왜? 2차 시간이 1차 시간, 우리 세상의 시간하고 겹치고 얽혀 영향을 끼친 결과였다.
이 관계를 밝혀낸 것은 다름 아닌 수학자들이었다. 이 2차 시간을 틸링해스트 수학(크로포드 틸링해스트 박사 "1/2차 시간 축의 정확한 모델링을 위한 비선형 수학 체계" 54)을 통해 인위적으로 값을 바꿔 1차 시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형사인 수영은 한강 범람을 예고한 사교도 집단을 저지하기 위한 현장으로 출동한다. 끔찍한 현장 상황이 끝나자마자 수영에게 전해진 것은 사교도들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가족 지호의 죽음이었다.
교주, 제자들이 선생님이라 부르며 따르는 수학자 역시 틸링해스트 수학을 통해 2차 시간을 계산한다. 오랜 계산 끝에 "시간이 끝난다는 결과 23"를 받아들인 교주는 제자들에게 이를 공표하고, 이 값을 인위적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사교도 집단들처럼 인신공양으로 2차 시간 값에 변형을 일으켜야 하는데, 적어도 세 명의 고통스러운 죽음이 필요함을 알린다.
'시간의 끝', 불안한 결과를 두고 한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겠다고 나서자, 제자들 사이에서 당신말고 죽어 마땅한 이들을 죽이자, 타인의 희생으로 삶을 유지시킬만한 가치가 있느냐 논쟁이 벌어진다. 교주는 시간의 끝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상태이니, 다른 답을 찾기 위한 연구를 계속하겠다며 사람들의 불안을 진정시킨다.
다음날 다시 2차 세계의 틈으로 들어가 새로운 결과값을 얻어낸 교주가 계산을 적어둔 공책을 찾았을 때, 공책과 함께 17명이던 제자 중 한명이 사라졌음을 알게 된다. 사라진 것은 가장 먼저 자신의 목숨을 바치겠다고 나섰던 이정래였다. 신실한 믿음을 가진 그가 2차 시간을 변형시킬 위험한 방법과 함께 사라진 것이다.
수영은 지호의 죽음이 사교도들의 짓이라 확신하고 이를 추적해나간다. 교주 역시 공책과 함께 사라진 이정래를 막기 위해 의식 장소를 다시 계산해나가고, 수영과 지호, 교주, 제자들이 각자 자신들의 믿음과 방식대로 세계의 멸망과 이에 얽힌 죽음에 대응해나가는 복잡하고, 미스터리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는 것이 초반 도입부이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요그 소터스 안에서 하나다."

'시간의 끝'은 복잡하지만 의외로 독자의 앞에 숨기는 것이 적다. 불길한 예감을 감지하도록 하고 그 사이에 비워둔 '왜, 어떻게'를 좇아 몰입하도록 만든다. 제멋대로 행동하는 인물들과 부서졌다 다시 차오르는 달, 뒤틀린 시간 속에서 독자는 함께 멸망 앞에서 달려나가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책을 읽는 동안 감당하기 어려운 재난과 혼란 앞에서 나 역시 불안을 잠재우고 의지할 데를 찾아 사이비교에 빠지게 되지 않을까? 이렇게 우리가 상상하곤 하는 것처럼 언젠가 규격 외의 사건이 비현실적으로 펼쳐지게 되는 날이 올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수학 못해서 나만 세상의 끝조차 모르고 있으면 어떡하냐는 포모(FOMO)*를 느끼게 만들기도 하지만, 칠월의 긴 장마 속에서 이 눅눅한 더위를 피할 수 있는 몰입을 선사하는 SF 미스터리 스릴러 '시간의 끝'을 추천한다.  


* 이럴땐 언어학자가 등장하는 영화 <컨택트(2016)> 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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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사회 프로젝트 - 노동과 여성·청년이 만나면 세상이 바뀐다
조돈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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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평등 사회가 지속되는 것은 불평등체제의 피해자들이 지배 질서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11"

