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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 노동은 누가 하는가 - 보이지 않아도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인지노동'의 불평등
앨리슨 데이밍거 지음, 전경훈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7월
평점 :
" 우리가 본능적이거나 자연스럽다고 느끼는 방식으로, 또는 '나다운' 방식으로 행동할 때조차도, 우리는 또한 성별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29"
언젠가 결혼 생활의 현실 혹은 남편에게 심부름 시키면 벌어지는 상황이라는 제목으로 본 이야기다.
아내가 남편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아내 : 우유 하나 사 와. 계란 있으면 6개 사 와.
남편은 우유를 6개 사왔다. 아내가 물었다.
아내 : 왜 우유를 6개나 사왔어?
남편 : 계란이 있길래 6개 사왔지.
웃으라는 의도도 있겠지만 차마 웃음이 나오지도 않는다. '남편, 심부름' 키워드를 넣어 검색하기만 하면 이와 비슷한 사례들이 쏟아진다. 냉장고에 있는 감자 반만 까서 삶아놓으라는 말에 총 양의 절반이 아니라 각 감자알의 절반씩만 껍질을 깎아서 삶아놓은 것 같은 이상한 일들이 국가와 인종을 불문하고 일어난다. 이들에게 '제대로 된 명령어'를 입력하는 법 마저 공유되고 있다.
문제는 이들이 멀쩡히 정상적으로 사회생활을 하고 연애와 결혼까지 한 성인이라는 것이다. 가사노동을 나눠야하는 아내와 남편이 되기 전까지 아마 이들의 취약함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이들 대부분은 사회에서 자신들이 다른 여성노동자들보다 더 일을 잘하고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고 단단히 믿고 있다. 이들이 우월하다고 믿는 사고와 능력은 왜 가사노동의 범위에서만 이토록 퇴화되는 것일까?
저런 상황들은 유머일 뿐이고 일부의 극단적인 예시이며, 요즘은 반반결혼, 노동과 경제 관리를 반씩 나눠 부담하는 방식이 유행하면서 가사노동의 불평등에 대한 인지와 개선,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머릿속 노동은 누가 하는가'에서는 항목과 시간으로 다 계산되지 않은 '인지노동'의 존재와 불평등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 여러 세대에 걸친 페미니즘 활동가들과 사회과학자들이 가치 있는 사회적 기여와 여성이 짊어진 과도한 부담으로서의 집안일에 대한 사회적 인정을 얻기 위해 운동을 벌였고 지금도 계속 벌이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싸움에서 비롯한 한 가지 유감스러운 부작용은 가사노동이 시간 계랑으로 드러나는 육체적 요소로 단일하게 축소되었다는 사실이다. 52"
머리 속에서 끊임없이 진행되는 인지노동은 생필품이 얼마나 남았는지, 어떤 제품을 얼마에 구매해야 하는지, 가족모임, 병원 예약을 관리하거나, 저녁 메뉴와 냉장고 안의 식재료를 가늠하는 것처럼 사소하고 빈번하며 반복적인 가사노동부터 육아, 돌봄처럼 책임이 크고 장기간에 걸친 의사결정과 노동을 아우른다. 가정에서 이 인지노동을 주로 하게 되는 것은 누구일까? 왜 '여성'들이 인지노동의 대부분을 맡게 되는 것일까?
'엄마가 우리집 대장'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것처럼, 가사노동/인지노동은 확고하게 여성들의 몫이 크다. 가정의 대소사를 여성 파트너가 주관하면서 여성들은 초인/관리자로 묘사되고, 남성들은 허당/서투른 보조자로 묘사되곤 한다. 표면적으로는 여성을 치켜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별 차이의 관념을 강화하고 인지노동을 불균형하게 부담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리고 이 차이를 성별 불균형이 아닌, 개인 성격 차이로 계획적이고 꼼꼼하고 더 잘 챙기는 사람이 맡아서 분담하는 것이란 인식 때문에 "커플 다수가 인지노동 배분 방식이 최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깨부술 수 있는 힘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293)"해 변화의 가능성을 축소(283)해왔음을 '머릿속 노동은 누가 하는가'를 통해 밝힌다.
때문에 이 책을 권하는 것은, 이를 통해 그저 남성 파트너들이 여성에게 가사노동의 대부분을 전가하려는 행태를 보인다고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노동의 범위로 채 인식하지 못했던 '인지적 가사노동'이란 무엇인지 파악하고, 가정 내에서 어떻게 부담되고 있는지,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서 어떻게 접근하고 시도해야 하는지 알아보기 위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반'으로 정해진 가사노동의 분배에도 불구하고 불균형과 부담을 느끼고 있는 여성 파트너들에게도 이 책을 추천하지만, '일부러 제대로 가사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일부 남성 파트너들과 '균형적이고 공평하게 가사노동을 분담하고 있'다고 자신하는 일부 남성 파트너들에게 이 책이 어떻게 느껴질지 의견이 궁금해진다.
책을 통해 어떤 '실전(노동, 불평등, 불만요소)'들이 가정 내에 존재하고 있는지 책을 통해 새롭게 깨닫고, 그동안 의식하지 못한 채로 수행했던 인지노동이 어떤 배경을 통해 이루어져 왔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완벽한 평등점을 찾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머릿속 노동은 누가 하는가'는 가시적인 목록과 시간으로 반영되지 않았던 회색지대를 발견하고 이를 더 나은 방식으로 풀어가기 위한 받침이 되어주는 좋은 질문이었다.