 이 문장을 읽고 우리는 왜 우리를 위한 사회 질서가 아닌 더 가진 자들이 세운 질서를 지키고 따르려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우리 사회의 법과 제도의 틀은 오래되었다.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개선되기도 하지만, 빠른 변화의 속도에 맞추거나 선제적으로 달라질 수는 없다. 오래된 제도의 허점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대응은 언제나 그보다 느리다. 개선이 반드시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수많은 법과 제도가 갈수록 권력과 경제력을 가진 사람들의 이익을 쫓아 교묘하게 만들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이런 현실을 꼬집어 규탄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을 보호하고 사회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복지 정책을 두고도 자신들에게 올 이익을 빼앗기는 것처럼 여기고 분노하거나, 복지 대상자들을 향해 상황을 극복해려는 노력이 부족하다 비난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반면 가진 자에게 더 큰 이익을 주는 각종 제도와 정책은 오히려 그만큼 보장되고 보호 받아야 하는 경제질서로 이해해주려 하고, 이를 형평성에 맞게 개선하려는 변화는 불합리하게 보며 달가워하지 않는다. 불평등 이데올로기의 제 2명제, "불평등이 있다 하더라도 불평등은 정당하다 11"의 그늘에 있는 셈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복지의 대상이 될 리 없다는 듯이 굴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혜택과 권력을 쥐고 있는 가진 자들 편을 들어주는 '불평등의 정당한 그늘'이 아닌 복지의 그늘이 필요한 쪽에 더 가깝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불평등체제의 피해자들이 수혜자의 입장에 서서 질서를 받아들이고 옹호하도록 만들었을까?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생각을 멈추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전부터 느끼던 이 묘한 위화감에 대한 답을 '평등사회 프로젝트'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읽었다. 
 
" 스웨덴은 1900년 당시 미국보다 더 불평등한 사회였다. 그러나 한 세기를 지나오면서 미국은 더 불평등한 사회가 되었으나, 스웨덴은 훨씬 더 평등한 사회로 바뀌었다. 같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도 어떤 시장경제 모델인가에 따라 불평등은 심화될 수도 있고 완화될 수도 있다. 214" 

코스트코는 되지만, 이케아는 안되는 한국 특성이 여기에도 적용되는 것일까? [1부 2장 불평등 대한민국의 미국 사랑 45]에 들어서면 한국인들의 '모순적 시민 인식: 불평등 불만과 미국 선호'에 대한 실태와 분석을 만날 수 있다. 책은 " 한국 사회는 불평등이 심각하고, 시민들은 불평등에 대한 불만이 높으며 평등한 복지국가에 대한 선호도가 높으나, 정작 발전 방향은 평등한 복지 선진국 스웨덴-스칸디나비아 모델이 아닌 불평등한 복지 후진국 미국식 모델을 따르는 모순을 가지고 있음 46-47"을 반복적으로 강조(53, 64, 90, 95, 207, 212)한다. 이 모순에는 미국을 우방국가로 긴밀히 협력해온 배경과 오랜기간 세계 패권국가 입지를 지켜온 지위에 대한 선망(50)이 반영되어 있다. 재미있게도 이 '선망'은 회원권을 구매한 일부인원이, 독점 계약을 맺은 결제 루트를 제한적으로 사용하여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코스트코의 방식은 성공적으로 안착하였으나 합리와 실용을 내세운 이케아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것도 기본적 선호도와 친숙함이 다르기 때문에 나타난 차이가 아닐까 싶었다.
정치적으로도 "국힘 계열 정치인은 물론 아스팔트 태극기 부대에서부터 국힘 정부의 대통령까지 모두 미국과 자유시장경제 모델을 방어하며 홍보한다. 64" 특히 이 보수층들의 미국 선호는 각종 보수시위현장에서 성조기가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으로도 드러나기도 한다. 물론 팍스 아메리카나의 몰락과 더불어 자본주의가 성공적인 모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선명해진 지금, AI와 기술 발달로 인한 노동시장의 변화(498)에 대비해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 시키고 평등한 복지 제도를 만들기 위한 새로운 구상이 절실하다. 하지만 긴 시간 노동계급의 사회정치적 영향력을 다져나간 스웨덴의 방식을 적용하기에는 구심점도, 시민 의식도 기반이 약하다. 게다가 스웨덴이 미국을 역전하는 평등 사회 모델이 세기를 거치며 안착되었다면, 이를 이처럼 장기간 관철하여 이끌어나가기엔 정권 변화에 따른 정책 불안정성이 크다는 점도 책의 내용과 현실적 문제 사이에서의 거리를 느끼게 만드는요소가 되었다. 노동자 계급형성과 정치세력화의 성공 정도에 의해 스웨덴 모델의 구축 가능성이 달라진다(226)고 보는데, 이어지는 3부에서 한국 노동계급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을 다룬다. 
" 민주노총은 한국노총과 마찬가지로 비호감도가 86%에 달한다. 20"
" 노동조합에 대한 필요성 80%이상 긍정, 적극적으로 인정하지만 양대 노총에 대한 호감도는 반대이다. 23년 2월 조사에서 비호감도가 86%로 극단적 수준이다. 241"
한국 사회에서 노총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 수준의 비호감도이다. 시민들은 노동조합이 이익집단 역할에 중점을 둔 기득권 세력으로 변질되었다고 간주한다. 한국은 고임금 일자리, 저임금 일자리로 노동시장이 양극화되어 정규직-비정규직 두개의 계급으로 분절되어 있다. 저임금 일자리의 비정규직, 여성, 중소영세 사업장 노동자를 제대로 대변하고 있지 못한다는 시선(247)과, 노총이 취약 계층 보호 활동보다 정치적 활동에 더욱 중점을 둔다는 인식(246)이 호감도를 하락 시켰다. 더불어 이들의 활동이 전반적인 이해 없이는 때로 시민 편의에 양해를 구해야하는 불편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점도 아쉽지만 현실이다. 개인적으로는 노총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데 노총이 품고 있는 모든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반독재 민주화 투쟁으로 시작되어 박근혜, 윤석열 퇴진 투쟁까지 정치적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투쟁에 뜻을 두고, 철도, 보건의료, 가스 등 "민주노조 투쟁이 없으면, 사회서비스 공공성도 없다(357)"는 최소한의 저지선 기능을 하고 있다는 데에 의미를 둔다.  

앞선 부에서는 우리가 어떤 사회 모델을 따라야 하는지, 실행 주체에서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아보았다면, 4부에 이르러서는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왜 우리 사회는 불평등체제를 개선하고 사회복지 확대를 위한 합의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을까 살펴보게 된다. 한국인의 조세 부담 성향이 강하지 않은 편인데다가 지금도 '내가 낸 세금'을 운운하며 공공기관과 공무원을 상대로 돈낸값을 받아내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거의 두배에 달하는 유럽 국가 수준(2021년 기준. 414)으로 증세했을때 보일 태도마저 우려된다. 또한 불평등에 대한 문제의식이 강하고 이에 대한 정부 책임을 강하게 요구하지만 성평등 촉진과 실업자 생활 수준 제공에 있어서는 정부 책임을 가장 약하게 요구한다는(443) 특징이 있는데, 이는 도리어 성차별이 심각하다는 반증이 되고, 실업문제를 사회 구조적 문제가 아닌 개인의 책임으로 보는 시선이 강하다는 뜻이 된다. 더불어 돌봄 서비스 제공 주체 중 특히 노인 돌봄에 '가족' 비중이 높다는 점(444)도 같은 뿌리를 둔다. '수저론'이 한차례 큰 유행을 탔던 것처럼 한국은 세대 간 자산 불평등 대물림 현상이 강한 상속 계급 사회임에도 부자 증세, 소득세 자산세를 통한 소득 불평등 완화 정책에 대한 찬성 의견이 반대보다 적다(510). 지배세력에 대한 불신과 평등사회 실현 가능성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탓에 수혜 집단(여성 466/청년 512)들이 오히려 보수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것에서 어느 정도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18장 응원봉도 촛불의 실패를 되풀이하는가?(537) 묻기에는 이미 응원봉의 불빛은 꺼지고 치열했던 응집력은 각자의 일상으로 흩어져버린지 오래다. 사람들은 다시 주식과 환율이 요동치고 부동산이 흔들릴 때마다 다음 정권은 경제 위기를 극복해줄 선택을 하게 될 수 밖에 없다며 실패의 구실을 쌓는다. 촛불과 응원봉을 들었던 절박함을 돈의 논리 앞에서 잊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될지도 모른다. 특히나 대통령의 자택 매각 소식과 더불어 고액의 근저당으로 인한 논란이 생겨난 상황이 그동안 강조해왔던 부동산 정책과 비교하여 다소 씁쓸하게 여겨지는 상황이다. 이래서야 더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겠다는 약속에 대한 믿음은 줄어들고, 최선이 아니라 차악의 선택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불신이 커질 수 밖에 없다. 책을 통해 사회의 구조적으로 문제와 시민의식 수준을 직시하고 불평등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얻을 수 있었지만 '평등사회 프로젝트'가 우리 공통의 목표점인 것인지, 착수 가능한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것인지 의심해야 하는 상황이 더욱 크게 느껴져 현실적인 아쉬움이 남았다. 분량이 적지 않지만 사회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다면, 혹은 왜 세상은 변하지 않는 것일까 같은 궁금증을 품고 있다면 '평등사회 프로젝트'가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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